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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왕조 제 12대 왕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와 그의 후원자 영국 부호 카나번경
고대 유물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카나번경
투탕카멘의 석관실 문을 조심스레 여는 하워드 카터
날마다 엄청난 인파가 발굴 현장에 몰려들었다
태양신 아텐의 햇살을 받고 있는 선왕 아케나텐과 그의 왕비 네페르테티가 그려진 황금 옥좌,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3500년 전 이곳에서 마지막 숨을 쉰 사람들의 섬뜩한 발자국조차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누군가 무덤을 다녀간 증거로는 그을린 램프와 새로 칠한 표면에 눌린 손자국, 문턱에 떨어져 있는 작별의 화환이 있다. 마치 어제 갔다 둔 것 같다. 보존이 어찌나 잘 되었던지 시간이 멈춘 듯하다. 마치 내가 침입자 같다.
-1922.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처음 보고 나서 압도당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하지 못할 그런 광경이었다. 묘실은 호화로운 물품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 옛날 마지막 놓여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마치 어제 만든 물품 같아서 주인이 찾으러 올 것 같았다.
-1922. 시카고 대 연구소 창설자. 제임스 헨리 프리스티드-
1922년 11월 4일 마침내 지하로 연결되는 돌계단이 발견되었다. 그 계단은 벽으로 막아놓은 입구까지 연결되었다.
혹시 그토록 찾던 투탕카멘 묘?!
카터는 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내려갔다. 그리고 석고 벽에서 여태껏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장을 발견했다. 그랬다. 제 18왕조 12대 왕 투탕카멘의 카르투슈였다.
한결같은 후원자 카나번경은 당시 영국에 있었다. 그는 급히 작업을 중단시켰고 무덤을 봉쇄했다. 카터는 서둘러 전보를 쳤다.
<놀라운 발견을 했음. 훌륭한 무덤임. 무덤을 닫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음. 축하드립니다!!>
"왕가의 계곡은 더 이상 파낼 게 없다." 1915년 미국인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시어도르 데이비스가 선언한 이래(데이비스는 1902년에서 1915년까지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했다. 그의 팀은 18왕조 아멘호테프 3세의 장인 장모 묘 유이아-푸이 무덤과 18왕조 마지막 파라오 호렘헤브 묘를 발견했다.) 카터와 카나번은 2년간 왕가의 계곡 발굴권을 따내느라 애를 먹었고, 1917년 그토록 바라던 발굴을 허가 받은 후 5년간 왕가의 계곡을 이 잡듯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묘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초조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기어코 일이 터졌다. 그간 막대한 자금에도 이렇다 할 성과가 나지 않자 카나번이 발굴 중단 선언을 한 것이다!! 이에 카터는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발굴하게 해 주십시오!! 유물에 대한 소유는 면허권을 가진 카나번경의 것으로 하겠습니다."
"정말 왕가의 계곡에 투탕카멘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나?! 말해보게. 확신하나!?"
"아뇨, 확신할 순 없지만 일전에 (1912년) 데이비스 팀이 발견한 투탕카멘 관련 유품이 왕가의 계곡 가운데서 나온 걸 보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측만으론 안 되네.......그러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전 그냥 끝장을 보고 싶습니다. 정 그러하시다면 제 돈으로라도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야, 아니야, 그럴 순 없네. 돈은 내가 내지. 하지만 이걸로 끝이네."
카터는 다시 발굴 현장으로 갔다. 그러나 여전히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 왕가의 계곡 가운데 거의 대부분을 파해쳤다. 이제 남은 곳은 오직 한 곳!! 그곳은 오래 전부터 인부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이곳은 람세스 6세부터 인부들의 쉼터였어.......람세스 6세는 제 19왕조 파라오고 투탕카멘보다 200년 뒤에 태어났으니.......그래!!맞아!! 투탕카멘 당시엔 인부들의 숙소는 존재하지 않았어!!'
