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 8. 24. 경북 안동 낙동강 유역, "할배, 갓 쓰고 어데 갑니까?" "나 집에 간다." "못 갑니다." "와! 나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라 칸다. 어이 비켜라."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라" <다부동 전투> 60년 세월 속에 묻힌 55일간의 대항전
| | | 낙동강이 뚫리면 남한이 무너질 판이었다. 1950년 8월 3일. 우리 국군은 북한군의 강력한 진격에 못이겨 낙동강방어선인 대구 북방 22㎞지점 다부동까지 밀려 내려오게 된다. 전쟁이 터지고 꼭 40일만의 일이다. 북한군은 다부동을 차지하기 위해 그들의 주력인 3·13·15사단을 전투에 투입했다. 군단급에 해당하는 2만1,500명의 병력과 전차 20대, 각종 중화기 670문으로 맹공격을 퍼부었다. 우리 국군도 제 1사단 7,6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이 중에는 500여명의 학병(學兵, = 학도병)도 속해 있었다. 갖고 있는 172문의 화포로 막강한 공산군의 총공세를 버텼고, 미 제 27연대가 이를 도왔다. 55일간의 대혈투였다. 시체는 쌓이다 못해 흘러내렸고, 여름이라 악취가 진동했다. 하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다부동이 북에 넘어가면 지형상 우리 군은 남쪽으로의 후퇴가 불가피했다. 대구가 적의 지상화포 사정권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국군은 이곳을 꼭 사수해야만 했다. 전쟁의 승부처였다. |
아래는 경북에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에 대한 학도병 일기 입니다. 저 피난민속에 형제와 친척은 없는지? 07시경에 중대에서 처음으로 김으로 싼 주먹밥을 아침 식사로 먹었다. 제3대대의 우측에서 총포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날 북괴군 제13사단이 제12연대 정면 洛東(낙동)나루로 도하하여 공격해 와서 낙동강방어선에서첫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 화기중대는 3개 소총중대에 중기관총 2정씩을 배치하여 진지를 구축해 놓았고, 내가 있는 박격포소대는 낙동강변 무명고지중턱에 81mm 박격포 진지를 구축하고 언제든지 포를 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겪는 전투라 우리는 많이 긴장했다. 13시경 나는 무명고지에서 경계를 하면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과 그 건너편에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쾌청한 날씨에 우측으로 선산읍이, 좌측으로는 구미시가지가 한 눈에 바라보였다. 강 건너편의 산기슭과 모래사장에 노숙자가 많이 보였고, 나루터에는 피난민 행렬이 몰리고 있었다. 이 피난민 대열은 작전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북괴군 게릴라가 섞여서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하고 있어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제1사단은 이 무렵에 입대한 경주 문화중학교와 경주공업중학교, 그리고 군위농업중학교 학도병 120명으로 사단 수색중대를 편성하여 사단사령부의 경비를 맡는 한편 이들 학생들에게 학생복과 농민복을 입혀 분대단위로 강 너머에 있는 피난민 야영지와 나루터에 침투시켜 첩보를 수집하면서 북괴 게릴라를 색출하고 있었다. 한편 미 제8군사령부는 피난민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어 강북에는 많은 피난민이 운집하여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강을 건너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어 나루터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14시경 제2대대 정면 송당 나루 부근에서 포격소리와 함께 장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제1대대 정면 강정나루 근방에서도 북괴군이 쏘는 포탄이 여기저기 떨어지고 AK소총소리가 들려왔다. 피난민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강물로 뛰어들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헤엄을 쳐서 건너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부부는 노모와 어린 자식을 찾다가 끝내 보이지 않자 강가에 주저앉아 어머니와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딱한 정경을 보고 있어야 했다. 북한에서 월남한 저 피난민 속에 형제와 친척들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닌지 기대와 함께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루마상님의 부친이 전쟁에 참여하셔서 전쟁때 얘기 입니다. 1사단 통역장교로 근무하셨는데 북한군과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다고 하더군요. 뜬구름님의 사진을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나네요. <피난민 엄호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지고 있으므로 침략자 북한 공산군을 처 부셔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의무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백의종군한 학도병이 아닌가? 피난민들이 곤경에 처한 딱한 정경을 바라보며 이런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피난민을 엄호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우리 학도병들은 고참병들의 지도하에 강 건너에 있는 북괴군을 향하여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쏘아댔다. 우리의 사격은 비교적 정확하게 적진에 떨어졌다. 강 건너의 야산에 산개하여 도하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북괴군 제13사단과 제15사단의 대병력이 아군의 포격과 중기관총의 세례를 받고 꼼짝하지 못하는 사이 피난민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갈 수가 있었다. <북괴군의 역습포격에 희생된 학도병>
