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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익대총동문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선경나라
노루목.,십동지 묘 & 충혼탑.
설악산 노루목에는 설악을 사랑하다가
설악의 품으로 돌아간.,'산악인들의 묘지'가
옹기종기 흩어져있는데, 이름하여.,'사자의 마을'.
설악동에서 외설악 초입에 있는 노루목 산자락에 가면
현재, 호텔과 여관 등 숙박시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곳 "십동지묘"는 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한국산악회 소속 대원 10人의 무덤'
그리고, 노루목에는 설악에서 숨진 산사람들의 묘지가 모여 있다.
산악인들은 그곳을
'노루목'이라 부른다.
또는 '목'이라고도 호칭.
'목'에는 故 송준호 산악인의 묘가 있는데
그 곁에는 '엄홍석 신현주' 묘가 나란히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이름하여 '3동지 묘'라 부른다.
그중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故 송준호 묘역.
토왕폭 정상 초등을 불과 몇십m 눈앞에 두고
추락하여 숨진 클라이머의 안타까움 때문일까?
고 송준호 산악인은
생전에 이곳 노루목을
'목'이라며 자주 찾았다.
그의 유품 편지에서의
이곳은 '목'으로 쓰여있고
토왕폭은 '벽'으로 스여있다.
설악산 천화대에 석주길을 개척하고
'엄홍석 신현주' 영전에 바쳤던.,송준호.
석주길은 엄홍석 신현주를 위해 개척한 길.
그래서, '엄홍석 신현주' 두 악우의
이름 끝자를 따서.,명명했다는.,석주길.
엄홍석과 송준호는.,자일파트너이자 친구.
광성고교 피에몽산악회에서부터 함께 활동.
두 악우의 인연은 요델산악회까지 이어진다.
.
1967년 엄홍석 송준호.
요델산악회에서 함께
설악 동계산행을 할때.
요델산악회는 1963년 5월 7일에
도봉산 선인봉에서 창립된.,산악회.
선인봉과 설악산에 많은 루트를 개척.
도봉산 선인봉에는 표범길, 요델버트레스.
설악산에는 석주길, 흑범길, 칠형제봉 등.
설악산 노루목' 3동지 묘.,이야기.
.
충혼비 & 송준호 묘.
생전.,송준호
1973. 1. 2. 토왕폭에서 故人이 된.,송준호.
노루목에 안장하는., 후배 '홍경의'의 오열.
그후, 반세기 세월이 지난 후에.,故 송준호 묘.
노루목 송준호 묘 & 충혼비.
설악산
노루목에서
2013년 제50회
故 송준호 추모제.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 송 준호 傳
2008년 박인식 著 '사람의 산' 한국의 산천.
1973. 1. 2. 토왕폭 상단 단독등반 도중 추락사.
설악(雪嶽)은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솜다리꽃, 박새품, 둥굴레, 함박꽃, 전나무, 자작나무,
설악골, 용소골, 토막골, 잦은바위골, 곰골, 그리고 대청의
바람과 구름 그리고 동해까지.,거기에다 설악시를 가지고 있고
또 설악가라는 노래까지 가지고 있다. 설악의 노래는 슬픈 노래다.
아니, 서럽도록 아름다운 노래다.
“너와 나 다정하게 걷던 계곡길,
저 높은 봉우리에 폭풍우칠 적에….”
그설악의 가을에 산친구는 죽었다.
죽은 친구를 설악에 묻고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부르는 노래가 설악가이다.
“잘 있거라 설악아,
내 어이 잊으리요
꿈 같던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설악 초입 노루목에 가면 지금은 관광단지 C지구.
설악의 맞은편 산자락에 사자(死者)의 마을이 있다.
설악을 사랑하다 설악의 품에 안긴 설악인들의 묘지.
그곳에는 1969년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조난을 당한
한국산악회 10동지를 비롯해 많은 산사람들의 무덤이 있다.
인가(認可)가 난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유일.,;산악인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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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동 노루목 산악인들의 묘지에는
삼동지 묘 이외에도 십동지 묘가 있으며
상석은 고사하고 비석마저 없는 무덤이 대부분.
.
그 무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벚꽃처럼 젊은 나이에 스러졌다.
'삼동지 묘'.,엄홍석 신현주 두 사람은
설악에서 등반사고로 인하여 함께 죽었다.
고 송준호는 이 2악우와 같은 산악회 회원이었고
엄홍석과 자일 파트너였기에 석주의 무덤에 자주 갔다.
엄홍석.,석
신현주.,주.
'석주'의 무덤.
노루목 석주 묘에서는
토왕폭 상단이 보인다.
석주 묘에서 바라본.,토왕폭.
용아장성
동계 초등 후
'석주' 묘 앞에서.,
용아장성은 알피니즘을 추구하는데 부족함 없는 등반 대상지.
지금은 산악단체 추천과 등반 계획서 없이는 출입 불가능한 곳.
수렴동산장에서 봉정암까지 구곡담과 가야동 사이로 솟은 암릉.
수렴동 대피소에서 오르막길 10 분이면,
서서히 용아장성 위용이 드러나는 들머리.
.............故 송준호의 용아장성 등반기록................
1970년 10월 KCC와 요델산악회가 초등했던 용아장성
한국 클라이밍 클럽(KCC), 어센트 산악회, 요델산악회
2박 3일간의 초등 목적은 알프스 거벽등반을 위한 훈련
4 개조로 나눠 각각 수렴동과 봉정암에서 출발한, 방사상 등반 방식
여러 조가 다른 지점에서 출발, 한 지점에서 만난 후에 각각 하산 길.
새벽 3시 기상 오후 3시 등반 완료 후, 비박하는 고산 거벽등반 방식.
용아장성 끝낸 등반대는 쌍폭으로 뻗어 내린 200m 페이스 연장 등반.
이 등반은 그당시 방송국에 근무하던 박채규씨가 촬영하여 TV에 방영.
용아장성 동계 초등은 1972년 2월 요델산악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옥녀봉을 1봉으로 한 시도는 고도의 팀워크와 기술적인 면이 수반.
정확한 판단력은 목적달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산행 기본 요소이다.
유충길 대장이 이끈 3명의 공격조와 5명 지원조.
7일간에 걸쳐 용아장성 23개 봉을 모두 넘는 쾌거.
폭설 속에서 벌어진 용아장성 자일파티이기도 했다.
모두를 삼킬 듯 폭음 속에서 무너져내렸던 9봉의 낙석.
한순간의 위험이 모두의 삶을 빼앗아갈 뻔했던 사건.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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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장성 첫번째 장벽(10 m) 개구멍바위
우회로 또는 날등으로 통과하는 올리지 루트.
용아장성 1봉 옥녀봉에 올라서면
파아란 하늘 아래 까마득한 계곡 속.
전국 어디든지 '옥녀봉'은 위험한 곳.
그곳 1m 남짓 벌어진 벼랑 틈 뜀바위는
아래로 내려와 다리를 벌리면 건너기 쉽다.
용아장성은 수렴동대피소에서 시작해 봉정암 사리탑에서 끝난다.
