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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十五回 弒齊光崔慶專權 納衞衎甯喜擅政
제65회: 제나라 군주를 죽인 최저 경봉이 전권하고 위나라 영식 영희가 정권을 맘대로 하다.
話說,周靈王二十三年,夏五月,莒黎比公因許齊侯歲歲來朝,是月,親自至臨淄朝齊。莊公大喜,設饗於北郭,款待黎比公。崔氏府第,正在北郭。崔杼有心拿莊公破綻,詐稱寒疾不能起身,諸大夫皆侍宴,惟杼不往,密使心腹叩信於賈豎。豎密報云:「主公只等席散,便來問相國之病。」崔杼笑曰:「君豈憂吾病哉?正以吾病為利,欲行無恥之事耳。」乃謂其妻棠姜曰:「我今日欲除此無道昏君!汝若從吾之計,吾不揚汝之醜,當立汝子為適嗣﹔如不從吾言,先斬汝母子之首。」棠姜曰:「婦人,從夫者也。子有命,焉敢不依?」
한편, 주양왕 23년(기원전 549년) 여름 5월에 거나라 여비공은 제장공이 해마다 조공을 허락하여 이달에 친히 제나라 임치성에 들어와 제장공을 알현했다. 제장공이 크게 기뻐하며 북쪽 성곽 부근에 큰 잔치를 열게 하여 여비공을 환대했다. 그런데 최저의 집도 역시 북쪽 성곽 부근에 있었다. 최저는 제장공을 잡아 죽여야겠다고 작정하고, 거짓으로 감기에 걸려 몸을 일으킬 수 없다고 했다. 여러 대부가 모두 잔치에 참석했지만, 오직 최저는 가지 않았다. 몰래 심복을 환관 고수(賈竪)에게 보내어 무슨 소식이 있나 알아보게 했다. 고수가 몰래 보고하기를. “주공은 오직 잔치가 파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상국의 집에 들러 문병하겠다고 하십니다.” 했다. 최저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주군이 어찌 내 병을 걱정하겠는가? 바로 나의 문병을 핑계로 염치없는 짓을 하려는 수작이다.” 하고, 즉시 그의 처 당강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오늘 이 무도한 혼군을 죽이려고 하오! 당신이 만약 내 계획을 따라 준다면, 나는 당신의 더러운 짓에 대해 소문내지 않고 그대의 소생을 적자로 삼겠소! 그러나 만약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면, 먼저 당신 모자의 목을 베겠소!” 하니, 당강이 말하기를, “부인은 남편을 따라야 하니, 그대가 명령하는데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했다.
崔杼乃使棠無咎,伏甲士百人於內室之左右,使崔成崔疆伏甲於門之內,使東郭偃伏甲於門之外。分撥已定,約以鳴鐘為號。再使人送密信於賈豎:「君若來時,須要如此恁般。」且說,莊公愛棠姜之色,心心念念,寢食不忘,只因崔杼防範稍密,不便數數來往。是日,見崔杼辭病不至,正中其懷,神魂已落在棠姜身上。燕享之儀,了事而已。事畢,趨駕往崔氏問疾。閽者謬對曰:「病甚重,方服藥而臥。」莊公曰:「臥於何處?」對曰:「臥於外寢。」莊公大喜,竟入內室。時州綽、賈舉、公孫傲、僂堙四人從行。
최저가 즉시 당무구를 시켜 갑사 백 명을 내실의 좌우에 매복하게 하고, 다시 최성과 최강에게도 무사들을 이끌고 대문 안에 매복하게 했다. 그리고 동곽언을 시켜 무사들을 이끌고 대문 밖에 매복하게 했다. 배치가 정해지자 종을 울려서 신호하기로 약속했다. 다시 사람을 시켜 고수에게 비밀 전갈을 보내기를, “주군이 만약 올 때에 반드시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했다. 한편, 제장공은 당강의 미색을 사랑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했으나 최저가 단속을 엄하게 하였으므로 자주 갈 수가 없었다. 그날 최저가 병으로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바로 마음속으로 당강의 몸 위에 있을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잔치가 끝나자 제장공은 최저의 병을 문안하러 갔다. 문지기가 거짓으로 고하기를, “상국의 병이 매우 중하여 방금 약을 드시고 누웠습니다.” 하니, 제장공이 말하기를, “어느 방에 누웠느냐?” 했다. 문지기가 대답하기를, “바깥 사랑채에 누워 계십니다.” 하니, 제장공이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내실로 들어갔다. 그때 주작(州綽), 가거(賈擧), 공손오(公孫傲,) 루인(僂堙) 등 네 사람이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賈豎曰:「君之行事,子所知也。盍待於外,無混入以驚相國。」州綽等信以為然,遂俱止於門外。惟賈舉不肯出,曰:「留一人何害?」乃獨止堂中。賈豎閉中門而入。閽者復掩大門,拴而鎖之。莊公至內室,棠姜豔妝出迎。未交一言,有侍婢來告:「相國口燥,欲索蜜湯。」棠姜曰:「妾往取蜜即至也。」棠姜同侍婢自側戶冉冉而去。莊公倚檻待之,望而不至﹔乃歌曰:「室之幽兮,美所遊兮。室之邃兮,美所會兮。不見美兮,憂心胡底兮!」歌方畢,聞廊下有刀戟之聲。莊公訝曰:「此處安得有兵?」呼賈豎不應。
고수가 말하기를, “주군이 하시는 일을 그대들은 알 것입니다. 밖에서 기다리지 않고 몰려 들어와서 상국을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했다. 주작 등이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모두 문밖에 머물렀다. 오직 가거가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말하기를, “한 사람 정도 따라 들어간다고 해서 무슨 해가 되겠소?” 하고, 홀로 방안에 머물렀다. 고수가 중문을 닫고 들어가자, 문지기가 대문을 닫은 후에 빗장을 질렀다. 제장공이 내실에 들어가자 당강이 예쁘게 화장하고 나와서 맞이했다. 아직 한마디 말도 나누기 전에 시녀가 와서 고하기를, “상국께서 입이 말라서 뜨거운 꿀물을 찾고 계십니다.” 하니, 당강이 말하기를, “첩이 가서 꿀물을 가져다주고 곧 오겠습니다.” 했다. 당강이 시비와 함께 옆방으로 가서 천천히 사라졌다. 제장공이 난간에 기대어 기다렸으나 당강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제장공이 곧 노래하기를, “그윽한 방이여, 미인이 노는 곳이로다. 깊숙한 방이여, 미인과 만나는 곳이로다. 미인이 보이지 않음이여, 울적한 마음 둘 곳이 없도다.” 했다. 노래가 막 끝나자 복도에서 도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장공이 의아하여 말하기를, “이곳에 어찌하여 군사들이 있는가?” 하고, 고수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須臾間,左右甲士俱起。莊公大驚,情知有變,急趨後戶,戶已閉。莊公力大,破戶而出,得一樓登之。棠無咎引甲士圍樓,聲聲只叫「奉相國之命,來拿淫賊!」莊公倚檻諭之曰:「我,爾君也﹔幸舍我去!」無咎曰:「相國有命,不敢自專。」莊公曰:「相國何在?願與立盟誓不相害!」無咎曰:「相國病不能來也。」莊公曰:「寡人知罪矣!容至太廟中自盡,以謝相國何如?」無咎又曰:「我等但知拿奸淫之人,不知有君。君既知罪,即請自裁,毋徒取辱。」莊公不得已,從樓牖中躍出,登花臺,欲踰牆走。無咎引弓射之,中其左股,從牆上倒墜下來。甲士一齊俱上,刺殺莊公。
잠시 후, 내실의 좌우에 매복하고 있던 무사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제장공이 크게 놀라 변란이 난 줄 알고, 급히 뒷문으로 달아나려고 했으나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제장공은 힘이 세어서 문을 부수고 나와 다락 위로 올라갔다. 당무구가 무사들을 이끌고 다락을 에워싸고 소리 지르기를, “상국의 명령이니 저 음탕한 도적놈을 잡아라!” 했다. 제장공이 난간에 기대어 달래기를, “나는 너희들의 군주다. 나를 갈 수 있게 놓아다오!” 하니, 당무구가 말하기를, “상국의 명이라 감히 제 맘대로 못합니다.” 했다. 제장공이 말하기를, “상국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너희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다.” 하니, 당무구가 말하기를, “상국은 몸이 아파 이곳에 올 수 없소!” 했다. 제장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죄를 알고 있다! 내가 태묘에 가서 자진하여 상국에게 사죄하겠다. 어떠냐?” 하니, 당무구가 또 말하기를, “우리는 단지 간사하고 음탕한 사람을 잡을 뿐이지 군주는 알지 못하오. 군주가 죄를 알았으면 곧 스스로 자진하면 그만이지 헛되이 창피를 당하지 마시오.” 했다. 제장공이 할 수 없이 다락 창문으로 뛰어나가 화단으로 올라가서 담을 넘어 달아나려고 했다. 당무구가 활을 당겨 쏘아서 제장공의 왼쪽 허벅지를 맞히자 담장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제장공을 찔러 죽였다.
