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그해 5월, 18일 오전. 상상을 초월한 무차별진압에 밀려 전남대앞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전남대 사거리에서 일단 대열을 정비한 뒤 시내로 진출한다. 일부학생들의 논의를 거쳐 시위행렬이 택한 진출로는 광주역과 공용터미널, 가톨릭센터, 그리고 전남도청앞. 전남대앞에서부터 대인동 공용터미널까지의 대열 선두에있던 박몽구씨 (시인·당시 전남대 영문과 2년)는 당시 시위대열에 있던 학생들의 한결같은 생각은 공수부대의 잔인한 실상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시내 어디엔가 모여있을지도 모를 동료학생들과 한시바삐 합류해야 한다는 공포와 분노가 전부였다고 증언한다.
[일차로 형성된 대열 숫자는 약1백50여명 정도였다. 모두가 격앙돼 있었다. 쉴틈도 없이 광주역을 거쳐 공용터미널까지 내달렸다. 엄청난 속도였지만 분노때문이었는지 누구 한사람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은채 구호를 외쳤다. 다행히 공용터미널까지 오는 동안에는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본 대열은 공용터미널을 거쳐 가톨릭센터쪽으로 향하고 일부 학생들은 터미널 대합실로 들어가 전남대앞에서 벌어진 만행을 시민들에게 알리는데 열중했다.] 당시 계엄사 상황일지에는 오전 11시 [전남대생 1백여명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쪽으로 진출중이다]고 기록, 이같은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다. 전남대에서 시내로 이동해온 1차대열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것과 달리 조금 늦게 시내로 진출하려던 학생시위대는 광주역에서부터 강력한 제지를 받는다.
1차로 이동한 학생들과 시내에 집결해있던 학생들이 합류해 금남로와 가톨릭센터인근의 학생숫자와 5백여명으로 불어나서 계엄사 치안처가 경찰에 시위학생전원을 연행토록 지시함에 따라 경찰은 11시50분께 페퍼포그등을 이용 가톨릭센터, 광주역, 광주고속인근에서 진압작전을 시작한다.
(계엄사 상황일지) 12시께 전남대정문에서 시내쪽으로 진출하려던 천영진씨 (신용보증기금 순천지금 근무 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2년)등 학생들은 광주역인근에서부터 최루탄 저지를 받는다.
[공수부대의 곤봉세례에 더이상 버틸 수 없어 12시께 일부동료들과 함께 사레지오고등학교를 거쳐 광주옆쪽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전경들이 차단하고는 마구잡이로 최루탄을 쏴댓다. 함께 도청앞까지 가기로 했으나 이를 포기한채 흩어지고 말았다. 일부 동료들은 기어이 공용터미널까지 가겠다며 골목길을 통해 이동했다. 그러나 공용터미널 앞 상황은 더욱좋지 않았다.]
천씨등과 함께 이동했던 이광호씨 (샘물출판사 대표·당시 전남대 사회학과 3년)의 증언. [제일 먼저 간 곳은 광주역이었다.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흩어졌다. 공용터미널로 몰려갔다. 거기서도 전경들이 봉쇄했다. 이때 나는 박인천씨 집쪽으로 도망갔다. 10여명의 전경들이 학생들을 쫓아왔다. 잡혀가는 학생과 구타를 당하며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어느 가정집으로 뛰어들어 숨었다. 마루밑에 숨어 한시간 가량을 버틴 뒤에야 나올 수 있었다.] 이무렵 공용터미널 인근에 있는 대인시장에서도 대혼란이 벌어진다. 진압을 피해 시장으로 쫓겨들어온 학생들을 체포한다며 전경들이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 시장상인과 가정주부, 학생들이 뒤엉킨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이날 사건이후 광주지역 최대시장인 대인시장은 10여일간 사실상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상상초월한 검문 검색
전경들의 강력한 제지로 1백∼2백명단위의 소규모그룹으로 나뉘어진 시위대는 시내 곳곳으로 퍼져나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인다. (자세한 상황은 7,8회에서 언급한다) 오후 2시께. 시내 특히 금남로일대에서의 시위상황은 더욱 격렬해진다. 오전 상황이 갖가지 경로를 통해 시민, 학생들에게 전달되면서 시위대의 숫자가 크게 늘고 시위강도 또한 격렬해진다.