난이도는 중급 정도이지만 초심자가 도전하기엔 위험한 코스이다.
보통 10 시간 정도 등반코스이지만 등반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용아장성은 위험한 만큼 통과한 후에 오는 성취감도 크다.
정규등산로가 아니라 신고하지 않으면 공원법 28조에 적용.
사고에 대비해 설악산 국립공원 입산허가 후., 산행이 바람직.
송준호는 총 높이 300 m.,토왕폭 상단에서 추락했다.
토왕폭 허리에서 확보를 보던 후등자의 본의 아닌 실수.
선등으로 오르는 송준호를 뒤따라가기에도 벅찼던 후등자.
확보 중 몸의 중심을 잃고 자일을 당기며 추락하다가 정지.
그 충격으로 송준호 역시 중심을 잃고 후등자와 동시에 추락.
빙폭의 확보물이 터져나가며 송준호는 허공으로 새처럼 날랐다.
선등자 송준호는 토왕폭 상단에서 하단까지 추락.
토왕폭 초등 기록을 엄홍석과 신현주 영전에 받치려던 꿈도 물거품.
토왕폭 아래까지 굴러 떨어진 송준호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석주가 죽은 1969.8.7 이후 3년 3개월 만에 발생했던.,1973.1. 2 산악사고.
최후까지 몸의 중심을 잡고, 추락에 제동을 걸었던 피켈.
송준호가 허공을 날기 직전 사력을 다해 빙벽에 찍었던 피켈.
그 피켈은 송준호가 추락한 후에도 빙벽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토왕폭 정상부 등반
토왕폭 정상
노루목이 내려다보이는.,토왕폭 정상
지금 셋은 나란히 노루목에 묻혀 있다.
언제나 늘 함께 있고싶어 했던 세 사람.
생전에 못 이룬 꿈이 사후에 이루어진다.
신현주가 가운데 눕고
그 좌우에 나란히 잠든
엄홍석, 신현주, 송준호
아래는 '노루목 묘지'의 충혼비
그 전면에 새겨진.,3동지.,추모 글.
시간과 존재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이 될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의 그 대담한 의지로
그대들은 설악에서 회생하리라.
1973년 2월 18일
요델 산악회
.....충혼비 뒷면에 새겨진 글.........
삼가 親友의 영전에 이 碑를 바친다.
親友 일동
이 비를 설립하여 주신 故 宋俊鎬 嚴弘碩
岳友의 親友 분들께 심심한 謝意를
表하는 바 입니다. 요델 岳友 일동
.......................
........................
故 송준호 시신을 노루목에 묻으며 오열하던.,늑대 홍경의
故 송준호의 배제중학교 2년 후배로 피에몽에서부터 함께 활동.
선배를 못잊어 석주길 옆에 흑범길을 개척해 故 송준호 영전에 헌납.
1974년 故 송준호의 별명인 "흑범"을 따서.,천화대 흑범길 개척
2010년 5월 심장마비로 운명한 '요델산악회 기둥' 늑대 故 홍경의,
故 송준호, 석주 삼동지 묘를 40년 간 벌초한 요델산악회 악우 최진순.
백인상이 죽자 영원히 자신의 몸과 함께 하겠다며 유골가루를 삼킨 악우,
2011년까지 설악동 C단지에서 자신의 호 백사를 딴 '104 이벤트' 회사 운영.
故 송준호와 절친했던 악우이자 '의리의 사나이'.,최진순.
故 송준호 연고지 악우들.,'인천 상록 산악회'., 깃발.
故 송준호가 죽기 전까지 몸 담았던 요델산악회., 깃발.
두 깃발을 관에 두르고 추운 겨울 땅 속에 묻힌.,故 송준호.
하늘 높은 곳까지 울리고.,
땅 속 깊은 곳까지 울렸던
악우들의 애달픈.,통곡 소리.
.
고인이 된, 송준호 엄홍석 신현주.
삶과 죽음을 초월했던.,자일 파트너.
설악가 산노래 가사처럼 살다간 삼동지.
- 故엄홍석과 故송준호.,묘비.
그 뒷면에 새겨진.,친구들 이름.
......故엄홍석 비.......
송준호 나경봉 김범석
오수동 구현모 윤재욱
심우길 김인웅 박창호
김희자
.......故송준호 비.....
김우영 홍성도 유재식
김홍규 김계순 심우길
김효원 송정길 서동현
훗날, 요델산악회는 <준호 버트레스>를 송준호 영전에 헌납
오늘날 "요델 버트레스" 라고 불리워지는., 선인봉 최장 바위길.
요델산악회 개척등반에 버팀목이었던 고 송준호를 추모하고 있다.
........................송준호 산악인...................
1969년 가을.,설악산 천화대 석주길 개척등반.
1970년 용아장성 & 인천 청악산 오버행 인공등반
1971년 잦은바위골(표범골) 50M,100M 빙벽 개척등반
1972년 설악산 용아장성 동계 합동등반 최초등반.,주역.
1965년 광운전자 공대 입학., 3학년 마치고., 69~72년 10월 육군 제대
송준호 개척 등반사는 군 복무 시절에 이루어진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가 속한 부대 지휘관을 비롯해 동료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던듯.,
제대 후 3개월도 채 안돼.,
만 25세 꽃다운 나이에 운명.
1947년 9월20일 ~1973년1월2일
................................................
故 송준호 산악인의 두 여동생과 매제를 비롯하여
광성고 시절 피에몽 산악회 동창.,나경봉 등 선후배들.
수십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노루목 묘소를 찾아 추모 행사.
<1973년1월 2일., 송준호 기일>
<1969년 8월 7일., 석주 기일>
'37년 만에 삼동지 묘' 재 정비 완료.(2006.10.16)
충혼탑과 삼동지의 비석 위치를 같은 선상에 맞춰
많은 사람이 참배할 수 있게 여유있는 공간을 확보.
1967년 송준호 나경봉 엄홍석.,사진.
'송준호, 엄홍석, 나경봉은 고교 시절부터 3총사 악우.'
"먼저 간 두 악우를 추모하는 일은.,홀로 살아 남은 자의 몫."
"노루목에서 다시 뭉치세. 나도 그 곁으로 갈께." - 나경봉 산악인 -
..................
..................
1969년
'산악인'
송 준호가
엄홍석., 석 字
신현주., 주 字를 따서
명명한 바위길 이름.,석주길.
개척완료 일자 :1969년 10월 7일
석주 死後 2달 만에 완성된 바위길.
개척자는 요델산악회.,송준호 산악인.
1969년 10월 7일 송준호는 천화대에 바윗길을 개척 후
개척자가 새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고유권한 관례에 따라
고인이 된, 두 악우를 못 잊어.,'석주길'이라고 명명한다.
세 사람은 동갑나기 악우이자, 생전에 연인 같은 사이.
셋 중 어느 한 사람도 서로 포기할 수 없는 자일 파트너.
그러나, 두 자일 파트너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았던.,송준호.
1969년 8월 7일 육담폭포에서 숨진 엄홍석과 신현주.
송준호는 개척한 '석주길'을 두 악우의 영전에 바친다.