無咎即使人鳴鐘數聲。時近黃昏,賈舉在堂中側耳而聽,忽見賈豎啟門,攜燭而出曰:「室中有賊,主公召爾。爾先入,我當報州將軍等。」賈舉曰:「與我燭。」賈豎授燭,失手墜地,燭滅。舉仗劍摸索,纔入中門,遇絆索躓地。崔疆從門旁突出,擊而殺之。州綽等在門外,不知門內之事。東郭偃偽為結好,邀至旁舍中,秉燭具酒肉,且勸使釋劍樂飲,亦遍飲從者。忽聞宅內鳴鐘,東郭偃曰:「主公飲酒矣。」州綽曰:「不忌相國乎?」偃曰:「相國病甚,誰忌之?」有頃,鐘再鳴,偃起曰:「吾當入視。」偃去,甲士悉起。州綽等急簡兵器,先被東郭偃使人盜去了。
당무구가 즉시 사람을 시켜 종을 몇 번 울렸다. 그때는 황혼에 가까웠는데, 가거가 집 안에서 귀를 기울여 들었다. 갑자기 고수가 문을 열고 촛불을 들고나오면서 말하기를, “내실에 도적이 있어 주공께서 그대를 부르시오. 그대가 먼저 들어가면 내가 주작(州綽)장군 등에게 알리겠소.” 하니, 가거가 말하기를, “나에게 촛불을 주시오.” 했다. 고수가 촛불을 주다가 실수하여 땅에 떨어뜨리니 촛불이 꺼졌다. 가거가 검을 손에 들고 길을 더듬어 겨우 중문으로 들어서다가 올가미에 걸려서 바닥에 넘어졌다. 최강이 문 옆에서 튀어나와 가거를 쳐서 죽였다. 주작 등은 문밖에 있어서 문안의 일을 몰랐다. 동곽언이 거짓으로 잘 지내자고 하면서 주작 등을 행랑채로 초대했다. 촛불을 켜고 술과 고기를 차려내어 칼을 풀어놓고 즐겁게 마시라고 권했다. 또한 두루 따라온 종자들에게도 술을 내어 마시게 했다. 갑자기 집 안에서 종소리가 들리니, 동곽언이 말하기를, “주공께서 술을 들고 계신다는 신호군요.” 했다. 주작이 말하기를, “상국을 꺼리지 않습니까?” 하니, 동곽언이 말하기를, “상국은 병이 중한데 누가 누구를 꺼리겠습니까?” 했다. 잠시 후, 종이 다시 울리자 동곽언이 일어나며 말하기를, “제가 안으로 들어가 살펴봐야겠습니다.” 했다. 동곽언이 나가자마자 매복했던 무사들이 모두 일어나 덮쳤다. 주작 등이 급히 병기를 찾았으나 동곽언이 먼저 사람을 시켜서 훔쳐 가 버렸다.
州綽大怒,視門前有升車石,磔以投入。僂堙適趨過,誤中堙,折其一足,懼而走。公孫傲拔繫馬柱而舞,甲士多傷。眾人以火炬攻之,鬚髮盡燎。時大門忽啟,崔成崔疆復率甲自內而出,公孫傲以手拉崔成,折其臂,崔疆以長戈刺傲,立死,并殺僂堙。州綽奪甲士之戟,復來尋鬥,東郭偃大呼:「昏君奸淫無道,已受誅戮,不干眾人之事,何不留身以事新主?」州綽乃投戟於地曰:「吾以羈旅亡命,受齊侯知己之遇,今日不能出力,反害僂堙,殆天意也!惟當捨一命以報君寵,豈肯苟活,為齊晉兩國所笑乎?」即以頭觸石垣三四,石破頭亦裂。
주작이 대로하여 문 앞에 섬돌이 있는 것을 보고 섬돌을 들어 던져 넣었다.루인이 마침 달려 지나다가 섬돌에 잘못 맞아서 한쪽 다리가 부러져 두려워서 달아났다. 공손오는 말을 매는 기둥을 뽑아 휘둘러 무사들이 많이 다쳤다. 여러 사람이 횃불을 들고 공격하니 수염이 모두 타버렸다. 그때 대문이 갑자기 열리며 최성과 최강이 다시 무사들을 인솔하여 집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공손오가 맨손으로 최성을 붙잡아 그의 팔을 부러뜨렸다. 최강이 긴 과로 공손오를 찔러 선 채로 죽이고, 아울러 루인도 죽였다. 주작이 무사의 극을 빼앗아 다시 싸움터에 돌아오자, 동곽언이 크게 외치기를, “어리석은 군주가 간음하고 무도하여 이미 죽임을 당했다. 여러분과는 상관이 없는 일인데 어찌하여 몸을 아껴서 새 군주를 섬기려 하지 않는가?” 하니, 주작이 곧 극을 땅에 던지고 말하기를, “내가 나그네로 망명하여 제장공으로부터 나를 알아주는 은혜를 입었다. 오늘 내가 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도리어 루인을 해쳤으니 아마도 하늘의 뜻인가 한다! 오직 마땅히 이 한 목숨을 바쳐 제장공의 은총에 보답하고자 한다. 내가 어찌 구차하게 살아서 제나라와 진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겠는가?” 하고, 곧 머리를 돌담에 서너 차례 부딪치니 돌이 깨어지고 머리도 깨어져 죽었다.
