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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지 않고 떠난 빈 집은 곧 거미줄이 처지고, 벽에 금이 가고 벌레들이 들끓는 흉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영혼이 떠난 몸은 가족들 조차 만지기 두렵고, 옆에 두기도 싫은 차디찬 시체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한 때 성령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성령이 떠나가고 혼자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에게서 성령이 떠나자 악신이 들어 제 정신이 아닙니다(삼상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그래서 그는 충신이요,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삼상18:6-11,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질투의 화신이 된 '사울' 왕에게 이처럼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다윗'은 부인인 '미갈'의 도움으로 성을 빠져 나와 '사무엘'이 살고 있는 "라마나욧"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라마"는 당시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자 그의 활동 중심지인 곳입니다. 그리고 "나욧"은 '사무엘'이 그의 주변에 모여드는 제자들을 수용하고 교육(기도와 말씀으로)키 위해서 세운 선지학교 기숙사이자 신앙훈련소였습니다. 그러기에 "라마나욧"은 신앙공동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바로 오늘날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1. "라마나욧"은 안전한 피난처였습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삼상19:18)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사무엘'이 있는 "라마나욧"으로 도망간 이유는,
1) 우선 '사울'의 살해 음모로부터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며,
2) 앞으로 자신이 취해야 될 처신에 대해 선지자의 자문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사울'이 적어도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존중하여, 거기까지 자신을 죽이러 사람을 보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라마나욧"으로 도망하여 갔다고 하는 보고를 듣고 '다윗'을 잡아오기 위해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군사들이 "라마나욧"에만 오기만 하면 번번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예언하며 다윗을 잡아오지를 못합니다.
삼상19: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갑자기 임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에 '사울'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라마나욧"에 왔지만 "라마"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도 역시 성령에 사로잡혀 예언하고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로 종일 드러누웠다가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마나욧"에 거하고 있는 '다윗'을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심으로 인하여 도저히 '다윗'을 해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세상은 험하고 위험이 많고 그래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입니다. 지진과 해일과 태풍 그리고 전쟁과 테러와 난리와 혼란과 소요와 질병과 사건과 사고로 인한 죽음의 소식이 끊임없이 들여오는 곳입니다(페루에서 연락이 두절됐다 나흘만에 발견된 실종 헬기 탑승자 14명의 시신이 10(2012년 6월)일에 모두 수습됐습니다. 페루 당국은 이날 오전 사고 헬기 잔해가 발견된 지역에 산악구조 전문인력 20명과 경찰과 군인 등 총 50명을 투입해 수색을 벌여 한국인 8명 등 탑승자 14명의 시신을 모두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촌에 어디에 안전한 곳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는 주 예수그리스도 안입니다.
시편18:1-3,“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편46:1-3,“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요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데일 킷츠만" 선교사에 의해 밝혀진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실입니다. 한 50년 전에 중국에서 일어난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중국 정부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였습니다. 한 넓은 협동농장에 연립으로 주택을 지은 주택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목조주택 한 곳이 불이 붙었습니다. 마침 빠르게 부는 바람에 불이 신속하게 번져 나갔습니다. 즉시로 온 마을이 화염이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온 마을이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화재의 현장에 기적이 일어낫습니다. 마을 중앙에 오직 한 채의 집이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마을중앙의 집이였고 모두가 불에 탄 집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도 화염은 그 집을 태우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에 몰려와서 그 집 주인을 불렀습니다. 그 집주인은 왕씨였습니다. 군중들이 왕씨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 집은 불에 타지 않았소? 왕씨는 대답 하였습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습니다. 이윽고 왕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나는 우리 정부가 금지하는 예수를 믿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단지 대답 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나도 예수를 믿어야지".
찬송가388장(구441장)
♬1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주소서
풍파 지나가도록 나 숨겨주시고 안식 얻는 곳으로 주여 인도하소서
2 나의 영혼 피할 데 예수밖에 없으니 혼자 있게 마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구주 의지하옵고 도와주심 비오니 할 수 없는 죄인을 주여 보호하소서♬
나의 영혼, 우리가정, 내 앞날, 건강, 생명, 재산을 피할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 늘 많은 사람들은 피할 곳을 찾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피난처를 찾다가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에게로 나와 피난처를 삼을 때 승리 할 줄로 믿습니다.