예상대로였다. 1922년 11월 4일 왕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려 20년 동안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의 바람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카나번은 그의 딸 애블린과 함께 번개 같은 속도로 달려왔고 그날이 11월 23일이었다. 계단을 정리하고 입구를 뚫느라 족히 이틀이 걸렸다. 경사진 회랑이 보였는데 천장까지 자갈로 막혀있었다. 그걸 치우느라 다시 하루가 소요되었다. (아마도 이 기간 동안 카터와 카나번은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회랑을 따라 내려가니 벽으로 막아둔 두 번째 입구가 보였다. 역시나 투탕카멘의 카르투슈가 있었다. 카터는 떨리는 손으로 몇몇 돌을 제거했다. 그리고 양초를 들이밀었다. 고대의 탁한 공기로 정신이 혼미했다.
"어떤가!?뭐가 보이나??"
"네, 정말 대단합니다!!!!!"
1922년 11월 26일 소년 왕 투탕카멘은 수천 년 간의 그 기나긴 잠에서 마침내 깨어났다.
18살 혹은 19살에 죽은-그의 사인(死因)은 척추측만과 치통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들어 독살설이 거론되고 있다. - 그의 묘도 매장된 지 얼마 안 되어 도굴될 뻔 했으나, 다행히 본격적인 도굴 전에 저지되어 파라오의 시신과 부장품들은 온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 진열된 그대로 복구되진 못했고, 따라서 카터와 카나번이 발견했을 당시엔 모든 유물들이 뒤죽박죽 얽히고설켜있었다.
"현실(현실)은 어딘가?"
"(입구에서 오른쪽 벽면으로 가더니 잠시 후) 이 석고 벽면 뒤에 있는 것 같습니다."
"보세나."
"절대 안됩니다. 이집트 유물국 국장 피에르 라코의 허가가 떨어지기 전까진 현실을(玄室) 보면 안됩니다!"
"그냥 슬쩍 보자는 것이네. 그리고 지금껏 수많은 돈을 부었는데 그럴 권리쯤은 있어야 한다고 보네."
"뚫린 구멍은 어쩝니까?"
"자넨 참 융통성이 없구먼. 적절히 슬쩍 가려두면 될게 아닌가?!"
카터는 썩 내키진 않았지만 카나번의 청을 거절할 순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 제안은 물리치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그 순간의 감동과 전율을 카터와 카나번의 남동생 멜번 허버트의 회고록으로 대신할까 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체험해 보지 못했을 위대한 감동의 순간이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나는 마지막 나사를 풀어 관실의 문을 열었다. 뚜껑이 서서히 열렸고 그 안에는 관실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황금색 규암석이 놓여 있었다. 뚜껑은 사제가 마지막 닫아 둔 그대로 제자리에 닫혀 있었다.
-하워드 카터-
형(카나번)은 그 당시 벽에 자신이 구멍을 뚫은 게 발각 될까봐 장난꾸러기처럼 불안해했다. 또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안다 했다. 아무나 맛 볼 수 없는 일생일대의 위대한 순간이라는 사실에 형은 가슴이 벅차 있었다.
-1923 멜번 허버트-
카터와 카나번은 개구멍(?)을 바구니 유물로 교묘히 감췄다. 투탕카멘의 현실 확인식(1923. 2.16) 이전의 사진을 보면, 대기실 오른쪽 벽면 양쪽에 실물 크기의 투탕카멘 조각상(파라오를 수호하는 한편, 만일 파라오의 시신이 훼손 될 경우 대리역할을 한다.) 사이에 바구니가 놓인 걸 볼 수 있다.
이렇듯 위험천만한 일을 자행했지만, 카나번에게는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1925년 10월 28일 있던 현실과 그 옆의 보물의 방 개봉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1923년 2월 28일, 그는 아스완으로 요양 갔다가 모기에게 물렸는데 면도하다가 상처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말라리아에 걸렸고 항생제를 못 구해 1923년 4월 5일 사망했기 때문이다.
카나번의 갑작스런 의문사로 고대의 저주, 소위 파라오의 저주도 되살아났다.
왕의 무덤을 건드리는 자에게는 반드시 파라오의 저주가 임하리로다!!!
수다스런 언론은 일제히 그의 죽음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가 죽기 며칠 전 한 여류작가 카나번에게 이집트 신비주의를 조심하라 밝혔다 한다. 그리고 감히 파라오의 무덤을 뒤지려 했으니 그런 일은 당연하다 했다.
