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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 일 삼국의 선사상 2
중국의 마조도일 선사, 일본의 대우량관 선사, 우리나라의 태고보우 선사의
생애와 선사상을 보내드립니다.
- 혜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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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 마조도일 선사
[조사선(祖師禪)의 실질적 건립자 마조(馬祖)선사]
김진무 교수 충남대학교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가 조계(曹溪)에서 40여 년 동안 법을 펼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따르면 그의 직계 제자가 43인이라고 하며, 『단경』의 ‘부촉(咐囑)’에는 이른바 ‘십대제자(十大弟子)’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육조(六祖)와 선종 오가(五家)의 형성
그렇지만 ‘십대제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하택신회(荷澤神會)이며, 다른 제자들의 행적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더욱이 숙종(肅宗) 대종(代宗)의 두 황제의 국사(國師)로서 선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남양혜충(南陽慧忠), 그리고 선종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맥인 남악회양(南嶽懷讓), 청원행사(靑原行思) 등도 ‘십대제자’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단경』에 기록된 ‘십대제자’는 혜능대사가 입적 당시에 문하에 머물던 제자들을 거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가속(賈餗)이 보력(寶曆) 원년(825)에 찬술한 『대비선사비명(大悲禪師碑銘)』에서는 “조계대사의 입적 후 그 법을 이은 신회(神會)와 회양(懷讓)이 또한 두 종(宗)을 이루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따라서 이 당시에는 남종선(南宗禪)의 주류를 신회의 하택종(荷澤宗)과 남악회양의 제자인 마조도일(馬祖道一)의 홍주종(洪州宗)으로 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한편 송대 지반(志磐)이 찬술한 『불조통기(佛祖統紀)』에서는 “육조 이후 두 파(派)를 이루었는데, 하나는 청원행사(靑原行思)이다. 행사(行思)는 석두희천(石頭希遷)에게 전하였으며, 그 문하에 조동종(曹洞宗)·운문(雲門宗)·법안(法眼宗)을 이루었다. 다른 하나는 남악회양(南嶽懷讓)으로 회양(懷讓)은 마조(馬祖)에게 전하였고, 그 문하에 임제종(臨濟宗)·위앙종(潙仰宗)을 이루었다. 이렇게 오가종파(五家宗派)가 되었으나 도(道)는 하나일 뿐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로부터 보자면 후대로 갈수록 ‘하택종(荷澤宗)’은 쇠락하여 사라지고 ‘청원계(靑原系)’에서 조동·운문·법안의 3종이 출현하였고, ‘남악계(南嶽系)’에서 위앙·임제의 2종이 출현하여 ‘오가(五家)’를 이루었으며, 그는 모두 혜능(慧能)으로부터 계승된 것이기 때문에 “도(道)는 하나일 뿐”이라고 칭함을 알 수 있다.
이 ‘오가(五家)’의 형성은 조사선(祖師禪)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이후에 각각 논하겠지만 이러한 남종선(南宗禪)의 분파는 실제적으로 석두희천과 마조도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특히 『송고승전宋高僧傳』 권9의 “강서(江西)의 법주는 대적大寂[馬祖]이요, 호남(湖南)의 법주는 석두(石頭)로서 서로 왕래가 끊이지 않아 두 대사(大士)를 친견하지 못한다면 도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라는 기록으로부터 이 두 선사의 문하에서는 서로 왕래하면서 조사선(祖師禪)을 선양했다고 하겠다. 그에 따라서 먼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선사상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벽돌을 갈아 거울 만들기
마조(馬祖)는 실질적인 조사선(祖師禪)의 건립자라고도 평가받는다. 조사선(祖師禪)에 조금이라고 관심이 있는 이들은 이른바 ‘즉심즉불(卽心卽佛)’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도불용수(道不用修)’ 등을 언급할 정도로 마조의 선사상은 상당히 유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선사상이 모두 『육조단경(六祖壇經)』에 근거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이들은 드물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마조(馬祖)가 남악회양(南嶽懷讓)을 만나 깨달음에 이르는 기연도 상당히 유명하다. 마조가 출가한 이후, 남악(南岳)의 전법원(傳法院)에서 매일 좌선(坐禪)을 하자 회양(懷讓)선사는 그 앞에서 벽돌을 갈았고, 무엇을 하냐는 질문에 거울을 만든다고 답하고, 그에 의문을 제기하자 다음과 같이 설한다.
“네가 좌선(坐禪)을 배움은 좌불(坐佛)을 배움이 된다. 만약 좌선(坐禪)을 배운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禪非坐臥-선비좌와]. 만약 ‘좌불(坐佛)’을 배운다면 부처는 정해진 상(相)이 아니다. 머무는 법이 없는 곳에서 마땅히 취하고 버릴 것이 없다. 네가 만약 ‘좌불(坐佛)’한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요, 만약 좌상(坐相)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 아니다.”1)
이로부터 마조(馬祖)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사상은 바로 『단경』에서 강조하는 것으로,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면, 유마힐(維摩詰)이 사리불(舍利弗)의 숲 속에서 연좌(宴坐)함을 꾸짖은 것과 맞지 않다.”2) 등의 내용과 같다. 이러한 기연(機緣)은 이후에 이른바 ‘선비좌와(禪非坐臥)’ 라는 용어를 유행시켰다고 하겠다.