전경들의 위세에 눌려 흩어졌던 학생들이 또다시 터미널인근으로 모여든다. 이와동시에 전남대, 조선대등에서 이동해 수창국민학교에 모여 있던 공수부대원들도 금남로일대에서 시위진압활동을 시작한다. 전남대에 진주해 있던 7공수33대대는 이날 오후 12시45분 31사단으로부터 가톨릭센터앞에 모여 진압명령을 하달받고 수창국민학교 인근을 중심으로 진압작전에 돌입한다.
조선대에 진주해있던 7공수35대대도 오후 2시42분부터 도청앞 데모대 진압에 나선다. (특전사 전투상보) 수창국교인근에서 시작, 도청앞까지 금남로 일대를 훑어내리듯 진압작전도 나선 공수대원들은 젊은 학생들을 발견할 경우 골목길까지 쫓아가 무차별연행을 시작한다.
18일 오전과 오후 공용터미널인근시위에 참여했던 이재의씨 (현 광주일보기자·당시전남대 경제학과 3년)는 18일 오후 2시이후 겪었던 상황을 [가장 위기감을 느꼈던 순간]이라고 증언한다. [북동우체국인근에 있는 형님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2시께 공용터미널앞으로 나가봤다. 소방서쪽에 계엄군이 포진해 있고 로터리쪽에는 수많은 시민학생들이 있었지만 분위기에 눌려서인지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후 당시 심리학과 3학년이던 후배 양동춘씨가 시민들 앞으로 나서 오전의 시위 상황을 밝힌뒤 계엄군들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할 것을 호소했다. 반응은 곧바로 나타났다. 양씨의 말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나온뒤 일부가 가드레일을 뜯어냈다. 일부는 공중전화박스를 뒤집어 바리케이드로 만들었다. 진압병력들과의 일진일퇴가 거듭됐다.
그러던중 뒤쪽에서 갑자기 공수부대가 튀어나와 무차별적인 진압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상황은 변해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급한김에 공용터미널옥상으로 피신했다. 잠시후 옥상에서 내려와 공수부대원들에게 대항했으나 총검과 진압봉, 그리고 인정사정없는 구타앞에선 역부족이었다.
공용터미널내에 사무실이었던 임열학씨 (당시 36세·금호용역대표)의 증언. [오후3시가 가까워지면서 자동차보험쪽으로 나가 봤다. 시위대 2∼3백명이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전경지휘자는 군인들이 곧 투입될 것이니 귀가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10분이 지났을까 공수부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무지하게 두들겨 팼다.
위험을 느낀 나는 잠시후 터미널내배차실로 숨었다. 거기서 내다보니 공수부대원들이 대한극장앞에서 구타를 견디지 못해 실신한 학생들을 가마니던지듯이 싣는 것을 봤다.] 광주역과 소방서쪽으로 통하는 터미널앞에서도 금남로인접지역에 못지않은 진압작전이 펼쳐진다. 금남로일대에서 진압작전을 벌이고 있던 7공수 33대대병력일부가 이곳에 투입된다.
계엄확대 등으로 공용터미널내 사무실에서 비상근무를 하고있던 당시 광주고속 총무과 나종의씨 (현금호건설고속사업부 업무이사)와 경리부 서진열씨 (현업무부차장)는 당시 상황을 전쟁보다 더 참혹한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2층사무실에서 내려다보니 공수부대원들이 학생을 붙잡자마자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하수구쪽에 쓰러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내버스가 지나가자 무작정 세우더니 젊은 사람들을 끓어내렸다. 반항하는 움직임이 보이면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이사)
터미널 상황 시입파급
[곤봉으로 내리치는 것은 물론 젊은 사람이 지나가면 검문을 한다며 가방 등을 내놓게 한뒤 대검으로 죽 찢어 내용물을 길거리에 팽개쳤다. 무조건 연행했다. 조금 있으려니 학생 2명이 3층사무실에까지 쫓겨 올라왔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한 학생에게는 근무복을 입혀 책상에 앉게 하고 한 학생은 금고 뒤편에 숨겨주었다.] (서차장)
당시 27세이던 이종남씨의 경우 이날 오후 4시50분께 대한극장옆에서 공수대원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해 4개월여동안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상을 입었으며 김막동씨(당시 25세)·건축)도 공용터미널에서 장흥행버스에 타고 있던 중 끌어내려져 전진을 구타당하는 등 (평민당접수 [피해자신고서]내용 인용) 숱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공용터미널에서의 이같은 상황은 택시기사들을 통해 곧 시내 전역으로 퍼지면서 [공용터미널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으로 이어졌으며 이날 오후와 심야 시위를 격화시키는 주요요인으로 작용한다. 오전과 오후에 걸쳐 아수라장이 됐던 공용터미널은 오후 5시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서는 오후4시30분 금남로일대 시위를 진압했다고 보고하고 있다)가 넘어지면서 평온을 되찾지만 이것은 잠시뿐 19일 이곳은 또다시 시민과 공수대원간의 격전장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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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하루 4백여명 체포·연행돼
