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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
유식과 라깡 정신분석
- 라깡과 불교
김종주
프랑스의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자끄 라깡이 1960년대 일본의 어느 산사에서 차 한잔 드시는 모습이 사진첩에 남아 있다. 그가 자신의 교육방법을 선禪의 기교에 비유했지만 불교에 관한 그의 강의나 논문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밝은 사람들’의 학술연찬회에 두 번 참석했던 덕분에 ‘나’의 문제를 추구하다가 유식의 개념들을 정신분석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실체적인 나로서의 자기’ 같은 것은 없다고 하며, 유식도 무아無我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한 방법으로 ‘허망한 나에 대한 인식’을 해명해주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 자아를 ‘착각의 자리’로 보는 라깡 정신분석에 연결된다.
‘의식’이란 용어는 이미 정신의학과 신경과학에서도 확고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개념이 유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과 정신치료에서 ‘훈습’이란 단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대체해보려는 여러 시도가 있어 왔지만 훈습보다 더 나은 용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라깡의 독특한 개념인 ‘무의식적 지식’을 용어화하기 위해 아뢰야식의 별칭인 ‘본식’으로 시도해본 일이 있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영역에 관여하는 학문이고 임상이다. 무의식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아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먼저 ‘자아’와 ‘자기’라는 개념을 명확히 정리해두고, 그에 이어 라깡의 독특한 무의식 개념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라깡은 ‘프로이트로의 회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서 자아심리학이 프로이트를 배신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아심리학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 자아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라깡의 개념이 거울단계이다. 우리의 작가인 이상李箱만큼 거울단계를 잘 다룬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문학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이유는 정신분석 개념을 직감적으로 예기豫期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선 언어에 대응하는 실체는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기표와 기의에 관한 라깡의 개념을 연상시켜주는데, 여기서 유식의 아뢰야식이 라깡의 언어학적 무의식을 예기해주는지 한번 살펴보고 싶다.
자아와 자기, 그리고 무의식
라깡은 1953년에 시작된 세미나를 그 뒤로 27년간이나 지속해왔다. 첫 번째 세미나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테크닉에 관한 강의가 책으로 출간된 것은 1975년인데, 라깡 자신이 붙인 서문은 ‘큰스님’(buddhist master)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시작되고 있다. 스승은 풍자적인 말이나 시동장치로 침묵을 깨는데, 그것은 선의 기교를 이용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체계가 세워진 기존의 학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해답을 찾으려는 바로 그 순간에 그런 식으로 답을 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체계도 거부하는 방법이다. 체계화는 도그마의 측면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라깡은 프로이트의 사유도 계속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프로이트는 언어의 시적인 기능을 통해 욕망에 대한 상징적 중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18개월 된 어린 손자가 어느 날 실이 매달려 있는 실패를 멀리 던졌다가 가까이 끌어당기며 노는 모습을 보고서 이 놀이가 엄마의 출현과 부재를 상징적 언어로 대치해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정신분석학에 구조주의 언어학을 도입해서 무의식에 관한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으로 되돌아가려는 라깡의 입장이 여기서 아주 선명해진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언어의 의미작용에 대해 대단한 불신을 내보이고 있다. 「사랑의 존재」라는 작품에서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 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데 있습니까?”라고 읊고 계신다. 라깡 정신분석에서는 시니피앙(기표)의 무한한 이동이 바로 욕망이 되는데, 님의 침묵은 곳곳에서 이런 현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프로이트와 라깡이 문학작품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보였던 까닭은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제자들과 ‘수요회’를 만들어 1년 8개월 동안 53회에 걸쳐 모임을 가졌는데, 그 가운데 35번은 문학가와 예술가 혹은 그들의 작품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라깡은 분석가가 되는데 문학수업이 첫 번째 요건이라 말하고, 정신분석을 문학연구의 한 분과로 생각했다. 우리 시대의 ‘분석하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청준의 장편소설, 신화를 삼킨 섬에 나오는 자아에 관한 한 개념을 살펴봄으로써 그 해답을 구해볼 수도 있다.
먼저 충동에 대한 이청준의 정신분석적인 해설을 들어보자. 그는 제주도 출신의 문학평론가를 내세워 국가와 시의 충동이란 책을 독자들에게 읽어보라고 은근히 강요하는 셈이다. 이 책을 빌려 작가는 국가가 술어의 세계를 넘어 시의 충동을 일으킬 때 벌어질 수 있는 재앙에 대해 말한 다음, 술어로 오염되지 않은 시어의 근원적 존재성과 그 솟아오름의 황홀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권력적 술어의 세계와 시의 세계를 프로이트의 초자아(아버지, 국가, 이성)와 이드(아들, 인민, 충동)의 대위관계로 번역한 뒤에, 다음처럼 ‘의미 깊게’ 쓰고 있다. 마치 작가의 정신분석 이론을 보는 것 같다.
