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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이론
1. 프랑크푸르트학파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세기 독일의 민주주의 발산지이며 한때 자유도시의 성격을 강력히 지녔던 프랑크푸르트의 시민들이 정부의 재정지원 없이 1914년에 세운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부설된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연구소는 1923년에 창설되었으며 나치정권이 들어선 그 이듬해인 1934년에 스위스, 프랑스를 거쳐 뉴욕으로 건너가서 컬럼비아 대학의 부설기관이 되었다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옮겨왔다. 초기에는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1895~1973), 아도르노(T. W. Adorno, 1903~1969), 마르쿠제(H. Marcuse, 1892~1979) 등이 주축이 되어 연구 활동을 하다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1950년에 프랑크푸르트대학으로 돌아와 다시 사회연구소를 재건했고, 마르쿠제는 미국대학에 남아 1960년대 사상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문화와 그 이데올로기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 존재피제약성(存在皮制約性)을 파헤치며 새로운 사회의 기능을 가능성을 모색하고 처방한다. 종래의 학문이 존재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지 못했다는데서 비판이론은 사실의 기술보다는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에 역점을 둔다. 비판이론은 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심리학 등의 여러 분야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이고 사회이론을 접근함으로써 일종의 종합접근법을 시도하였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복합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전체성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또한 인간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보아야지 초시간적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사는 시대의 진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계몽의 이념에 기초한 근대화의 과업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도구적 합리성 비판이 보여주는 것처럼 새로운 억압세계 속에 인간을 감금함으로써, 진보와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보를 초래하였으며 자유의 실현 대신에 비인격적인 경제적 힘의 지배, 관료적으로 조직된 행정의 지배를 야기했을 뿐이다. 계몽과 근대화의 성과에 대해서 많은 사상가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다른 대안 없이 체념적으로 방관하는 자세를 취해왔다.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한 막스 베버나 아도르노 그리고 푸코의 경우 이들의 문제제기는 좋았지만 결론이 없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선배들의 체념적이고 회의적인 결론에 대항해서 하버마스는 하나의 새로운 이성적, 합리적 대안을 제공한다. 인간의 본성은 이성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버마스의 사상은 근대화의 숱한 부작용과 모순을 고발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치유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새 희망을 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이성, 계몽, 합리성 등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본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합리성이나 계몽은 전부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 일부가 타락했다고 본다. 즉 도구적 이성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이성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의 제자리를 잡아주고 상대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위해 하버마스는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분리 및 상호보완을 주장한다. 막스 베버나 아도르노 그리고 푸코 등의 잘못은 본래 포괄적인 합리성의 개념을 오직 도구적 합리성으로만 본 점이다.
2. 의사소통 행위이론
1981년에 출간된 하버마스의 주저인《의사소통행위이론》은 전문적인 학자들에게도 어렵기로 소문난 책이다. 그것은 하버마스 사상의 복잡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하버마스의 이 책이 단순히 전통적인 철학의 학설들뿐만 아니라 베버, 파슨스, 미드 등의 방대한 사회학 이론들을 함께 아우르고 종합하며 나름의 체계 안에 녹여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학문적 훈련을 받지 못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두 권으로 된 이 책의 주요 개념들과 논지는 무조건 난해하기만 한 것은 아니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그것들에 대한 이해가 얼마간은 필요할 것처럼 보인다.
의사소통행위는 사람들 상호간의 언어적 이해와 관련된 행위다. 이런 행위는 어떤 특정한 목적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는 ①목적론적 행위나 사회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규범을 따르는 ②규범적 행위나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표현하여 드러내는 ③연출적 행위 등과는 구분된다.1) 다른 행위들에서도 언어가 사용되지만 그 경우 언어를 통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이해는 다른 목적이나 기능에 비추어 부차적이지만, 의사소통행위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상호이해, 이해도달이 그 목적이다. 