2.라마나욧은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윗'은 주의 종 '사무엘'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낫낫이 다 고하였습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19:1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마음 깊이 억울하고 원통한 사연을 주의 종 '사무엘'에게 모두 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마음이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인의 독특한 정서로 "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은 인간으로서 존중과 보살핌, 사랑과 정을 받지 못하고 학대를 당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삼키므로 일종의 정서적 암이 된 것입니다. 억압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생기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들이 어우러져 생기는 이러한 감정의 암 덩어리를 그대로 두면 자신과 이웃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생을 저주하고 자주 무력감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정서적인 블랙홀이 되어 우리에게 오는 축복과 행복, 위로와 기쁨을 다 빼앗아 가고 정상적인 감정과 의지를 송두리째 잡아 먹어버립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 환난과 고통 중에 "한"이 생길만 하였지만 치유와 회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라마나욧"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광야에서 피가 마르는 도피생활 중에도 정신 분열증이나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던 것은 "라마나욧"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마나욧"에서 성령의 강한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고 심령이 새로워 졌을 뿐 아니라, 주의 종과 상담하여 마음의 아픔을 풀고 내적치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신령한 "라마나욧"인 교회에 와서 사랑의 주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기만 하면 사랑의 주님이 마음을 만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디메오', '삭개오', '혈루증여인', '사마리아여인'등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깊은 한을 가지고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 모두 치유 받고 회복되어 건강한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이었고 "나욧"은 기숙사 혹은 신앙 훈련소였습니다. 결국 "라마나욧"은 신앙공동체 즉 오늘 날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로 나오면 그 삶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간 '엘리멜렉'과 '나오미' 그들은 10년도 못되어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두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두 죽어 세 과부가 남아 '나오미'의 가슴에 한이 생겼습니다. 고향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온다고 환영하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자 그 이름의 뜻이 기쁨이었지만 "마라" 즉 "쓴물"이라고 부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신앙공동체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그녀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세상은 힘들게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1992년 "사는게 뭔지"라는 노래로 일약 인기 가수가 된 '이무송' 씨가 역시 가수였던 '노사연'씨와 결혼하였는데 심한 우울증으로 날마다 침대 모서리를 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날 살려 주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라고 외치면 통곡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치유하여 주시고 지금은 다시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라마나욧"인 교회당에 와서 마음을 열고 다 고하십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힘을 얻고 사회생활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다윗'은 "라마나욧"에서 용기를 얻어 다시 제2의 인생을 출발하였습니다. 여러분도 "라마나욧"을 경험하고 새 힘을 얻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3. "라마나욧"은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었습니다.
삼상19:22-24,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라마"에 이르게 되자 그도 역시 개인의 자격과 상관없이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에 붙잡혀버렸습니다. "라마나욧"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곳에는 예언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 곳 근방을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였습니다. 그곳은 어느 누구라도 근방에만 오면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자가 되는 신비의 처소였습니다. 그리해서 살의를 가진 자든, 세상의 어떤 목적을 도모하려는 자이든지, 그 근방에만 오면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혀서 예언자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다윗을 잡으러 온 사울도 "라마나욧"을 향해 걸어가는 내내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마나욧"에 이르자 사울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삼상19:24)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악한 마음과 잘못된 영적상태를 가지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현장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영적 상태나, 마음 상태와 상관없이 성령의 능력에 노출되자 거룩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혔던 자, 예언할 수 없는 사람,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긴 사람도 성령의 능력에 압도당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런 사울이 예언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능력이 몰려 있던 현장 가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사울이 보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임재하신 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그 능력에 사로잡혔던 기록이 있습니다(행2:1-4).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던 1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두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충만하게 되었고 변화되었으며 새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영적수준이 모두 달랐고 성품도 기질도 모두 달랐지만 성령의 능력이 몰려 있던 곳에 있었기에 모두 큰 변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도 로마의 장교 고넬료의 집에 모여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 앞에 거룩한 변화를 받고 방언을 받았던 기록이 있습니다. 그 사건은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실로 놀라운 사건이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방인 모든 사람들 심지어 종들 까지도 모두 성령을 받고 방언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18세기의 영국사회는 암흑 사회였습니다. 그당시 영국은 도덕적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황폐화되어 있었습니다. 세 명이 걸어가면 두 명이 사생아라 그럴 정도로 온 나라가 타락하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울 때였습니다. 한집건너 술집이었고 한 집 건너 극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영국사회를 건지기 위해서 '웨슬레'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본래 '사무엘 웨슬레'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목사가 되었습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선교하기 위해 갔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웨슬레'는 고향인 영국의 런던에 돌아와 1738년 5월 24일 9시 15분전에 "올드스케잇"이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그 거리의 어느교회에서 작은 집회(수요일 예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소리를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거듭나는 체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불을 받아 변화 받은 '웨슬레'를 통하여 부패해 가는 영국사회를 건졌습니다. 그가 나가서 설교를 하면 술집들이 문을 닫았고 깡패와 창녀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요한 웨슬레'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한 영혼이 거듭나면서 옥스포드에 신령한 바람이 불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영적 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살리고 경제도 살리고 정치도 살리고 대학도 살리고 교육도 살리고 20세기의 최고의 나라를 건설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호지 유태랑'이란 불량 청년이 18살때 살인 강간 방화 이세가지의 큰 죄를 짓고 무기형을 받고 옥중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 전도를 받아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불 세례를 받고 '호지 유태랑'은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었고 그때부터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죄수가 종기로 인해 고통을 당할 때 '호지'는 자기 입으로 그 종기의 고름을 다 빨아내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여러 죄수들이 크게 감동이 되어서 감옥속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200여명의 신자가 생겼고 일본의 무서운 기독교 탄압 때에도 감옥안에 교회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교육이나 가르침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교양이나 도덕적 수양으로 인생이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잔소리 많이 한다고 해서 남편이나 자녀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슥4:6).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님을 환영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복음이 실제가 되어 하늘의 능력과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마나욧"과 같은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을 반드시 내가 경험하여야만 하고, 내가 성령의 실제를 체험하고, 그 임재 앞에 변화를 받아야만 하겠습니다.
"라마나욧"은 신앙의 공동체(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어렵고 힘들고 분주하고 매우 바쁘더라도 신앙의 공동체(교회)를 소중히 여기시고 신앙의 공동체모임에 모이기를 힘쓰고 신앙의 공동체에 임재하신 주님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을 힘입고 매일 매일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라마나욧"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라마나욧"은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라마나욧"은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신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여러분의 "라마나욧"이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실재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