‘이드’는 자아의 아명이다. 이드는 야생마처럼 날뛰고, 자아는 이 짐승을 길들여 정해진 목표 지점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목표 지점을 정하는 것은 기수가 아니라(…) 초자아다. 자아란, 아버지에 의해 길들여진, 혹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이드 자신이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라는 논문에서, “자아는 외부세계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수정되어온 이드의 부분이며…. 자아는 이성과 상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나타내는데, 열정을 포함하고 있는 이드와 대조해서 그렇고… 이드와 관련해서 그것은 말을 타고 있는 사람과 비슷한데, 그는 말의 월등한 힘을 억눌러야 한다. 이런 차이점으로 그 기수는 그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반면에 자아는 빌려온 힘을 이용한다”라고 설명한다. 프로이트 자신이 직접 제시한 비유를 들어보면, “흔히 기수가 자기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것이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아는 이드의 의지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행동으로 바꾸는 버릇이 붙어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정확한 비유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드는 “무의식의 자손”이고 자아는 “의식의 자손”이다. 따라서 이드는 원시적이고 자아는 문명화되어 있다. 고전적인 이론에 따르면, 이드는 그 발달에 있어 자아에 앞선다. 다시 말해, 정신기구는 분화되지 않은 이드로 시작되어 그 일부가 구조화된 자아로 발달해간다. 초자아는 자기관찰과 자기비판과 또 다른 반성적인 활동들이 발달해가는 자아의 일부라고 설명된다. 이런 모든 설명은 ‘자칭’ 프로이드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결과이다.
인문사회학 분야에서는 흔히 자아와 자기가 혼용되고 있어서 정신분석가인 라이크로프트의 설명에 따라 자아(ego)와 자기(self)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좌표계에 속하는데, 자아는 인격을 구조로 보는 객관적 좌표계에 속하고 자기는 인격을 경험으로 보는 현상학적 좌표계에 속한다. 그런 자기는 정신분석 이론의 자아와 이처럼 달라진다. (1) 자기는 스스로 경험하는 주체를 가리키지만, 자아는 비개인적인 일반화가 만들어지는 구조로서 자신의 인격을 가리킨다. (2) 프로이트에 의해 규정된 자아는 피억압물, 즉 자기에 의해 인식될 수 없는 무의식적인 부분을 포함한다.
어떤 철학사전에는 흥미로운 설명이 실려 있다. ‘자아’라는 표제어 뒤에 “自我 [라] ego [영] ego, self”가 붙어 있어서 역시 ego와 self가 혼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식에 있어서의 주관, 실천에 있어서 전체를 통일하고 지속적으로 한 개체로 존속하며 자연이나 타인과 구별되는 개개인의 존재를 가리켜 말한다”로 풀이되고 있다. 한자경은 자아의 연구의 ‘지은이의 말’에서, “자아가 본래 영혼과 신체를 가지고 언어를 사용하며 타인 및 세계와 관계하고 문화와 역사를 이루는 존재”라고 말한 다음 “완벽한 자아의 이해란 영혼과 신체, 언어와 세계, 자연과 문화 등 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를 다 해명함으로써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무한한 문제 영역”이라고 말한다.
겨우 100여년밖에 되지 않은 정신분석학의 역사에서 자아개념의 발달은 2000여년에 걸쳐 발전해온 철학에서의 발전과정을 짧은 기간 동안에 압축시켜 놓고 있다. 일찍이 데이비드 흄도 자아를 ‘인상의 묶음’으로 보고 그 실체성을 부정하면서 자아의 절대화에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라깡의 주장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데카르트 이래로 서양철학이 전통적으로 부여한 중심적인 위치로부터 자아를 제거하는 일이 된다. 자아는 중심에 있지 않고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자아는 상상계의 일부인 반면에 주체는 상징계의 일부로서, 특히 라깡의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이다.