『마조어록』에는 “너희들은 각자 자심(自心)이 부처임을 믿어라.” “자성(自性)이 본래 구족되어 있어 다만 선악(善惡)의 일 가운데 걸림이 없다면 수도인(修道人)이라 칭하겠다. 선(善)함을 취하고 악(惡)함을 버리며, 공(空)을 관하여 입정(入定)한다면 바로 조작(造作)에 속한다.”라고 하는 ‘불성(佛性)’과 관련된 언급이 많이 보인다. 이 역시 『단경』에서 ‘자성(自性)’, ‘자심(自心)’으로서 불성(佛性)을 해석하는 것과 동일한 사상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마조(馬祖)의 가장 유명한 문구는 바로 ‘도불용수(道不用修)’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고 할 수 있는데, 『마조어록』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道不用修] 다만 오염되지 말라. 어떻게 오염되는가? 다만 생사(生死)의 마음이 있어 조작하고 좇아가면 모두 오염이다. 만약 바로 그 도(道)를 알고자 하면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平常심)이라 이르는가? 조작(造作), 시비(是非), 취사(取捨), 단상(斷常), 범성(凡聖)이 없음[無]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범부(凡夫)의 행함도 아니며, 성현(聖賢)의 행함도 아님이 보살행(菩薩行)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지금 행주좌와(行住坐臥)하고 근기에 따르고 사물을 접함이 모두 도(道)이다.”3)
이러한 사상도 『단경』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단경』에서는 ‘돈오(頓悟)’의 입장에서 ‘무수무증(無修無證)’을 제창하고 있음을 언급했는데, 마조(馬祖)는 직접적으로 ‘도불용수(道不用修)’를 제창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그 근거를 바로 ‘평상심(平常心)’으로 설정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평상심(平常心)은 결코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이른바 ‘조작(造作)·시비(是非)·취사(取捨)·단상(斷常)·범성(凡聖)’이 없는 상태가 ‘평상심(平常心)’이라는 것이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다
어떤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만약 ‘조작·시비·취사’를 없앤다면 그는 결코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차들이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횡단보도의 신호등 앞에서 초록과 빨간 등을 ‘취사’하지 않고 건넌다면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따라서 마조(馬祖)가 설한 ‘평상심’은 결코 일반적인 ‘마음’이 아닌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결국 능소(能所)가 완전히 희석된, 즉 나와 우주법계가 완전히 ‘불이(不二)’의 상태에 들어 이극(理極)에서 극조(極照)하는 ‘돈오(頓悟)’를 이루어야만 가능하다고 하겠다. 또한 ‘돈오’가 이루어진다면 바로 ‘돈수(頓修)’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비로소 ‘도불용수(道不用修)’가 가능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마조어록』의 다음과 같은 문답에서도 나타난다.
승려가 물었다. “어떠한 것이 수도(修道)입니까?” 답하였다. “‘도(道)’는 ‘닦음[修]’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닦음’을 통하여 얻는다면 그 ‘닦음’으로 이룬 것은 또한 무너지기 때문에 바로 성문(聲聞)과 같을 것이다. 만약 ‘불수(不修)’라면 바로 범부와 같을 것이다. … 만약 상근중생(上根衆生)이라면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指示)를 만나 다시 계급(階級)과 지위地(位)를 거치지 않고서 본성(本性)을 돈오頓悟할 것이다.”4)
이로부터 명확하게 ‘도불용수(道不用修)’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는 ‘돈오(頓悟)’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사실상 궁극적인 깨달음에 있어서는 ‘돈오(頓悟)’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은 이미 『단경』에서 제시되었는데, ‘돈오(頓悟)’의 속성은 마조(馬祖)의 말과 같이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음’이다. 종보본 『단경』에서 “자성(自性)을 스스로 깨달아[自悟] 돈오돈수(頓悟頓修)하는 것이지 점차(漸次)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을 세우지 않는다. 제법은 적멸(寂滅)한 것이니 어디에 차제(次第)가 있단 말인가?”라고 설하는 바와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돈오(頓悟)’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학인들에게 선리(禪理)를 ‘돈오(頓悟)’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마조(馬祖)는 이러한 문제를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일반적인 교학(敎學)에서 시설하는 이른바 성문(聲聞)의 ‘사쌍팔배(四雙八輩)’, ‘연각(緣覺)’, ‘보살십지(菩薩十地)’ 등의 과정을 다만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를 바로 ‘제접(提接)’이라고 칭하고, 이후 조사선(祖師禪)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제접법(提接法)’이 출현하게 된다. 또한 ‘제접(提接)’은 기본적으로 대면(對面)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다양한 상황의 ‘선문답(禪問答)’이 출현하고, 후대에 그를 정리하여 ‘공안(公案)’으로 제시하게 된다.