邴師聞莊公之死,自剄於朝門之外。封具縊於家。鐸父與襄尹相約,往哭莊公之屍,中路聞賈舉等俱死,遂皆自殺。髯翁有詩云:「似虎如龍勇絕倫,因懷君寵命輕塵。私恩只許私恩報,殉難何曾有大臣。」時王何約盧蒲癸同死,癸曰:「無益也,不如逃之,以俟後圖。幸有一人復國,必當相引。」王何曰:「請立誓!」誓成,王何遂出奔莒國。盧蒲癸將行,謂其弟盧蒲嫳曰:「君之立勇爵,以自衛也。與君同死,何益於君?我去,子必求事崔慶而歸我,我因以為君報仇,如此,則雖死不虛矣!」嫳許之。癸乃出奔晉國。盧蒲嫳遂求事慶封,慶封用為家臣。申鮮虞出奔楚,後仕楚為右尹。
병사(邴師)는 제장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 밖에서 목을 찔러 자결했다. 봉구(封具)는 자기 집에서 목매어 죽었다. 탁보(鐸父)와 양윤(襄尹)은 서로 약속하여 제장공의 시신에 곡하러 가다가, 중도에 가거 등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자살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범과 용같이 용기가 절륜한 장수들인데, 주군의 은총을 생각하여 목숨을 티끌처럼 버렸다. 사사로운 은혜를 다만 사사로이 갚았으니, 난리에 순사한 대신이 누가 있었던가?” 했다. 이때 왕하가 노포계(盧蒲癸)와 같이 죽자고 하니, 노포계가 말하기를, “무익한 일이오. 차라리 도망가서 후사를 도모하는 편이 낫습니다. 다행히 한 사람이라도 나라를 바로 잡게 되면 마땅히 서로 이끌어 줍시다.” 하니, 왕하가 말하기를, “청컨대, 바로 맹세합시다.” 했다. 맹세를 하고, 왕하는 즉시 거(莒)나라로 달아났다. 노포계도 달아나려다가 동생 노포별(盧蒲嫳)에게 말하기를, “주군이 용작(勇爵)을 만들어 나를 자신의 호위무사로 삼았다. 주군을 따라 죽을 수도 있으나 주군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내가 달아나면 너는 반드시 최저나 경봉을 섬겨서 나를 귀국시켜다오. 내가 그로써 주군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비록 죽어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했다. 노포별이 허락했다. 노포계가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노포별은 곧 경봉을 섬기겠다고 하니, 경봉이 그를 가신으로 삼았다. 신선우(申鮮虞)는 초나라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초나라의 우윤(右尹)이 되었다.
時齊國諸大夫聞崔氏作亂,皆閉門待信,無敢至者。惟晏嬰直造崔氏,入其室,枕莊公之股,放聲大哭。既起,又踴躍三度,然後趨出。棠無咎曰:「必殺晏嬰,方免眾謗。」崔杼曰:「此人有賢名,殺之恐失人心。」晏嬰遂歸,告於陳須無曰:「盍議立君乎?」須無曰:「守有高國,權有崔慶,須無何能為?」嬰退,須無曰:「亂賊在朝,不可與共事也。」駕而奔宋。晏嬰復往見高止國夏,皆言:「崔氏將至,且慶氏在,非吾所能張主也。」嬰乃嘆息而去。未幾,慶封使其子慶舍,搜捕莊公餘黨,殺逐殆盡。
그때 제나라 대부들은 최저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문을 닫고 소식을 기다렸을 뿐, 아무도 감히 제장공의 시신을 돌보러 가지 않았다. 오직 안영(晏嬰)이 최저의 집에 가서 방으로 들어가 제장공의 다리에 이마를 대고 방성대곡하였다. 그리고 일어나서 세 번 뛴 뒤에 나왔다. 당무구가 말하기를, “반드시 안영을 죽여야 사람들의 비방을 면할 수 있습니다.” 하니, 최저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어진이라고 세상에 이름난 사람이다. 그를 죽였다가 사람들의 마음을 잃을까 두렵다.” 했다. 안영이 돌아와서 진수무(陳須無)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의논하여 새 군주를 세우려고 하지 않소?” 하니, 진수무가 말하기를, “명망으로는 고지(高止)와 국하(國夏)가 있고 권신(權臣)으로는 최저와 경봉이 있는데, 이 진수무가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했다. 안영이 물러가자, 진수무가 혼잣말로, “난적이 조정을 차지했으니 내가 어찌 그들과 같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수레를 타고 송나라로 달아났다. 안영은 다시 고지와 국하를 찾아가니, 모두 말하기를, “최저가 장차 조정에 나타날 것이고 또 경봉도 있으니, 우리가 주장한다고 될 일이 아니오.” 했다. 안영이 탄식하고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봉이 그 아들 경사(慶舍)를 시켜 제장공의 잔당들을 잡아다가 모조리 죽이거나 추방했다.
以車迎崔杼入朝,然後使召高國,共議立君之事。高國讓於崔慶,慶封復讓於崔杼。崔杼曰:「靈公之子杵臼,年已長,其母為魯大夫叔孫僑如之女,立之可結魯好。」眾人皆唯唯。於是迎公子杵臼為君,是為景公。時景公年幼,崔杼自立為右相,立慶封為左相。盟群臣於太公之廟,刑牲歃血,誓其眾曰:「諸君有不與崔慶同心者,有如日!」慶封繼之,高國亦從其誓。輪及晏嬰,嬰仰天嘆曰:「諸君能忠於君,利於社稷,而嬰不與同心者,有如上帝!」崔慶俱色變。高國曰:「二相今日之舉,正忠君利社稷之事也。」崔慶乃悅。
수레를 최저에게 보내어 조정으로 모신 다음에 고지(高止)와 국하(國夏)를 불러와서 함께 새 군주를 세우는 일을 의논했다. 고지와 국하가 최저와 경봉에게 사양하니, 경봉이 다시 최저에게 양보했다. 최저가 말하기를, “제영공의 아들 저구(杵臼)가 이미 장성했습니다. 그 모친이 노나라 대부 숙손교여(叔孫僑如)의 딸이니, 우리가 그를 군주로 세우면 노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예, 예’ 했다. 이에 공자 저구를 맞아 제나라의 군주로 세웠다. 이가 제경공(齊景公)이다. 그러나 그때 제경공의 나이는 어려서, 최저가 스스로 우상이 되고 경봉은 좌상이 되었다. 최저는 군신들을 태공의 묘에 모아 희생을 잡아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세하기를, “여러분 중에 이 최저 경봉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하늘의 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했다. 경봉이 뒤를 이어서 맹세하고, 고지와 국하도 따라 그 맹세를 했다. 안영의 차례가 되자, 안영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여러분들은 주군에게 능히 충성을 다 하고 사직을 위해 힘쓰되, 만일 안영과 같은 마음을 품지 않는 자가 있다면 하늘의 상제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오!” 하니, 최저와 경봉의 얼굴색이 변했다. 고지와 국하가 말하기를, “두 분 상국께서 오늘 행하는 의식이 비로 주군에게 충성하고 사직을 위하는 일이오.” 하니, 최저와 경봉이 이에 기뻐하였다.
時莒黎比公尚在齊國,崔慶奉景公與黎比公為盟,黎比公乃歸莒。崔杼命棠無咎斂州綽賈舉等之屍,與莊公同葬於北郭,減其禮數,不用兵甲,曰:「恐其逞勇於地下也。」命太史伯以瘧疾書莊公之死,太史伯不從,書於簡曰:「夏五月乙亥,崔杼弒其君光。」杼見之大怒,殺太史。太史有弟三人,曰仲、叔、季。仲復書如前,杼又殺之﹔叔亦如之,杼復殺之﹔季又書,杼執其簡謂季曰:「汝三兄皆死,汝獨不愛性命乎?若更其語,當免汝。」
그때 거나라 여비공이 아직 제나라에 있었다. 최저와 경봉은 경공을 받들어 여비공과 맹세하게 했다. 여비공은 이에 거나라로 돌아갔다. 최저는 당무구에게 명하여 주작과 가거 등의 시신을 거두어 제장공과 함께 북곽에 장사 지내고, 예법을 줄여서 무기나 갑옷을 묻지 못하게 하며, 말하기를, “그들이 지하에서 용기를 자랑할까 걱정된다.”라고 했다. 최저가 태사 백(太史伯)에게 명하여 제장공이 학질로 죽었다고 사서(史書)에 쓰도록 하였다. 태사 백이 따르지 않고 목간에 쓰기를, “여름 5월 을해(乙亥) 일에 최저가 그의 군주인 광(光)을 시해했다.”라고 썼다. 최저가 보고 대로하여 태사 백을 죽였다. 태사 백에게는 동생이 셋 있었는데, 중(仲), 숙(叔), 계(季)라고 했다. 중이 다시 사서에 전과 같이 쓰니, 최저가 또 중을 죽였다. 숙이 또한 그와 같이 쓰니, 최저가 다시 그를 죽였다. 계가 다시 쓰자, 최저가 목간을 잡고서 계에게 말하기를, “너의 세 형들이 모두 죽었다. 너는 홀로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만약 그 말을 바꾸면 마땅히 너를 살려주겠다.” 했다.