요델 산악회 '송준호 자일 파트너'였던.,엄홍석과 신현주.
그해, 10월 7일에 개척된.,석주길.
두 악우가 숨진 후., 2달 만에 완성.
1947.9.20 ~ 1973.1.2
토왕폭에서 산화한.,송준호.
만 25 세에 삶을 마감한.,산악인.
우리나라 산악계 역사 상
토왕폭에서의 최초 희생자.
'1960년대 토왕폭은 당시 산악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었을까?'
해외 원정대 등반이 극히 제한되었던.,1960년대.
그당시 산악인들에게는 '희말라야 14좌' 같은 곳.
국내 명문 산악회마다 토왕폭 초등 명예를 꿈꾸었다.
토왕폭 초등 산악인을 배출한 산악회는
곧, 해외 원정대 선발 0 순위.,명문산악회.
토왕폭 초등은 산악인 명예이자 산악회 명예.
설악동에서 설악산의 동남쪽 연봉 밖.,토왕성계곡.
병풍처럼 애워싼 석가봉 문수봉 노적봉 보현봉 칠성봉.
오늘날 빙벽등반 매니아에게 각광 받는 높이 340m., 토왕폭,
.
토왕성 폭포의 전체 길이는 330 m
상단(140m) 중단(60m) 하단(1백30m).
상단과 하단은 고드름 직벽이지만
임신부 배처럼 튀어나온 곳도 있다.
상단과 하단을 잇는 중단은 30~50도
.
완만한 빙벽이라 실질적 높이는 300m.
동해에서 치솟는 아침 햇살을 받아
토왕폭 얼음 기둥이 수정처럼 빛날 때
바라보는 토왕성 빙폭의 위용은 신의 섭리.
.
그곳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동해바다와 외설악.
용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듯한.,비룡폭포(飛龍瀑布),
작은 폭포 6개가 잇달아 떨어지는 육담폭포(六潭瀑布)
설악동-비룡교-육담폭포-비룡폭포-토왕성폭포.
'고 송준호 산악인
만 25 세에 삶을 마감.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설적인 산악인으로 널리 알려져있는.,그.
산악인들은 '故 송준호' 그를 "표범"이라고 부른다.
1973년 1월 2월 토왕폭 초등에 도전 중 숨진.,산악인
송준호, 그는 1947년 9월 20일 서울 전농동에서 태어났다.
외아들이었고 여동생이 둘, 배제중학교, 광성고등학교 졸업.
고2 때 부친이 대우중공업 인천공장 자재부장으로 전근.
인천 이사 후 65년 광운전자공과대학 입학, 3학년까지 수료.
69년 4월 육군 입대, 72년 10월 제대했고, 산과의 인연은 고2 때.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익힌 나경봉 씨와 62년 6월 올라간 백운대.
그 맞은편에 우뚝 솟은 인수봉에서 등반을 하는 클라이머들의 모습.
송준호가 눈여겨 본 그 오름짓은 자신에게 산사람으로서 운명을 결정.
“아!~”
송준호 가슴 속에서 탄성을 자아낸 클라이머의 실루엣
그날 자신이 그 바위를 오르고 있는 미래 모습을 본.,그.
그해 여름 방학 때 도봉산 선인봉으로 간.,나경봉과 송준호.
박쥐 코스에서 다른 사람이 오르는 모습을 1주일이나 지켜본 후
그들을 본따 올랐고 그후 단 둘이 그 어깨 너머식 산행을 계속했다.
광성 고교 1학년 같은 반에서 처음 만나 등반 열정에 불탔던.,두 악우.
고3 때 산에서 만난., 요델산악회 회장 백인섭.
그당시 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바위꾼 산악인.
요델산악회를 고양이에서 표범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1967년 선인봉 표범길 개척자.,백인섭.
1964년 요델산악회는 선인봉 양지길 개척.
1965년 허리길, 1967년 설악산 표범골 등 개척.
요델은 전문 산악회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송준호를 산악계 재목으로 여겨, 요델 산악회 가입을 권유.
송준호는 팀에 소속되어 구속받고 싶지 않다며 입회 하지 않았다.
요델 산악회 회장 백인섭은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송준호에게 접근.
65년 겨울, 선인봉 표범길을 오르고 싶어했던.,대학 1학년 송준호.
표범길은 요델 산악회에 의해 개척된 후 등반한 사람이 없는 난코스
요델 회원도 아닐 뿐더러, 등반 루트도 몰랐던 송준호에게는 어려운 일.
나경봉과 한달을 계속 관찰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던.,송준호.
그해 첫눈이 올때 송준호는 나경봉에게 산에 가자고 전화를 걸었다.
나경봉은 무심히 배낭을 꾸려, 그를 따라 선인봉으로 야영을 들어갔다.
다음날 송준호는 사진기를 꺼내들고
스타트 지점의 튀어나온 바위에 올라가
표범길 루트를 살펴보며., 사진을 찍어댔다.
표범길에는 약간씩 요철된 곳마다 간밤의 눈이 쌓여 있었다.
송준호는 인화한 사진의 눈 쌓인 부분을 연결하여 선을 그었다.
그 선은 기가 막히게도 요델 추장 백인섭이 개척한 표범길과 일치.
제2의 선을 그은 그는 그 선을 쫓아 등반에 성공.
다음해 봄, 송준호는 결국 요델 산악회에 입회했다.
그후 요델 산악회 뿌리 위에서 그의 등반력은 꽃피었다.
요델에 같이 입회한., 나경봉 엄홍석 송준호
광성 고등학교 피에몽산악회 시절부터 삼총사.
셋은 의형제를 맺고 여러 등반 코스를 개척했다.
1967년 우이암 전면코스,
1968년 선인봉 요델 버트레스,
1968년 동계 설악산 표범골 개척.
1969년 10월 천화대 석주길 개척.
1970년 11월 인천 청악산 오버행 인공등반코스 등을 개척등반
1971년 1월에 설악산 표범골 50m 폭과 100m 폭 빙벽등반 성공
1972년 1월' KCC, 어센트, 요델 합동으로 용아장성을 동계 초등.
그 짧은 기간에 그처럼 많은 초등을 기록했던.,송준호.
습관적인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 언제나 노력했던.,그.
가령, 선인봉 표범길을 출발할 때, 매번 자세를 바꾸었던.,그.
언더 홀드를 붙을 때
왼쪽 슬랩으로 붙는가 하면,
바로 언더 홀드로 나가기도 했다.
그와 같이, 미세한 밸런스를 요구하는 지점은
스스로 터득한 자기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게 마련.
그렇다면, 그는 그곳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것일까?
178cm 키, 75kg 체중에 강인한 체력.
클라이머로서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턱걸이를 한손으로 여러 번 할 정도로 완력이 좋았다.
남들이 오르기 급급한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로움은 그가 더 높고 어려운 곳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었다.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을 오르며 멀리 설악산의 흑범길을,
그곳 흑범길을 오르며 천화대를, 천화대를 오르며 석주길을,
석주길을 오르며 천화대에서 뻗어내린 염라길을 보았던.,송준호
그는 여름의 용아장성을 오르며 눈 덮인 용아장성을 보았다.