피난민 엄호작전으로 14시 30분부터 무려 2시간 동안을 쉴 새 없이 중기관총과 81mm 박격포를 쏘아 적진을 강타했다. 우리 학도병들은 생전 처음으로 신나게 전쟁을 체험하면서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후 얼마동안 전장은 침묵하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깃들 무렵, 갑자기 북괴군의 포가 작렬하는가 싶더니 포탄이 우리의 기관총진지와 박격포진지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낮 동안 우리가 포와 기관총을 쏠 때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가 역습을 감행한 것이다. 순식간에 산이 무너지고 호가 뭉개졌으며, 흙덩이와 바위덩이에 파편이 뒤섞인 덩어리가 사정없이 튕겼다. 옆에서 살점이 하늘로 날으고 피가 땅으로 튀었다. 사방에서 ‘아이고!’, ‘어머니!’ 하는 단말마같은 비명이천지를 진동했다. 혼비백산한 신병 학도병들이 이리 뛰고 저리 숨고 했지만 계급도 군번도 없는 학도병들은 많이 쓰러져 갔다. 포항 동지상업중학교 학도병 崔相厦(최상하)군은 교통호에 뛰어들어 납작 엎드렸다. 그 위에 다른 학도병이 포개졌고, 또 그 위에 다른 학도병이 엎어져 이렇게 3중 4중으로 엉켜 엎드렸다. 제일 위에 엎어진 학도병이 파편을 맞아 전사했는데 그 덕에 밑에 깔린 최상하는 무사했다. 16세의 어린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울면서 헤매고 있었는데 순간 ‘빨리 엎드려!’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누군가의 힘에 의하여 호 속으로 나뒹굴어졌다. 선임하사관 余泰煥(여채환) 상사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나를 껴안고 호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거의 동시에 폭음이 울렸고, 우리가 있던 자리에 떨어진 포탄은 우리가 뛰어든 호까지 무너뜨렸다. 여 상사와 나는 흙덩이를 뒤집어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 상사의 철모에 파편이 박혀 있었고 나는 여상사의 몸에 깔려 있었다. 여 상사는 철모 덕에 무사했고, 나는 여 상사 덕에 살아났다. 이날 전투에서 제3대대 화기중대에 배치된 학도병 오상태, 이회창, 마숙직, 김연복, 권오릉, 김정열, 정인양, 김경한 등 8명의 학우를 잃었다. 그들은 참전 첫날 계급도 군번도 없이 사라져 갔다. “삶과 죽음은 한 순간의 일이다. 죽으면 무슨 쓸모가 있으랴? 살아야 전쟁도 이기고, 나라도 구하고, 부모형제와도 만날 수가 있다. 나는 꼭 살아서 전쟁에 이겨 조국을 구하고, 부모형제 곁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리라...” | 경북을 사수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패망한다...6.25. 전쟁중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
<북괴군의 낙동강 도하와 학도병의 용전> 8월 4일 19시경 북한군 제13사단 제21연대 병력이 운성나루로 도하하여 낙상 리를 거쳐 장사 봉을 점령했다. 이로 인하여 청화산(701고지)을 방어하고 있는 제6사단 제2연대와 우리 제1사단 제12연대 배치지경선 사이에 약 3km의 공백이 생겨 우리 제1사단 우측이 노출되는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자 우리 제12연대 주력은 부득이 22시를 기하여 산림동으로 철수하였다. 8월 5일 02시 우리 제3대대 고지에서 바라보니 우측의 북쪽 제2대대 방어지역에서 북괴군 제13사단 1개 대대병력이 비등산(245고지)을 격파하고 25번 국도를 따라 해평 쪽으로 남진해 오고 있었고, 또 다른 북괴군 제134사단의 대대병력이 하도 봉(225고지)을 공격하여 02시부터 07시까지 6시간 동안 혈전이 벌어졌다. 조명탄 불빛이 대낮같이 비치고 예광탄의 섬광이 하늘을 수놓으며 요란한 총포탄의 소리가 낙동 강변을 진동하였다. 한편 북괴군 제13사단의 1개 중대병력이 청화산 남쪽의 구시골 계곡으로 동진하여 신라의 천년고찰 도리사가 있는 냉산(651고지)으로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 제11연대의 우측 방을 교란하였고, 우리 제3대대의 우측 제1대대는 정면 강정나루로 도하를 시도하는 북괴군 제15사단 1개 연대병력과 격전이 벌어졌다. 8월 5일 08시경 낙동강변의 무명고지에서 우리 제3대대 학도병들은 가랑비를 맞으며 강정나루에서 도하하는 북괴군 제15사단을 향하여 중기관총과 박격포를 집중하여 적의 도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때 ‘제3대대는 이동하여 냉산을 점령하고 있는 북괴군 1개 중대를 격퇴하라!’는 작전 명령이 내렸다. 우리 제3대대는 비를 맞으며 이동을 개시하여 해평 동과 문량 동을 거쳐 냉산으로 진격해 갔다. 09시경 제3대대는 냉산을 에워싸고 일선중대가 산개한 다음 그 후방의 무명고지에 중화기중대가 포진하였다. 09시 30분 우리 중화기중대는 적진에 81mm 박격포로 집중포격을 하였고, 이어서 10시 정각에 학도병들의 중기관총 엄호를 받은 일선 3개 중대가 냉산을 그물처럼 에워싸고 협공해 갔다. 적도 82mm, 61mm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응사하여 치열한 사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우리 제3대대의 일선중대가 백병전으로 돌진하자 적은 구시골 계곡을 타고 청화산으로 퇴각해갔다. 이렇게 하여 학도병으로 편성된 제3대대는 냉산을 확보하여 우리 제1사단에 대한 북괴군의 우회공격을 막았다.
