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3 - 팔일(八佾) - ㉕ |
1 | 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공자께서 소(순임금의 음악)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라고 하셨으며, 무(무왕의 음악)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는 않다.”라고 하셨다. 韶, 舜樂. 武, 武王樂. 美者, 聲容之盛. 善者, 美之實也. 舜紹堯致治, 武王伐紂救民, 其功一也, 故其樂皆盡美. 然舜之德, 性之也, 又以揖遜而有天下; 武王之德, 反之也, 又以征誅而得天下, 故其實有不同者. 韶는 순임금의 음악이다. 武는 무왕의 음악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소리와 용모의 성대함이다. 선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의 실질이다. 순임금은 요임금을 이어받아 다스림을 지극히 하였고, 무왕은 주왕을 정벌하여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그 공은 동일한 것이므로, 그래서 그 음악이 모두 다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순임금의 덕은 본성대로 한 것이고, 또한 사양하고 겸손함으로써 천하를 갖게 되었지만, 무왕의 덕은 본성을 돌이킨 것이고 또한 정벌하고 주살함으로써 천하를 얻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 실질은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朱子曰 美如人生得好 善則其中有德行也 實是美之所以然處 주자가 말하길, “美라는 것은 사람이 잘 태어난 것과 같고, 善은 그중에 덕행이 있는 것이며, 實이라는 것은 美의 所以然(그렇게 된 까닭)에 해당하는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聲容樂之聲舞之容也 美之實 謂其聲容之所以美 경원보씨가 말하길, “聲容이란 음악의 소리와 춤의 용모다. 美의 實이란 그 聲容이 아름다운 까닭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韶盡揖讓繼紹之美 武盡發揚蹈厲之美 호씨가 말하길, “韶는 읍하고 사양하고 이어가는 아름다움을 다한 것이고, 武는 드러내어 드날리고 힘있게 밟음하는 아름다움을 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美是言功 善是言德 問說揖遜征誅足矣 何必說性之反之 曰 也要就他本身處說 使舜當武王時 畢竟更彊似大武 使武王當舜時 必不及韶 주자가 말하길, “美는 功을 말한 것이고, 善은 德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읍하고 겸손함과 정벌하고 주살함를 말하면 충분한 것인데도, 하필이면 본성대로 하거나 본성으로 돌이킨다는 것도 말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 본체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 말해야 하는 것이니, 만약 순임금이 무왕의 시대에 당했더라면, 필경은 더욱 강력하여 大武(주공이 지은 악곡명)와 비슷하였을 것이고, 무왕이 순임금의 시대에 당했더라도, 반드시 韶음악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德有淺深 時又有幸不幸 舜之德旣如此 又遇著好時節 武王德不及舜 又遇著不好時節 故盡美而未盡善 덕에는 얕고 깊음이 있고, 때에는 또 다행과 불행이 있다. 순임금의 덕은 이미 이와 같은 데다가 또한 좋은 시절을 만났지만, 무왕은 덕이 순임금에 미치지 못하였고, 또한 좋지 못한 시절을 만났기 때문에, (소리와 형식이) 다 아름다우나 (그 내용은) 다 선하지 않은 것이다. 樂觀其深矣 若不見得性之反之不同處 豈所謂聞其樂而知其德乎 樂은 그 깊은 데를 살펴보는 것이다. 만약 본성대로 하는 것과 본성을 돌이키는 것이 서로 다른 부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찌 이른바 그 음악을 듣고서 그 덕을 알아차린다는 것이겠는가? 樂便是德之影子 韶武之樂 正是聖人一箇影子 要得因此以觀其心 음악은 곧바로 德의 그림자다. 韶武(순임금의 음악과 무왕의 음악)의 음악은 바로 성인의 한 그림자이니, 이로 인해 그 마음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韶武今皆不可考 但書稱德惟善政至勸之以九歌 此便是作韶樂之本 所謂九德之歌 九韶之舞 是也 武王之武 看樂記 便見皆是象伐紂之事 所謂南者自南而北伐紂也 氣象便不恁地和 韶樂只是和而已 韶武의 음악은 지금 모두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서경에, ‘德惟善政’에서부터 ‘勸之以九歌’에 이르기까지 칭송한 것들, 이것들이 바로 韶樂을 지은 근본(本意)이니, 이른바 九德之歌와 九韶之舞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무왕의 武樂은 樂記를 살펴보면, 모두 다 주왕을 정벌한 일을 형상화한 것임을 바로 알 수가 있다. 이른바 ‘南’이라는 악곡은 남쪽으로부터 북상하여 주왕을 정벌한 내용이니, 그 기상이 그렇게 온화하지가 않다. 韶樂은 그저 온화할 따름이다. |