마음에 ‘즉(卽)’해야 부처에 다가갈 수 있다
마조(馬祖)의 또 다른 유명한 구절은 바로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다. 『마조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승려가 물었다. “화상은 어째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설했습니까?”라고 묻자 마조가 “아이의 울음을 그치기 위함이다.”라고 답하였다. “울음이 그치고 나면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자 마조가 “비심비불(非心非佛)이다.”라고 답하였다. “이 두 종류를 제외한 사람이 오면 어떻게 가리켜 보이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에게 물(物)이 아니라고 말하겠다.”라고 답하였다.”5)
이로부터 마조(馬祖)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상당히 강조하여 설했으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도 설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즉심즉불’과 ‘비심비불’은 바로 ‘표전(表詮)’과 ‘차전(遮詮)’, 즉 긍정적인 표현과 부정적인 표현의 방법일 뿐으로 그 함의(含意)는 동일하다. ‘즉심즉불’은 바로 마음에 ‘즉’했을 때 불(佛)에 ‘즉’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실제로 반야사상(般若思想)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하겠다. 반야법(般若法)에서는 이른바 ‘중생즉불(衆生卽佛)’,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하는 진리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는 철저하게 ‘즉卽’의 관계임을 논증하고 있다.
특히 반야법(般若法)에서는 진리의 세계가 가치를 지닌다면 또한 세속의 세계도 그와 동등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호상관대(互相觀待)’를 제창한다. 축도생(竺道生355~434))은 불성(佛性)과 반야(般若)의 문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돈오(頓悟)’를 제창하였으며, 『단경』에서도 불성과 반야의 입장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제창하였고, 비록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사상적으로는 이미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마조(馬祖)의 ‘즉심즉불’ 역시 ‘돈오’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고, 『단경』의 선사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마조(馬祖)의 사법제자(嗣法弟子)는 『경덕전등록』 권6에 실린 ‘마조전’에 따르면, “입실제자가 139인으로 각 한 지방의 종주(宗主)가 되었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많은 마조의 사법제자들이 강서(江西)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를 홍주종(洪州宗)이라고 칭한다.
마조(馬祖)의 선사상은 선종사상사(禪宗思想史)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조의 선은 『단경(壇經)』을 계승하여 보다 직접적인 언구(言句)로 설시(說示)하는 점이라고 하겠다. 사실상 마조(馬祖)의 선사상은 상당히 광범위하고 또한 학인들을 제접(提接)하면서 다양한 기연어구(機緣語句)가 존재 하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사상만을 살펴보았다. <끝) [월간 고경)
* 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1) [宋]頥藏主集, 『古尊宿語錄』卷1, 「大鑑下一世」(卍續藏68, 3a-b), “汝學坐禪, 爲學坐佛; 若學坐禪, 禪非坐臥; 若學坐佛, 佛非定相. 於無住法, 不應取捨. 汝若坐佛, 卽是殺佛; 若執坐相, 非達其理.”
2)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b), “若坐不動是, 維摩詰不合呵舍利弗宴坐林中.”
3) 『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卍續藏69, 3a), “道不用修, 但莫汚染. 何爲汚染? 但有生死心, 造作趨向, 皆是汚染.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舍, 無斷常, 無凡無聖. 經云: 非凡夫行, 非聖賢行, 是菩薩行. 只如今行住坐臥, 應機接物, 盡是道.”
4) 『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卍續藏69, 2c), “僧問: 如何是脩道? 曰: 道不屬脩. 若言脩得, 脩成還壞, 卽同聲聞. 若言不脩, 卽同凡夫. …… 若是上根衆生, 忽爾遇善知識指示, 言下領會, 更不歷於階級地位, 頓悟本性.”
5) 『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卍續藏69, 4c), “僧問: 和尙爲甚麽說卽心卽佛? 祖曰: 爲止小兒啼. 曰: 啼止時如何? 師曰: 非心非佛. 曰: 除此二種人來, 如何指示?祖曰: 向伊道, 不是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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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일본선 이야기 – 다이구 료칸
[무일물(無一物)의 선사 다이구 료칸(大愚良寬)
원영상 원광대 교수
깨달음의 길을 제시한 여러 목우도(牧牛圖) 가운데는 보명(普明)선사와 곽암(廓庵)선사의 것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두 가지 중에 확연한 차이는 마지막 장에 제시된 쌍민(雙泯)과 입전수수(入廛垂手)일 것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주객(主客), 능소(能所)의 무차별 세계에 다다른 절대자유의 경지이며, 후자는 원효대사가 보여준 대자비의 보살행인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을 말한다. 현대에 와서는 보다 실질적인 대승행이 요구되고 있기도 하다. 근세 인물인 다이구 료칸[大愚良寬, 1758∼1831]의 경우, 무사정권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 하에서도 중생들과 동행하는 대오각성(大悟覺醒) 후의 입전수수(入廛垂手)를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근대불교의 길목을 터주고 있다.