시민들 자위위해 각목으로 무장
33대대, 수창국교서 가톨릭 센터 진입 건물로 피신하는 시민 뒤쫓아가 구타
일부학생[김대중석방] [계엄령 철폐] 외치며 투석
18일 아침 전남대교문앞에서 공수부대와 첫 격돌을 마친 전남대생들은 3㎞에 가까운 거리를 단숨에 달려 가톨릭센터앞에 도착한다. 이날 오전 11시40분께 가톨릭센터앞에 집결한 학생수는 1천여명. (계엄사 상황일지는 시위대를 9백여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전남대앞에서 숨가쁘게 달려온 3백여명과 이날 오전 10시께부터 충장로 입구 광주우체국앞에서 집결한뒤 인근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다 가톨릭센터앞으로 온 2백여명, 그리고 개별적으로 금남로로 찾아와 시위본대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과 시민들이다. 특히 10시께부터 충장로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이날 오전 11시25분께 10일동안의 항쟁기간중 맨처음으로 충장로파출소에 투석, 유리창7매를 깬 뒤 광주공원인근에서 대열을 재정비, 가톨릭센터로 이동하는 등 조직적인 모습을 보인다. 속속 모여드는 동료학생들과 시민들의 성원에 고무된 학생들은 인도와 일부 차도를 점령한채 연좌농성을 벌인다. (공원에서 돌아온 6백여명의 학생들은 가톨릭센터 앞에서 손에 돌을 들고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으며 한일은행 앞에서도 3백50여학생들이 모여있음-2군사령부, 계엄사상황일지 인용) 이같은 분위기도 잠시뿐. 연좌농성이 시작된지 10여분이 지나자 인근에 배치돼 있던 전경들의 진압작전이 시작된다. 1시께 학생시위대가 시내일원으로 진출하자 게엄사치안처는 가톨릭센터 인근 9백개지역에 10개중대 1천9백25명의 경찰병력을 배치한다. (2군계엄상황일지는 1천3백50명으로 기록,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광주공원서 대열 정비
페퍼포그차량과 최루탄을 동원한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학생시위대는 일순간에 충장로와 인근 골목길로 진입, 20∼30명단위의 소규모시위를 벌이며 경찰들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한다. 80년 당시 변호사사무실에 근무하던 씨 (현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는 이날 비상근무를 하던중 가톨릭센터 앞에서 첫 격돌을 목격한다. [11시30분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도청쪽을 향해 연좌한 학생들과 전경들과의 사이는 불과 20∼30여 m에 불과했다. 농성이 시작된지 10여분이 지나자 도청쪽과 금남로 4가쯤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경들이 진압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최루탄과 페퍼포그가 발사되면서 가톨릭센터 인근은 대혼란 상황으로 빠져 들었다.] [우리와 3m 간격을 두고 멈춘 전경들이 페퍼포그를 발사했다. 도망가는 학생들을 쫓아온 전경들의 무차별구타와 연행이 시작됐다. 주위는 최루탄을 이기지 못하는 시민들의 기침소리, 고함소리로 들끓었다.] (광주 5월민중항쟁사료전집, 김한중씨증언 재인용) 12시30분께 2백여명의 학생들이 또다시 가톨릭센터앞으로의 재집결을 시도했으나 곧 해산되고 만다. 강제해산된 학생들은 가톨릭센터를 일시 포기한채 충장로 황금동 부로동 대한극장 시민관 중앙국민학교등으로 흩어져 시민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에 들어간다. 시내 전역으로 흩어졌던 학생시위대들은 오후2시께 또다시 가톨릭센터를 목표지로 집결한다. 75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센터에서 화원을 경영하고 있는 임정하씨 (53)는 [오전 시위를 마치고 각지로 흩어졌던 학생들과 일요일 오전 시내 곳곳에서 볼일을 마치고 시내상황을 알아보기 위한 시민들이 급속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금남로 2가부터 4가까지의 인도등이 시민, 학생들로 가득찼다. 학생들의 경우 오전상황과는 달리 상당히 격앙돼 있었다]며 이날 오후 가톨릭센터앞 분위기를 전한다. 도청과 [가톨릭센터]. 학생, 시민등에게 이곳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펴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이같은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삽시간에 전광주시내로 파급된다. 전통적으로 4·19때부터 시위대의 목표는 도청앞광장이었고 더구나 민주화성회의 진행기간이었던 지난 며칠 동안이 광장은 민주의 광장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18일오전 가톨릭센터앞 시위를 주도했던 이상승씨 (당시 전대농대4년 현재 신협 광주시연합회 지도과장)도 같은 맥락의 증언을 한다.
