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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이기심, 사랑, 분노 / 생명과 정신의 구조
김정일 칼럼 / 김정일 정신건강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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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추론할 수 있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생명은 에너지가 모이다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면서 생겨났다.] 언젠가 어떤 신문 해외 토픽란에서 얼핏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어떤 컴퓨터를 잘 모르는 사람이 대형 컴퓨터 앞에서 입력을 하는 데 하도 엉성하게 하니까 컴퓨터가 그 사람을 모욕했다고 한다. 그 컴퓨터는 어떻게 그 사람을 어떻게 모욕했을까?
아마도 'fuck you!"나 "foolish(바보같이)'란 단어를 화면에 띄워 모욕했을 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컴퓨터는 사람을 모욕할 수 있었을까? 컴퓨터는 입력한 데로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한데.... 내 생각엔 그 대형 컴퓨터는 에너지가 많다 보니 그 에너지를 통괄하는 자아 반응이 어렴풋이 생겨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나 한다. 나는 그 기사에서 생명 탄생의 비밀을 엿보았다. 바로 축적된 에너지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미래 공상과학 소설에서는 로보트나 컴퓨터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재가 많다. 인간에게 충성만 하던 컴퓨터가 어느 날 갑자기 대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공격하고 지배하려 한다는 소재가 많다. 작가들은 미래에 대한 예측 능력이 뛰어나다는 데 그렇다면 그것은 언젠가 현실로 닥쳐올지도 모른다. 미래의 컴퓨터는 어떻게 그렇게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바로 에너지의 축적과 축적된 에너지를 총괄하는 자아(ego)의 발달 때문이 아닐까 한다.
128메가 D-램, 256메가 D-램, 1기가 D-램등 에너지를 집적하는 컴퓨터 칩 등이 자꾸 발달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엄청난 에너지가 쌓이게 되고 그 모든 에너지를 총괄하는 '자아(ego)'같은 것이 생기면 그런 공상과학 같은 일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아(ego)'는 컴퓨터라는 전체 에너지체를 보존, 발달시키는 임무를 띠고 인간을 공격할 것이다. 자연계의 에너지는 한정되니 그 한정된 에너지를 컴퓨터 혼자 독차지하기 위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다. 마치 한정된 식민지를 두고 쟁투하다가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 같이..... 그래서 나는 에너지의 축적이 생명체로 발전한다고 본다. 지구상에 에너지가 충만했을 때 그 에너지가 모이면서 움직이는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
내가 이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백두산에서 였다. 백두산 천지 가에서 푸른 물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언가 파릇파릇 하게 기운이 꿈틀거리며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꿈틀거림에서 생명의 탄생을 엿볼 수 있었다. 그 꿈틀거림에 에너지가 축적됐기 때문이다. 한정된 공간에 에너지가 조화롭게 차있을 때 그 에너지는 꿈틀거리는 모양의 축적된 에너지체를 만들게 된다. 봄기운이 완연할 때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이.....
그 아지랑이 같은 꿈틀거림을 나는 스프링 구조라고 생각한다. 스프링을 책상에 대고 누르면 작용하는 에너지와 책상에서 맞받아 치고 오르는 반작용의 에너지는 모두 스프링에 모이게 된다. 즉 스프링 안에는 에너지의 축적이 가능한 것이다. 아마도 그 에너지는 스프링의 경사에 모여 있을 것같다. 천지에 기운이 좋을 때 그 기운은 꿈틀거리는 스프링을 만들게 되고 그 스프링이 점차 발전하다 보니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명체는 굉장히 정교한 스프링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에너지를 가능한 스프링의 구조체 내로 많이 모으고 그 에너지를 가급적 늦게 방출해 내는 것이 생명체의 일생인 것이다. 우리가 피부를 눌렀다 놓으면 곧 원상회복 되는 것 같이 인간은 에너지를 아주 잘 흡수할 수 있는 탄력적인 구조이다. 남자들이 날씬하고 탄력성 있는 피부가 곱고 이목구비가 정연한 여자에 끌림은 그런 여성에게서 보다 효율적인 에너지의 축적과 건강한 생명의 탄생이 가능하기 때문일 게다.