프로이트의 정신기구에 관한 이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지형학설은 무의식 체계와 전의식-의식 체계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지형학설에서는 이드와 자아 및 초자아라는 세 가지 심급審級으로 나눈다. 이런 변화는 실제적인 분석에서 무의식의 내용보다는 자아와 그 방어기제의 분석이란 새로운 방향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여준다. 프로이트가 초기 작업에서부터 사용하고 있는 자아(Ich)라는 용어는 특수한 의미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계속적으로 그 개념이 바뀌고 있지만, 처음부터 ‘개인으로서의 자아’와 ‘심급으로서의 자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자아 문제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자아’라든가 ‘나’라는 말과 결부된 어떠한 의미도 자신의 이론영역에서 배제시키지 않으면서 그 모호성을 이용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자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된 것은 신경증에 관한 임상경험 덕분이었다. 그는 히스테리 연구에서 의식 또는 ‘자아의식’을 하나의 기억만이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길에 비유하여 ‘훈습’이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면 막힐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훈습熏習은 원래 “불법을 들어서 마음을 닦아 나간다”는 뜻의 불교용어이다. 아마도 정법훈습의 의미를 취해온 것 같다. 독일어(Durcharbeitung)는 완성, 단련, 철저한 연구, 조탁, 타개, 돌파, 극복이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신조어(perlaboration)를 사용하든가 영어(working through) 그대로 사용할 만큼 훈습의 의미를 제대로 규정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정신분석의 어휘에서는 “해석을 심어주어 저항을 극복하는 과정”을 말한다. 억압된 요소를 인정하고 반복기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종의 정신작업이다. 특히 해석에도 불구하고 저항이 지속되어 치료의 진전이 중단될 때 이 작업을 필요로 한다. 해석에 의한 수정된 반복을 말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훈습에서 분석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피분석자가 어떤 단계에서 통찰을 얻고도 그 다음 시간에 그 통찰을 잊어버리는 것 같기 때문에 이런 훈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아 개념의 발전에 있어 1920년대는 전환점을 이룬다. 제2지형학설이 자아를 하나의 체계나 심급으로 취급하는 이유는 그 목표가 제1지형학설보다 더욱 정신적 갈등의 양식들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1지형학설은 1차과정과 2차과정 같은 정신기능의 방식들을 주요한 지시물로 취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갈등의 적극적인 당사자들인 방어기관으로서의 자아와 금지체계로서의 초자아 및 욕동의 중심으로서의 이드는 정신기구의 심급으로 승격된다. 이처럼 제1지형학설에서 몇 가지 체계들에 분배되었던 기능들과 과정들은 자아의 심급 내에서 한꺼번에 찾아볼 수 있다. 의식은 이제 ‘자아의 핵심’이 되고, 전의식계에 속했던 기능들도 그 대부분이 자아에 포함된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점은 자아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는 정신분석 치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의식적 저항’이다. 프로이트의 자아와 이드에서 한 구절 인용해보면, “우리는 자아 그 자체 내에서 무의식적인 어떤 것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정확히 피억압물처럼 행동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의식화되지 않으면서 강력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의식화될 수 있으려면 특별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해서 프로이트는 후계자들이 폭넓게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
이러한 자아 개념의 확대는 제2지형학설에서 다양한 기능들을 자아에게 부여하게 된다. 본질적으로 자아는 서로 모순되는 요구들을 화해시키는 중재자처럼 보인다. 자아심리학에서는 소위 ‘통합적’ 기능을 갖는 탈성욕화되고 중립화된 에너지라는 개념과 자아의 무갈등 부분이란 개념이 소개된다. 여기서 자아는 현실에 대한 조절과 적응의 기구로 생각되고, 성숙과 학습과정을 통해 그 기구의 생성과정이 추적되고 있다. 이런 개념들 가운데 어떤 것은 프로이트의 정신기구 이론에 대한 적절한 표현으로 보기 어렵다. 프로이트의 자아 개념은 두 방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자아가 외부현실의 영향 하에 이드의 점진적인 분화의 산물이라 보며, 둘째는 자아가 인간들 사이에서 유래하는 어떤 특권화된 지각들에 그 근원을 두는 내적 형성물로 본다는 것이다. 특히 자아를 이드의 점진적인 분화의 산물로 보는데 그런 분화는 ‘생명체의 소포(vesicle)의 피질층’에 비유되는 지각-의식체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라깡의 거울단계
라깡은 프로이트의 작업에 나타난 자아에 대해 두 가지 접근방법을 구별해내고 이들이 서로 모순됨을 지적해준다. 자기애 이론의 맥락에서 보면, “자아는 대상의 반대편에 속해” 있지만, ‘구조모델’의 맥락에서 보면, “자아는 대상과 같은 편에 속하게” 된다. 전자의 접근방법은 자아를 리비도의 경제체제 위에 확고히 위치시키며 자아를 쾌락원칙에 연결한다. 그에 반해, 후자의 접근방법은 자아를 지각-의식체계에 연결하고 쾌락원칙에 대립시킨다. 그렇더라도 자아는 ‘쾌락원칙의 화분花盆’에서 자란다고 말한다.