오후2시 시위격화
[70년대후반 이지역 민주화 운동의 거점은 곧 가톨릭센터였다. 5월18일 당시만 해도 가톨릭센터에는 가톨릭농민회, 노동청년회, 정평등이 한자리에 모여 민주화운동의 진원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같은 당시 상황은 뚜렷한 지도부가 부재한 당시 시위대를 가톨릭센터로 이끄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군부세력 또한 이같은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로인해 가톨릭센터앞을 차지하기 위한 공방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센터앞 시위상황은 오후 2시이후 다시 가열된다. 2시가 넘어서면서 한일은행 조흥은행인근을 중심으로 3백여명이 모여 시위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점차 숫자가 불어나기 시작, 2시40분께는 1천5백여명, 오후3시께는 3천여명으로 불어난다. (육군본부작전상황일지기록) [5·18]이후 18일 상황을 분석한 전투교육사령부 (전교사)의 [광주소요사태분석]은 2시이후 시내분위기를 [14시경에는 시위행렬이 3백∼1천여명으로 확대, 경찰과 투석전으로 대치하면서 경찰의 가스차 1대를 방화하는 등 경찰능력으로는 저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따라 군부는 전남대와 조선대에 진주해 있던 7공수33대대와 35대대에 강력한 시위진압을 지시한다. 오후12시45분 가톨릭센터앞데모대 진압명령을 수령한 (특전사 전투상보) 권승만중령의 33대대는 수창국민학교에서 작전을 준비하던중 오후 3시40분께부터, 3백32명 (31사, 특전사전투상보내용)을 가톨릭센터에 투입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군기록과 목격자들간의 증언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군기록은 오후4시를 전후해 본격진압작전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목격자들은-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미 오후2시께부터 금남로일대에 공수부대가 출현, 소규모충돌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후2시부터 가톨릭센터에서 진압활동을 벌였던 곽행렬공수부대원들의 진압방식에 대해 전경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증언한다. [유동삼거리쪽에서 공수들이 헤드라이트 켜고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본 공수들의 시위진압방식은 전경들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군중이 돌을 던지거나 말거나 앞으로 전진했다. 시위군중들이 도망가면 건물속에까지 따라갔다. 시위군중을 잡으면 일단 참나무 봉이나 군화발로 정강이를 차버렸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팬티만 입힌 채 군트럭에 실어 원산폭격을 시키고 있었다.] (광주 5월민중항쟁사료전집) 같은 시각 35대대에도 충장로에서 소규모 시위를 하고 있던 시위대의 [강력저지 및 분산]이라는 진압명령이 내려진다. (공수부대의 진압과 피해상황은 [18일 오후 4시편]에서 자세히 언급한다.)
강력저지 진압 명령
오후5시에 접어들면서 33대대는 특전사등에 작전종료를 보고한다. 시위학생 해산과 함께 1백3명이 체포된다. 밤7시 작전종료를 보고한 35대대에 연행된 학생은 모두 1백73명으로 4시간여 사이에 2백76명이 연행된다. 2군사령부가 추후집계한 18일 하룻동안 연행자 4백5명의 65%가 가톨릭센터인근에서 연행된다. 하지만 공수부대의 작전종료보고가 시위상황의 종료가 아니었음은 곧바로 확인된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밀려 시외곽지역으로 일단 빠져나온 시위대들은 당시까지만해도 시내상황을 잘모르고 있던 시민들에게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면 동참을 호소한다. 산수동과 계림동등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또다시 가톨릭센터로 모여든다. 그러나 이들 시위대와는 달랐다. 오전까지만 해도 방관자적인 입장에 머물러있던 시민들이 시위대에 직접 합류하는 한편 자위를 위해 각목등으로 무장한다. 밤8시15분께 가톨릭센터앞에는 6백여명의 시위대 (2군계엄상황일지)가 또다시 나타나 진압군과 격렬한 공방을 벌인다.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 또다시 흩어지는 심야시위는 이날밤 10시가 넘어서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