이와 같은 행위들은 언어적 상호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언어의 다른 기능들 즉 어떤 목표의 달성, 도덕적 설득, 반가워하는 마음의 표현 등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적 상호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다른 행위들은 의사소통행위의 다양한 계기들의 한 측면만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킨 행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사소통행위는 우리 인간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행위들의 포괄적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의 언어적 상호이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러한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은 (1)다른 사람들이 자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해가능하게 말을 해야 할 것이고(이해가능성), (2)‘나는 너에게 진짜인 무엇인가를 알려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을 하거나(진리성), (3)‘나는 너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올바른 규범들과 가치들에 맞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거나(규범적 정당성), 나아가 (4)‘나는 네가 믿을 수 있게끔 진정한 마음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설득하거나(진실성 또는 진정성) 해야 한다. 그리고 대화자는 위의 4가지 타당성 주장의 기준에 합당한 언어 행위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타당성 주장에 비판을 허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사소통 합리성이 성립될 수 있다. 특히 하버마스는 진리성 주장과 정당성 주장을 강조하였는데 전자에 대해서는 그것이 비판을 받을 때 적절한 증거를 제시하여 그 주장의 근거를 확립할 수 있어야 하고, 후자에 대한 비판을 받을 때에는 주어진 상황에서 그의 주장을 타당한 기대에 비추어 해명함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각각 합리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는 사람이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이런 전제들은 특히 뒤의 세 전제들은 물론 단순한 주장들뿐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사기꾼이 참을 말한다면서 거짓말을 하듯이 말하는 사람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전제들(진리를 말한다, 올바른 일을 알려준다, 나의 진심이다 등)은 사실은 거짓이거나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따라서 말하는 사람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 주장들(하버마스는 이 주장들을 ‘타당성 주장들’이라고 이름 붙인다)은 말을 듣는 사람들이 그 주장들을 인정할 때에만 실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단지 그런 상대방의 인정 위에서만 사람들 상호간의 동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말을 듣는 사람들도 어떤 말하는 사람의 주장들에 대해 ‘정말이니?’,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데?’ 하는 식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고,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마찬가지의 타당성주장들을, 말하는 사람과 똑 같은 권리를 가지고, 제기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언어적 상호이해의 과정도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들을 다른 사람의 인정 가능성에 비추어 상대화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도 전제하지도 않는 언어행위는 비정상적인 독백이거나 강요일 뿐일 것이다.
3. 의사소통적 이성
하버마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성적’이라거나 ‘합리적’이라거나 말할 때 그것은 바로 그와 같은 타당성주장들의 제기와 수용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어떤 정신병자에게는 ‘나는 너에게 참을 말하고 있다’는 식의 타당성주장을 제기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타당성주장을 제기할 때 나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 나의 주장을 검토하고 수용하거나 비슷한 타당성주장을 제기하면서 나의 주장을 거부할 것이라고 가정해야만 한다. 남에게 사기를 치더라도 ‘나는 너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남이 믿어야만 가능하다. 언제나 서로가 거짓말을 말한다고 믿는 상대끼리 상호이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는 타당성주장들을 제기하면서 상대가 이성적이라고 전제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전제할 때에만 나도 이성적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일상적 의사소통에서 그런 식의 강제 없는 의사소통에 참가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경험적 맥락에서만 보면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갈등과 의견 불일치 등을 물리적인 싸움이나 어떤 전략적 행위들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에게는 그러한 경험적 사실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의 논점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의사소통의 불일치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건 간에 그가 문제 삼고 있는 보편적 타당성주장들은 인간의 언어 구조 그 자체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문제되는 상황이 일상적 의사소통이건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담화이건 아니면 그 어떤 실천적 담화이건 간에 <가능한 의사소통의 일반적 구조> 안에는 <언제나 이미> 그와 같은 타당성주장들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타당성주장들 안에는 부드럽지만 완고한, 비록 좀처럼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한 결코 침묵하지도 않는 이성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강의에서 살펴 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두 철학자는 현대 사회의 도구적 이성의 폐해를 비판했지만, 거기에서 도대체 그 비판의 근거가 무엇인지 왜 우리가 그런 비판을 해야 하는지는 불분명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인간에게 타당할 의사소통적 이성은 바로 그것에 비추어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회를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해준다. 의사소통적 이성 또는 합리성이 얼마나 제대로 체계적으로 발휘되고 보장되느냐가 그 잣대다. 그 잣대는 한 사람의 고독한 주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평가하는 그런 잣대가 아니라,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함께 서로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만 성립 가능한 그런 잣대다. 이런 의사소통 주체들의 상호 인정과 그에서 비롯하는 화해와 자유의 이념은 아직도 그런 이념에 비추어볼 때 너무도 많은 왜곡과 억압과 모순들을 안고 있는 현실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4. 체계와 생활세계
