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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 세상,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존 레녹스, 아바서원, 2020
변증가 존 레녹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입을 열다!
“우리는 획기적인 시기를 거치고 있다. 우리의 세계관과 신념과 상관없이 예전에 품었던 확실한 것들이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당신이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우리 모두를 난감한 상황에 빠뜨리고 있다.”(존 레녹스, ‘머리말’ 중에서)
저자는 먼저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며 대처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 책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조자의 성찰이다.(9쪽)
코로나바이러스에 떠는 세상
영화에서나 본 듯한 장면이 실제로 벌어지는 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도시들과 심지어 국가들까지 폐쇄되고, 국경이 봉쇄되고 여행이 금지되고, 필수적인 서비스 외에는 모두 문 단고, 대규모 스포츠도 금지되고, 침묵의 소도시와 대도시들이 두려움과 자가격리에 처하는 등 우리가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는 국면이다. 이 팬데믹은 확산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필요한 자원을 생산하느라 국가 보건 시스템이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12쪽)
우리 대다수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안정된 세계에 익숙해 있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온 세상이 점점 더 취약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하다.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적 건강과 심리적 건강 때문에 두려워한다. 또한 가족과 친구들, 특히 노약자들 때문에, 그리고 사회적 그물망, 식량 조달, 직업과 경제적 안정 등 수많은 문제들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매년 인플루엔자로 죽는 사람의 통계를 태연히 받아들인다. 영국 보건부에 따르면, 영국에서 지난 5년 동안 매년 인플루엔자로 죽은 사람이 평균 17,000명으로 추정되고, 미국에서는 2019년 10월부터 2020년 3월까지 23,000-59,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2019년에 전 세계적으로 길에서 죽은 사람이 무려 135만 명이나 된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런 원인보다 우리를 더 두렵게 하는 것은 방대한 규모와 기하급수적인 성장, 무수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잠재력 때문이다.(13쪽)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인 프랜시스 콜린스는 ‘더 애틀랜틱’과의 인터뷰에서 이 바이러스에 대해 깜짝 놀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바이러스는 전염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사스(SARS)보다 더 빠르다. 사스는 18년 전 온 세계를 두려움에 빠뜨린 질병이었으나, 이 코로나바이러스만큼 전염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전염이나 죽음의 수준에 도달한 적이 없다. 사스는 중병에 걸린 사람들로부터만 전염될 수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경미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나 아예 아프지 않은 사람들로부터도 전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13-14쪽)
저자는 묻는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공황과 히스테리에 빠지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문제를 겪은 적이 있다. 과거에도 비슷한 팬데믹들이 있었다. 기록에 남은 가장 오랜 사례는 아마 주후 165-180년에 발생한 안토니우스 역병 내지는 갈레노스 역병일 것이다. 연루된 질병은 불확실하지만 홍역이나 천연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4쪽)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콜레라 팬데믹이 여러 차례 휩쓸어 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1918-1920년에 발병한 인플루엔자 팬데믹은 2천만에서 5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나의 십대 시절인 1956-1958년에 발병한 아시아 인플루엔자는 2백만 명을, 1968-1969년의 홍콩 인플루엔자는 백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2005-2012년에 최고조에 달한 HIV/AIDS 펜데믹으로 죽은 사람은 무려 3천 2백만 명이나 되었다. 이 모든 질병은 펜데믹으로 분류된다. 이에 덧붙여, 에볼라와 사스 같은 여러 유행병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특정 지역에 한정되었기에 팬데믹으로 분류되진 않는다.”(14-15쪽)
저자에 따르면 과거에는 서양에서 국가적 재앙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갔고 국가 지도자들은 기도를 요청하곤 했다. 남아공화국의 헌법재판소장 모호엥은 “나는 기도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오늘부터 기도하는 게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이 점점 더 줄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또는 누구로부터 진정한 위안이나 희망을 얻을 수 있을까?”
