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오프라인 세상을 창조했지만 인간은 온라인 세상을 창조했다. 그러나 온라인 세상을 만든 인간을 만든 원천기술은 신에게 있으니 온라인 세상도 결국 신의 창조의 세계인 셈이다.
온라인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웹(WEB)이 있었다.“이다. 온라인 세상에서의 로그인과 로그아웃은 오프라인의 출생과 사망과 같다. 이를테면 스마트폰교의 교주 스티븐 잡스 1955년에 이 세상에 로그인(login)하여 2011년 56세에 로그아웃(logout) 된 셈이다. 즉 온라인에서 로그인으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데가르트가 오늘날 살았다면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을 것이다..
기독인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 2 가지 세상을 살아야 한다. 온라인 세상은 로그인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시작할까? 뜬 구름을 잡지 않고 모든 것에 현실적인 예수는 ‘하나님 나라’ 사용 방법의 매뉴얼을 만들어 놓았다.
온라인의 기본은 ‘검색’이다. 만일에 하나님이 내 삶에 대하여 알기 위해서 검색을 한다면 무슨 단어로 검색을 할까? 수입? 건강? 집? 가족 수? 아마도 “하나님 나라와 義’일 것이다. 왜냐하면 매뉴얼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2020년 4월 어느 주일 아침에 페친 한 분이 “여기 좀 들어가보세요”라 하면서 메시지를 남겨서 무심코 클릭을 했더니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있는 평신도 교회가 대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서 비대면으로 드리고 있었다. 그 모임은 만난 적은 없으나 당당뉴스에 오래 동안 같이 칼럼을 써와서 피차에 이름만 알고 있던 왔던 신성남 형제가 주축이 되어서 운영되고 있었는데 나를 알아보고 “지 목사 님이 오셨네요”라고 인사를 건네주어서 금방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다시 대면 예배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오클랜드에 있는 평신도 교회 신자들은 돌아가서 온라인 모임은 소수만 남게 되어 더욱 빠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 안식년을 맞고 있던 뉴욕의 정영민 목사에게 참여를 요청하고 지인들에게도 권유를 시작했다. 이름도 처음의 ‘온라인평신도교회'에서 '아둘람온라인교회'로 했다가 ‘교회’가 아닌 ‘공동체’로 바꾸었다. 즉 새로운 공동체, '온라인공동체’의 실험인 것이다.
그러나 대면해서도 공동체성을 갖기 어려운데 비대면 상황에서 어떻게 공동체성격을 갖출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었다. 공동체는 서로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서로를 아는 것은 상대방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뜻은 사생활
최적화(optimization)란 말은 원래 시스템 공학에서 쓰이는 말로 “어떤 목적에 대하여 가장 적절한 계획을 세워 설계하는 일. 또는 선택을 하는 일”을 말한다.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이 즉 ‘교회 생활’이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는 하기에 따라서 신앙 생활의 최적화된 시스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
아둘람에 참여하는 이들 모두 교회를 다녔던 이들이었기에 처음에는 한풀이 하듯이 교회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왜 예수 이야기는 없고 교회 이야기만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그 동안의 신앙 생활이 교회 안에서만 예수를 찾는 훈련을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즉 몸은 출애굽을 했지만 정신은 아직 출애굽을 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아둘람 초창기에 기성 교회를 비난하는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예수도 그런 무리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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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하면 어느 종교나 가지고 있는 종교 일반의 문제를 기독교의 문제로만 보게 될 수 있다. 종교도 시대와 문화의 산물을 일 수 밖에 없어서 세월이 가면 저절로 변할 것에 목숨 거는 것은 아무래도 부질없는 짓인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든지 어차피 개인의 결단, 고백, 성찰을 통해서 접근해야 하는 법인데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영적, 정신적, 인격적, 교육적으로 유익함이 전혀 없는 에너지 낭비일 뿐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가고 나는 내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둘람에 참여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나는 스스로 내 자신을 퀘이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입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짜증 나는 일은 믿는 것을 가지고 다투는 일이다. 양심의 자유가 있는 민주사회에서 남이야 무엇을 어떻게 믿던 상관할 바가 아닌데 기독교인은 믿는 것을 가지고 싸운다.
하지만 아둘람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 다른 신앙의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색깔이 분명치 않아 보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종교다원주의냐?"고 묻는 사람도 생겼다. 그러나 사실은 ‘종교다원주의자’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쫓아 갈 수 없는 사람을 점잖게 비난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는 마치 북방 불교가 자기들 보다 더 원초적인 남방 불교를 향하여 소승 불교라고 시건방을 떠는 것과 같다.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느 길로 가나 모두 정상으로 이르게 되어있다”는 뜻같이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은 "산을 올라가 보고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산을 올라가보지 않고 먼데서 산을 바라보기만 하고 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다르다. 일단 산에 올라가 봐라. 산을 올라가다보면 잘못든 길도 있고, 가다가 끊어진 길도 있고 심지어는 골짜기로 도로 내려오는 길도 있다. 그러므로 산을 올라가 정상에서 그런 소리를 할 때 맞지만 올라가 보지 않고 밑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에 올라가 보고서 비로소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즉 다원이 아니라 일원인 것이다. 그럼으로 엄밀하게 정의하면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종교일원주의'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다석 유영모는 귀일(歸一)로 표현 했다. 다석의 귀일사상은 하느님을 향한 구도정진(求道精進)적 삶을 뜻한다. 유영모는 예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산 가장 모범적인 사람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를 따라가는 것이 신을 향한 다가감인 동시에 내 안에서의 신을 찾는 방법인 것이다.
경계는 자기의 것을 안전하게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타인을 배척하기 위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보수의 이름으로 오로지 배척하기 위해서 경계를 세우는 집단이 있는데 바로 기독교이다.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바로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바야흐로 인류는 Untect의 시대 터널을 막 통과했다. 접촉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인간은 한 생명체였던 어머니와 탯줄을 끊으면서부터 다른 생명체와 접촉하면서 살아야 한다.
만일에 온라인이 없었을 때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다면 지구는 벌써 멸망했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면서 인류는 대면하지 않고 소통하는 길을 배웠다. 동시에 ‘비대면 영적인 소통’도 있다는 것도 배웠다. .
사도신경에서 ‘성령이 교통하심을 믿사오며’라고 하지만 나는 성령의 역사는 잘 몰라도 교통하는 네트워크의 역사는 알기 때문에 나는 사도신경을 이렇게 고쳐서 믿는다.
“인간의 근원이시고 모든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사오니 모든 관계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도 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즉 예수와 네트워크를 맺어야 하나님과 네트워크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나는 사도신경을 이렇게 고쳐 믿는다.
“거룩하지 못한 교회가 안티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며 인터넷으로 서로 교통하는 것과 평균수명의 급격한 연장으로 지루하게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다행스러운 일은 아둘람도 점점 진화해서 네트워크가 되어서 역동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역동은 생산성을 가져온다. 아둘람 구성원들 각자의 소질과 역량이 네트워크를 통해서 역동적 에너지로 발산될 수 있을 때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을 굳게 믿고 있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