사회의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어 행위를 통해 매개되는 사회성원들의 일상적 실천이다. 그러나 그 동안의 대부분의 사회이론들은 그와 같은 사람들의 언어적 실천이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지 못하고, 의사소통행위의 한 극단적 측면인 목적론적 행위와 그에 기초한 ‘도구적 이성’의 결과만을 중심에 두고 사회를 이해하려 해 왔다. 그래서 어떤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가 하는 것이 사회 진보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라는 듯이 여겼다. <계몽의 변증법>도 결국 그런 관점에서만 문제를 바라보고 우리 현대 사회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적 현실이 언어적 의사소통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있는 한, 그런 의사소통에 잠재된 이성적, 합리적 잠재력, 곧 의사소통적 이성이 얼마나 제대로 전개되고 발휘되는가 하는 관점에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평가하는 그런 시도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 의사소통적 행위의 차원에서의 합리화는 도덕적-실천적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의 극복,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확대로 이해된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의 의사소통적 실천은 어떤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일정한 문화적 맥락과 지평과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만 진행된다. 하버마스는 바로 그런 일상적 삶의 실천에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원천으로 기능하는 문화적 맥락과 지평과 배경을 ‘생활세계’라고 개념화한다. 생활세계는 인간의 모든 의사소통의 과정에 ‘항상 이미’ 처음부터 전제되어 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바로 바로 이 생활세계의 모습과 관련이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 생활세계의 상징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문화적 경험지평은, 바로 그러한 의사소통 전제들의 작용 덕분에, 역사발전의 과정에서 그 안에 있는 규범적 잠재력이 점점 더 커져 가게 되는 어떤 발전논리를 전개시킨다. 그가 “생활세계의 합리화”라고 부르는 이 발전논리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그 생활세계의 사회문화적 의미연관이 무반성적으로 전승되어 온 전통적 요소들에서 점차 해방되어 그 의미연관이 사회성원들 자신들의 합리적인 조정의 대상이 되는 과정의 논리를 말한다. 그러니까 사회적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행위의 맥락과 원천으로 삼고 있는 그 생활세계를 단순히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이나 관습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 ‘스스로가’ “예/ 아니오”의 태도를 가지고 참여하는 해석과정을 통해 반성해 보고 비판적, 합리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과정의 논리다. 물론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의사소통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상호이해를 위한 실천이다. 바로 이 실천을 통해 언어행위를 통해 매개되는 생활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규범적 잠재력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의 발전과정을 평가하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많은 사회이론가들이 주목해 온 ‘도구적 이성’의 측면이다. 사회의 발전은 그런 도구적 이성의 기술적, 기능적 합리성이 점차 증대해 온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우리의 기술 발전, 경제 관계의 발전, 행정 조직의 발전 등은 모두 그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버마스는 그런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기 위해, 파슨스(T. Parsons)에서 출발하고 루만(N. Luhman)과 같은 사회학자에 의해 발전된 ‘체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체계는 말하자면 어떤 자동기계처럼 작동하는 사회의 계기들을 말한다. 경제는 ‘화폐’의 논리에 의해 거의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사회의 정치적 관리 메커니즘, 곧 행정도 ‘권력’에 기초한 법적 장치들에 의해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거의 자동적인 메커니즘이다. 사회는 생활세계인 동시에 체계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서로 차원을 달리하는 두 수준의 합리화과정으로서 인류의 자기발전과정을 바라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의 진화는 이와 같이 화폐와 권력과 같은 비언어적 매체들에 의해 조정되는 <체계>와 의사소통이 언어에 의해 매개되는 <생활세계>의 분화과정이다. 사회의 진화는 체계가 복잡성을 증대시키고 생활세계는 합리성을 성장시키는 동시적인 분화과정이다. 한 편으로 체계는 생활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 경제와 행정이라는 독립적인 하위체계를 형성시킨다. 다른 한 편으로 체계와 생활세계의 각각의 차원 안에서도 분화과정이 진행된다. 그리하여 체계는 체계 복잡성을 더 높은 수준으로 증가시키며 사회의 자기조절능력을 강화시켜가고 생활세계는 점점 더 합리화되어간다. 현대사회는 그와 같은 분화의 정점에 있다. 현대사회는 이와 같은 합리성구조의 분화과정을 전제로 해서만 제대로 이해된다.