표범골 50m 폭, 100m 폭에서 토왕폭을 오르는 꿈을 키웠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일반인은 구경조차 힘들었던.,카라비나
US카라비나 5~6개 만 있어도., 베테랑 산악인으로 인정 받던 시절.
40m 자일, 비브람 등산화 차림이면, 명문 여대생들에게도 선망의 대상.
그당시 구하기도 힘들었고 비쌌던.,등반 장비.
미군 US 카라비나 2개에 쌀 한가마 값이던 시절
어지간한 등반장비는 직접 제작해 사용했던.,송준호.
피아노 선을 끊어
카라비너 개폐구를
만들어 쓸 만큼.,열정.
.
US 군용 카라비너 재질까지 연구해 직접 제작
아버지 근무처 부천공장에서 테스트를 거쳐 완성
해머, 하켄, 일회용 스텐레스 아이스 하켄.,직접 제작
.
일제 볼트 하켄과 점핑 세트., 국내 보급시기는
2~3년후인 1967년 일만큼 시대를 앞서간.,송준호
공학도 기질을 살려 대부분 암벽장비를 만들어 사용.
US군용 카라비너 재질까지 연구하여 카라비너를 제작.
아버지의 직장인 부천공장에서 테스트까지 거쳐 완성된 카라비너
해머, 하켄, 일회용 스테인레스 아이스 하켄, 철제 지게배낭, 사다리.
국내에서 그 누구도 사용해 본적 없는 새로운 등반 장비를 만들어 사용.
인천에서 등산장비점까지 운영하며 등반활동에 몰입했다.
등산가로서 송준호의 진면목은 빙벽등반에서 한결 돋보였다.
71년 1월 설악산 잦은바위골의 50 m 폭과 100 m 폭을 빙벽등반
100m 폭은 후배 오세진과 단 둘이서 붙었다.
오전 9시부터 달빛 속에서까지 등반을 계속했다.
그는 열 개의 아이스 하켄을 사용한 후
정상 10여미터를 남진 지점까지 도달하여
개척등반 그 톱을 오세진 씨에게 넘겨주었다,
나머지 10여미터는 등반하기가 매우 수월한 곳이었다.
용아장성 등반 때도 이런한 배려를 후배에게 자주 베풀었다.
100m 폭포 등반을 끝내고 시계를 보니 오후 8시가 넘어 있었다.
100미터 폭을 완등하는 데 10여 시간의 사투를 벌인 것이다.
요즘 빙벽장비와 등반기술로는 납득하기 곤란한 시간이지만,
장비는 프론트 없는 8발 아이젠, 1m 넘는 길고 무거운 피켈 뿐.
바르트 훅이나 핀스크류 없이 스스로 제작한 아이스하켄만 갖고
하루종일 스텝 컷팅 등반을 한다면 열 시간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잦은바위골의 100m폭을 올랐다고 했을 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던.,송준호 산악인.
그해 요델산악회의 최용준 씨가 토왕폭 상단에 도전해
하켄 10여 개를 설치하고 슬립 했는데 하켄이 모두 빠졌다.
그토록 그당시 빙벽장비은 부실했고 토왕폭의 아성은 높았다.
송준호의 산행 의지는 토왕폭을 겨냥해 거슬러 올라갔다.
그해 가을, 설악산 등반을 마치고 석주에 성묘갔던.,송준호.
그 곁에 있던, 후배 홍경의에게 "토왕폭을 오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송준호는 노루목 석주의 성묘를 마치고는
토왕폭 일대를 다음 겨울에 대비해 정찰등반을 했다.
이듬해 12월 그는 다시 설악의 잦은바위골(표범골)을 찾아갔다.
50미터 폭을 단숨에 넘고 100m 폭포를 불과 30분만에 올라섰다.
송준호는 그곳 정상에서 표범처럼 설악의 골짜기를 향해 표호했다.
"석주야!
토왕으로 간다,
토왕으로 간다."
"토왕폭 위에
너를 위한
작은 케룬을 쌓고
그곳에 피켈을 꽂아주마. "
100미터 폭을 30분 만에 오른 그는 너무나 기뻤다.
토왕폭 등반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아니, 확신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후등자는 100 분을 소요
100m 빙폭 등반 중 송준호는 아이젠 밴드가 벗겨졌으나
균형을 잡고 고쳐맨 일화는 산악계에 신화로 전해지고 있다.
.
1969년 가을.,설악산 천화대 석주길 개척등반
1970년 용아장성 & 인천 청악산 오버행 인공등반
1971년 잦은바위골(표범골) 50M,100M 빙벽 개척등반
1972년 설악산., 용아장성 동계
합동등반 최초등반 주역.,송준호
용아장성
동계 초등 후
'석주' 묘 앞에서.,
"석주야
이제는 석주길
봉정암릉 다음은
동계 토왕성 빙벽이라네
자네가 있기에 이처럼 하고
내가 있기에 외롭고 끊기지 않는
무언의 대화 속에 다음 계획을 진행하리라."
.............故 송준호가 남긴 유품 중 2점.,.............
* 송준호가 쓴.,1972년 동계 용아장성 개척등반 기록
* 노루목 석주 묘 앞에서 찍은 사진 뒷면에 남긴., 메모.
(그 사진은 피에몽 산악회.,OB 나경봉 산악인이 보관 중.)
...............................................................................
개척등반을 할 때마다 위험한 크럭스 구간은 선등했지만
마지막 구간 10m는 동료 선후배에게 초등 공로를 양보하여
동료 선후배 산악인들에게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었던.,송준호.
178cm 키, 75kg 건전한 체구에 배려심 깊은 인품과 겸손한 성격
'피에몽 산악회' 동창 선후배들에게 아직도.,존경의 대상인 산악인.
'요델 산악회'에서는 그 영전에 선인봉 '요델 버트레스'를 헌납 추모.
개척 당시 '준호 버트레스'라 불리웠던.,'요델 버트레스'
'요델 산악회 버팀목'이란 뜻말을 품고 있는 바위길 이름.
도봉산 선인봉에서 가장 루트 거리가 긴 바위길이기도 하다.
1965년 광운전자 공대 입학, 3년 수료., 69년 4월~72년 10월 육군 제대
송준호의 개척 등반은 거의 군복무 시절 이루어진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는 소속된 부대 지휘관을 비롯해 동료들에게도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수경사에서 30개월 근무.
제대 후 3개월도 채 안돼.,
만 25세 꽃다운 나이에 운명.
1947년 9월20일 ~1973년1월 2일.
송준호 사후에
유품을 정리 하다가
발견 된.,'한통의 편지'.
..........................................
받는 이 : 석주
주 소 : 목(노루목)으로
보내는 이 : 준
주 소 : 벽에서
..........................................
"잘 있었나.
그동안 나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네.
내일 벽과의 감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등반 날, 나를 도와줄 S 상대
J와P 두 악우를 소개 하겠네,
기억해두고 깊이깊이 사귀어보고 싶은 악우들 일세.
지기도 아닌데 나를 support해 준다는것은 고마운 일일세 .