2 | ○ 程子曰: “成湯放桀, 惟有慙德, 武王亦然, 故未盡善. 堯ㆍ舜ㆍ湯ㆍ武, 其揆一也. 征伐非其所欲, 所遇之時然爾.” 정자가 말했다. “성탕이 걸왕을 유배 보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慙德)이 있었는데, 무왕 역시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내용까지) 다 선한 것이 아니었다. 요임금, 순임금, 탕왕, 무왕이 그 다스린 법도(이치)는 모두 같았으니, 정벌한 것은 그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었고, 단지 만난 때가 그러하였을 뿐이다.” 朱子曰 舜性之武王反之 自是有淺深 又舜以揖遜 武以征伐 征伐雖是順天應人 自是有不盡善處 今若要强說舜武同道也不得 必欲美舜而貶武王也不得 又曰 舜武不同 正如孟子言 伯夷伊尹之於孔子不同 至謂得百里之地而君之 皆能以朝諸侯有天下 行一不義殺一不辜而得天下不爲 是則同也 舜武同異 正如此 故武之德 雖比舜自有淺深 而治功亦不多爭 주자가 말하길, “순임금은 본성대로 하였고, 무왕은 본성으로 돌이켰으니, 저절로 깊고 얕음이 있는 것이다. 또한 순임금은 揖遜으로 하였고, 무왕은 정벌로 하였으니, 정벌이 비록 하늘을 따르고 사람에 호응한 것이었지만, 저절로 다 선하지는 않은 곳이 생긴 것이다. 지금 만약 순임금과 무왕이 같은 道였다고 억지로 말한다면, 이는 안 되는 것이지만, 반드시 순임금을 미화하고 무왕을 폄훼하고자 하는 것도 역시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순임금과 무왕이 같지 아니한 것은 바로 맹자가 말한 것처럼 ‘백이와 이윤이 공자와 다르다’는 것과 같으나, ‘백리의 땅을 얻어서 임금 노릇을 한다면, 모두 능히 제후의 조회를 받으며 천하를 소유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불의한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는다면,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에 이르면, 이것이 바로 같은 점이다. 순임금과 무왕이 서로 같거나 다른 것은 바로 이와 같을 따름이니, 그래서 무왕의 덕은 비록 순임금에 비하여 저절로 깊고 얕음이 있지만, 다스리는 功에 있어서는 역시 (같다는 데에) 다툼이 많지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征伐固武王之不幸 使舜當之 不知如何 曰 只恐舜是生知之聖 其德盛 人自歸之 不必征伐耳 不然 事到頭也住不得 如文王亦然 且如殷始咎周 周人戡黎 祖伊恐奔告于受 這事勢 便自是住不得 若曰奔告于受 則商之忠臣義士 何嘗一日忘周 自是紂昏迷爾 누군가 묻기를, “정벌은 본래 무왕의 불행이니, 만약 순임금이 그 처지에 당했더라면, 어떻게 하였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단지 순임금은 生知(나면서부터 앎)의 성인이어서, 아마도 그 덕이 성대하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귀의할 것이니, 반드시 정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은 끝내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예컨대 문왕도 역시 그러하였다. 또한 예컨대 은나라가 비로소 주나라를 미워하자, 주나라 사람들은 黎를 쳤는데, 祖伊는 두려워하여 달려가서 受(紂王의 이름)에게 고했던 것처럼, 이 일의 형세는 곧 저절로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달려가서 受에게 고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상나라의 충신과 의사들이 어찌 일찍이 하루라도 주나라를 잊은 적이 있었겠는가? 원래부터 紂王이 혼미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西山眞氏曰 聖人於湯武之事 每微有不足之意 如論樂 則以武爲未盡善 論泰伯文王 皆稱其爲至德 此非貶湯武也 惜其不幸而爲此不獲己之擧也 然恐後世遂以湯武爲非 故曰 湯武革命順乎天而應乎人 論語微有不滿之意者 恐後世亂臣賊子借湯武之名以窺伺神器也 易發 革命之義者 恐後世亂君 肆行於上 無所憚也 聖人立言爲後世慮 至深遠矣 서산진씨가 말하길, “성인께서는 탕왕과 무왕의 일에 대하여, 매번 미세하게 부족하다는 뜻을 갖고 있었으니, 예컨대 음악을 논하면서는 武樂을 전부 다 善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겼지만, 泰伯과 文王을 논하면서는 모두 그들이 지극한 德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이것은 탕왕과 무왕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불행하게도 이렇게 부득이한 거사를 했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그러나 후세가 마침내 탕왕과 무왕을 옳지 않다고 여기실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주역에서) 말하길 탕왕과 무왕의 혁명은 하늘을 따르고 사람에게 호응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논어에 미세하게 불만의 뜻이 있는 것은 후세의 난신적자가 탕왕과 무왕의 이름을 빌려서 神器(帝位)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셨기 때문이다. 주역에서 혁명의 意義를 드러낸 것은 후세의 폭군이 위에서 함부로 행동하며 거리끼는 바가 없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성인께서 立言을 하시면서 후세를 위하여 염려함이 지극히 깊고도 멀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