전설에 용은 비바람과 구름을 휘몰아서 올라가며 승천을 한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스프링이 튕겨 올라가는 것 같다. 뱀이 용이 되기 위해 하는 천년 기도는 아마도 자기 안 깊숙이에 존재하고 있는 엄청난 잠재에너지에 맞닥뜨리기 위함 일 것이다.
우리 안에는 오랫동안 자연계에 적응하면서 축적해온 엄청난 잠재에너지가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하고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뇌호흡도(우리는 평생써야 뇌의 10%정도밖에 못쓰니 뇌호흡을 통해 보다 많이 활용하자) 우리 안의 잠재에너지를 끌어 쓰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우리 안의 잠재에너지는 하나의 긴 스프링같이 연결되 있다. 우리 의식 표면에서부터 무의식 깊숙이 까지 모든 에너지는 스프링으로 연결돼 있는 데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스프링의 눌린 정도는 더 정교해진다. 아마도 에너지를 보다 고농도로 축적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은 모두 제거하고 강한 엑기스만 축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엑기스도 튕겨 나오게 되면 강한 현실의 힘이 된다. 뱀이 천년기도를 통해 자기 안 깊숙이에 있는 고농도의 강한 스프링을 해방시켰을 때 그는 용으로 바뀌면서 비바람을 휘몰아 튕겨 올라가며 구름을 찢으며 승천한다. 부처님은 깨달은 다음 몇 주 동안 법열을 즐겼다는 데 그 또한 강하게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환희롭게 즐긴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잠재되는 에너지는 어떤 형태를 가질까? 내 생각에는 감정의 선에 매달린 이미지일 것 같다. 수많은 사연은 한 느낌으로 축약할 수 있고 그 느낌들이 응축되다 보면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지나온 일생의 극적인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스쳐간다고 한다. 지나온 일생을 연속되는 필름으로 볼 수 있음은 일생의 경험이 그같이 저장됐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죽음이란 내 자아(자아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현실에 당장 필요치 않은 존재의 에너지들은 억압을 한다)가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동안 억눌렸던 무의식에 잠재된 에너지(이미지)가 한꺼번에 튀어 나오는 것이리라. 인간 존재에 에너지가 이미지로 저장되는 과정은 참 흥미롭다. 그것은 영화를 찍는 것과 유사할 것 같다. 우리눈이라는 영사기로 체험하는 세상을 촬영하고 그것들은 살아있는 영상으로 내 존재에 새겨지게 된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내 존재의 가장 얇은 필름에 가장 동적으로 새겨진다. 또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가장 정교한 녹음 테이프에 운율이나 리듬으로 저장되리라.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내 안 가장 깊숙이 존재하는 빛과 물과 공기, 수많은 세월동안의 조화일 것이다. 저장된 이미지나 운률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가장 엑기스만이 남게 되어 상징의 형태로 간직하게 된다. 보다 많은 이미지를 축약한 것이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명체는 하나의 긴 끈과 같다는 것이다. 단절된 것은 생명체가 아니다. 내 팔이 잘려 나갔을 때 잘린 팔을 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기다란 한 줄의 에너지 스프링이고 그 스프링들은 에너지의 엑기스인 감정과 이미지의 형태로 있으므로 사람들에게는 합리성과 이해, 설득력이 무척 중요하다. 그래야 사람들 마음 깊숙이까지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성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존재 안의 스프링이 풀려나면서 이루어진다. 아기들의 피부는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다. 조화롭게 응집된 스프링상태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 정교한 스프링이 풀려 나면서 아이들은 몸집이 커진다. 그러나 어느 정도 크고 나면 그 성장도 멈춘다.
