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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
손택수의 애도일기
김종훈
이 당혹스러운 부재의 추상성. 그런데도 그 추상성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비로소 추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추상은 부재이면서 고통이다, 그러니까 부재의 고통. 그런데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까?
-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중(김진영 역, 이순, 2012)
그러고 보니 손택수가 그려온 세계는 줄곧 ‘충만한 부재’였다. 첫째 시집의 표제시 「호랑이 발자국」에서는 발자국은 있되 눈과 함께 사라진 사람의 자취를 그렸고, 둘째 시집의 표제시 「목련 전차」에서는 전차기지터에 핀 목련을 보며 예전 바퀴를 굴리던 힘을 생각한다. 셋째 시집의 표제시 「나무의 수사학」 연작은 속마음을 감춰야 하는 도시 생활의 피로에서 시작해, 머리카락이 듬성하고 발뒤꿈치 양말이 구멍이 난 청소부의 뒷모습을 주목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최근 시집은 어떠한가. 시집의 상당 부분을 부친을 떠나보낸 뒤 찾아온 상실감으로 채우고 있다. 그의 시적 상상은 무언가 놓여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며 작동한다. 장시 「백년 동안의 이별」이나 최근의 다른 시편을 보니 이와 같은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인왕시장이나 망원시장 골목 전집 같은 데,
이어붙인 천막 사이로 찢어진 하늘이 보이는 아현시장
그런 데선 비슷한 처지들도 더러 있어 조금은 덜 민망하고
이모집 고모집 숙자네 정든 이름들, 이름들이나마
혼자 술 먹는 청승도 서럽지 않게 껴안아 줄 것 같지
그런데, 웬걸, 이런 만만한 데서도 봉변을 당할 때는 있으니
혼자 왔어요, 네, 그러면, 사람 좋아 보이는 그 늙수그레한 여자가 친절도 하게
술잔 둘과 수저 두 벌을 놓고 가는 것이다
마치 맞은 편에 누가 앉아 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혼자서 멋쩍을까 봐요, 묻지도 않는 말을 상 위에 버젓이 올려놓는 것이다
배려라면 배려인데, 이럴 때는 도무지 취하지 않을 수가 없지
장수막걸리에 부추전, 아나 너도 한 잔 받아라,
취하지도 않는 맞은편을 향해 술잔을 기울이면서
- 「혼자 가는 술집」 전문
그는 재래시장의 술집을 자주 찾는다. 과거 흔적을 보존하고 있어서도 그렇지만 혼자라도 눈치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주인은 혼자 오는 사람에 익숙한 듯 “멋쩍을까 봐” 술 잔 두 개와 수저 두 벌을 놓고 간다. 이 넘치는 배려는 시적이라 할 만큼 눈에 띈다. 그러나 더욱 눈에 띄는 부분은 다음에 있다. 시인은 왜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걸까. 한 잔 받으라고 말하면서까지 시인은 왜 고양됐는가. 주인의 배려에 대한 감동으로 촉발되었을지언정, “너도 한 잔 받아라,/취하지도 않는 맞은편을 향해”로 이어지는 장면을 염두에 두면 이를 감동의 원인 전부로 상정하기는 어렵다. 주인의 배려에 대한 감동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빈자리를 차지한 상대방의 환영이 전면에 들어선다. ‘부재하는 그’는 주인이 놓은 술잔과 수저로 인해 ‘현전하는 당신’으로 변모했다.
다시 묻는다. 시인은 허름한 술집의 낭만을 즐기러 왔나, 없는 ‘당신’이 그리워서 왔나. 이 두 질문은 일정 부분 겹치지만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는다. 재래시장은 지난 시간을 봉인한 곳이다. 지난 시간에는 ‘당신’도 있었고 ‘시장’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은 ‘그’가 되어 있고, ‘시장’은 여전하다. 그는 과거를 봉인한 시장을 매개로 ‘그’가 아닌 ‘당신’과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곳을 찾아 봉인된 시간이 풀리자 ‘그’는 ‘당신’이 되어 시인과 대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실제로 예전에 그곳에 '당신'과 함께 갔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특정한 장소를 뜻하는 시장이 아니라 그가 살아 있던 시간을 뜻하는 것이 재래시장이다.