료칸(良寬)은 풍요로운 집안을 떠나 평생을 탁발승으로 보냈다. 니이가타현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낮에 불을 켜도 쓸모없는 주행등(晝行燈)이라는 별명이 보여주듯이 세속에는 관심이 없었다. 18세 때 광조사(光照寺)에 출가하고, 22세 때 그곳에 들렀던 오카아먀현 원통사(圓通寺) 주지 다이닌 고쿠센[大忍國仙] 문하에 들어가 법명 료칸(良寬)을 받았다. 그리고 조동선(曹洞禪)의 가풍과 노동선(勞動禪) 중심의 수행이 12년 동안 이어졌다.
마침내 다이닌(大忍)으로부터 33세 때인 1790년에 인가를 받았다. “좋구나, 어리석음에 취했던 너는 하늘의 도(道)와 계합했구나. 등등임운(騰騰任運)하는 모습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내 법(法)을 잇게 됨을 네게 주는 때 묻은 등나무 지팡이로 증명하노라. 이르는 곳마다 집벽 사이에서 낮잠 자는 한가로움을 지니길 바라노라.” 인가(認可)와 함께 무소유(無所有), 무집착(無執着)의 도심(道心)으로 평생을 탁발(托鉢)하며 저자 거리로 나갈 것을 주문한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후 여러 지역을 행각하다가 39세부터 니이가타현의 동해안 쪽에 면해 있는 사찰인 국상산(國上山) 내 소박한 오합암(五合庵)과 오토고신사[乙子神社]에 머물기도 하고, 초암에 묵거나 일정한 거처 없이 열반 때까지 탁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오합암에는 이르니 아무것도 없다. 지붕이 무너져 있어 매달린 경쇠 같다. 문밖엔 오랜 삼나무가 서 있고, 벽에는 몇 개의 게(偈)가 써져 있다. 솥에는 오랜 먼지가 쌓여 있고, 시루에는 불 땐 흔적조차 없구나. 동쪽 마을 영감이 밝은 달 아래 문을 자주 두들길 뿐.”(『료칸도인 유고』,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역, 이하 같음)이라며 인적 끊긴 암자에 왔을 때를 읊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임을 토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생 입신(立身)에는 흥미가 없었노라. 주어진 모습대로 살아왔다. 주머니에는 쌀 세 되, 난로 옆엔 한 다발의 장작밖에 없다. 누구도 나에게 미오(迷悟)의 길을 묻지 않는다. 명리도 재산도 없다. 밤비 속 초암(草庵)에서 양다리를 한가로이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라며 소요유(逍遙遊)의 삶을 누렸다. 탁발(托鉢)은 무일물의 삶 그 자체였다. “오늘 탁발하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오래된 사당 속으로 비를 피했다. 웃을 수밖에. 두타대(頭陀袋-탁발 주머니) 하나와 바리때 하나밖에 가지지 않았는데. 시원한 내 삶, 파가(破家)의 바람이여.” 파가(破家)의 바람은 번뇌를 멸각(滅却)한 무소유의 삶을 말한다. “불을 땔 정도의 땔감으로 바람이 낙엽을 가져오는구나.”라고 읊은 것처럼 최소한의 의식주로 살아갔다.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능력도 갈고 닦았다. 이후 많은 시를 남겼다.
치올선痴兀禪
료칸(良寬)은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이들이 졸라대면 해가 떨어질 때까지 공을 차고 놀았다. “이 마을에 공놀이 하는 아이들과 노는 봄날은 지지 않아도 좋다.”라고 읊었다. 그는 “아이들의 순진한 마음이야말로 참된 부처의 마음”이라고 했다. 지체 높은 이들이 글을 써달라고 하면 거절하기도 했지만 아이들 부탁은 꼭 들어주었다.
한번은 아이들이 연(鳶)에 글을 써달라고 했다. ‘천상대풍天上大風’이라고 흔쾌히 써주었다. 불법(佛法)을 짊어진 정의롭고 자비로운 큰 인물들이 되기를 희망한 것이다. 어느 때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했는데, 밭에 들어가 숨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 아이들은 료칸(良寬)을 찾지 않고 집으로 갔다. 다음 날, 농부가 일하러 밭에 가보니 그가 누워 있어 놀랐다. 그러자 료칸은 “조용히!”라며 큰 소리를 내면 아이들에게 들킨다고 했다.