라깡에 따르면, 중심적인 위치로부터 제거된 자아를 자아심리학자들이 다시금 주체의 중심에 놓아둠으로써 프로이트의 근본적인 발견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자아는 중심에 있지 않고 실제로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자아는 겨울단계에서 거울상을 동일시함으로써 생겨난 구조이다. 이 현상의 핵심은 어린아이의 미숙성에 있다. 생후 6개월의 아이는 여전히 ‘협동운동실조’를 보이는데 시각계통은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어서 신체운동을 통제하지 못하면서도 거울 앞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통합된 전체로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이미지는 ‘조각난 몸’으로 경험되던 신체와 대조되면서 조각난 주체를 위협하게 된다.
거울단계는 주체와 이미지를 동일시한다. 이렇게 꼭 닮은 ‘빼쏜꼴’과의 동일시가 자아를 형성시켜준다. 이 자아는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되어 빼쏜꼴로 변형되는 장소이다. 자아의 기반을 이루는 소외가 편집증과 구조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에 라깡은 자아가 편집증적 구조를 지닌다고 말한다. 사실상 자아는 주체에 반대되는 상상적인 형성물인데, 그에 비하여 주체는 상징계의 산물이다. 자아는 상징적 질서의 몰인식(méconnaissance)이며 저항의 자리이다. 정확히 말해서, 자아는 증상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주체의 심장부에서 자아는 특권을 부여받은 증상일 뿐이며, 탁월한 인간의 증상이자 인간의 정신질환이다. 불가에서도 ‘허망한 나에 대한 인식’은 “자기 자신의 내부에 반영된 영상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울단계는 라깡 정신분석의 시작이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라깡의 전기를 쓴 클레망은 “아마 라깡은 거울단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거울단계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씨앗”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이상은 1933년 《카톨릭靑年》 10월호에 「거울」이란 시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마치 1936년 마리엔바트에서 발표된 라깡의 「거울단계」란 논문을 예기해주는 것 같다.
이상은 이 작품에서 소리가 없는 참으로 조용한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니다. 아주 낯선 곳이다. 어렸을 때부터 거울을 지니고 다니길 좋아했다던 이상은 거울 속의 자신과 만나는 동안 이미 거울단계를 거쳐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이행해 갔을 것 같다. ‘거울 속의 나’에게도 귀는 ‘두 개나’ 있지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라서 의사소통이 이뤄질 리가 없다. 완전히 단절된 세계임을 암시한다. 여기에 ‘딱하다’는 감정까지 동원되어 있다. 더구나 악수를 하려해도 악수조차 받을 줄 모르는 딱한 친구다. ‘왼손잡이’이기 때문이다. 좌우가 뒤바뀐 존재다. 이 딱한 친구를 만져보고 싶은데도 다름 아닌 거울 때문에 만져볼 수가 없다. 아주 낯선 곳에 살고 의사소통도 이뤄지지 않고 신체접촉도 불가능하다. ‘나’는 ‘나’인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질적인 존재다.
그래도 거울 덕분에 그나마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게 됐다는 것이다. ‘나’를 무척 만나보고 싶었던 심정을 은근히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남은 환희다. 이런 환희를 거쳐 ‘거울 밖의 나’는 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5연은 이 작품의 절정을 이룬다.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왔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거울 속의 세계에 ‘거울 속의 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것도 ‘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울 속의 세계’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잘은 모르겠다”는 자신 없는 말투로 한 발 뒤로 물러선 다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 거라고 짐작하는 말로 끝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상징계라면 상상계는 우리가 잘 모르는 세계일 수도 있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있긴 있는데 거울 앞을 떠나면 눈앞의 광경이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려 거울 속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엷어져간다.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잘 모르겠다. 다시 들여다보면 분명히 눈앞에 존재하는 세계, 그러니 “외로된 사업”에 전념하게 되는 별난 세계, 이질적인 세계임에 틀림없다. 그런 뜻으로 읽힌다.
마지막 연에서는 ‘참나’를 예기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이 별난 세계를 통과해야 ‘참나’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 ‘거울 속의 나’와 반대가 되는 ‘참나’를 인식할 수 있다. 거울상像과 ‘거울 밖의 나’는 꽤나 닮아 있다. 닮아 있으면서도 반대인 두 존재. 서로 모순일 것 같은 두 속성을 ‘또’라는 접속사로 한꺼번에 압축시키고 있다. 이 시의 맨 마지막 행은 역시 작가다운 종결을 내보인다. 우선 누가 누구를 근심하고 진찰한다면 그 두 사람들의 위상은 쉽게 짐작된다. 한쪽이 어른이라면 또 한쪽은 미성년자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대조일 수도 있고 ‘앓는 자’와 ‘치료자’와의 대조도 된다. 이러한 대조는 라깡이 「프로이트다운 것」이란 논문에서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자아심리학의 이분법이다.