석주도 고마워할거야,
현재 나는 내 마음을
정리하고 있다네.
전진,용감한 후퇴,
서두르지않고
차분히 한스텦 한스텦
올라갈 것이네.
나는 확신한다
아직 너는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을..
석주가 있기에
나는 더욱열심히
한발 한발 힘차게
오를 것이네 ...
정상에서 대화를!
노루목에서 일배 하세!
좁은 지면을
메우기보다는
서로 힘찬 격려로
서로를 지켜주면 좋을걸세,
용아장성처럼 ....
후회하지 않을 행동뿐
두려워하지는 않겠네.
나의 맘 한없이 메꾸고 싶지만
주고받을 이야기는 벽 꼭데기에서!
여유를 가져보세.
1월 1일 새해 아침에
이러한 일들이 있다는 것은
보람일세. 넘기기 싫은 하루였다네."
.............................
.............................
토왕폭 초등 도전 전날 밤.
비룡산장으로 올라간 송준호
73년 1월 1일 밤 석주에게 쓴 편지.
1972년 12월 30일, 설악산은 빙벽등반에 좋은 날씨
맑은 가운데 바람도 적당했고 섭씨 영하 10도 안팎.
오전 11시 송준호는 사흘 앞 D -day를 대비 정밀답사.
아이젠도 없이 피켈만 들고 토왕폭 하단을 돌아
중단의 완만한 오른쪽 상단 출발지점 들머리 도착.
그곳을 살펴본 후 등반장비 일부를 눈속에 묻고 하산.
설악동에서 요델산악회 백인섭 선배에게 전보.
'토왕폭 빙벽의 상태가 등반에 최적임. 피켈.아이젠.
아이스하켄 지참, 31일 비행기편으로 오기 바람. - 준호 -'
이튿날 맑은 날씨지만 강한 바람이 불었던 오전 3시 설악동.
송준호는 백인섭.박경립에게도 전화했으나 통화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송준호는 함께 훈련한 S대 산악회 악우에게 지원요청.
그 다음날 73년 1월 1일 아침.
영하 8도 기온 속에 맑은 날씨.
송준호와 지원조 두명은 설악동에서
등반에 필요한 몇 가지 물품을 구입.
............................................
............................................
1973년 1월 2일 영하 5도 기온
토왕폭 초등반 도전에 적당한 날씨.
드디어, 4일 전부터 기다렸던.,D-day.
오전 8시 40분 송준호와 지원조는
비룡산장을 떠나 토왕폭 아래 도착.
토왕성 빙폭의 전체 길이는 330 m
상단(140m) 중단(60m) 하단(1백30m)
토왕폭 국내 초등 기록을
석주의 영전에 바치겠다고
그앞에서 굳게 다짐한 송준호.
토왕폭 상단 40m 지점 고드름 기둥까지 1피치(40 m 안팎)
그곳에 70m 자일을 고정하고 지원조로부터 1백20m 자일을 받아
토왕폭 상단 빙벽을 2시간 정도에 끝낼 계획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송준호와 두명의 지원조 첫번째 휴식처
송준호가 사흘 전 장비를 묻어두었던 곳.
토왕폭 중단 완만한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 낮 12시 15분.
송준호는 70m 자일을 몸에 묶고 선등, 후등자는 뒤따랐다.
송준호를 뒤따라 온 후등자는 5~6m 간격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송준호와의 체력과 기량 차이로 역부족.
송준호가 토왕폭 상단 출발지점에 도착할 무렵
후등자는 40m 떨어진 채 자일을 풀며 뒤따르다가
가파르게 턱이 진 빙벽 앞에서 진로를 바꾸려는 찰나.
균형을 잃고 넘어진 후등자가 외친 외마디.."앙카!"
송준호도 그 충격을 감당 못하고 후등자와 동반추락.
앙카는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요청하는 구호.
안전지대에서 등반과정을 촬영하다가 놀란 나머지 대원
송준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빙벽 중단에서 미끄러졌다.
후등자는 아이젠이 얼음에 걸리며 안전지대로 추락했다.
하지만, 송준호는 그 형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추락을 멈추려 피켈로 얼음을 '지익 지익'긁은 송준호.
그러나,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끝내 멈추지 않아.,추락사.
중단을 벗어나 하단으로 추락하며 허공을 나르는 물방울
모든 것은 끝났고 중단과 하단이 맞닿은 곳에 꽃힌.,피켈.
마지막 제동을 위해 휘두른 피켈만 토왕폭에 박혀 있었다.
.
'토왕폭 2시간 개척등반 시도는 무모했을까?'
"송준호는 무섭도록 차갑고 이지적인 친구.
10년간 미끄러지거나 추락한 적이 없었는데
이건 확률적으로 제로에 가깝도록 어려운 일." -나 경봉 -
송준호의 도전이 무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훗날 토왕폭을 등반한 후배들에 의해 입증된다.
70년대 말부터 표범골 100m폭 등반은 30분 소요.
토왕폭 등반 두 시간은 송준호가 계획한 시간과 일치.
그당시 장비로도 요즘 클라이머와 맞먹는 그의 등반력.
송준호 산악인은 그당시 7~8년은 시대를 앞서간 산악인.
'1972년 12월 눈덮힌 잦은바위골(표범골)을 찾아갔던 송준호.'
'50m폭을 단숨에 넘고, 100m폭을 불과 30분만에 올라섰던.,그.'
'그곳에서 330m 높이 토왕폭을 2시간 내 등반할 결심을 굳혔던 그.'
1973년 1월 2일.
고 송준호 산악인.
토왕폭에서 추락사.
"혹시, 자살이 아니었을까?"
"단순한, 실족사고 였던걸까?"
"단독등반은 무모한 시도였을까?"
그당시, 산악인들의 관심사.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록..
풀리지 않았던.,미스테리 관심사.
이미 고인이 된 송준호는 말이 없고
살아 남은 지인들도 그 사실을 잘 몰라서
훗날 , 뭇 세인들까지 온갖 추축 만 난무할뿐..
..........................
받는 이 : 석주
주 소 : 목(노루목)으로
보내는 이 : 준
주 소 : 벽에서
...............................
"잘 있었나.
그동안 나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네.
내일 벽과의 감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
이승에서 저승으로 쓴 편지.
석주는 고 엄홍석, 고 신현주.
벽은 설악동 노루목 산악인 묘.
토왕 빙폭 초등의 꿈을 품에 안은채
설악산 토왕 빙폭 상단 허공에서 산화
짧고 굵은 삶을 살다 간.,전설적인 산악인.
요델산악회 "흑범".,고 송준호.
"비호처럼 날렵한 .,검은 실루엣."
"'요델산악회 개척 등반사'의 전설."
"그를 상징하는 선인봉.,요델버트레스."
1973년 가을, 고 송준호 용아장성 추모등반 1주기 행사
용아장성 14번째 암봉에 추모동판을 부착한.,요델산악회.
용아장성에서 14번째 암봉은 히말라야 14좌를 상징하는 곳.
.
그곳 동판 뒷면에 연서를 써 넣은., 까만돌.
그것은 고인에게 보내는.,연서이자, 마지막 편지.