<낙동강 방어선 뚫은 북괴군과 격전> 8월 6일 14시경 낙동 나루 부근에서 북괴군 제3사단이 전차와 야포를 도하시키기 위하여 수중교를 가설하느라고 낙동강 수위가 2시간 동안 갑자기 줄었다가 원상으로 돌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23시 30분경에는 북괴군 제15사단의 2개 대대병력이 강정나루와 강창나루를 지키고 있는 제1대대 진지에 비를 퍼 붓듯 집중폭격을 가하면서 도하작전을 감행해 왔다. 줄기차게 내리는 장대비를 맞으며 긴장하고 있던 제1대대는 조명탄을 하늘높이 쏘아 나루터를 대낮처럼 밝혀놓고 저지 전을 폈다.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총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포연이 강을 뒤덮었다. 8월 7일 24시 적 제15사단은 강정나루에서 요란하게 도하하는 척하다가 주력을 상류의 강창나루로 돌려서 도하에 성공했다. 북괴군 제15사단 2개 대대병력이 제1대대의 낙동강방어선을 뚫고, 산양 동 일대까지 진출해 왔다. 24시경 제1대대와 제3대대가 빗속에서 북괴군의 저지에 안간힘을 썼다. 북괴군은 제3대대가 있는 냉산에 포탄을 퍼부으면서 밀어붙여왔다. 연합군의 반격이 진행되는 기간인 9월, 미군이 낙동강 후방지역을 공격하여 두명의 북한군 포로를 잡았다. <낙동강 건넌 북괴군 탱크 등 유인 격멸> 8월 8일 01시 제1대대의 우측에 있던 제2대대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8월 8일 01시 적이 주평 동을 점령하자 06시 제1대대와 제3대대는 낙동 강변에서 이동하여 해평 천변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168고지와 해평 천 사이의 월호 동 일대에 살상지대를 형성하여 진지구축작업에 들어갔다. 14시경부터 북괴군은 우리가 진지구축 작업을 하고 있는 해평천 일대에 122mm 곡사포를 산발적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북괴군의 야포와 전차가 낙동강을 도하해 왔다는 증거다. 19시경 제2대대가 제1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철수하여 22시경에는 무사히 예정된 168고지에 도착한 후 신 방어진지 편성을 완성했다. 8월 9일 03시 북괴군 제13사단의 1개 전차중대가 1개 연대의 대병력을 꽁무니에 달고 살상지대로 설정해 놓은 월호동으로 진입해 오고 있었다. 조용한 밤중에 전차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그때 아군은 조명탄을 쏘아 올렸고, 순간 천지가 환해지면서 T-34전차 5대와 그 뒤를 따라오는 보병연대의 대병력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때를 맞추어 신호탄 3발이 연거푸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이어서 우리 제11연대의 전 화력이 적의 전차와 보병부대에 집중 포격했다. 함께 기관총과 소총도 불을 뿜었다. 삽시간에 월호동 일대가 불바다로 변했다. 그러나 북괴군의 전차는 끄덕도 않고 168고지의 제2대대 방어진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우리 주저항선의 중앙을 향하여 돌진해왔다. 이때 사단공병대대가 해평교를 폭파하여 화염이 충천하고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낙동강 전투에서 당시의 육박전 04시경 북괴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파괴된 해평교를 우회하여 해평천 신방어진지를 발견하지 못한 채 해평천을 따라 문량동으로 진격해 갔다. 05시경 T-34전차 5대와 그 뒤를 따르는 1개 대대병력이 제1중대를 통과하여 그 첨병이 두대동 제3중대의 진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제1대대장 김재명 소령이 신호탄 2발을 쏘아 올렸고, 동시에 정영홍 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 학도병들의 81mm 박격포와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이어서 제17야포대대 제2중대의 105mm M-2곡사포와 연대 대전차포 소대의 57mm 대전차포가 가세하였고, 보병들의 개인화기도 집중했다. 金鍾杓(김종표) 준위가 이끄는 제11연대 특공대의 2.36인치, 3.5인치 로켓포가 발사되고, 수류탄도 집중되었다. 순식간에 전장은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처참하게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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