여자는 20세, 남자는 25세가 되면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는다. 자연계에서 적응하는 인간의 육체의 크기는 그 정도면 족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 정신은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은 빛에 따라 무한히 나아갈 수 있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밝고 가볍고 맑은 빛은 멀리까지 나아가나 어둡고 무거운 빛은 멀리까지 비추지를 못한다.
윤회를 거듭해 영혼이 성숙해 윤회가 끝난다는 말은 아마도 삶을 통해 내 안의 영혼의 빛을 보다 가볍고 맑고 투명하게 함으로써 이 땅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멀리 나아감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정신은 노력하기 나름에 따라서 무한히 맑아지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내 안에서 떠오르는 에너지, 상, 이미지를 해방하면 된다. 내 안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해방하다 보면 내 깊은 곳의 에너지가 떠오르게 되고 그 깊게 떠오르는 응축된 에너지는 나를 보다 강하고 용기 있고 성숙하게 만든다.
사람은 기다란 한 줄의 에너지 스프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떠오르는 스프링의 에너지들을 단계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한 살이 갑자기 30살이 될 수 없듯이 우리 정신도 내 안에서 떠오르는 정신에너지, 상들을 단계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이 떠오르는 에너지, 상들을 소화하지 못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사는 것이 무겁고 긴장되고 불안한 것이다.
바로 내가 소화해야 하는 떠오르는 무의식의 기운들을 소화하지 않았기에 그 기운들이 튕겨 나오려 하면서 나를 긴장시키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내 안의 영혼의 빛이 나오려고 하는 데 그것을 막게 되면 빛이 후행하고 흩어지면서 어둠과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안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소중히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솔직하고 용기있게 소화해 나갈 때 그 사람의 존재의 성숙은 촉진될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런 생명체가 탄생하는 데 걸린 시간이 10억년이나 된다는 점이다. 지구 탄생을 45,6억년전으로 보고 생명체 탄생은 35억년 전으로 본다. 45억년 전의 지구도 지금같은 하늘과 땅, 바다를 갖고 있었을 텐데 생명체는 왜 이리도 더디게 만들어 졌을까? 물론 원시 지구는 지금보다는 훨씬 불안정했겠지만 그래도 생명체가 탄생하기까지 10억년이나 걸렸다는 것은 의외다. 요즘은 물만 며칠 놔둬도 구더기가 고이는 데...
아마도 에너지가 축적되는 처음 구조를 만들기까지가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286 개인용 컴퓨터가 처음 개발된 후 급속도로 상위 기종의 컴퓨터가 개발된 것 같이 처음 생명체가 탄생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스프링은 무수한 시행 착오를 거듭하면서 에너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모으고 더디게 방출되는 구조로 지향했다. 이러한 생명체의 탄생은 자연의 필연적인 선택이고 요구였다. 한자로 生命은 일어날 生, 천명 命이라고 한다. 즉 생명체는 하늘의 명령이 있을 때 탄생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명령은 아마도 조화를 지향하기 위함 일 것이다. 천지 만물간에 조화롭게 축적되는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생명체의 탄생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런 생명체의 특성은 한마디로 자율성에 있다. 이미 만들어져 꼼짝 못하는 무생물과는 달리 생명체는 에너지가 모이면서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다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우리가 목을 매거나 물에 빠지면 답답해하는 것 같이 무생물로 가는 것은 자율성의 상실에 있고 생명체로 가는 것은 자율성의 획득에 있다.
