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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아산UBF 여름특강 제 4 강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말씀 / 야고보서 2:14~26
요절 / 야고보서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현대문명의 주류가 서구문명이고 서구문명의 바탕에는 기독교가 있기에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분석을 담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국가시스템의 바탕에도 기독교 사상이 많고 6.25전쟁 후 사회적으로 기독교가 크게 부흥하면서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영화에서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반성, 사과, 보상에 무관심한 이슈를 다룬 적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크고 작게 우리 주변에서 경험하기에 공감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오늘 야고보서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개인의 감정적인 만족이나 신학교리에서만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앞에 인정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야고보서 말씀 저자 야고보는 '만약 믿음이 있노라 하고 계속적으로 말만 한다면' 이라 하여 비판을 위한 가정을 먼저 내세웁니다. 참된 믿음은 거듭난 사람의 생활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람을 피하여 다니던 사마리아 여자가 메시아 예수님을 만난 후 동네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숨은 신자로 지내던 아리마대 요셉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여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경쟁하던 베드로와 요한이 합심동역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고 오순절 회개역사를 섬겼습니다. 저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 ‘생활의 변화와 실천이 이루어지 않는 믿음’이 가치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신앙 고백 하면서도 마음의 원하는대로 사는 것, 믿음의 말은 하는데 믿음의 실천은 없는 것, 믿는 사람이라 하면서도 세상풍조대로 생활하는 것, 개인의 인간적인 나쁜 습관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 해오던 생각패턴대로 두려워하고 부정적이서 도전, 변화가 없는 것, 실제 문제 앞에서 믿음이 전혀 적용되지 않아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같은 것! 이러면서도 ‘믿는다’ ‘믿고 있다’ 하는 것이 어떻게 ‘믿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데” 저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예를 듭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을 찾아가서 어려움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도움은 주지 않고 말만하는 사람을 들고 있습니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절망적인 실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매우 어려워서 생활의 고통이 심하고 심지어 생존의 위기에 처한 절박함을 가진 형제나 자매에 대하여 실제적인 도움이 없이 말만 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저자는 세 가지 위로의 말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평안히 가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헤어질 때 사용했던 인사입니다. 걱정이 쌓여 있는 사람에게 이런 인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덥게 하라’는 것은 일교차가 커서 밤에는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는 당시 유대에서 입고 덮을 옷 조차 없는 어려운 사람에게 스스로 불을 지펴서 따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도 공허한 말일 뿐입니다. ‘배부르게 하라’는 말도 먹을 것을 구하고 구하다가 오래 굶주린 상태가 된 사람에게 자기가 알아서 배부르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인사는 걱정해주고 위로해주는 말의 형태이지만, 사실 차가운 말이 되는 것이며 어려운 사람에게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지 않으면서 스스로 믿음있노라 한다면 그 사람은 위선적인 사람이며 그가 가진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고 입증되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입니다. 4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많은 나무들이 겨울에 가지만 앙상한 상태로 서 있습니다. 똑같이 앙상한 상태로 서있지만 살아 있는 나무는 봄이 되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죽은 나무는 잎이 나지 않고 꽃도 없고 당연히 열매도 없습니다. 똑 같이 땅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나무여도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를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잎이 나야할 때에 잎이 나는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할 때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지 여부입니다. 다들 똑 같이 나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부합니다. 다들 똑 같이 저는 믿어요 하고 믿는다 말을 합니다. 이 믿음이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게 해주는 것이 행함이요 실천이요 생활의 변화입니다. 행함이 없고 실천이 없고 생활의 변화가 없으면 그 믿음은 자체가 죽은 것으로 판별되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가운데 믿음과 행함을 별개로 다루는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 사람들 외에도 초대교회를 약 300년 동안 훼방한 세력이 있는데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사는 것은 어떻게 살아도 된다. 믿기만 하면 된다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영혼의 구원만 받으면 되기 때문에 육체는 본성대로 놔둬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일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회개’ ‘결단’ ‘행함’ ‘성화’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이단집단들이 있습니다. 이 이단들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본인도 회개가 없고 그들의 리더들도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런 이단에 누가 빠지나 봤더니 듣기 싫은 말 - 책망, 회개, 변화, 연단을 촉구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고 귀에 달고 듣기 좋은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석에 이끌리듯이 따라가고 그런 사람들을 애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자는 그런 주장하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너는 믿음이 있다고 하느냐?’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행함이 있다.’ 저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촉구합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저자는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내보이겠다고 합니다.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믿음과 행함을 따로 보는 사람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자는 믿음과 행함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행함은 함께 있는 것이라 지적합니다. 행함은 믿음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행함도 따라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있을 수 없고 믿음이 없는 행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저자는 행함은 믿음의 열매이기에 행함을 가지고 믿음을 보여줄 수 있다 확증합니다. 따라서, 입증할 행함이 없이 무엇으로 믿음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18절 후반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느니라”