이집트는 왕의 무덤을 건드리는 자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미신이 있었다. 그러자 카나번의 발병 사망은 옛 저주의 실현으로 여겨졌다.
카나번은 파라오의 저승사자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에는 확실히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아마도 그건 파라오의 저주일 것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헛소문이었다. 발굴 과정에서 몇몇은 자신들의 부주의로 혹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했지만, 이 모든 걸 진두지휘한 그는 보란 듯이 천수(天壽)를 누렸다. (하워드 카터1874년~1939년) 아래는 그의 회고록 중 일부분이다.
이집트 학자로서 느낀 것은 두려움보다 존경과 경외감이었다. 터무니없는 미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무덤 안에 위협의 존재가 있다고 한다지만 .......감히 무덤을 열려는 자에게는 무언가가 복수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무덤 속보다 안전한 곳은 이 세상 아무데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하트셉수트 여왕과 투트모시스 4세의 왕묘를 발견했고 이번이 433번째 발굴이다. 여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파라오의 저주라면 그건 매순간 폐로 드나드는 모래바람일 것이다.
-하워드 카터-
아무튼 악성 루머가 한동안 끊이질 않았고, 카나번의 죽음으로 인해 발굴현장에는 그 전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자칫하면 진귀한 유물이 박살날 수도 있었다. 카터와 각 분야 전문가들은 수많은 부장품들을 옮길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룩소르(테베)에 위치한 왕가의 무덤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투탕카멘의 무덤에선 침상, 의자, 소파, 배의 모형, 무기, 항아리, 내세에 시중을 들 샵티의 인형들, 세네트 놀이기구(우리나라의 윷놀이와 유사), 심지어 순금 전차까지 엄청난 유물이 나왔다. 특히 황금옥좌는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거기엔 태양신 아텐의 햇살을 받으며 다정하게 앉아 있는 선왕 아케나텐(외교술의 달인이었던 아멘호테프-신들의 우두머리 아문신이 만족한다는 뜻-의 아들이었다. 원래는 아멘호테프 4세로 불렸으나 태양신 아텐만을 유일신으로 섬겨 아텐신의 축복이란 의미의 아케나텐으로 개명했다. 다신교의 전통이 있던 이집트에서 이단아 광신교로 낙인찍혔다.)과 아름다운 왕비 네페르테티가 있었다. 왜 아케나텐의 보물이 여기 있을까?! 학자들에 의하면 투탕카멘의 다신교 복귀 정책에 대한 아케나텐 반대세력의 선물이라 한다. 또한 설화 석고로 만든 정교한 램프도 있었다. 겉과 속 아무런 문양도 없었는데, 불을 붙이자 투탕카멘과 왕비의 실루엣이 비쳤다. 고대의 마법 같았다. 학자들은 추론했다. 재위 고작 9년이었던 투탕카멘의 부장품이 이 정도라면, 선대의 왕 소위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리던 투트메시스 3세(재위 54년) 그리고 후대 왕 제 19왕조 제3대 왕 람세스 2세(재위 67년)의 유물은 엄청났을 거라고. 그러나 불행히 이들의 무덤은 이미 오래 전 도굴되었다.
투탕카멘의 관은 발굴 시작 이후 만 1년이 지난 뒤 개봉되었다. 카터는 이때의 희열과 흥분을 묘사하고 있다.
뚜껑은 도무지 관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급작스러운 파라오의 사망으로 다른 이의 것을 쓴 듯하다. 뚜껑 위엔 금이 있었는데, 장례를 치르는 도중 사고가 있어서 급히 수리 후 덮었나 보다.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들어 올렸다. 처음에는 길고 좁다란 어두운 관이 보였다. 첫 번째 관, 두 번째 관 이렇게 세 번째 관을 들어 올리는 순간!! 수려한 가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였다!!!!! 이제 곧 제 18왕조 12대 왕 투탕카멘의 미라를 보게 될 터였다!!!!!
황금마스크에는 사자의 서 글귀가 새겨 있었는데 고인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대 오른쪽 눈은 밤 배
그대 왼쪽 눈은 나뭇배
그대 눈썹은 9신의 계보인 에니아드
그대 정수리는 아누비스신 (사자를 하계와 부활의 신 오시리스에게 인도하는 한편, 지하에서 심판 집행하는 자칼 머리의 신)
그대 뒤통수는 호루스신 (오시리스가 파괴의 신 세트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의 아내 이시스는 남편 오시리스를 부활시킨다. 이시스는 세트에게 복수하고자 아들 호루스를 낳는다. 호루스는 매의 머리를 한 지상의 신이다.)