季對曰:「據事直書,史氏之職也。失職而生,不如死!昔趙穿弒晉靈公,太史董狐,以趙盾位為正卿,不能討賊,書曰:『趙盾弒其君夷皋。』盾不為怪,知史職不可廢也。某即不書,天下必有書之者。不書不足以蓋相國之醜,而徒貽識者之笑,某是以不愛其死,惟相國裁之!」崔杼嘆曰:「吾懼社稷之隕,不得已而為此。雖直書,人必諒我。」乃擲簡還季。季捧簡而出,將至史館,遇南史氏方來,季問其故。南史氏曰:「聞汝兄弟俱死,恐遂沒夏五月乙亥之事,吾是以執簡而來也。」季以所書簡示之,南史氏乃辭去。
계가 대답하기를, “사실을 바르게 쓰는 일이 태사의 직분이요. 그 직분을 잃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소. 옛날 조천(趙穿)이 진영공(晉靈公)을 시해하자 태사 동호(董狐)가 조돈이 정경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아, 사서에 ‘조돈이 그의 군주 이고(夷皐)를 죽였다.’라고 썼었소. 조돈은 개의치 않고 태사의 직분임을 알고 동호를 폐하지 않았소. 내가 쓰지 않아도 세상에는 반드시 이를 바르게 쓰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그 일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상국의 잘못이 덮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한갓 식자들에게 웃음거리를 줄 뿐이오. 내가 죽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직 상국이 결정할 일이오!” 했다. 최저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사직이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부득이 그렇게 하였으니, 비록 사실대로 쓴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것이다.” 하고, 목간을 던져서 계에게 돌려줬다. 계가 목간을 들고 나가서 역사관에 이르러 막 도착한 남사씨(南史氏)를 만났다. 계가 온 까닭을 물으니, 남사씨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그대 형제들이 모두 죽으면, 마침내 여름 5월 을해(乙亥) 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할 사람이 없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내가 그래서 목간을 가지고 왔소.” 했다. 계는 자기가 갖고 있던 글 쓴 목간을 보여주니, 남사씨가 보고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髯翁讀史至此,有讚云:「朝綱紐解,亂臣接跡﹔斧鉞不加,誅之以筆。不畏身死,而畏溺職﹔南史同心,有遂無格。皎日青天,奸雄奪魄﹔彼哉諛語,羞此史冊!」崔杼愧太史之筆,乃委罪賈豎而殺之。是月,晉平公以水勢既退,復大合諸侯於夷儀,將為伐齊之舉。崔杼使左相慶封以莊公之死,告於晉師,言:「群臣懼大國之誅,社稷不保,已代大國行討矣。新君杵臼,出自魯姬,願改事上國,勿替舊好。所攘朝歌之地,仍歸上國,更以宗器若干,樂器若干為獻。」諸侯亦皆有賂。平公大悅,班師而歸,諸侯皆散。自此晉齊復合。時殖綽在衛,聞州綽邢蒯皆死,復歸齊國。
염옹(髥翁)이 사서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찬양하여 이르기를,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지니, 난신들이 날뛰었다. (사관이) 도끼로 죽이지 못하지만, 붓으로 그들을 죽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분을 지키지 못할까 걱정했다. 남사씨도 같은 마음이었으니, 마침내 막을 수가 없었다. 푸른 하늘에 해는 밝고, 간웅은 넋을 빼앗겼다. 저 아첨하는 말들이여! 이 사서에 부끄럽구나!” 했다. 최저가 태사의 필법에 부끄러워하여 주군 살해의 죄를 고수에게 뒤집어씌워 그를 죽였다. 그달에 진평공(晉平公)은 홍수가 물러가자 다시 제후들을 이의(夷儀)에 크게 모아 장차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최저가 좌상 경봉을 사자로 보내 제장공의 죽음을 진나라 군영에 고하며 말하기를, “제나라 신하들은 대국이 죄를 물어 죽여서 사직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미 대국을 대신하여 제장공을 죽였습니다. 새 군주 저구는 노희(魯姬)의 소생이니, 옛날의 일을 고쳐서 상국을 섬겨 예전처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빼앗은 조가(朝歌)의 땅을 상국에 돌려 드리며, 더하여 종묘 제기 약간과 악기 약간을 바칩니다.” 하고, 다른 나라 제후들에게도 역시 모두 뇌물을 주었다. 진평공이 크게 기뻐하여 군사를 물려 돌아가고, 제후들도 모두 흩어졌다. 이로부터 진(晉)나라와 제나라는 다시 친한 사이가 됐다. 그때 식작은 위나라에 있다가 주작(州綽)과 형괴(邢蒯)가 모두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제나라로 돌아갔다.
衛獻公衎出奔在齊,素聞其勇,使公孫丁以厚幣招之﹔綽遂留事獻公。此事擱過一邊。是年吳王諸樊伐楚,過巢,攻其門。巢將牛臣隱身於短牆而射之,諸樊中矢而死。群臣守壽夢臨終之戒,立其弟餘祭為王。餘祭曰:「吾兄非死於巢也,以先王之言,國當次及,欲速死以傳季弟,故輕生耳。」乃夜禱於天,亦求速死。左右曰:「人所欲者,壽也。王乃自祈早死,不亦遠於人情乎?」餘祭曰:「昔我先人太王,廢長立幼,竟成大業。今吾兄弟四人,以次相承,若俱考終命,札且老矣。吾是以求速也。」此段話且擱過一邊。
위나라의 헌공(獻公) 간(衎)이 제나라로 망명한 후에 평소에 식작의 용기를 듣고, 공손 정(公孫丁)을 시켜 많은 폐백을 주어 불러오게 했다. 식작은 마침내 제나라로 돌아왔으나 위헌공을 받들게 되었다. 이 일은 한쪽으로 밀어두기로 하자, 그해(주양왕 24년)에 오왕 제번이 초나라를 정벌하러 가다가 소(巢) 땅을 지나게 되어 그 성문을 공격했다. 소 땅을 지키던 초나라 장수 우신(牛臣)이 담장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쏘았다. 제번은 그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오나라의 신하들이 수몽의 유언을 지켜, 그 동생 여제(餘祭)를 왕으로 세웠다. 여제가 말하기를, “내 형은 소 땅에서 비명에 죽은 게 아니라, 선왕의 유언에 따라 나라가 마땅히 형제상속으로 계찰(季札) 아우에게 전해지도록 빨리 죽으려고 했다. 그래서 사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다.” 하고, 밤에 하늘에 기도를 드려 빨리 죽게 해 달라고 했다. 좌우의 측근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바라는 것은 오래 사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빨리 죽기를 기도하니, 그것은 인정에서 벗어난 짓이 아닙니까?” 하니, 여제가 말하기를, “옛날 우리들의 선조인 태왕(太王)께서 장자 태백(太伯)을 폐하고 막내 계력(季歷)을 세워서 결국 대업을 이루게 되었소. 오늘 우리 4형제가 순서에 따라 서로 왕위를 전하고 있는데, 만약에 모두가 명대로 다 살면 계찰은 늙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내가 빨리 죽기를 기도했소.” 했다. 이 대목의 이야기도 한쪽으로 밀어두자.