당시 전세계 모든 족속들이 다신교를 믿었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도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주피터, 넵투우스, 세레스, 미네르바, 아폴로, 디아나, 마르스, 비너스, 불카누스... 온 세상의 공용어 헬라어의 원조이고 지혜를 자랑하던 그리스에도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 헤파이스토스...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고 선진문명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그들과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독보적이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믿음만 고백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 ‘행함 없는 믿음’을 냉철하게 비판해야 하는 이유를 언급합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누구신 줄 모를 때, 제자들도 예수님이 아직 누구신 줄 모를 때,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거룩한 분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마가복음 1장에서 이미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말하고 있다. 귀신들도 그렇게 합니다. 귀신신앙과 다르려면 인간의 본질, 인격이 변화하여야 합니다. 믿음이 올바르다면 믿음이 올바른 내면성을 이루고 내면의 변화된 인격이 외적 행함,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은 죄입니다. 저는 회개했어요'하고는 자기중심의 말, 자기중심의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든지, '성과지향은 죄입니다. 성과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말하면서 끊임없이 사람끌어모으기에 집착을 놓지 못하는 것은 말만 하는 수준인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허탄하다는 것은 '공허하다', ' 속이 텅 비었다'는 말입니다. '헛것'이라는 것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곡식이 전혀 재배되지 않아 이익을 내지 않는 논밭을 평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텅 빈 것입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어떤 유익도 없는 것입니다.
저자는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중요한 역사 사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고 둘째는 여리고 정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이고 여리고 정복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중요한 전략거점으로써 땅을 차지하는 시작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이스라엘 영토의 시작을 대표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영토의 시작에 무엇이 있었는가? 믿음의 사람의 행함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민족과 땅은 시작될 수 없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한 결단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믿음, 부활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믿음대로 이삭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 번제로 드리는 실천을 행해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직 죽이고 불태우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드리는 실천이 확실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을 향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공식 선포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저자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함으로써 믿음과 행함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을 분명히 합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역사합니다. 행함은 믿음의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결과인 행함이 나타날 때 믿음은 온전해 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늘의 별을 보고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30년이 흘러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사건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구체화되었습니다. 창세기 22장 사건은 창세기 15장 6절 말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을 실제로 응하게 한 것입니다. 의롭다함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행함으로써 믿음이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행함으로 믿음이 구체화되어 결국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은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받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단히 깊어지는 은혜의 세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지금도 믿음으로 행한 사람,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깊이 체험합니다. 하나님과의 기도에 막힘이 없습니다. 믿음이 말과 이론에 그치지 않고 행함으로 생활에 나타나는 사람이 더 깊은 영적 세계로 나가고 성령의 함께 하심과 능력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불변의 사실입니다. 행해 보지 않는 사람, 믿음으로 희생과 헌신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계가 많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큰 차이가 없어서 불안, 두려움, 염려에 시달리며 소중한 인생을 소비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 것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사람을 대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하는 대상은 그리스도인 중에서 행함과 믿음은 별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져 행함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즉 행함이 이루어지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도피시켜줌으로써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행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녀는 이런 믿음과 행함으로 인하여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과 친척들까지 살렸고, 후에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저자는 행함과 믿음을 사람의 몸과 영혼에 비유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 죽은 시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행함의 중요성,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행함있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결단하고 시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선악에 대한 분별력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 자기가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저렇게 해야 옳은 것인데 행하지 않는 것, 자기가 행하지 않고자 마음 먹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주와 복음을 위하여 해야 할 것을 결단하여야 합니다. 행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여자 좋아하는 것은 남자의 본성이지요, 잘생긴 남자에게 호감가는 것 역시 여자의 본성입니다. 자기를 칭찬해주면 마음이 뿌듯하고 더 인정받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입니다. 세상이 내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고 주변 사람들이 내 마음 같았으면 하는 것도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믿음으로 이런 본성을 부인해 나가야 합니다. 믿음이 이런 본성을 부인하는 힘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축복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대하며 안목의 정욕, 마음의 정욕, 육체의 정욕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것이 훨씬 크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기뻐하고 나의 선행을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욕문제를 정리했다, 청산하였다 공개적으로 밝히고 뒤로는 계속 연락을 주고 받을 때, 그의 회개 그의 믿음은 사람에게 비난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징계를 받습니다. 이기심을 회개했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말,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을 때, 사람들이 다 떠날 수 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드릴 열매를 성령께서 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가기보다 사람 좋아하고 사람에 집착하는 일을 절제할 줄 모르면 평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다 헛된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죄를 청산하고 본성을 부인하는 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본성과 습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내가 하기 힘든 희생과 헌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센터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십니다. 청년학생들을 보내주시고 계십니다. 세계각지의 선교사님들을 보내주시고 계십니다. 우리 청년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까? 많은 가능성과 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답답하고 염려가 많고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청년학생들을 개척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십니다. 학생들의 말을 들어 주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이 학생들과 대면하여 학생들의 이슈가 무엇인지 듣고 알고자 해야 합니다.