인간이 호기심을 갖고 우주를 개척하고 계속 자연을 지배하려고 나아가는 것도 결국은 본능적인 자율성을 확대하려는 선상에서 봐야 한다. 생명체는 자유를 지향하면서 이기심을 획득한다. 자기만 보다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 이기심은 공격심과 성욕으로 나타난다. 공격성은 자연계에 한정된 에너지를 누구보다도 빨리 많이 차지해 보다 긴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에너지를 모아도 영원히 살 수가 없어 영원히 사는 방편으로 생명체는 자기와 똑같은 존재를 복제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바로 성이 발달한 것이다. 자연계의 생명체들은 공격성, 성욕을 기본 본능으로 갖고 있으며 그 이면의 뿌리에는 이기심이 강하게 배태되어 있다. 나와 나의 분신들만 번성케 하려는 것이다. 이 본능들을 통해 그는 자연계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확대한다. 이 본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본능을 충족하는 경우에는 쾌락이 뒤따랐다. 즉, 자연계에서 조화롭게 축적되는 기운들은 10억년에 걸쳐 겨우 자율성을 획득했기에 자율성을 보다 넓히는 쪽으로 강하게 지향하며 자율성을 넓히고 지속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강한 만족과 보람, 쾌감(소위 살 맛)을 안긴다. 본능은 만족과 쾌락을 통해 생명체가 자연계에서 보다 효율적이고 길게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진화시킨다. 본능의 욕구에 저항하는 자는 본능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 무척 고생을 하게 된다. 정신질환에 걸리던지 심지어는 죽음까지 초래케 하면서...
많은 정신질환자들은 공격성이나 성욕, 이기심의 충족에 게으른 사람들이다. 현실을 헤쳐가기를 싫어하고 이성 관계를 기피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높이는 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럴 때 존재는 불안이나 우울, 해리, 환각 같은 채찍을 휘둘러 정신이 번쩍 나게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의 욕구에 게을리 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길로 진행하고 만다. 그들은 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돈을 탐하고 색을 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의 길이다. 그러나 이 본능을 이기적으로 충족하는 것은 인간이 집단 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용납되지 않았다.
한 명보다 두 명이 두 명보다 세명이 더 강하고 보다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음을 발견한 인간은 집단을 보다 크게 형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집단을 형성하면서 인간은 개인의 이기심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혼자만 잘살려는 개인의 이기심과 함께 잘살자는 집단과는 서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과 집단의 싸움은 시작되었으며 이 싸움에서 집단은 승리한다. 개인이 이기적으로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 것보다는 다소 이기심을 누르더라도 집단에 어울려 사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페렌찌라는 정신분석학자는 개인에 대한 종족의 승리라고 말했다. 집단 사회는 개개인의 이기심과 본능을 억압하면서 집단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필요하면 신의 권위까지 업어서...
그래서 인간 사회는 동물들과는 달리 유독 법도 많고 도덕도 많다. 사람이 같이 어울려 살면 제멋대로 자기만 살고 져 하는 이기심을 억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 본능은 워낙 강하기에 집단의 규율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빈틈만 있으면 불쑥불쑥 솟아오르곤 했다. 그에 따라 법과 도덕 체계 또한 보다 복잡하고 엄격하게 발달했다. 그러나 집단 사회에서도 이기심과 본능의 충족을 마음껏 누린 존재가 있으니 바로 집단의 우두머리나 윗사람들이 그러하다. 우리 사회가 성과 소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규제하면서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윗사람들은 온갖 환각(요정 정치)과 부속에서 흥청망청 했던 것이 그러하다. 물론 윗사람들의 그런 양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 있었다.
아랫사람들이 모방해서 자기들의 영역을 침범하면 자기들의 이기심이 제한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단 사회의 질서 가치관이 최근 들어서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은 집단만 크게 유지해 구성원의 힘을 모으면 다른 부락도 점령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는 데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그러한 집단의 어드벤테이지는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현대같은 개성화 시대, 정보화 사회에서는 구지 집단에 모이지 않아도 개인은 적응할 수가 있다. 특히 요즘같이 빨리 변하는 사회에서는 집단의 합의를 도출하면서 느릿느릿 적응하는 것보다는 개인이 발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여기서 초래되는 것이 바로 도덕의 혼란이다.
