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41장 1~34절
[서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통제하지 못한 사람
메리 셸리의 소설『프랑켄슈타인』은 한 젊은 과학자의 이야기입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의 원리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으로 죽은 조직을 이어 붙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 낸 존재는 그의 통제 범위를 완전히 벗어납니다. 자신이 창조한 존재를 다스리기는커녕, 그는 남은 평생을 그 존재에게 쫓기고 또 그 존재를 쫓으며 살다가, 결국 북극의 얼음 위에서 탈진한 채 숨을 거둡니다. 자기 손으로 빚어낸 것을 자기 힘으로 다스리려 했던 인간의 시도가 파멸로 끝난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41:1).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던 욥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인간이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짐승 하나를 보여 주시며, 인간의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 짐승을 참으로 다스리시는 이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신약의 그리스도 사건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의 삶에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의 손으로는 안 된다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의 첫 질문은 "네가 낚시(하카)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라며 '낚시'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히브리어 חַכָּה(하카)는 물고기를 낚는 갈고리, 즉 인간이 만든 도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밧줄, 코뚜레, 창, 작살(41:1-7)까지 인간이 가진 온갖 사냥 도구를 하나씩 열거하시며 그 무력함을 드러내십니다. 이 갈고리는 단지 물고기잡이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혼돈과 악을 정복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지혜와 방법을 상징합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실과 지식이 바로 그런 갈고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학과 이성이라는 도구로 생명의 신비를 붙잡고 통제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 낸 존재는 그의 지식과 도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렸습니다. 인간의 가장 정교한 기술과 가장 강한 의지를 다 모아도, 리워야단 앞에서는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밧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사유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사유의 중심에는, 인간의 의지가 스스로는 결코 선을 온전히 이룰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힘입어야만 참된 선과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통찰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오히려 그 무력함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리워야단 앞에 놓인 인간의 갈고리는 바로 이 무력함의 상징입니다. 인간이 손에 쥔 의지와 노력이라는 도구는 처음부터 혼돈과 죄를 스스로 정복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신약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통찰했던 이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말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죄와 악의 문제 앞에서 인간의 행위, 인간의 도덕적 노력이라는 갈고리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역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선포합니다.
교회와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주한 죄와 세상의 악과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우리의 프로그램과 열심과 인간적 방법이라는 갈고리로 해결하려 하지 맙시다. 우리의 손에 들린 갈고리는 처음부터 리워야단을 감당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교만의 왕 리워야단은 내 안에도 있다
본문 마지막 34절은 이렇게 마칩니다.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사하츠)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여기 '교만한 자들'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שַׁחַץ(샤하츠)입니다. 리워야단을 묘사하는 이 긴장이 도달하는 결론은, 이 짐승의 본질이 단순한 힘이 아니라 교만이라는 사실입니다. 24절은 또한 "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 같이 튼튼하구나"라고 말합니다. 굳은 마음과 교만은 짝을 이룹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도 바로 이 교만이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창조자가 되고자 했고, 자연의 한계와 죽음의 경계를 자신의 손으로 넘어서려 했습니다. 이 야심이 재앙의 첫 단추였습니다. 리워야단은 그저 큰 짐승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세력, 혼돈과 반역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이 짐승의 정체는 결국 자기 자신을 왕좌에 올려놓으려는 마음, 곧 교만입니다.
신약은 이 교만을 악의 뿌리로 지목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하며, 야고보서 4장 6절도 동일하게 증언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하늘에서 쫓겨난 큰 용, 옛 뱀을 묘사하는데, 그 뿌리에는 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높이려 한 교만이 있습니다.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의 가장 깊은 형태를 '반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핵심 사상은, 인간의 자아가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서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기 힘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고집스럽게 붙들 때, 그것이 곧 절망의 가장 깊은 형태이자 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리워야단이 '모든 교만한 자들의 왕'이라는 것은, 이 짐승이 우리 바깥에만 있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속 굳은 자리, 곧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기 존재의 주인이 되고자 반항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왕 노릇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리워야단을 멀리 있는 거대한 악으로만 여기지 맙시다. 우리 각자의 마음에 있는 굳은 자리,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낮아지기를 거부하는 그 완악함이야말로 오늘 본문이 겨냥하는 자리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향한 교만과 완악함을 직시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새 언약의 피 그리스도의 승리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베리트)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여기 '계약'이 히브리어 בְּרִית(베리트), 곧 언약입니다. 리워야단은 사람과 언약을 맺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짐승을 길들여 자기 종으로 삼는 관계, 즉 언약적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 역시 자신의 창조자에게 관계와 동반자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만든 이에게 곁에 있어 줄 존재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빅터는 두려움과 혐오 속에서 그 요청을 끝내 거절합니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맺어졌어야 할 관계는 끝내 성립되지 못했고, 그 파열이 이어지는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과도, 자신이 마주한 혼돈과도 진정한 언약적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습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중심 사상은 '타자의 얼굴'(le visage d'autrui)이 그 자체로 나에게 무한한 윤리적 책임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주체는 스스로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타자를 향한 책임 속에 놓여 있으며, 참된 주체성은 자기 자리를 타자를 위해 내어주는 '대속(substitution)' 속에서 완성됩니다.
빅터가 자신이 낳은 존재의 얼굴과 절규를 외면한 것은, 바로 이 창조자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의 자리를 스스로 거절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회피가 이어지는 모든 파국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은 결정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리워야단조차도, 그 모든 혼돈과 반역의 세력조차도 결국은 하나님의 소유 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갈고리로도 안 되고, 인간이 맺는 언약으로도 안 되는 그 일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신약 히브리서 2장 14-15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은 성도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 용을 이겼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갈고리가 아니라, 새 언약의 피,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리워야단을 굴복시킨 것입니다.
빅터가 끝내 거절했던 그 관계,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언약을 그리스도는 스스로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지으신 존재들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레비나스가 철학적 개념으로 사유했던 '타자를 위한 대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사유를 넘어 실제 역사 속 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빅터의 거절이 파멸을 낳았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적 내어 주심은 새 언약의 승리를 낳았습니다.
교회는 죄와 죽음과 어둠의 세력을 자기 힘의 갈고리로 정복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확정된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언약 안에서 싸우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싸움은 정복이 아니라 이미 이기신 주님 안에 거하는 싸움입니다.
[결론] 리워야단 ,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물리치라
『프랑켄슈타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빅터는 자신이 만든 존재를 뒤쫓다가 북극의 얼음 위에서 홀로 숨을 거둡니다. 자신이 창조한 것과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그는 추격과 회한 속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갈고리는 리워야단을 감당하기에 무력합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도 낮아지기를 거부하는 교만의 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인 하나님께서, 인간이 끝내 맺지 못했던 그 언약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친히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ㆍ우리의 손에 든 갈고리(하카, חַכָּה하카)를 내려놓읍시다.
ㆍ우리 안의 교만한 왕좌(샤하츠, שַׁחַץ)를 하나님 앞에 낮춥시다.
ㆍ이미 리워야단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은혜의 언약(베리트, בְּרִית)을 붙들고 살아갑시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 우리가 마주한 리워야단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물리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