또한 이 행의 종결어는 ‘섭섭하다’는 감정어다. 섭섭하다는 것은 뭔가 귀중한 것을 잃거나 그런 사람과 헤어질 때 느끼는 아깝고 서운한 감정이다. 또한 남의 태도나 대접이 흡족하지 못하거나 기대에 못 미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이처럼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해주고 진찰해주려는 ‘참나’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떠나가는, 그런 배려를 거부하는 그의 태도가 ‘퍽 섭섭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울 속의 나’는 미성년자도 아니고 모르는 자도 아니며 더구나 환자도 아니란 뜻이다. 아니, 그보다도 ‘참나’로 생각했던 ‘내’가 진정으로 ‘참나’가 아닐 수도 있다. 아직 ‘거울 밖의 나’일 뿐이다. 그런 ‘나’는 어른도 아는 자도 치료자도 아니다. ‘내’가 지향하고 있는 이상형일 뿐이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조금 섭섭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이상을 읽는다면 이상은 과연 ‘아는 자’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상은 ‘거울 속의 나’를 진찰할 수 있는 치료자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감도시제4호」에서 이미 1931년 10월 26일에 ‘환자의 용태’를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진찰한 다음 ‘0․1’로 진단하고서 ‘責任醫師 李箱’이라 서명한 적이 있었다. 정신분석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는 분석가인 셈이다. 이렇게 이상을 ‘다 아는 자’로 여기는 필자가 이상에 대해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전이’라고 부른다. 전이를 극복하려면 일단 전이에 빠져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라깡의 정신분석에 의거하는 일이다. 라깡이 자신한테 빠져있는 전이를 독자들로 하여금 극복하도록 도와주리라는 믿음도 역시 또 하나의 전이다. 그래도 한번 빠져봐야 할 것 같다. 거기에는 빠져나오는 길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라깡에 의하면, “거울단계는 한 편의 드라마로서 그 드라마의 내부적인 압력은 불충분으로부터 예기로 몰아간다.” 그런 다음 이러한 작용에는 근본적인 ‘소외’가 자리 잡게 된다. 아이가 이뤄냈다고 믿은 통달은 거울상 속에 있고 그 자신의 밖에 있어서 아이는 자신의 동작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다만 그는 외부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다소간 통일된 것으로 볼 뿐인데, 실제적으로는 접촉할 수 없는 소외되고 이상적인 가상假想의 통일체 속에서 볼 뿐이다. 이상이 「거울」에서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라고 읊었고, 1936년 《여성》 2호에 실린 「명경」에서는 “설마 그렇랴? 어디 촉진…/ 하고 손이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라고 읊었다. 접촉할 수 없고 소외된 거울상을 이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외라는 것은 존재의 결여다. 그러한 결여에 의해 그의 실현은 또 다른 공간이나 상상적 공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통일체의 이미지는 아이의 조정되지 않은 신체의 소란스런 동작에 의해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는 외부 형태 속에 있는 신기루인데 거울이 전도된 대칭과 원근법으로 되비쳐준 것이다. 그 이미지는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왼손잡이’인데다, 거울을 주제로 하는 이상의 또 다른 작품인 「오감도시제15호」에서처럼,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할 것을 권하지만 내가 자살하지 않으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알고 나서,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금속으로 엄폐하고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다.” 이 작품에는 전도된 대칭이 이처럼 비장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성까지 함축되어 있다.
거울단계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를 동일시하기 시작하고 주체가 그들과 공유하는 세계를 동일시하기도 한다. 타자의 이미지와의 동일시와 그 이미지와의 원초적인 경쟁 사이에 벌어지는 최초의 갈등은 자아를 더욱 복잡한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켜주는 변증법적 과정을 시작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서, 다른 아이를 때린 아이는 제가 방금 맞았다고 말하고, 다른 아이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는 아이는 제가 넘어진 것처럼 울게 된다. 그밖에도 타자와의 동일시가 갖는 구조적인 양가성은 노예가 전제군주를 동일시하고 배우가 관객을 동일시하며 유혹 받는 자가 유혹자를 동일시하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라깡은 공격성과 자기애가 서로 간에 단단히 맺어져 있는 양상을 관찰하고 있다. 공격성이란 자기애의 환원될 수 없는 부수물이고 타자와의 어떠한 관계에서도 나올 수 있다. 라깡은 공격성을 “주체의 생성에서 자기애적인 구조의 상관적 긴장”으로 본다.