그대 손가락은 토드신 (달, 지혜. 글자의 신)
그의 외침은 태양신 라가 들었노라
전 세계인들은 3500여 년간 귀잠을 자고 있던 파라오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고 카터는 이들에게 왕의 모습을 공개해야 했다. 마스크 아래 고인의 시신을 떼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녔다. 미라 처리 당시 다량의 향유 때문이었다. 카터는 불에 달군 칼로 마스크와 시신을 분리했다. 말쑥한 파라오의 주검이 마침내 드러났다. 다음은 그가 소년 왕을 내려다보며 남긴 글이다.
젊은 파라오의 모습이 마침내 드러났다. 이것이 오랜 발굴 작업의 절정이었다. 무덤은 그 비밀을 드러냈다. 시간의 무게와 세월의 풍상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메시지가 현재에 도달한 것이다.
카터는 투탕카멘을 보면 볼수록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무덤엔 그가 지상에서 누렸을 부귀영화 외에도 슬픔도 들어 있었다. 사산된 두 구의 미라는 이집트 왕실에서 빈번히 행해지던 근친상관의 결과였다. (근친결혼은 권력 분산을 막기 위한 왕가의 전략이었다.)
투탕카멘의 집권기 파라오의 힘은 무척 약했다. 그는 고작 10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선왕 아케나텐 서거 후 다신교 신봉자들과 무인들의 힘이 다시금 강해지자 이 어린 왕은 그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특히 군의 우두머리 아이의 파워는 막강했고 그의 손녀 안티세나멘이 투탕카멘의 왕비가 되면서 최고의 실세로 떠오른다. 투탕카멘은 친정(親政)을 막 시작하려는 18~19세 즈음에 후계자 없이 갑작스레 죽었는데, 왕의 시신의 온기가 채 식기도 전 아이는 파라오가 되었고 그의 친손녀를 취했다 한다.)
20세기 고고학 최고의 발견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하워드 카터 생전에 아무런 훈장도 하사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외롭게 살았으며 그의 장례식 역시 쓸쓸했다한다.
하지만 카터 덕분에 그의 친구 투탕카멘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는 여전히 이집트 룩소르에서 5킬로 떨어진 왕가의 계곡 62호 고분에 누워있으며, 날마다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3500여 년 전의 고대 이집트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음 편엔 최초의 이방인 파라오 힉소스 족(제 17왕조)의 지배로부터 이집트를 되찾은 18왕조 초기 왕들과 그들의 황금 제국에 대해 서술하겠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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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게 읽었어요~^^
다음편도 기대되네요.ㅎ
이번편 18왕조의 시작을 이끈 아흐모세에 대해서는 고문서도 턱없이 부족하다하고 19세기 말에 왕들의 계곡에서 얼마 떨어진 왕들의 은신처 데이르엘 바하리에서 투트모시스 3세 람세스 2세 미라와 함께 발견되었다는 것 외엔 그닥 정보가 없는지라....이야가 구성도 단순하고 좀 재민 덜 할 수 있어요...
그래도 요 담편 남장 여왕 하트셉수트 그리고 투트모시스의 선왕 (하트셉수트)의 치적에 대한 질투 그리고 중동 강대국 연합국들과 싸워 이긴 메기도 전투편은 흥미로울 거예요..
언제 이렇게 많이
공부해둔건지,
그저,놀랍네요.
박물관서 올 일년,
그리고,답사모임서
가을학기에 강의들으려는데,
피숑님은 공부할게 없겠는데요~^^
@맵시자 원래 소싯적 고고학자가 꿈였어요...♥
참 인디에나 존스 레이더스에서 타니스...
거기 성궤...그거 구라예요..
거긴 저명한 프랑스 고고학자 피에르 몽퇴가 19왕조 푸스셋네스 왕묘에서 부장품들 발견했고 현제 그 후임자 필리프 브라소가 푸스셋네스 여왕묘 발굴중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