그동안 개인의 이기심과 본능을 눌러 놨던 도덕은 설득력이 약해지고 개개인들이 다시 자유롭게 자기 이기심과 본능을 충족하려 하고 있다. 개인이 해방되고 그 개인들이 한정된 자연의 에너지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약육강식의 원시 시대가 다시 펼쳐 지고 있다. 앞으로 개인은 강해야 살 수 있다. 그래서 윗사람들의, 집단의 비능률적인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효율성이 없는 말을 믿어봐야 자기만 손해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어른들 말 듣다가는 망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개개인은 자기의 본능을 해방시킴으로써 거기에 저장되 있는 막강한 에너지를 활용하려고 한다. 본능이 해방 되야 보다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때는 이기심과 본능의 해방이 개인을 육체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면 현대에서 개인의 본능의 해방은 그를 보다 창의적이고 개성 있게 만들어 준다. 그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로 만들어 주며 그 다양함이 신선한 충격을 뿌리며 매스컴의 도움으로 엄청난 부를 거둬 들이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작금의 정보화 시대, 세계화 시대를 맞아 발 빠르게 변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 점잖떨고 뒷짐만 지고 있다가는 언제 다시 식민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벌써 IMF관리하에 들어가 허덕이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사방이 바다로 막혀 있고 위마저 강한 중국과 맞닥뜨려 있어 어쩔 수 없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만들어야 했다.
좁은 영토 안에서 오손도손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윗사람 공경하고 나라사랑하는 충효의 개념을 발달시켰다. 윗사람 공경하고 오손도손 살게 되면 아래 사람들은 강해지거나 성숙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윗사람 눈치나 보면서 시키는 데로 하는 것이 최선이다. 윗사람들이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윗사람을 거역하게 되면 그는 발칙한 놈, 집단을 어지럽힌 존재가 되어 집단 사회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문제는 나라가 열렸을 때다. 나라가 열리게 되면 윗사람들의 무력함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윗사람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면서 속속들이 썩었음이 드러나게 되며 열강의 침략에 얼마나 무기력한지가 드러난다. 고인 물이 썩듯이 그들은 무소부지의 권력 속에서 자기들의 이기심과 본능만 충족하기 바빴지 나라를 위해 일하거나 대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 우리나라가 부도 위기를 맞은 것 같이...
우리나라는 나라가 열릴 때마다 위기를 맞았고 망해왔다. 병자호란이 그랬고 임진왜란, 경술 국치가 그러했다. 나라가 열리게 되면 새로운 세상에, 보다 넓은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길을 빨리 찾아가야 한다. 과거의 달콤한 향수에 젖어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 층의 구태안일한 태도에 더 이상 현혹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이익만 탐하다가 정 급하게 되면 나라를 팔고 도망가거나 적의 주구가 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현대 개성화 시대는 개인의 해방을 요구한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개개인에게서 튀어 나오는 다양한 본능을 적절하고 조화롭게 충족, 소화시키면서도 사회적인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새로운 도덕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 도덕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개인들이 오래만의 해방에 들떠 해방의 해악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 피우는 것만이 좋지 바람 피워서 결과적으로 자기와 자기 아이들, 거친 비바람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주는 가정이라는 틀이 망가지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별 두려움을 안 갖는다.
개인의 이기심과 질서를 설득력 있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문화 속에는 삶의 시행착오를 생생하게 거친 무수한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문화 개방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필름에 가위질을 하거나 성인 극장을 제한하는 식으로 문화를 다시 가두어 두었다가는 개성화 시대에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르는 개인들의 이기심을 감당할 수가 없다. 사람의 체험은 이미지로 저장되기 때문에 개인에서 솟아오르는 본능은 이미지를 통해서 충분히 해방, 충족될 수가 있다. 문화를 완전 개방하고 그 문화 속에서 개개인이 보다 바람직한 생명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 나갈 때 그 사회의 질서와 체질은 더욱 강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