라깡의 무의식과 유식唯識
라깡은 정신분석 경험에서 ‘무의식의 주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무의식은 반드시 … 시니피앙의 논리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시니피앙들은 서로 간에 결합(환유)과 치환(은유)이란 두 가지 움직임에 종속된다. 치환이란 기제 덕분에 무의식은 은유적인 시니피앙의 형태로 외면화한다. 결합과 치환이란 시니피앙의 두 가지 움직임이 구조를 끊임없이 활성화시킨다. 무의식은 향락의 힘으로 작동되어 은유적 시니피앙이란 열매와 ‘무의식의 주체’란 효과를 가져 온다. 은유와 환유를 통해 의미화 진술이 계속적으로 갱신될 수 있다. 그것은 부단한 능동적 과정인 무의식을 그대로 닮아 있다.
다시 말해서, 결합과 치환을 연결하면 무한한 ‘시니피앙의 연쇄’, 즉 ‘의미화 연쇄’가 만들어진다. 의미화 연쇄란 서로 연결된 일련의 시니피앙들을 지칭한다. 이런 의미화 연쇄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욕망의 영원한 성질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언제나 다른 시니피앙들이 무한히 첨가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욕망은 환유적이다. 연쇄는 또한 환유적으로 의미를 생산해낸다. 의미작용은 연쇄의 어떤 한 지점에 현존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는 한 시니피앙에서 다른 시니피앙으로 이동하면서 강요된다.
‘현행진술’(le dit)과 ‘잠복진술들’(les dires)이란 개념을 활용해 보면 라깡의 무의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나’로 기능하는 사건은 피분석자가 자신도 모르게 언술한 현행진술이 되고 다른 시니피앙들의 연쇄는 잠복진술들의 집합으로 나타난다. 잠복진술이란 “말해지길 기다리거나 이미 말해진” 진술들이라서 “잠재적이고 무의식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의미화 진술’은 무의식의 행위화이고 무의식은 현행진술의 행위 속에 존재한다. 라깡은 특히 명명하고 쓰기를 좋아하여 공식화하고 문자와 숫자와 이름을 붙인다. 그는 현행진술을 S1이라 쓰는데, 그것은 영원히 하나(1)이고 시니피앙이라서 S라고 쓴다. 사슬로 연결되고 억압되어 있는 잠복진술의 집합은 S2로 표기된다. 이렇게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어떻게 행위화하는지 보여주는 의미화 한 쌍인 S1/S2의 이론을 세우게 된다.
나지오는 무의식이 오로지 분석치료 내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라깡 자신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지만 그가 라깡을 그렇게 읽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분석적인 두 파트너들이 공유하는 독특한 구조이다. 따라서 무의식은 분석가의 것도 피분석자의 것도 아니다. 전이 속에서 산출되는, “유일한 무의식이 있을 뿐이다.” 무의식은 오로지 치료 내에만 존재한다. 무의식은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집단적인 것도 아니며 둘 사이의 공간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분석의 당사자들 각각을 꿰뚫고 포괄하는 독특한 실체라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자아는 거울단계에서 거울상과 동일시함으로써 생겨난 착각에 불과하다. 이런 자아와 구분하여 철학적 뉘앙스가 부여된 ‘주체’를 상정하게 된다. 물론 라깡의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이다. 이렇게 라깡을 거치면서 무의식의 개념이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의식을 회피하려는 이 시대에는 정신분석이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 자리를 새로운 뇌과학이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음에 관한 가장 일관된 견해를 내보이는 정신분석이 신경과학자들한테 가장 적절한 이론적 출발점을 제공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새로운 시도가 모색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벌써 4-5세기에 조직화된 유식불교가 현대의 정신분석 개념들을 더욱 심화시켜주고 신경과학의 연구방향을 선도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음은 자연의 한 측면이고 ‘정신기구’는 그 뒤에 놓여 있는 추상작용이지만 자연의 다른 부분들과 구별되는 한 가지 독특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자연의 일부라서 우리가 그에 대해 독특한 관찰시각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기구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은 각각 자연의 서로 다른 부분을 연구하고 있다. 그에 따라 정신기구를 두 종류의 요소로 나눠왔다. 그 중 하나인 뇌는 신경과학자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연구되고, 다른 하나인 자기(self)는 주관성의 과학인 정신분석학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이렇게 잘못된 이분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바로 신경․정신분석학이다.