료칸(良寬)은 자신의 선(禪)을 치올선(痴兀禪)이라고 했다. 무일물의 본질인 무심無心·무착無着·무위無爲의 선이다. 그는 무상한 세상을 긍정하고, 조작 없는 기풍을 드날리며, 바보와 같은 천진무구의 수행을 축으로 삼았다. 서민이나 농부, 아이들과 함께하며 세간 삶이야말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다. 합종연횡, 이합집산하는 무자비한 힘의 시대에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이야말로 진리의 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의 법문(法門)은 고준(高峻)하고도 어려운 것이 아닌 민중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해졌다. 종조 도겐(道元)이 설한 본증묘수[本證妙修-깨달은 상태의 좌선], 현성공안[現成公案-실상(實相) 모두가 살아 있는 불도(佛道)]을 삶에서 구현하고자 한 것이 치올선(痴兀禪)이다. 다이닌이 주문한 것처럼 탁발은 자신을 한 없이 낮추는 것이다. 심신탈락(心身脫落)은 가장 낮은 것에 처한 것과 같다. 그럴 때, 물 긷고 나무하는 것 모두가 신통묘용(神通妙用)이 된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부처 아님이 없다. 그는 “극락 연꽃의 이파리를 내게 공양하는 그대가 신통(神通)”이라고 읊는다.
또한 헤맴과 깨달음, 재가와 출가, 남녀 등의 분별심을 놓았다. “남전(南泉)화상의 닳아빠진 송곳이 갑자기 날아와 나의 빈객(賓客)처럼 되었다. 눈물 젖은 입술이 피로 물들어 봄의 지주[池州-남전(南泉)이 살던 안휘성 내의 지명]를 진홍(眞紅)으로 물들였도다.” ‘남전참묘(南泉斬猫)’의 화두를 통해 고양이라는 번뇌와 사람들의 눈물 모두를 끊어 불국토를 나투었다는 것이다. 당두불범(當頭不犯-정면에서 부딪쳐도 흔들리지 않는 것), 방제불범(傍提不犯-옆에서 찔러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의 체(體)와 용(用)을 겸비한 본래면목의 자리를 세상사 속에서 구현해냈다.
“천봉(千峯) 속 하나의 띠집, 죽을 때까지 누더기를 입고 있다. 앉아 있으니 입에는 흰 곰팡이가 피고, 머리에는 먼지가 쌓여 있어 터는 것도 귀찮다. 옛날, 산새가 꽃을 머금고 와서 좌선하는 중에게 공양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없다. 마음이 경대(鏡臺)일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덧없는 세상의 움직임을 좇을 마음도 없어 바보라고 부르는 것을 즐기도다.” 범성(凡聖)을 초탈, 바보처럼 살고자 했다. 치올선(痴兀禪)은 철저히 금강(金剛)과 옥(玉)을 숨기되 세상에 빛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일도양단(一刀兩斷)
민중과 함께 한 그로서는 당연히 세상에 의지하며 사는 승가(僧伽)에 대한 비판도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머리를 깎고 승가(僧伽)에 들어와 먹을 것 걱정 없이 얼마간의 생명을 이어간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된 바에는 어떻게 바르게 살지 않을 수 있는가.”라며, 불심(佛心) 없는 재가(在家)들은 이해할 수 있지만, 출가(出家)의 길, 특히 머리 자른 것은 삼독심(三毒心)을 끊기 위함이며, 염의(染衣)는 일체의 상대심을 깨부순 것인데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직녀가 옷을 짓지 않으면 가족은 무엇을 입으며, 농부가 논밭을 경작하지 않으면 가족은 무엇을 먹을 수 있는가. 지금은 석가의 자손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해서 깨달은 것도 없다. 신도들의 보시(布施)를 그저 받고,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돌아보지도 않는다.”라며 신랄하게 나무란다. 백성들 앞에서 큰 소리로 설교하며 농민들을 속이고 있다. 정법(正法)을 만나기는 어렵다. 깊이 생각해 노력해야 하며 결코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경계하고 있다. 뼛속에 스미는 경책이다. 승가야말로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법화찬(法華讚)
민중을 향한 료칸(良寬)에겐 삶 전체가 구제(救濟)의 방편이었다. 아마도 무일물(無一物)의 선심(禪心)에서 솟아났겠지만, 특히 애독하던 『법화경』의 가르침도 한몫했을 것이다. 『법화경』을 중시한 도겐(道元)과 그 이후 조동종(曹洞宗)의 전통 때문이기도 하다. 료칸(良寬)은 「법화찬(法華讚)」을 하어(下語)로 남기고 있다. 하어(下語)는 주로 고칙(古則)이나 공안(公案) 글귀 아래 주석이나 촌평을 다는 것을 말한다. 촌철살인의 핵심을 찌르는 것으로 수행자가 터득한 살활자재(殺活自在)의 면목을 보이기도 한다.
먼저 개구(開口)에서 “입을 열면 법화를 비방하고, 입을 닫으면 법화를 비방한다. 법화 법화, 어떻게 찬할 것인가. 분향하고 합장하며 나무묘법화.”라고 설한다. 십여시(十如是)와 개시오입(開示悟入)의 도리를 밝힌 방편품에 대해서는 “성性(본질)·상相(현상)·체體(근거)·역力(동기)·작作(작용)·인因(내인)·연緣(외연)에 뛰어난 난국(蘭菊)의 향기 풍부한 가르침. 잘 생각해 보게나. 법화개연(法華開演)이 있던 날, 어느 부분이 지게미와 쌀겨가 있는가.”라고 하며 『법화경』의 완벽한 철학의 공덕을 극찬한다.