卻說,衛大夫孫林父寧殖既逐其君衎,奉其弟剽為君。後寧殖病篤,召其子寧喜謂曰:「寧氏自莊武以來,世篤忠貞。出君之事,孫子為之,非吾意也。而人皆稱曰『孫寧』。吾恨無以自明,即死,無顏見祖父於地下!子能使故君復位,蓋吾之愆,方是吾子。不然,吾不享汝之祀矣。」喜泣拜曰:「敢不勉圖!」殖死,喜嗣為左相,自是日以復國為念。奈殤公剽屢會諸侯,四境無故﹔上卿孫林父又是獻公衎的敵仇,無間可乘。周靈王二十四年,衛獻公襲夷儀據之,使公孫丁私入帝邱城,謂寧喜曰:「子能反父之意,復納寡人,衛國之政,盡歸於子,寡人但主祭祀而已。」
한편, 위나라 대부 손림보와 영식은 군주인 헌공(獻公) 간(衎)을 쫓아내고 그 동생 표(剽)를 군주로 세웠다. (그가 위상공(衛殤公)이다.) 얼마 후에 영식이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자 그의 아들 영희(寧喜)를 불러 이르기를, “영씨들은 장공과 무공 이래 대를 이어 위나라에 충성을 바쳐 왔다. 지난번 군주를 쫓아낸 일은 손씨들이 행한 것이지, 내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손씨와 영씨를 들먹인다. 나는 스스로 밝히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죽어서 선조들을 지하에서 뵐 면목이 없다. 너는 능히 옛날의 군주를 복위시켜 나의 허물을 덮어주면 비로소 내 아들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나는 네가 올리는 제사를 받지 않겠다.” 하니, 영희가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말하기를, “어찌 감히 힘써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영식이 죽자, 영희가 뒤를 이어 위나라의 좌상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라를 회복시킬 생각을 했다. 위상공 표는 자주 제후들의 회합에 참석하여 위나라의 사방은 태평했다. 상경 손림보가 위헌공 간의 원수였으나 틈이 없었다. 주영왕 24년에 위헌공이 이의성(夷儀城)을 습격하여 그곳에 근거하여, 공손 정(公孫丁)을 시켜, 몰래 제구성(帝丘城)에 들어가 영희에게 편지를 전하기를, “그대가 만일 부친이 한 일을 후회하고 나를 다시 받아들인다면 위나라의 정치는 모두 그대에게 맡기고 과인은 다만 제사나 주관하겠다.” 했다.
寧喜正有遺囑在心,今得此信,且有委政之言,不勝之喜。又思:「衛侯一時求復,故以甜言相哄,倘歸而悔之,奈何?公子鱄賢而有信,若得他為證明,他日定不相負。」乃為復書,密付來使,書中大約言:「此乃國家大事,臣喜一人,豈能獨力承當?子鮮乃國人所信,必得他到此面訂,方有商量。」(子鮮者,公子鱄之字也。)獻公謂公子鱄曰:「寡人復國,全由寧氏,吾弟必須為我一行。」子鱄口雖答應,全無去意。獻公屢屢促之,鱄對曰:「天下無無政之君。君曰『政由寧氏』,異日必悔之。是使鱄失信於寧氏也,鱄所以不敢奉命。」
영희는 부친의 유언이 마음속에 있어서, 지금 그 편지를 받고 또한 정치를 맡기겠다는 말에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또 생각하기를, “위헌공이 복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달콤한 말로 환심을 사서 복위한 후에 그 말을 후회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공자 전(公子鱄)은 어질고 신의가 있으니 만약 그가 증인이 된다면 후일에 약속을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마음속을 정리한 영희가 답신을 써서 밀봉하여 공손 정에게 주었다. 편지 속에 크게 약속하여 말하기를, “이 일은 나라의 큰일이라 제 한 사람만의 힘으로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자선(子鮮)은 곧 나라 사람들이 믿는 분이라 반드시 그가 이곳에 와서 상의하게 하신다면 좋은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했다. (자선(子鮮)은 공자 전(公子鱄)의 자다.) 위헌공이 공자 전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군주 자리를 회복하려면 전적으로 영희의 힘을 빌려야 한다. 아우는 반드시 나를 위해 한번 가 주어야 하겠다.” 하니, 공자 전은 입으로 대답만 할 뿐 전혀 갈 뜻이 없었다. 위헌공이 여러 번 재촉을 하니, 공자 전이 대답하기를, “천하에 정치를 하지 않는 군주는 없습니다. 주군께서 ‘정치를 영희에게 맡기겠다.’라고 한 것을 후일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영희에게 신의를 잃게 되니,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했다.
獻公曰:「寡人今竄身一隅,猶無政也。倘先人之祀,延及子孫,寡人之願足矣,豈敢食言,以累吾弟。」鱄對曰:「君意既決,鱄何敢避事,以敗君之大功。」乃私入帝邱城,來見寧喜,復申獻公之約。寧喜曰:「子鮮若能任其言,喜敢不任其事!」鱄向天誓曰:「鱄若負此言,不能食衛之粟。」喜曰:「子鮮之誓,重於泰山矣。」公子鱄回復獻公去了。寧喜以殖之遺命,告於蘧瑗。瑗掩耳而走曰:「瑗不與聞君之出,又敢與聞其入乎?」遂去衛適魯。喜復告於大夫石惡北宮遺,二人皆贊成之。
위헌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지금 나라의 한 귀퉁이에 몸을 숨기고 있으니, 이것이 정치가 없는 것이라. 만일 내가 선조들의 제사나 지내고 그 일을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과인은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내가 어찌 감히 식언을 하여 내 아우에게 누를 끼치겠는가?” 하니, 공자 전이 대답하기를, “주군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면 제가 어찌 감히 이 일을 피하여 군주의 큰일을 그르치게 하겠습니까?” 하고. 곧 제구성(帝丘城)에 들어가 영희를 만나 다시 위헌공의 약속을 전했다. 영희가 말하기를, “자선께서 능히 그 말에 책임을 져 주신다면, 제가 감히 그 일을 맡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자 전이 하늘을 향해 맹세하기를, “제가 만약 이 약속을 어기면 위나라의 곡식을 먹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영희가 말하기를, “자선(공자 전)의 맹세는 태산보다 무겁습니다.” 했다. 공자 전이 위헌공에게 돌아가 복명하였다. 영희는 부친 영식의 유명을 거원(蘧瑗)에게 고하니, 거원이 귀를 막고 달아나며 말하기를, “저는 주군이 나라 밖으로 나간 일에 관여한 바가 없는데, 또 감히 주군이 나라로 들어오는 데 관여하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가 버렸다. 영희가 다시 대부 석오(石惡)와 북궁유(北宮遺)에게 고하니, 두 사람이 모두 찬성했다.