그림 1. 꿈꾸는 마음
(출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1900년)
의식이란 인간에게 특유한 심리 활동의 총체이다. 철학사에 있어서 의식과 물질의 관계는 철학의 근본문제였다. 꿈 연구는 인간의 의식에 관한 연구를 과학 이론으로 이끌어 간다. 의식은 뇌의 기능이고, 뇌의 상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의식의 종류를 결정해 준다. 이렇게 꿈 연구는 수면과학에 연결되고 수면과학은 신경생물학에 연결된다. 인지과학자들이 정신기구의 기억계통을 연구할 때 프로이트가 초심리학에 관한 저술 속에서 연구하고 기술하고 규정하려던 것과 동일한 것을 연구해 왔다. 먼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제7장에 나오는 유명한 도식인 ‘꿈꾸는 마음’을 살펴보자.
이 도식은 퇴행과 관련시켜 처음으로 정신기구란 개념을 소개한 그림이다. 정신과정은 언제나 지각종말(Pcpt)에서 운동종말(M)로 진행된다. 주체가 받아들인 지각 자극들은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기억(Mnem)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각계통과 기억계통을 분명히 구별해야 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분화이다. 여기서 기억들은 그 성질상 무의식적(Ucs)이다. 기억들은 무의식이 된다. 꿈의 형성은 ‘비판적인 기관’과 ‘비판받는 기관’ 두 가지로서 설명할 수 있다. 비판하는 기관은 의식으로의 접근을 금지시킨다. 프로이트는 이 두 기관 사이에 중간역으로서 전의식(Pcs)을 설정해둔다. 전의식은 운동종말에 위치하여 지각-의식 체계의 마지막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꿈에서는 내적인 자극이 의식화되기 위해 중간역인 전의식을 통과하려 하지만 검열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자극은 정상적인 운동종말 쪽으로 향하는 대신 역행로를 따라가게 되는데, 이런 현상이 바로 퇴행이다.
이러한 정신기구의 개념들은 유식설에서의 식識의 전변轉變과 상당한 부분에서 겹치고 있다. 철학사전에 나오는 ‘유식설’에 따르면 “꿈속의 경험과 같은 형태로, 외계의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식의 분별 작용에 의해 임시로 나타나게 된 것이고(顯現), 그 작용을 식의 전변轉變이라고”하여 식의 전변을 마침 꿈속의 경험에 비유하고 있다. 오오타 큐우키(太田久紀)의 불교의 심층심리를 번역한 정병조의 각주에는 아뢰야식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서 그 궁극을 제팔식 즉 아알라야(Ālaya)식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불교에서 보는 인간의 무의식적 심층심리이다.” 아뢰야식의 별칭인 장식藏識은 ‘밑층에 깔려있는’ 혹은 ‘파묻히다’는 뜻의 어원인 ‘아라야’를 명사화한 용어이고 ‘감추다’ ‘간직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과거의 경험’이며,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현재나 미래를 낳게 하는 힘’이라서 종자種子라고도 부른다. 여기서의 아뢰야식은 정신구조를 의식․전의식․무의식으로 나누는 프로이트의 첫 번째 지형학설을 떠올리게 해준다.
한편 아뢰야식의 ‘집착되는 성질’을 설명하면서 인용된 세친世親의 “아뢰야식은 폭류와 같다”는 말은 라깡의 무의식 개념을 연상시켜준다. 우선 아뢰야식의 ‘격심한 흐름’이 자기의 실체라고 하는데, 인간은 흘러가기만 하면 ‘불안’하기 때문에 부동의 것을 구하려고 한다.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 허상을 그리며, 허상의 자기를 진실한 자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라깡도 환경에 대한 자아의 통달이 착각적인 통달이며 주체는 일생을 통하여 상상적인 총체성과 통일체를 계속 찾아 나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아가 주체한테 영구성과 안정성의 느낌을 부여해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거울단계를 지나면서 인간은 통일성의 착각 속에서 언제나 자기통달을 예상하게 되는데, 자신이 출발했던 혼돈 속으로 다시금 미끄러져 떨어질지 모른다는 끊임없는 위험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찔한 오르막의 나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안의 본질을 본다. 라깡의 불안은 주체가 거울단계에서 대면하게 되는 파편화(‘조각난 몸’)의 위협과 연결된다.