「비유품」에 대해서는 “옛날, 세 수레[三車]가 만약 진짜라면 지금의 일승(一乘)은 도대체 누구에게 설한 것인가. 월등하고 월등하다. 내년엔 보다 새로운 새순이 싱싱하게 나는 것은 필정(必定), 춘풍이 흔들어 대는 바람에 아직도 쉴 수는 없다.”라고 한다. 삼승(三乘)과 일승(一乘)을 뛰어넘은 그의 삶이 법풍(法風)에 실려 감을 읊고 있다. 「약초유품(藥草喩品)」은 어떤가. “비구름이 낮게 깔리고, 질풍 뇌우가 더해져 누구라도 기다릴 수 없는 절호의 계절풍이 온다. 법우(法雨)가 삼천대천세계 구석구석에 내려, 거목은 거목대로 잡초는 잡초대로 그들의 봄이 되는구나.” 제불조사(諸佛祖師)의 불법(佛法)이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어린이를 좋아하고 그들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일체가 된 그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에 가깝다. “아침에 일어나면 상대에게 절하고, 저녁에 자기 전엔 또한 상대에게 절하며 오직 타인에게 절하며 일생을 보냈구나. 나무귀명(南無歸命)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 천상천하에 오직 한 사람.” 실제로는 민중과 함께 한 자신과 다름이 없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일심으로 부르는 관세음 소리가 덮는 곳은 수면 위 부평초, 칠난삼독(七難三毒)의 업이 자신의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승리의 노래가 흘러내린다. “묘음(妙音) 관세음, 범음(梵音) 해조음. 일체 세속을 벗어난 소리, 세상에 드문 진실의 소리”라며 불가사의하고 신성한 관세음보살의 능력을 찬탄하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인 관세음의 손길이 비참한 백성의 삶 위로 퍼져 나가길 기원한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료칸(良寬)은 순간순간 불법(佛法)이 살아 있음을 노래한다. <탁발>에서 “8월 초하루, 탁발하러 마을로 들어간다. 백운(白雲)은 발걸음을 따라오고, 금풍(金風-금색의 가을바람)은 석장(錫杖)의 옥환(玉環)을 울린다.”라며 이 집 저 집을 다닌다. 술집도, 생선집도 다니며 지옥의 검산(劍山)도, 가마솥 탕(湯)도 보노라면 어느새 해가 오른다. “정반왕의 아들[석가]이 맛본 소식이며, 금색 수행승[마하가섭]이 계승한 수행이다. 그로부터 2천7백 년, 나도 그러한 석가의 자손으로 일의일발(一依一鉢)의 삶이 참으로 맘에 든다. 돌이켜보니 유마(維摩) 노인이 말한 것이다. ‘평등하게 밥을 얻은 것은 법도 또한 그러하다.’라고. 바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리. 누가 당나귀 해(驢年, 있을 수 없는 일)까지 데굴데굴 있을 건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불법(佛法)이 춤을 추는 때다. 그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대매법상(大梅法常)은 죽을 때까지 ‘즉심즉불(卽心卽佛)’ 일구(一句)로 만족하고, 영남의 오랑캐 혜능(慧能)은 도를 판별한다는 말도 없이 특별 가사(袈裟)를 받았다고 한다. 제구실하는 자라면 크게 분발해야 한다. 불면 사방으로 날아가는 꾸정모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종조 도겐(道元)이 『학도용심집(學道用心集)』에서 “명리를 멀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보감(寶鑑)으로 삼았다. 명리는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료칸(良寬)은 말년에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지는 벚꽃”, “안을 보이고, 겉을 보이고 사라지는 단풍”이라고 읊었다. 그리고 “유물로써 무엇을 남기겠는가. 봄은 꽃, 여름은 두견, 가을은 단풍잎.”이라며 사세(辭世)의 시(詩)를 남겼다. 밤중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 몸을 조금 비켜서 이불을 훔치기 쉽게 했던 료칸(良寬). 그는 무일물(無一物)에서 왔다가 무일물(無一物)로 간 수행자였다. 자본주의가 횡행하여 비대해진 자아가 자신의 꼬리를 무는 시절, 그가 더욱 그립다. <끝> [월간 고경]
* 원영상교수 원불교 교무, 법명 익선. 일본 교토 불교대학 석사, 문학박사. 한국불교학회 전부회장, 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일본어교육과 조교수.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佛教大学国際学術研究叢書: 仏教と社会』(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등이 있다. 현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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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 이야기 – 태고보우
[태고보우(太古普愚)에 의한 임제종(臨濟宗)의 법맥 계승]
김방룡 교수 충남대학교 철학과
태고보우(太古普愚)는 가지산문 출신의 선승(禪僧)이지만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하였고,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원(元)나라로 들어가 임제종의 명안종사(明眼宗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으로부터 인가를 받고서 귀국하였는데, 그 시기는 1348년(충목왕 4)으로 그의 나이 48세 때이다. 이때부터 그가 열반에 든 1382년(우왕 8년)까지 34년 간의 시기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입전수수기(入廛垂手期)라 할 수 있다. ‘선사(禪師)’로서의 태고(太古)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 시기이다.