'그대의 뜻대로 스카렛 오하라처럼 살아가리라.'- 까만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의 여주인공, 스카렛 오하라.
송준호는 토왕폭 등반 후 까만돌과 그 영화를 보기로.,약속.
73년 1월 5일 중앙극장 앞 약속장소에 송준호는 나오지 않았다.
1월 2일 이미 고인이 된 송준호는 그곳에 올 수 없기 때문.
까만돌은 송준호를 기다리다가 그후 혼자서 그 영화를 보았다.
그날 밤 불길한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송준호의 죽음을 직감한다.
송준호가 토왕폭을 오르다가 떨어지는 꿈을 꾼.,까만돌.
꿈속 송준호는 까만돌이 짜준.,목도리 모자 장갑을 끼고 있었다.
까만돌의 꿈속에 나타난 송준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려는듯 했다.
꿈속에서 만난 송준호가 까만돌에게 남겼던 마지막 메세지이자 당부.
'내가 없더라도 스카렛 오하라처럼 용기를 잃지 말고 살아가라.'
까만돌이 송준호 추도식에서 동판 뒷면에 연서를 써넣게 된 배경.
그녀는 송준호와 결혼하면 스위스에서 보금자리를 펼 예정이었다.
그곳 등산학교를 졸업 후 히말라야 전문 가이드가 되려던 그들의 꿈.
용아장성 14번째 암봉에는
죽어서라도 그 꿈을 이루라는
산악인 악우들의 바램이 담겨있다.
'국내 최초 히말라야 14좌 등정.'
'고 송준호의 연인이었던.,까만돌.
송준호 사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여주인공 스카렛 오하라.
'그대의 뜻대로
스카렛 오하라처럼
살아가리라.' -까만돌-
1973년 가을 용아장성 동판 뒷면에 연서를 써 넣었던.,까만돌.
1974.1.2. 故 송준호 1주기에 참석차 노루목을 찾은.,신혼 부부.
7주일 동안 전국 신혼여행 49일째 마지막 날에 찾은.,송준호 영전.
생전에 송준호와 자일파트너였던 두 악우에게는
'故 송준호와의 이별여행이자 49일 간 신혼여행.'
신부가 송준호의 영전 앞에 절하며 내려 놓은 까만돌 2개.
신부가 내려 놓은 그 까만돌 2개를 다시 집어 든 신랑.,상록수.
까만 조약돌 하나는 故송준호가 생전에 그녀인듯 품고 다녔던 유품.
또 하나는 그녀가 송준호인듯
늘 몸에 지녔던.,옛 사랑의 징표.
그 까만돌 2개를 다시 신부의 손에., 꼭 쥐어주는 신랑.
故 송준호 1주기 추모객들의 눈시울을 적신.,신랑의 맹세'
석주가 죽은 후 송준호의 자일 파트너였던.,까만돌과 상록수.
"친구여! 편히 눈을 감게나.
까만돌은 내가 보살펴 주겠네."
까만돌과 희야봉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싶어했던.,故 송준호
故 송준호가 생전에 까만돌과 신혼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던.,석주길.
'옛 애인'이었던 송준호의 영전을 찾아온 까만돌 곁엔 상록수가 있었다.
월간 '산' 기자이자.,조선일보 방일영 회장의 비서였던.,김백이
아담한 키, 도톰한 입술, 부드러운 목소리,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
까무잡잡한 피부에 스카렛 오하라 여배우 같은 매력을 지닌.,미모.
1973년 1월 2일에 첫사랑 송준호가 토왕폭에서 고인이 된 이후
1974년 1월 2일에 1년이 지났어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까만돌.
그 까만돌을 곁에서 그림자처럼 지켜주며 그 아픔을 함께 했던 상록수.
까만돌의 이별여행에 그림자처럼 동행한 상록수.
49일 간 여행을 함께 한 두 사람은 신혼부부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 속에는 똑 같은 아픔이 있었다.
송준호와 자일파트너이자 의형제였던 상록수의 아픔.
'첫사랑이자 자일파트너' 송준호를 잃은 까만돌의 아픔.
까만돌의 이별 여행에 그녀를 지켜주려고 동행한.,상록수.
그녀의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연., 상록수의 자상함과 성실함.
"내 고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키운 토끼로 털코트를 만들어 주고 싶소."
그 프로포즈를 받고 까만돌은 그와 농촌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된다.
1973년 1월 2 일 토왕 빙폭에서 숨진, '까만돌의 첫사랑' 故 송준호.
1973년 1월 5일.,이미 고인이 되어 약속장소에 나오지 못한.,故 송준호.
그래서, 고인이 된 송준호의 장례식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던.,연인 까만돌.
1973년 늦가을, 용아장성 14봉
동판 뒷면에 연서를 써넣었던.,까만돌.
'그대의 뜻대로 스카렛 오하라처럼 살아가리라.'
그후 49일간 이별 여행을 했건만,잊으려 해도 잊혀지지지 않았던.,그.
1974년 1월 2일 故 송준호 묘소를 찾은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추웠을까?
1969.8.7 고인이 된 석주를 못잊어 그 곁에 묻힌.,'영원한 사랑' 故 송준호.
좌측 엄홍석 묘,
중앙 신현주 묘,
우측 송준호 묘.
까만돌이 짜준.,목도리와 모자그리고 장갑을 끼고
차가운 땅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잠든.,옛 연인 송준호.
'옛 연인 송준호' 그 곁에는 석주가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생전에 연인처럼 다정했던 자일파트너.,세 사람.
1969년 가을, 석주길을 개척할 무렵
이미 연인 사이였던.,'까만돌과 송준호.
그래서, 석주길을 개척할때 동행한.,그녀.
'신혼여행을 석주길로 가자던.,산악인 송준호.'
'신혼의 첫날밤을 희야봉에서 보내자던.,그 남자.
'마냥, 가슴이 설레였던.,첫사랑 그 남자의 프로포즈.
'희야봉은 언제 누가 명명한 지명일까?'
'환희에 찬 초야(初夜)를 의미하는 이름일까?'
'개척자가 처녀지를 개척한 기쁨을 뜻하는 이름일까?'
1969년 가을, 프로포즈를 받은 그 순간부터
1973년 1월 2일 그가 고인이 된, 그 이후까지도
까만돌의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아가버린.,그 남자.
월간 '산' 기자., 까만돌
전설적인 산악인.,송준호.
두 사람의 인연은 운명일까?
1969년 가을, 송준호는 산악계에서 떠오르는 별.
석주길 개척 중인 송준호를 취재차 동행한.,까만돌.
송준호의 인간적인 매력에 깊이 빠져버리고 만.,그녀.
월간 산 기자로 근무하며 산에 깊이 빠져들면서도
'산악인의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된.,까만돌.
연인 송준호와 함께 평범한 삶을 누리고 싶었던.,까만돌.
그러나, 산을 향한 송준호의 열정은 막을 수 없었던., 그녀.
토왕폭 초등 도전조차 연인 까만돌에게 알리지 않았던.,송준호.
송준호 마음 속에는 사랑보다 등반 열정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옛 자일파트너 석주를 못잊었던 걸까?