喜乃告於右宰穀,穀連聲曰:「不可,不可!新君之立,十二年矣,未有失德。今謀復故君,必廢新君,父子得罪於兩世,天下誰能容之?」喜曰:「吾受先人遺命,此事斷不可已。」右宰穀曰:「吾請往見故君,觀其為人視往日如何,而後商之。」喜曰:「善。」右宰穀乃潛往夷儀,求見獻公。獻公方濯足,聞穀至,不及穿履,徒跣而出,喜形於面,謂穀曰:「子從左相處來,必有好音矣。」穀對曰:「臣以便道奉候,喜不知也。」獻公曰:「子第為寡人致左相,速速為寡人圖成其事。左相縱不思復寡人,獨不思得衛政乎?」
영희가 이에 우재(右宰) 곡(穀)에게 고하니, 우재곡이 듣고 연거푸 말하기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새 군주는 즉위한 지 12년인데, 아직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지금 옛 군주를 복위시키려면 반드시 새 군주를 폐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 부자는 두 군주에게 죄를 짓게 되니, 천하의 누가 그대를 용납하겠습니까?” 했다. 영희가 말하기를, “나는 돌아가신 부친의 유언에 따르고자 하니,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소!” 했다. 우재 곡이 말하기를, “내가 가서 옛 군주를 뵙고 그 사람됨이 옛날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본 뒤에 상의합시다.” 하니, 영희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소.” 했다. 우재 곡이 즉시 몰래 이의(夷儀)로 가서 위헌공에게 뵙기를 청했다. 위헌공이 발을 씻다가 우재 곡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신발도 미처 신지 못하고 맨발로 뛰어나와 기쁜 얼굴로 맞이하면서 곡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좌상의 말을 듣고 왔다 하니 틀림없이 좋은 소식을 갖고 왔겠지요.” 하니, 곡이 대답하기를, “신은 문안을 드리려고 지름길로 왔으니, 영희는 모릅니다.” 했다. 위헌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좌상에게 가서 과인을 위해 빨리 그 일을 도모하여 성사시키라고 전하시오. 좌상이 설사 과인을 복위시키는데 생각이 없더라도, 혼자 위나라의 정사를 맡는다는 데야 생각이 없겠는가?” 했다.
穀對曰:「所樂為君者,以政在也。政去,何以為君?」獻公曰:「不然。所謂君者,受尊號,享榮名,美衣玉食,崇階華宮,乘高車,駕上駟,府庫充盈,使令滿前,入有嬪御姬侍之奉,出有田獵畢戈之娛,豈必勞心政務,然後為樂哉?」穀嘿然而退。復見公子鱄,穀述獻公之言,鱄曰:「君淹恤日久,苦極望甘,故為此言。夫所謂君者,敬禮大臣,錄用賢能,節財而用之,恤民而使之,作事必寬,出言必信,然後能享榮名,而受尊號,此皆吾君之所熟聞也。」右宰穀歸謂寧喜曰:「吾見故君,其言糞土耳!無改於舊。」
곡이 대답하기를, “군주가 된 즐거움은 정치에 있습니다. 정치를 버리고 무엇 때문에 군주가 되려고 하십니까?” 하니, 위헌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소위 군주란 높은 칭호를 받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누리며, 아름다운 옷과 맛있는 음식, 높은 층계 위의 화려한 궁궐에 네 마리 말이 끄는 높은 수레를 타며, 나라 창고는 가득 차 있고, 사령들은 앞에 가득하며, 궁중에 들면 비빈과 궁녀들의 시중을 받고, 들판에 나가면 그물과 작살을 써서 사냥하는 즐거움이 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정무에 시달린 후에 즐겁다고 하겠는가?” 했다. 우재 곡이 묵묵히 물러나서, 다시 공자 전을 만나 위헌공이 한 말을 전했다. 공자 전이 말하기를, “주군께서 타향을 떠돈 지 오래되어 고생이 심하니 군주의 즐거움만을 생각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릇 소위 군주는 대신을 예절로 공경하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임용하며, 재물은 절약해서 쓰고, 백성들은 보살피며 부려야 합니다. 일을 도모할 때는 반드시 관대해야 하며, 말을 했으면 꼭 지켜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능히 영광된 이름을 누릴 수 있고, 높은 칭호를 받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군이 평소에 익히 들은 것입니다.” 했다. 우재 곡이 돌아와 영희에게 말하기를, “내가 옛 군주를 만나보니, 그 말이 오물 같았소. 옛날과 달라진 점이 없소.” 했다.
喜曰:「曾見子鮮否?」穀曰:「子鮮之言合道,然非君所能行也。」喜曰:「吾恃子鮮矣。吾有先臣之遺命,雖知其無改,安能已乎?」穀曰:「必欲舉事,請俟其間。」時孫林父年老,同其庶長子孫蒯居戚,留二子孫嘉孫襄在朝。周靈王二十五年,春二月,孫嘉奉殤公之命,出使聘齊,惟孫襄居守。適獻公又遣公孫丁來討信,右宰穀謂寧喜曰:「子欲行事,此其時矣。父兄不在,襄可取也,得襄,則子叔無能為矣。」喜曰:「子言正合吾意。」遂陰集家甲,使右宰穀同公孫丁帥之以伐孫襄。
영희가 말하기를, “자선도 만나 보셨습니까?” 하니, 곡이 말하기를, “자선의 말은 도리에 맞았소. 옛 군주가 능히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소.” 했다. 영희가 말하기를, “나는 자선의 말을 믿소. 나는 선친의 유명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옛 군주가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찌 능히 그만두겠소?” 했다. 곡이 말하기를, “반드시 일을 일으키겠다면, 시간을 기다려 봅시다.” 했다. 그때 손림보는 늙어서 그의 서장자 손괴(孫蒯)와 함께 척읍(戚邑)에 살고 있었고, 그의 두 아들 손가(孫嘉)와 손양(孫襄)을 조정에 머물게 하였다. 주영왕 25년(기원전 547년) 봄 2월에 손가(孫嘉)가 위상공(衛殤公)의 명을 받들어 제나라에 사자로 가서, 오직 손양(孫襄)이 제구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마침 위헌공이 또 공정을 보내어 독촉하는 편지를 보냈다. 우재 곡이 영희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일을 하려면 지금이 그 기회요! 손림보와 손가가 없으니 손양을 잡을 수 있소. 손양만 잡는다면 자숙(子叔: 위상공)은 아무것도 할 수 없소.” 하니, 영희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과 같소.” 하고, 즉시 몰래 가병을 모아 우재 곡과 공손 정에게 주어 손양을 치게 했다.
孫氏府第壯麗,亞於公宮,牆垣堅厚,家甲千人,有家將雍鉏褚帶二人,輪班值日巡警。是日褚帶當班,右宰穀兵到,褚帶閉門登樓問故。穀曰:「欲見舍人,有事商議。」褚帶曰:「議事何須用兵?」欲引弓射之。穀急退,帥卒攻門。孫襄親至門上,督視把守。褚帶使善射者,更番迭進,將弓持滿,臨樓牖而立,近者輒射之,死者數人。雍鉏聞府第有事,亦起軍丁來接應。兩下混戰,互有殺傷。右宰穀度不能取勝,引兵而回。孫襄命開門親自馳良馬追趕,遇右宰穀,以長鐃挽其車。
손씨들의 저택은 크고 화려하여 거의 군주의 궁과 같았다. 담장이 매우 견고하고 두터웠으며 가병이 천 명이고, 옹서(雍鉏)와 저대(褚帶)라는 두 장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면서 손씨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 이날, 저대가 당번이었다. 우재 곡의 군사가 도착하자 저대가 대문을 닫고 문루에 올라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곡이 말하기를, “주인을 만나 상의할 일이 있네.” 하니, 저대가 말하기를, “일을 상의하러 오면서 어찌하여 군사를 끌고 왔소?” 하고 활을 들어 쏘려고 했다. 곡이 급히 물러서며 군사들에게 대문을 공격하게 했다. 손양은 친히 문루에 올라 손씨 저택을 지키는 가병들을 독전했다. 저대는 활쏘기에 능한 자들을 번갈아 가며 활을 가지고 문루의 창문에 서서 가까이 오는 자들을 쏘도록 하니 죽은 사람이 여럿이었다. 옹서가 저택에 일이 났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들을 끌고 와서 지원했다. 양쪽 군사들이 혼전하여 서로 살상했다. 우재 곡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손양이 대문을 열라고 명하여 친히 말을 타고 우재 곡의 뒤를 추격하여 따라잡았다. 손양이 긴 갈고리로 우재곡의 수레를 걸어 끌어당겼다.