2020년 3월 10일자 「뉴욕 타임즈」에 이탈리아 지널리스트 마티아 페라레시의 이런 기사가 실렸다. “뜨거운 물은 손 소독제가 아니고 기도는 백신이 아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종교가 영적 치유와 희망의 근본적인 원천이다. 그것은 안녕의 필수 요소인 심리적 및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는, 절망의 치료책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종교가 예배자들에게 궁극적인 의미의 원천이다. 모든 종교의 가장 심오한 주장은 존재 전체를, 특히 고통과 환란으로 채색된 상황을 이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라. 그러면 신체적 건강조차, 더 큰 목적이 없다면,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통과 고난은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 첫째, 자연 재앙과 질병의 결과로 생기는 고난이 있다. 지진, 쓰나미, 암, 코로나바이러스 등인데, 이에 대해선 인간의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이는 고통의 문제 내지는 자연적인 악의 문제를 낳는다. 이 용어는 약간 유감스럽다. ‘악’이란 단어는 도덕적 의미를 내포하고 지진이나 바이러스는 도덕적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남자와 여자가 직접 책임을 져야 할 고난이 있다. 미움, 테러, 폭력, 학대, 살인의 행위들이다. 이는 도덕적 악의 문제를 낳는다.(22쪽)
물론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은 때때로 연결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자가 후자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무척 복잡하다는 것이다. 가령, 탐욕스런 상업적 산림 벌채가 사막의 확산을 낳고, 이는 영양실조와 질병을 낳을 수 있다. 물론 음모론자들은 어떤 인간 행위자들의 탓으로 돌리려고 할 것이다. 인간이 바이러스의 감염에 개입되어 있지만 고의적으로나 이기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보통은 바이러스가 동물로부터 인간에게 건너뛰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중국 당국이 애초에 파괴적인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보도를 억압했다는 증거가 있다.(23쪽) 슬프게도, 2019년 12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중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안과 의사 리원량은 전염병에 감염되어 두 달 후에 죽고 말았다.
저자는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를 세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셋 모두 중요하고, 이 셋은 누구에게나 상당한 도전을 던진다. ”우리는 지적인 명료성을 갖고 싶다. 다수는 몇 시간 동안 뉴스를 시청하고 인터넷을 물색하면서 현 상황을 이해하도록 돕는 새로운 정보를 찾기를 바란다.“
크리스천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저자는 6장에서 ”크리스천은 이 팬데믹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라고 묻고 이렇게 답한다.
첫째, 실제적 차원에서 최상의 의료적 충고를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 의료적 충고에 기초한 이런 반응은 물론 불신의 증거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또 치유할 수 있지만, 우리가 현명해서 의료를 비롯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자원을 사용하길 기대하신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이기심의 표출이 아니라 이웃을 보호할 만큼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이다.“(70쪽)
이들을 방문해서 쇼핑을 돕고 필요한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C.S. 루이스는 ‘핵폭탄’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취할 첫 번째 행동은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핵폭탄에 파멸될 것이라면, 그 폭탄이 올 때 우리가 무서워하는 양떼처럼 다함께 웅크리며 폭탄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 현명하고 인간다운 행동-기도하기, 일하기, 가르치기, 읽기, 음악 듣기, 자녀를 목욕시키기, 테니스 치기, 맥주를 마시고 다트 게임을 하면서 친구들과 얘기하기 등 –을 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하자. 핵폭탄이 우리의 몸은 부술지 몰라도 우리의 정신을 지배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핵폭탄’ 대신 ‘코로나바이러스’를 대입하여 읽어보라고 제안한다. 이는 만만찮은 글이지만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다른 관점을 준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셋째, 우리는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런 위기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알고 있다. 최근 가족연구소의 연구원 리맨 스톤은 “기독교는 지난 이천 년 동안 유행병을 다뤄왔다”는 글에 이렇게 썼다.
“역사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4분의 1을 죽일 뻔했던 2세기의 안토니우스 역병이 기독교의 확산을 초래했다면서, 크리스천들이 병자를 돌보고 역병은 변덕스립고 화난 신들의 작업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에 반역한 깨어진 창조 세계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영적 모델을 제공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더 유명한 유행병은 키프로스 역병으로, 이는 설교에서 이 질병을 다채롭게 설명한 주교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에볼라와 관련된 질병으로 보이는 키프로스 병은 로마 세계에서 3세기의 위기를 유발하는데 일조했다. 그런데 또 다른 역할도 했다. 기독교의 폭발적인 성장을 촉발한 것이다... 키프로스의 설교는 크리스천들에게 역병의 희생자들(천국에 사는)에 대해 슬퍼하지 말고 살아있는 자를 돌보는 노력을 배가하라고 했다. 그의 동료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크리스천들이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고 병자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등 그들을 도맡은 모습’을 묘사했다.”(73-74쪽).
한 세기 후, 이방인 황제 줄리안은 ‘갈릴리인들’이 비기독교인 병자들까지 돌본다고 비통하게 불평하곤 했고, 교회 역사가 폰티아누스는 크리스천들이 ‘믿음의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도록’ 확실히 했다고 말한다. 사회학자이자 종교 통계학자인 로드니 스탁은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있는 도시들의 사망률이 다른 도시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희생인 돌봄의 역사는 이후에도 종종 등장하곤 했다. 1527년 페스트가 독일의 비텐베르크를 덮쳤을 때 마르틴 루터는 도망처서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오히려 남아서 병자를 돌보았다. 도망치지 않은 바람에 딸 엘리자베스가 죽는 불행을 겪었다. 루터는 또한 “크리스천은 역병에서 도망쳐야 하는가”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역병에 대한 크리스천의 바람직한 반응에 대해 뚜렷하게 진술했다. “우리는 우리의 임지에서 죽는다. 크리스천 의사들은 그들의 병원을 버릴 수 없고, 크리스천 관리들은 그들의 구역에서 도망칠 수 없고, 크리스천 목사들은 그들의 회중을 버릴 수 없다. 역병이 우리의 의무를 용해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의무를 우리가 죽을 준비를 해야 할 십자가로 돌린다.”