석주 사후에 송준호의 자일 파트너.,까만돌과 상록수.
셋이 함께 등반을 하면서도 석주를 그리워했던.,송준호.
석주 만큼 송준호의 열정을 채워준 자일파트너는 없었던듯.
'1969.8.7 고인이 된 석주를 죽도록 잊지 못했던., 송준호.'
'1973.1.2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겨울 땅 속에 묻힌.,그 남자.'
그녀에게 그가 남기고 간 유품은 앨범, 일기장, 까만 조약돌 2개.
비룡폭포 아래 육담폭포에서 추락사 한.,석주.
비룡폭포 위 토왕성 빙폭에서 추락사 한.,송준호.
결국, 노루목 산악인 묘지에서 다시 만난.,세 사람.
'결국, 죽도록 잊지 못하던 석주 곁에 나란히 잠든.,그 남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첫사랑.'
'74년 1월 2일, 상록수와 함께 찾은.,고 송준호 1주기.,노루목 묘.'
'상록수 外 이 세상 그 누가
까만돌의 속마음을 헤아려줄까?'
'내 고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키운 토끼로
털코트를 만들어 주고 싶소.'
까만돌의 꽁꽁 얼어붙은 속마음을 봄눈 녹인듯 했던 그 프로포즈.
故 송준호와 절친했던 상록수는 까만돌과 1974년 11월 24일에 결혼식.
두 사람은 전라북도 장수에서 5~6만평 농장을 일구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상록수의 선산.,3만평에다
까만돌의 결혼 준비금으로
구입한 땅을 합친.,서울 농장.
두 사람은 서울농장 개척으로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대신했다.
그 비용을 투입해 일군.,서울농장.
장수읍에서 30km 떨어진 대성리 황무지에 흙벽돌 단칸방
전기도 없는 외딴 곳에서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대신한.,신혼.
낮에는 황무지 일구기에 바빴고, 밤이면 호롱불 아래에서 독서.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가 아궁이에 지피고
진동하는 소똥냄새와 소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영농 계획을 세우고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 했다.
그래서, "상록수"로 더욱 알려진.,이경해.
까만돌의 내조로 농촌 지도자가 된 이경해.
까만돌 부부의 삶은 장수 농민들의 꿈과 희망.
전국의 농촌지도자 영농 후계자를 꿈꾸던 청년들
장수의 서울농장은 그들에게 꿈을 현실로 보여준 곳.
그래서, 전국의 농촌 청년들이 서울농장으로 찾아왔다.
1993년 까만돌이 교통사고로 숨지기 전까지는.,그러했었다.
2003년 9월 11일 맥시코 칸쿤에서 활복자살한 상록수.,이경해.
농민운동가로 변신한 그가 까만돌을 못잊어 일기장에 남긴 기록.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당신!
대학까지 나온 서울 색시를 데려다가 고생만 시키고
저 세상에 보냈을때 나도 세상과 인연 끊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소. 당신이 미치도록 보고 싶습니다. (중략)
내가 흔들리지 않게
하늘나라에서 나를 지켜주오."
죽은 아내에게 쓴 편지들은 부치지 못한채
고스란히 그의 일기장에 가득 메워져 있었다.
평생 오직 아내 까만돌 만 사랑하다 간., 상록수.
고 송준호를 못잊는 아내의 추억까지.,사랑한 남편.
장수 행을 결정한 직접적인 계기는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하려 상록수가 훈련
까만돌은 그의 에베레스트 원정을 한사코 말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산에서 잃는 일은 한 번이면 족해요,
그러니, 시골로 가서 함께 농사 지으며 행복하게 살아요.”
까만돌의 만류로 양폭산장에서 돌아온.,상록수.
두 사람의 결실인., 첫딸 보람이가 1살이 되던 해.
만약, 그가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했더라면
1977년 우리나라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자가 된
故 고상돈 산악인과 함께 국민 영웅이 될.,절호의 기회.
그당시 산악인들이 꿈에 그리던.,일생 일대의 기회.
상록수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기로 결심한다.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 김백이.,까만돌이 있기 때문.
고상돈 산악인이 국민 영웅으로 귀국할 무렵
상록수와 까만돌 부부는 서울을 등지고 장수 行.
송준호 사후, 혼자 남겨진.,까만돌
그녀를 그림자처럼 지켜준 .,상록수.
그당시, 상록수는 동양 산악회.,소속.
송준호 사후, 동양산악회 회원들과 암벽등반했던 까만돌.
송준호 없는 요델 산악회보다 동양 산악회가 마음 편했을듯.
상록수는 까만돌을 꽃인듯., 귀한 도자기인듯., 애지중지 했다.
까만돌의 그림자인양 함께 다녀 선배들의 놀림감이었던 상록수.
상록수는 누구에게도 말못할 까만돌의 아픈 속마음까지 배려한듯.
송준호 사후에 자일 파트너로 남은 두 사람은.,영원한 인생의 동반자.
1947년 전북 장수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이경해.
고향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전원생활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서울시립농대 진학후 산에서 만난 동양산악회 회장 송영태씨
그가 본격적으로 암벽에 입문을 하게 된.,계기.
“등산에 전념하면서부터 다시 태어난 기분이예요”
중학 시절 태권도 4단을 딴 무서운 주먹 실력 소유자.
전라도파 출신 주먹들로부터 끊임없는 유혹을 받았지만,
틈만 나면 산을 오르며 자연스레 그들과 결별할 수 있었다.
암벽보다는 힘을 써야 하는 겨울 종주등반, 빙벽등반에 강했다.
한겨울에 종주할 때도 러닝셔츠 바람으로 앞서 러셀하던.,이경해.
그런 힘을 인정받아 77에베레스트 훈련대원으로 선발되어 최종 훈련
그당시 대원 선발부터 훈련까지 총책임을 맡았던 김영도씨
"말 없이 끝까지 따라온, 기대해볼 만했던 친구”로 기억한다.
코오롱 등산학교 이용대 교장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장의 회고.
아내가 옛 애인 앨범과 유품을 간직케 한., 남자
상록수는 까만돌의 과거까지도 사랑한., 산사나이.
까만돌이 간직했던., 송준호의 앨범, 일기장, 유품들,
송준호가 까만돌 대신 품고 다녔던 까만 조약돌까지
버리지 말게 하였고., 고스란히 간직하게 했던., 상록수.
농민들이 힘들때 사재를 털어 앞장섰던.,상록수
농민집회에는 언제나 함께 모습을 드러냈던.,부부.
상록수의 연설문 수정, 영문 서한은 아내 까만돌 몫
까만돌이 죽은지., 퍽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장수 마을에선 그녀 칭찬이 자자하다.
한번은 농민 집회때., 일꾼들이 먹다가 님긴 밥.
까만돌이 먹기에 깨끗한 밥을 먹으라 말린 남편.
"농민들이 땀흘려 수확해 지은 밥인데
더럽고 깨끗할 것이 있나요?" -까만돌 -
덤프트럭과 충돌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김백이.
아내가 운전을 했고, 그는 옆자리에 타고 있었다.