5. 생활세계의 식민화
이런 인식에 기초해서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의 근본 문제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부정적 현상들은 생활세계의 합리화나 체계의 점증하는 복잡성의 탓이 아니라 체계의 논리가 생활세계의 영역에 침범하여 일어난 <생활세계의 식민화>의 결과로 이해된다. 체계의 발전과정은 처음에는 생활세계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둔 채로 시작했다. 그러나 체계분화의 과정에서 체계연관들이 하위체계로 자립화하면서 생활세계에 도전을 제기하게 된다. 그와 같은 연관들은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성이라는 제2의 자연으로 응고되어, 객관세계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기만의 독자적인 발전 논리를 따르려 한다. 다시 말해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체계적 합리화와 분화의 전제조건이자 출발점이었지만, 체계가 생활세계에 구현된 규범적 내용에 맞서 점차 자동적으로 되어 결국 체계의 명령이 생활세계를 도구화하고 위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폐’와 ‘권력’은 현대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어 발전해 온 현대 사회에서 고유한 발전 동학을 따르는 경제 체계의 압도적 힘은 사회의 모든 삶의 영역을 오로지 경제적 가치의 언어로만 규정하고 재단하려 한다. 이와 더불어 정치는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을 보호하고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그 역시 법제화와 관료화의 고유 논리에 복종되어 자기만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다. 경제의 논리는 결코 돈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는 사회적 가치들을 매수하려 하고 정치의 논리는 사회 성원들에게 권력에 대한 일방적인 순응을 조작하고 강제하려 한다. 화폐의 논리와 권력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반민주적이다. 하버마스는 행정과 경제의 논리가 그처럼 우리의 일상적 생활세계에 침투하여 그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식민화”하려는 데 현대 사회의 대부분의 사회 병리적 현상들의 뿌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런 과정이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진행된 실제적인 역사적 결과이기는 해도, 그것은 불가피한 필연적 과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체계와 생활세계가 서로 보족적인 만큼 그 양자가 관계 맺는 방식은 그 양자를 매개하는 제도들이 어떤 식으로 역할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진행된 서구사회의 합리화과정은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에서와 같이 <합리화의 역설>(곧, 계몽의 변증법)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구 사회의 합리화가 보여준 <선택적 유형>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 실현된 합리화의 길은 다양하게 가능한 여러 길들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라서 또한 다른 가능성도 남아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근대사회의 제도들 속에 이미 구현되어 있는 규범적 구조들을 손상시킴 없이 체계합리화의 과정들이 생활세계의 통제 아래 놓이게 해서 체계의 유지가 생활세계의 규범적 제한에 종속되도록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의사소통행위의 과정 그 자체가 행위의 갈등을 규제하고 조정하는 점 점 더 결정적인 메커니즘이 되고, 생활세계의 재생산이 돈과 권력이라는 매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들의 의사소통적 행위 그 자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런 사회의 이념이다. 그것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제도화 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런 사회 지형에서 생활세계로부터 오는 민주주의적 요구는 말하자면 두 방향에서 오는 협공을 받으면서 포위당해 있다. 우리는 물론 한 편으로는 그런 화폐와 권력의 논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통합의 차원들의 고유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시장의 고유 동학을 무시하고자 했던 소련 식 사회주의의 실패의 경험은 그러한 무시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런 차원들의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사회의 민주적 통합을 위해서는 절실한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제 바로 생활세계에서 발원하는 민주주의적 요구와 잠재력을 키우고 응축시켜 경제와 행정이라는 두 하부 체계의 월권을 제한하고 포위망을 뚫어 사회통합의 민주적 균형을 세우는 것이 사회 진보의 관건이다.
물론 적은 막강하다. 그러나 이런 민주주의의 전망이 반드시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의사소통적 권력의 저수지인 이 생활세계에서는 사회의 통합을 위한 전혀 다른 논리가 지배한다. 여기서는 사회성원들의 삶의 양식과 관련하여 사회통합적인 규범과 가치와 사회의 의미연관을 의사소통을 통해 산출해 내는 바로 그러한 차원이 문제가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화폐와 권력은 ‘연대성’이라는 생활세계의 이 자원을 완전히 매수할 수도 남김없이 강제할 수도 없다. 생활세계는 그 사회통합의 기능을 아무런 고통 없이 그리고 아무런 저항 없이 포기해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활세계의 민주적 잠재력은 우선은 단지 혼란스럽기만 하고 사회의 공식적인 권력관계의 문지방 아래에만 자리를 잡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경제와 국가의 두 하부 체계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완강한 고유 논리를 갖고 있는 생활세계는 그 곳에서 경험되는 고통과 아픔을 공론장을 통해 표현하고 호소하기도 하고 시민 사회적 사회운동의 형식으로 정치적 저항을 조직해 낼 수 있다. 적어도 위기의 순간에는 늘 그렇다. 이제 반대 방향의 포위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포위의 무기는 얼핏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무기는 생활세계의 저수지에서 길러내어진 사회 성원들 사이의 평등한 상호인정과 존중, 민주주의적 참여, 사회적 불의의 제거, 인권의 보호 등에 대한 규범적 언어로 쓰인 요구들이다. 그러나 그 요구들은 행정 권력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법치국가적 정당성 확보를 포기하지 못하는 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요구들이다. 물론 생활세계의 민주적 요구는 스스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군림할 의도도 또 그럴 힘도 없다. 그러나 그런 자기절제 속에서도 그 요구는 사회의 작동 방향을 좀 더 많이 자신의 관점에 의해 조절하도록 이끌어 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1) ①의 예 다른 사람에게 상품을 팔기 위해 상품을 선전하는 행위, ②의 예 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며 설득하는 행위, ③의 예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행위 등등
<참고문헌>
1.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장춘익 옮김,《의사소통행위이론1,2》, 나남출판, 2006.
2. 한전숙 ‧ 차인석 저,《현대의 철학1》, 서울대학교출판부, 1993.
3. 남경태 저,《한눈에 읽는 현대철학》, 광개토, 2001.
4. 리처드 커니 저,《현대유럽철학의 흐름》, 한울, 2002.
5. 유병렬 저,《도덕교육론》, 양서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