右宰穀大呼:「公孫為我速射!」公孫丁認得是孫襄,彎弓搭箭,一發正中其胸,卻得雍褚二將齊上,救回去了。胡曾先生詠史詩云:「孫氏無成寧氏昌,天教一矢中孫襄。安排兔窟千年富,誰料寒灰發火光!」右宰穀轉去,回復寧喜,說:「孫家如此難攻,若非公孫神箭,射中孫襄,追兵還不肯退。」寧喜曰:「一次攻他不下,第二次越難攻了。既然箭中其主,軍心必亂,今夜吾自往攻之。如再無功,即當出奔,以避其禍。我與孫氏,已無兩立之勢矣。」一面整頓車仗,先將妻子送出郊外,恐一時兵敗,脫身不及。
우재 곡이 크게 외치기를, “공손 정은 나를 위해 빨리 활을 쏘시오!” 하니, 공손 정이 손양을 알아보고 활에 화살을 메겨 한 발로 손양의 가슴을 맞혔다. 옹서와 저대 두 장수가 함께 달려와 손양을 구해 돌아갔다. 호증 선생이 역사를 읊은 시에 이르기를, “손씨들은 이룬 게 없고 영씨는 번창하는지, 하늘의 뜻으로 화살 하나가 손양에게 맞았다. 토끼굴을 마련하여 천년의 부를 쌓아 놓았는데, 식은 잿더미에서 불이 다시 일어날 줄 누가 알았으랴.” 했다. 우재 곡이 돌아와서 영희에게 말하기를, “손씨 저택이 이처럼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소. 만일 공손 정이 귀신같은 활 솜씨로 손양을 맞추지 않았다면 추격병들이 도리어 물러가지 않았을 것이오.” 하니, 영희가 말하기를, “일차 공격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이차는 더욱 공격하기 어렵게 되었소. 이미 주인 손양이 화살에 맞았으니 가병들의 마음이 어지러울 것이오. 오늘 밤 내가 친히 가서 공격하겠소. 만약 다시 성공하지 못한다면 즉시 외국으로 도망쳐서 그 화를 피해야 하겠소. 우리와 손씨는 이미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했다. 영희는 한편으로 전차와 무기들을 정돈하게 하고, 먼저 처자들을 교외로 보냈으니, 만일 한번 싸움에서 지면 탈출하기 어려울 것을 걱정한 때문이었다.
一面遣人打聽孫家動靜。約莫黃昏時候,打探者回報:「孫氏府第內有號哭之聲,門上人出入,狀甚倉皇。」寧喜曰:「此必孫襄傷重而亡也。」言未畢,北宮遺忽至,言:「孫襄已死,其家無主,可速攻之。」時漏下已三更,寧喜自行披掛,同北宮遺、右宰穀、公孫丁等,悉起家眾,重至孫氏之門。雍鉏褚帶方臨屍哭泣,聞報寧家兵又到,急忙披掛,已被攻入大門,鉏等急閉中門,奈孫氏家甲,先自逃散,無人協守,亦被攻破。雍鉏踰後牆而遁,奔往戚邑去了﹔褚帶為亂軍所殺。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손씨 집안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황혼 무렵이 되어서 탐지하러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손씨 집안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고 대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거동이 매우 허둥지둥하고 있습니다.” 하니, 영희가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손양의 상처가 중하여 죽었소.” 했다. 말을 끝나기도 전에 북궁유(北宮遺)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말하기를, “손양이 이미 죽어 그 집은 주인이 없습니다. 빨리 공격해야 합니다.” 했다. 그때 이미 삼경(자정)이 지났다. 영희가 군장을 갖추고는 북궁유, 우재 곡 및 공손 정과 함께 가병을 모두 동원하여 손씨 집으로 달려갔다. 옹서와 대저는 손양의 시신 앞에서 곡하며 울고 있다가, 영씨들의 가병이 다시 왔다는 보고를 듣고 두 사람은 황급히 군장을 갖추고 대문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공격당하여 영씨의 가병이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옹서 등이 급히 중문을 닫았으나 손씨 집안의 가병은 먼저 스스로 흩어져서 도망쳤기 때문에, 중문을 지킬 군사들이 없어 또한 중문도 깨뜨려졌다. 옹서가 뒷담을 넘어 달아나서 척읍으로 갔으나, 저대는 난군 중에서 죽었다.
其時天已大明,寧喜滅孫襄之家,斷襄之首,攜至公宮,來見殤公,言:「孫氏專政日久,有叛逆之情,某已勒兵往討,得孫襄之首矣。」殤公曰:「孫氏果謀叛,奈何不令寡人聞之?既無寡人在目,又來見寡人何事?」寧喜起立,撫劍言曰:「君乃孫氏所立,非先君之命,群臣百姓,復思故君,請君避位,以成堯舜之德。」殤公怒曰:「汝擅殺世臣,廢置任意,真乃叛逆之臣也!寡人南面為君,已十三載,寧死不能受辱!」即操戈以逐寧喜。喜趨出宮門。殤公舉目一看,只見刀槍濟濟,戈甲森森,寧家之兵,布滿宮外,慌忙退步。
아침이 이미 밝아오자, 영희가 손양의 집을 멸하고, 손양의 머리를 베어 들고 궁으로 들어가 상공을 보고 말하기를, “손씨가 정사를 멋대로 한 지 오래되어 반역을 꾀하므로 제가 미리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토벌하여 손양의 목을 취했습니다.” 하니, 위상공이 말하기를, “손씨들이 과연 모반하려 했다면 어찌하여 나에게 알리지 않았단 말인가? 이미 그대는 과인이 안중에도 없으면서 구태여 이렇게 나를 찾아온 것은 무슨 일인가?” 했다. 영희가 일어나면서 칼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주군은 선군의 명에 의해서가 아니고, 손씨들에 의해 추대되었습니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은 다시 옛 군주를 생각하니, 청컨대 주군은 자리에서 물러나 요순의 덕을 이루도록 하십시오.” 하니, 위상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네 놈이 멋대로 대대로 내려온 대신을 죽이고 마음대로 군주를 폐하고 세우고 하니 참으로 역적이로구나. 과인이 남면하여 군주가 된 지 이미 13년이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욕을 당할 수는 없다.” 하고, 위상공이 즉시 과를 들고 영희를 쫓자 영희가 궁문으로 달아났다. 위상공이 눈을 들어 한번 보니 창칼이 엄숙하고 갑옷을 입고 과를 든 것이 숲과 같았다. 영씨 집안 가병이 궁밖에 가득하니 서둘러 물러났다.