부인과 사별한 그는 10년간 혼자서 세 딸을 길렀다.
둘째 딸 결혼식을 보름 앞두었음에도 자신의 심장을
한치 어긋남 없이 찔러야 했던.,농민 운동가의 절박감.
그로선 막다른 골목이었고, 결국 온몸을 던진 마지막 저항 .
자신의 심장을 찌른.,등산용 아미 나이프.
그는 젊은 시절에 인수봉을 오르던 그 정열로
'세계 무역기구' 높은 벽을 뚫어보려고 했던걸까?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그.
이경해(李京海·56)는 결국 격정적인 몸짓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농민의 영웅’ 이경해는 한때 열정적인 산악인이었다.
인수봉 동양길을 낸 동양산악회에 가입, 암벽에 열중한 한편
77 에베레스트 원정 최종 훈련대까지 참가했던 열정적인 산악인
세계무역기구 5차 각료회의
개막식이 열리던 9월10일 낮 12시50분,
세계적 휴양지인 멕시코 칸쿤에서의., 이경해
그는 한국 농민단체 회원 150명과 더불어 상여를 앞세우고
1만여 명의 세계 각국 반(反) WTO 시위대와 함께 칸쿤광장에서
각료회의장쪽으로 행진하다가 멕시코 경찰 바리케이드와 맞닥뜨렸다.
그는 바리케이드 위로 올라가
반대 구호를 외치다가 떨어져내렸다.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른 것이다.
고향 장수에서 낙농장 크게 일궜던 20년 전,
그때 그시절 확신으로 가득차 있던.,그의 얼굴.
전북 장수에서 그는 야산을 개간,
5~6만 평 규모에 젖소 100마리 농장을
일구어 현대판 상록수로 불리우던.,이경해.
탄탄하게 기반을 다진 그를 보고 주위 50 농가도
그를 따라 모두 낙농에 나서 장수군 일대에 목축 붐.
고향 후배들까지 설득해 낙농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그.
“여기는 젖소 키우는 법을 배우려는 후배들이 자는 방.”
그 방을 소개할 때 가슴 뿌듯한 보람을 숨기지 못했던 그.
그 확신이 좌절로 바뀌었고, 후배들의 좌절을 목격했을 때
그가 느낀 좌절과 상실감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걸까?
초원에서 까불까불 그네 타는 아이들과 함께
정겹게 목장을 산책하던 두 부부의 다정한 모습.
카메라 앞에서도 아내를 향한 애정어린.,그의 시선.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아름답고 풍요로운 전원생활의 꿈마저 좌절되자
정치 일선으로 나서 1, 2, 3대 도의원에 연이어 당선
그러나, 4·13 장수군수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그.
정부나 여론은 농산물 시장은 개방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
그로서는 막다른 골목에서 온몸을 던진 마지막 저항을 선택.
그의 세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이미 예견한 듯.
아버지의 활복자살 비보를 듣고 나서도 차분했다.
장녀 지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뜻을 기려 WTO 협상 반대 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시신을 인도하지 않겠다.”
둘째 딸의 결혼식이 9월28일 보름 뒤로 잡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예정한 장소에서 자신의 심장을
한치 어긋남 없이 찔러야 했던, 농민운동가 상록수의 절박감.
비보를 들은 동양산악회 후배 윤철상
전화기 저편에서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그의 장례식을 준비했던 장수군의 한 공무원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이경해 전 한농련
(한국 농업 경영인 중앙 연합회) 회장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의 농촌이 죽어가고 농민들은 쓸쓸하고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바로 이를 위해 그는 스스로를 희생했고,
때문에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농민 운동가.,이경해
추모하는 마라톤 대회
전라북도 장수군., 개최
마라톤 참가선수., 萬여명
자일파트너로 사랑과 죽음을 초월했던.,세 악우.
지금은 고인이 된., 송준호 산악인과 까만돌 그리고 상록수.
'석주길 동판'.비화 속에서 설악산의 전설로 되살아나길 바란다.
송준호와 까만돌 그리고 상록수.
삶과 죽음을 초월했던.,자일 파트너.
생전에 세 사람은 설악가를 즐겨 불렀다.
설악산이 있는 한,
멈추지 않을 <설악가>.
1969년 눈사태로 숨진
'영원한 총각 3인'.,고인
故.,오준보 임경식 이희성.
그 영원한 동정들을 위로하는 추모곡.,설악가.
1970년 봄에 도봉산장에서 만들어진.,산노래.
그당시 경희대 치대 2학년 이정훈., 작사.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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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가 /신현대 노래
이정훈 / 작사 &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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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굽이져 흰 띠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던 계곡의 여운
내 어이 잊으리오 꿈 같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2절
저 멀리 능선 위에 철쭉꽃 필 적에
너 와 나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던 길
내 어이 잊으리오 꿈 같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3절
저 높은 봉우리에 백설이 필적에
나는 야 생각한다 친구의 모습
내 어이 잊으리오 꿈 같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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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요델 산악회 회장 취임 후 용대리 첫모임
히말라야에 도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던.,나경봉
그 모임에 참석한 까만돌의 만류로 그 꿈을 접었다.
1963년 5월 17일 정식 발족한 요델산악회
1980년 요델산악회 회장에 취임한.,나경봉
1990년 5월까지 10년동안 요델산악회 회장.
그후 요델산악회에서 제명된.,나경봉.
백인섭 초대회장과 본격적인 갈등 탓.
2007년 잦은바위골 초등 기사에서 시작.
오세진이 세상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1968년 표범골 100m폭 초등 기록 정정을 요구한 나경봉
나경봉의 요구는 백인섭 초대회장에게 번번이 묵살되었다.
이듬해 2008년 5월, 도봉산장에서의 요델산악회 창립기념식
"잦은바위골을 거쳐 공룡능선, 봉정암까지 신루트
100m폭 상단 끝 부분을 내가 마무리했으니 초등자"
백인섭 초대회장의 억지 주장에 폭발하고 만 나경봉.
이후 두 사람은 5년간 언쟁을 이어가며 서로 비방.
그후 차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백인섭 초대회장.
2012년 3월 16일 "100m폭 초등은 1971년 송준호.
오세진 산악인이 한 것이 맞다"고 인정하며 일단락.
사실,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 조짐은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싹트고 있었다.
1973년 1월 2일 송준호 토왕폭서 추락사를 두고
백인섭 산악인이 "무모한 짓."이라고 한 말이 화근.
2006년 노루목 삼동지( 송준호, 엄홍석, 신현주)묘
축대가 함몰되어 보수 작업을 하기 위해 보고를 하자
"너희끼리 알아서 해"라는 백인섭 산악인의 매몰찬 대답
2013년 1월, 고 송준호 40주기 추모제에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요델산악회 백인섭.
추모제는 '설악 행각' 주관으로 조촐하게 치뤄졌다.
그래서, 더욱 고 송준호 산악인의 명예를 찾기 위해
그당시 개척 기록에 관해 진실 규명에 앞장선 나경봉.
천화대 석주길 개척 비화로 세인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요델산악회의 공식 발표가 맞을까?
나경봉 산악인의 주장이 맞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