귀국 후 입전수수(入廛垂手) 과정
태고(太古)가 귀국한 1348년은 충목왕 4년이었는데, 이듬해인 1349년에 충정왕이 즉위하여 1351년까지 3년을 재위하게 된다. 두 왕 모두 어린 국왕이었고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것은 원(元) 조정과 외척 세력이었다. 권문세족에 의하여 토지 겸병이 심화되었고 빈농층은 확산되었으며 민생은 파탄되었다. 사찰은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고 불교 교단은 세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태고(太古)가 지향한 삶은 현실 정치를 떠나 청빈낙도(淸貧樂道)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임제종의 대표적 승려였던 석옥청공이나 고봉원묘의 삶의 태도와도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남송 대 대혜종고가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것과는 결이 다른데, 원대 한족(漢族)이 처한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 태고는 삼각산 중흥사에 머물다가 용문산 북쪽 기슭에 소설암(小雪庵)을 짓고서 은거하게 된다. 이때 지은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보면 태고의 선(禪)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다.
대원천자성중성 (大元天子聖中聖) 원나라 천자는 성인 중의 성인이라
사거암곡소일월 (賜居岩谷消日月) 이 바위 골에 살며 세월을 보내게 하니
무인공아산중락 (無人共我山中樂) 산중의 이 즐거움 함께할 이 아무도 없네
오독련오소전졸 (吾獨憐吾踈轉拙) 내 홀로 나의 성글고 졸렬함 좋아하니
영동수석장자락 (寧同水石長自樂) 물과 바위와 함께 스스로 길이 즐길지언정
불여세인지차락 (不與世人知此樂) 세상 사람과 이 즐거움 나누지 않으리라.
(중략)
군간태고차중락 (君看太古此中樂) 그대 보게나. 태고암의 이 즐거움
두타취무광풍생만학(頭陀醉舞狂風生萬壑) 두타가 취해 춤추매 광풍이 온 골짜기에
일어나니
자락부지시서천 (自樂不知時序遷) 스스로 즐거워 계절이 가는 줄도 알지 못하고
단간암화개우락 (但看嵓花開又落) 다만 바위 꽃 피고 지는 것 볼 뿐이네1)
1352년에 드디어 공민왕이 즉위하게 된다. 태자 시절 연경(燕京)에서 “내가 장차 고려로 돌아가 정치를 맡게 되면 스님[太古]을 스승으로 모시리라.”라고 한 약속을 공민왕은 잊지 않았다. 즉위하자마자 공민왕은 태고(太古)에게 설법을 청하고 경룡사(敬龍寺)에 머물게 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에는 봉은사(奉恩寺)에서 개당설법을 하게 하고서 태고(太古)를 왕사(王師)로 삼는다. 이어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이의 주관을 태고(太古)에게 맡긴다.
왕사(王師)에 책봉된 다음 공민왕이 ‘위국(爲國)의 방도’를 물었을 때, 태고는 “다만 그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요 다스림의 근원이니,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릴 것”을 당부하였다. 여기에 이어 몇 가지 정책들을 논하는 가운데 태고는 불교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하나로 통일시킬 것과 백장청규(百丈淸規)의 도입 및 오교(五敎)를 홍포할 것을 건의하였다.
아울러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것도 건의하였다. 이를 통해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대하여 태고(太古)가 크게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고가 원융부의 일에 관여한 것은 1년 남짓이다. 이후 1363년에는 양산사(陽山寺-희양산 봉암사)의 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기도 하고, 가지사(迦智寺-장흥 보림사)의 주지가 되어 선풍을 크게 떨쳤다.
신돈(辛旽)의 등장과 태고(太古)의 말년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리고 1365년(공민왕 14)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공민왕은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신돈(辛旽-1323~1371)이다. 신돈은 공민왕의 사부(師傅)가 되어 1365년(공민왕 15)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와 감찰사판사(監察司判事) 및 서운관판사(書雲觀判事)를 겸직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보급하고 양인(良人)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석방시켰으며, 성균관을 중건(重建)하고 공자를 국사(國師)로 격상시키는 개혁 정책을 전개하였다.
태고(太古)는 공민왕에게 신돈(辛旽)을 멀리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결국 태고는 1366년 왕사를 사직하고 도솔산으로 들어갔다. 1368년(공민왕 18)에는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주석하면서 원나라로 가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신돈의 모함으로 금고형을 받고 속리산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듬해 금고형에서 풀려나 소설암으로 돌아오게 된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辛旽)이 처형되고 나서야 태고(太古)는 국사(國師)에 봉해지게 된다. 1374년 공민왕 또한 44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어 우왕이 즉위하게 된다. 말년에 태고는 양산사(희양 봉암사)와 밀양의 영원사(塋原寺) 그리고 소설암 등에 머물렀다.