리맨 스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위생을 중시하는 크리스천의 동기는 자기보존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윤리에서 나온다. 우리는 고통 받는 자를 돌보고 싶다. 이는 무엇보다도 건강한 자를 전염시키지 않는 것을 뜻한다. 초기 크리스천들은 역병의 시기에 돌봄을 제공하는 위생적인 장소로 유럽 최초의 병원들을 설립했다. 그 바탕에는 부주의해서 질병을 더욱 확산시키는 것은 살인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는 전염병의 확산을 줄이기 위해 제정된 규율을 무시하고 우리 자신(과 타인)을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우리가 자가격리를 실천해야 하거나 봉쇄된 지역에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75-76쪽)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지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도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 크리스천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한 이기적으로 식품과 필수품 사재기에 나서 우리 이웃이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76쪽)
저자는 『내가 모든 것을 선택한다』(I Choice Everthing)-유잔 모스(남아공)와 마이클 웬함(영국)이 고통의 여정을 묘사한 책-는 책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이 책을 마감한다. 두 저자는 모두 불치병(루게릭병)에 시달리고 있고 서로 이메일로 만났을 뿐이다. 유잔은 그 여정을 등산에 비유한다. 그녀는 솔직하고 용기 있게 하나님이 그녀를 지탱시킨 경위를 쓰고 있다.
“나는 약 15년 동안 내 산을 등반해왔다. 그 기간 대부분은 하나님이 나를 준비시키고 계심을 알고 있던 산의 기슭에 세운 베이스캠프에서 보냈다. 나는 항상 등반하길 두려워하며 베이 스캠프가 나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나의 질병을 통해 그것은 내 문제 또는 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항상 그분의 문제였다. ‘나에게 힘을 실어주고 내 길을 완전하게 만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분은 내 발을 사슴의 발처럼 만드신다. 그분은 나에게 높은 곳에 설 능력을 주신다.’”
“나는 마침내 베이스캠프를 떠나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에베레스트를 선택하셨다. 결코 쉽지 않았고 내 발이 종종 미끄러졌다. 종종 피곤함을 느꼈고 때때로 더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일부 구간은 매우 가파르고 내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지만, 그분은 나에게 그분의 능력과 힘을 계속 보여주시고, 내가 피곤할 때는 거기에 계시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내 등반은 거의 끝났다. 이제 내 산의 정상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 등반가가 더 높이 오를수록 정상에 더 가까워지고 숨을 쉬기가 더 어려워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소량이 줄어들고 등반가는 고산병에 시달리게 된다. (인터넷에 따르면, ‘온건한 고산병의 중상은 흔히 두통, 숨 가쁨. 수면 장애, 식욕 상실, 구역질, 빠른 맥박이다.) 몸의 근육이 루게릭병의 진행에 따라 약해지고 숨쉬기에 필요한 근육도 약화된다. 나는 숨이 가쁘고, 일정한 두통을 겪고, 수면 장애를 경험하고 종종 아주 빠른 맥박을 느낀다. 그래도 우려하지 않는 것은 정상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등반이 이제 힘겨워지지만 나는 강행해야 한다. 내가 등반을 마쳤을 때 나를 기다리는 보상이 그 어떤 희생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모든 등산가에게 물어보라!”
“그래서 나는 여기에 서서 쳐다보고 있다. 끝이 보이고 내 가슴은 홍분에 들떠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그날을 바라본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80-81쪽)
저자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황폐하게 만든 코로나바이러스와 모든 역병이 사라질 것이다. 주 예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은 결코 사라지거나 바래지지 않으리라.
팬데믹의 와중에 평안이라고? 오직 예수님만 평안을 줄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이슈는 바로 이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하실 것으로 신뢰할 것인가? 나는 이 위기가 제기한 모든 질문에 다 대답했는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더 명료하게 알고 싶은 많은 이슈들이 아직도 있다.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84-85쪽)
그동안 저자는 19세기의 위대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의 충고를 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너무 선해서 불친절할 수 없고 그분은 너무 지혜로워서 틀릴 수 없다. 우리가 그분의 손을 추적할 수 없을 때는 그 분의 마음을 신뢰해야 한다.”(스펄전)
글. 송광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