寧喜一聲指麾,甲士齊上,將殤公拘住。世子角聞變,仗劍來救,被公孫丁趕上,一戟刺死。寧喜傳令,囚殤公於太廟,逼使飲鴆而亡。此周靈王二十五年,春二月,辛卯日事也。寧喜使人迎其妻子,復歸府第。乃集群臣於朝堂,議迎立故君。各官皆到,惟有太叔儀乃是衛成公之子,衛文公之孫,年六十餘,獨稱病不至。人問其故,儀曰:「新舊皆君也。國家不幸有此事,老臣何忍與聞乎?」寧喜遷殤公之宮眷於外,掃除宮室,即備法駕,遣右宰穀北宮遺同公孫丁往夷儀迎接獻公。獻公星夜驅馳,三日而至。大夫公孫免餘,直至境外相見。獻公感其遠迎之意,執其手曰:「不圖今日復為君臣。」自此免餘有寵。
영희가 소리를 질러 지시하자 무사들이 일제히 뛰어올라 위상공을 붙잡았다. 세자 각(世子角)이 변란이 났다는 말을 듣고 칼을 들고 위상공을 구하려고 달려오다가 공손 정의 극에 찔려 죽었다. 영희가 명령하여 위상공을 태묘에 가두고 짐 독을 마시게 하여 죽였다. 주영왕 25년(기원전 547년) 봄 2월 신묘일(辛卯日)에 일어난 일이었다. 영희가 사람을 보내 그의 처자들을 불러와서 집으로 복귀시키고, 곧 여러 신하를 조당으로 불러 옛 군주를 맞아서 세울 것을 의논했다. 각 관원이 모두 도착하였으나, 오직 태숙 의(太叔儀)는 위성공의 아들이고 위문공의 손자이며, 나이가 이미 60이 넘어 병을 핑계 대고 나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태숙 의가 말하기를, “새 군주나 옛 군주가 모두 이 나라의 군주인데,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일이 있다. 늙은 신하가 어찌 차마 거기에 간여하겠는가?” 했다. 영희가 위상공의 궁실 권속을 밖으로 옮기고 궁실을 깨끗이 청소하여, 즉시 어가를 준비하여 우재 곡과 북궁유에게 공손 정을 데리고 이의(夷儀)로 가서 위헌공을 모셔 오게 했다. 위헌공이 밤낮으로 달려 3일 만에 도착했다. 대부 공손면여(公孫免餘)가 위나라 국경 밖까지 가서 위헌공을 영접했다. 위헌공은 멀리까지 맞으러 나온 뜻에 감격하여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뜻밖에 오늘 다시 군신 관계가 되었소,” 하고, 이때부터 공손면여가 위헌공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諸大夫皆迎於境內,獻公自車揖之。既謁廟臨朝,百官拜賀,太叔儀尚稱病不朝。獻公使人責之曰:「太叔不欲寡人返國乎?何為拒寡人?」儀頓首對曰:「昔君之出,臣不能從,臣罪一也﹔君之在外,臣不能懷貳心,以通內外之言,罪二也﹔及君求入,臣又不能與聞大事,罪三也。君以三罪責臣,臣敢逃死!」即命駕車,欲謀出奔。獻公親往留之。儀見獻公,垂淚不止,請為殤公成喪,獻公許之,然後出就班列。獻公使寧喜獨相衛國,凡事一聽專決,加食邑三千室。北宮遺、右宰穀、石惡、公孫免餘等,俱增秩祿。公孫丁殖綽有從亡之勞,公孫無地公孫臣,其父有死難之節,俱進爵大夫。其他太叔儀、齊惡、孔羈、褚師申等,俱如舊。召蘧瑗於魯,復其位。
위나라의 대부들은 모두 국경에 나와서 맞이하니 위헌공은 수레에서 대부들에게 읍했다. 태묘에 배알하고 조정에 임하자 백관들이 하례를 올렸으나, 태숙의는 아직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위헌공이 사람을 보내 꾸짖으며 말하기를, “태숙은 과인이 돌아온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십니까? 어찌하여 과인을 거부하십니까?” 하니, 태숙의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기를, “옛날 주군께서 출국하실 때 저는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신의 첫 번째 죄입니다. 주군께서 나라 밖에 계실 때에 신이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었으므로 나라 안팎의 일을 주군에게 알려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주군께서 들어오고자 하시는데 신은 또한 거기에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주군께서 이 세 가지 죄로 저를 꾸짖으시니 신은 감히 죽음에서 도망하여야겠습니다.” 하고, 즉시 수레를 준비하게 하여 나라 밖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위헌공이 친히 가서 위나라에 머무르게 했다. 태숙의가 위헌공을 뵙고 눈물을 흘리며 위상공의 상을 치를 수 있도록 청하였다. 위헌공이 허락했다. 그런 후에 태숙의가 조정에 나가 반열에 섰다. 위헌공은 영희에게 홀로 위나라 재상을 맡기고, 모든 일을 한 번 아뢰고 전결하도록 하고, 식읍 3천 호를 더해 주었다. 북궁유, 우재 곡, 석오, 공손 면여 등은 모두 녹봉을 더해 주었다. 공손 정, 식작 등은 위헌공의 망명 생활에 따라다닌 공로가 있고, 공손무지(公孫無地), 공손신(公孫臣) 등은 그 부친이 죽음으로써 헌공을 위해 절개를 지켰다 하여 모두 작위를 올려 대부를 삼았다. 그밖에 태숙의(太叔儀), 제오(齊惡), 공기(孔羈), 저사신(褚師申) 등은 옛날의 직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노나라에서 거원(蘧瑗)을 불러 그 직위를 돌려주었다.
卻說,孫嘉聘齊而回,中道聞變,逕歸戚邑。林父知獻公必不干休,乃以戚邑附晉,訴說寧喜弒君之惡,求晉侯做主。恐衛侯不日遣兵伐戚,乞賜發兵,協力守禦。晉平公以三百人助之。孫林父使晉兵專戍茅氏之地。孫蒯諫曰:「戍兵單薄,恐不能拒衛人,奈何?」林父笑曰:「三百人不足為吾輕重,故委之東鄙。若衛人襲殺晉戍,必然激晉之怒,不愁晉人不助我也。」孫蒯曰:「大人高見,兒萬不及。」寧喜聞林父請兵,晉僅發三百人,喜曰:「晉若真助林父,豈但以三百人塞責哉?」乃使殖綽將選卒千人,往襲茅氏。
한편, 손가(孫嘉)는 제나라에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위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척읍으로 발길을 돌렸다. 손임보는 위헌공이 틀림없이 자신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것을 알고 척읍을 진(晉)나라에 바쳤다. 그리고 진(晉)나라 군주에게 군주를 시해한 영희에게 죄 줄 것을 호소하고, 진나라 군주가 주관해 줄 것을 청했다. 또한 위헌공이 머지않아 군사를 보내 척읍을 칠 것을 두려워하여 지원군을 보내 주면 힘을 합하여 지키겠다고 했다. 진평공이 3백 명의 군사를 보내 손림보를 돕도록 했다. 손림보가 진(晉)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모씨(茅氏)의 땅을 지키도록 했다. 손괴가 간하기를, “지키는 군사가 적어서 위나라의 군사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찌 하지요?” 하니, 손림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3백 명의 군사들로 우리를 지켜 주기에는 충분치 않다. 그래서 동쪽 변방을 맡긴 것이다. 만약 위나라 군사가 진나라 수비군을 공격하여 죽인다면 반드시 진나라를 격분시킬 것이니, 진나라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했다. 손괴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높은 식견에 제가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영희는 손림보가 진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진나라가 겨우 3백 명의 군사를 보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진나라가 만약 진심으로 손림보를 도울 마음이 있다면 어찌하여 단지 3백 명을 보내어 책임을 면했을까?” 하고, 식작을 시켜 군사 천 명을 선발하여 모씨의 땅에 가서 습격하도록 했다.
不知勝負如何,且看下回分解。
승부가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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