또한 훈습과 종자라는 개념에 이르면 라깡식의 언어학적 무의식 개념이 연상된다. 경험이 축적되어가는 것을 훈습이라 하고, 축적되는 경험을 종자라고 말한다. 따라서 종자가 훈습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뢰야식 가운데, 결국 인격의 밑바닥에서 종자가 훈습되는 까닭이다. 아뢰야식은 종자의 집적통일 그 자체이다. 능훈能熏이란 개념을 빌려 말해보면, “자기가 자기에게 훈습하며 자기를 만든다. 숨은 자기의 나타난 것으로서의 자기가 거기에 하나의 행위를 만들며, 그 행위가 다시 자기의 밑바닥에 훈습되어 간다는 순환이 자기의 실태이다. 경험에 의해서 사람은 풍부해간다. … 훈습이란 그러한 인간의 풍요한 작업을 말한다.” 종자→현행→종자의 끝없는 순환이 “동시에 격심하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경험의 축적이 과거에 관련되어 있지만 훈습되어 있는 종자에는 미래를 향한 능동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종자는 과거와의 관계에서는 ‘경험’이 되고, 미래와의 관계에서는 ‘가능성’이 된다.
한편 종자의 신훈설에서, 인간의 능력이나 소질은 훈습에 의해 획득된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것은 한 인간의 몇 십년 동안의 경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경험, 조상들의 경험, 오래고 오랜 인류의 경험, 그러한 것들의 축적에 의해서 오늘날 지금 우리들의 생존이 있다고 말한다. ‘무시의 때부터 이제까지’라는 말로 ‘훈습’의 축적의 유구성을 난타는 부르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칼 융의 집단적 무의식을 연상시켜 주는데, 그 이유는 “집단적 무의식이란 인류 전체의 공통된 정신적 유산으로 계속 유지되고 전달되는 정신적 부분을 의미한다”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제7말나식이다. 정병조는 말나식에 대한 각주에. “Manas, 전오식을 조종하는 제육의식의 근원이다. 이것은 또 다시 제팔 Alaya식에 의해 움직여진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제칠 Manas의 특징을 ‘나’라고 하는 의식(Ego)으로 파악한다”라는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그런데 말나식은 사나운 물결 같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솔직히 보지 않을뿐더러, “보고 싶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나운 물결 같은 자기에게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라깡 정신분석에서 ‘몰인식’에 연결된다. 자아는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생각과 느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거부”하는 적극적인 의도를 보인다. 라깡은 ‘상상적 지식’(connaissance)과 ‘상징적 지식’인 무의식적 지식(savoir)을 구별하여 사용하는데, 무의식적 지식을 아뢰야식의 또 다른 별칭인 “일체 제법의 근본이 된다”는 뜻의 ‘본식’本識이라 불러볼 수 있을 것 같다.
본식은 정신분석 치료의 목표가 되는 지식이다. “무의식은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지식’, 즉 주체가 자신의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지식인 한에 있어서는 상징적 지식의 다른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치료는 이러한 지식을 주체에게 점진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전이를 라깡은 ‘알 것으로 가정된 주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도 아는 대상은 다름 아닌 본식이다. 그에 비해서 ‘지식’과 관련된 몰인식은 상상계에 속하는 일종의 ‘자기-지식’이다. 자아를 구성하는 자신에 관한 상상적 지식에 주체가 이르게 되는 것은 오해 또는 오인에 의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라깡은 자신의 글을 영어로 번역할 때 méconnaissance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두길 바랐던 것 같다.
정신분석의 목표인 무의식을 체험하려면 언어의 상상적 차원을 거쳐 상징적 차원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임상경험을 통해 그렇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0년에 노벨의학상을 받은 에릭 캔들은 “정신분석이 여전히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에 대하여 가장 일관되고 지적으로 충족되는 견해를 발표하고 있다”고 쓰면서, 이것을 근거로 정신분석이 신경과학자들한테 가장 적절한 이론적 출발점을 제공해 준다고 주장했다. 본질적으로 그는 정신분석과 신경과학의 통합을 요청했고 이런 통합을 21세기의 ‘정신의학을 위한 새로운 지식체계’로 보았다. 앞으로는 주관적인 경험에 대한 포괄적인 신경과학이 발전하게 될 것이고, 그 덕분으로 전혀 다른 정신분석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유구한 지식체계인 유식은 현대 정신분석 개념들을 예기해주고 심화시켜 줄 것이다.
김종주/ 1993년 《예술세계》 문학평론 등단. 문학관련 역저서 『라깡정신분석과 문학평론』 『이청준과 라깡』 『무의식의 시학』 그 외에 라깡정신분석에 관한 역저서 20여권. 현재 반포신경정신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