말로만 캠퍼스를 섬긴다고 하지 말고 학생들을 만나야 합니다. 학생들을 만나는 것으로 의미를 삼지 말고 학생들의 이슈를 알아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학생들 만나고 돕는 문제를 스탶목자의 일로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까? 저는 몇 년 후 은퇴합니다. 스탶목자는 역사리더십을 계승해주고 나면 멀리 떠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학생들과 대화해보지 않고 학생들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모르고 이제 몇 년 후로 다가온 리더 교체시기를 어떻게 맞이할 것입니까? 학생들을 만나도 학생들의 영혼에 다가갈 줄 모르면 어떻게 학생들의 어려움, 그 내면의 필요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방문하는 선교사님들은 건강문제, 자녀문제, 하나님역사 계승문제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선교사님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선교사님들 만나더라도 그저 좋은 손님 온 줄 여기며 들떠서 대하기만 하면, 그 분들의 어려움, 필요를 어떻게 해결해주고 어떻게 섬겨주겠습니까? 그분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센터가 된다면 어떻게 세계선교하는 모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말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부인하고 사람 좋아 들뜨는 본성을 부인하는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왜 오셨는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점에서 해결책을 도움받고 싶어하는지 알고자 하고 듣고자 하고 문제 해결을 제공하고자 해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의 질병과 치료를 내 가족일로 여기고 적극 조치를 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알아서 병원 알아보고 잘 치료 받으시라'는 식으로 무관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로 인한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도움이 되는 방안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역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 나 중심, 내 입장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2000년대 들어와 우리나라는 부자들과 사회주류층의 사회적 의무가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슈로 인하여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분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도 하였고, 부의 분배, 가진자들의 사회적 의무, 사회주류층들의 도덕적인 의무가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자기 노력을 해서 부를 얻었더라도 그런 부를 기꺼이 나누는 것이 좋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회적 정의, 부자들의 문제로만 국한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측면에서 특별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알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의 용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총을 값없이 은혜로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받고도 이 은혜를 나누는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의롭지 않은 부자와 차이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영접하고 무오하다고 믿는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나누고 베풀라고 가르치고 예수님께서는 특히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받은 은혜를 나누는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은 그냥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으로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때가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주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구제와 자선 뿐 아니라, 믿음 안에서 자기 좋은 것에 집착하는 것을 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계속 자기 말을 들어주고 주목해 주기를 바라는 것, 교회 사람들을 자기 원하는대로 통제하고 싶어하는 것, 부담스러운 일은 피하고 싶어하는 것... 믿음의 초보의 모습을 과감하게 중단하여야 합니다. 대신 장성한 자 답게 어린아이처럼 젖 먹으려 하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사회학에서 최악의 리더를 ‘무능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역사학에서는 최악의 리더를 ‘똑똑하면서 이기적인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잘 연단 받고 성장하여서 우리 중에서는 무능하면서 높은 자리만 원하는 최악의 리더가 나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기를 열심히 하여 성령의 지혜로 충만하되 자기이름 드러내고자 하는 이기적인 리더가 나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가진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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