1382년(우왕 8년) 12월 24일, 소설암에서 열반에 들었는데, 이때 남긴 임종게(臨終偈)는 다음과 같다.
인생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공허한 것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을 꿈속에서 지나갔네 八十餘年春夢中
임종의 오늘에 이 몸을 버리니 臨終如今放皮垈
둥근 해가 서봉에 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듬해 1월에 다비를 하였는데, 사리(舍利)가 수없이 출현하였다고 전한다. 우왕은 시호를 ‘원증(圓證)’이라 하였다. 태고(太古)에게는 수많은 문도(門徒)가 있다. 태고암비(太古庵碑)의 음기(陰記)에는 국사·대선사·선사를 위시하여 출가 사문의 문도가 천여 명이라 하였고, 최영·이성계를 비롯한 관계(官界)의 사람들도 문도로 기재되어 있다.
태고(太古) 선사상의 특징과 의의
종범스님은 「태고보우의 선풍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태고에 대한 관심이 법통설·종조설로 계속된다면, 태고에 대한 이해를 태고 자체 속에서 하지 않고 태고의 외적인 데에서만 찾는 모순이 있다.”2) 라고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벌써 30년 전에 한 말씀이지만 다시금 무겁게 다가온다.
“선사(禪師)로서의 태고의 진면목은 어디에 담겨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면, 그에 대한 해답은 「태고암가(太古庵歌)」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태고(太古)가 석옥(石屋)을 찾아가 인가를 받을 때 제시했던 것이 바로 ‘태고암가’이고, 자신의 호가 ‘태고(太古)’란 점에서도 그 같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태고암가」를 다시금 읽어보라, 거기에는 영가현각의 『증도가證道歌』와도 같이 초불월조(超佛越祖)의 본분사의 경지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 일부를 음미하여 보자.
<태고암가(太古庵歌)>
그대는 보는가 군불견 君不見
태고암 중의 태고 일을 태고암중태고사 太古庵中太古事
지금까지 분명하고 역력하여 지저여금명력력 只這如今明歷歷
백천삼매 그 속에 있어 백천삼매재기중 百千三昧在其中
때로는 중생을 이끌되 항상 적적하네 이물응록상적적 利物應錄常寂寂
이 암자는 노승만 머물지 않고 차암비단노승거 此菴非但老僧居
무수한 불조가 같은 풍격일세 진사불조동풍격 塵沙佛祖同風格
그대는 의심마라! 이 결정성을 결정설혜군막의 決定說君兮莫疑
지혜와 상식으로 알기 어려워 지역난지식막측 智亦難知識莫測
회광반조해도 오히려 망망하고 회광반조상망망 回光返照尙茫茫
바로 알아도 자취에 걸리네. 직하승당유체적 直下承當猶滯跡
뭐라고 물어도 크게 어긋났고 진문여하환대착 進問如何還大錯
여여부동해서 돌과 다를 바 없네.3) 여여부동여완석 如如不動如頑石
태고의 법맥(法脈)에 대해 ‘고려 가지산문의 법맥을 계승하였다는 입장과 임제와 석옥의 법맥을 계승하였다’라는 두 가지 입장이 공존한다. 태고가 분명 석옥(石屋)으로부터 인가를 받아오긴 하였지만, 귀국 이후 34년 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임제·석옥의 선풍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태고(太古)의 독자적인 선풍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태고의 선사상은 본분의 조사선풍(祖師禪風)과 간화선(看話禪) 수행에 중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염불선과 화엄선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범은 태고의 선사상의 특징에 대해 ‘① 초불월조(超佛越祖)의 본분선, ② 성성역력(惺惺歷歷)의 간화선, ③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염불선, ④ 잡화삼매(雜華三昧)의 화엄선, ⑤ 호법교화(護法敎化)의 원력선, ⑥ 보은우세(報恩憂世)의 동사선(同事禪)’ 등 여섯 가지로 밝힌 바 있다. 그의 시호가 ‘원증(圓證)’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태고는 선(禪)과 교(敎) 그리고 염불(念佛)을 원융(圓融)을 이념적으로 제시하였고 또 그 이념을 현실화하고자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태고보우(太古普愚)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中興祖)이자, 한국불교태고종의 종조(宗祖)라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고의 선사상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끝> [월간 고경]
* 김방룡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전북대 철학과 학부, 석사 졸업, 원광대 박사 졸업. 중국 북경대, 절강대, 연변대 방문학자. 한국선학회장과 보조사상연구원장 역임. 『보조지눌의 사상과 영향』, 『언어, 진실을 전달하는가 왜곡하는가』(공저)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1) 『태고화상어록』, 한국불교전서 6책, 684a-b.
2) 종범(서정문), 「太古普愚의 禪風에 관한 연구」, 『논문집』 3, 중앙승가대학, 1994, 7.
3) 『태고화상어록』, 한국불교전서 6책, 682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