그는 어떻게 없는가. 이인칭과 삼인칭의 환류 체제는 이 이상한 질문을 만든 주범이다. 이인칭과 삼인칭은 애초에 다른 것이 아니라 일인칭에 의해 선택되는 이름이다. 일인칭 앞에 있는지 여부에 따라 대상은 이인칭이 될 수도 있으며 삼인칭이 될 수도 있다. ‘나’ 앞에 있을 때 ‘그’는 ‘너’가 된다. ‘나’ 앞에서 사라지면 ‘너’는 ‘그’로 바뀐다. ‘너’는 구체적인 세계에 살며 ‘그’는 추상적인 세계에 산다. 영원한 부재란 구체적인 세계에 ‘그’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이인칭과 삼인칭의 선택을 주관하는 ‘나’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다. ‘나’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이 사태 앞에서 무력해진다.
시는 화석처럼 굳어 풍화되는 삼인칭 ‘그’를 ‘나’ 앞에 불러 세워 ‘당신’으로 바꾼다. ‘그’는 다시 ‘당신’이 된 다. 그리움과 상상력이 이 순간을 연출했을 것이다. 이들은 기억의 공간에서 점점 협소해지는 ‘그’의 영역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리움으로 호명되는 ‘당신’ 앞에 마주 앉은 ‘나’는 행복한가. 전적으로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위안을 받을 수는 있으나 추상의 세계가 구상의 세계로 바뀌지는 못할 것이다. 더욱 간절해지는 것은 ‘그’의 생생한 육체성이다.
뽈찜을 먹습니다 대구는 볼을 부비며
사랑을 나누는 버릇이 있다지요
한때 저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쁜 것이 보이면 먼저
볼을 부비고 싶었지요
볼에 불을 일으키고 싶었지요
(중략)
해풍에 탱탱 언 볼에 감아드린
목도리도 제 살갗이었습니다
동해 시린 물을 맞던 남해 물결이었습니다
얼마나 부볐으면 이리 꾸덕꾸덕 쫄깃해진 대구
알처럼 붉은 빛이 당신 볼에도 여전합니까
- 「가덕 대구」
환영을 동원하여 사라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환청을 동원하여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지기는 어렵다.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은 당신의 부재를 강력히 환기한다. 볼을 부비는 사랑을 나누는 대구에서 촉발하여 볼이 떨어질 것 같은 추운 날 둘러주었던 목도리로 당신을 떠올린다. 볼을 부볐던 그 기억은 여전한데, 당신은 없다. 모든 생의 감각과 결별하고 남은 자의 초라함이 '꾸덕해짐'으로 거기 있다. 이 초라함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라 ‘나’이다. 아니, ‘나’가 가진 '그의 기억'이다.
부재를 앓고 있는 시인은, 저물고 싶어서 서쪽으로 가기도 하고, “내게서 봄이 빠져나가버렸기 때문”(「매화력-문태준의 「長春」을 읽고」)에 남쪽으로 가기도 한다. 결핍은 그를 바깥으로 내몰았고, 그곳에서 그는 결핍을 채우려 했다. 그래서 내면의 추위는 사라지고 봄은 왔는가, 내면의 주름은 펴졌는가.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그가 느끼고 있는 부재의 대상이 세상을 뜬 부친이기 때문이다. “곱씹고 곱씹은 아버지의 유언 한 줄로 시집을 묶”(「시인의 말」 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는다고 시인은 최근 말했다. 시집은 묶였으나 애도의 마음은 묶이지 않은 채 여전히 시를 만들고 있다.
부친에 대한 애도가 집중적으로 표현된 시편은 장시 「백 년 동안의 이별」이다. ‘우는 발’ ‘종이신’ ‘세상 끝에서의 잠’ ‘당신은 누구인가’ ‘명옥헌에서’ ‘청산도에서’ ‘빗방울 후두기다 간 자리’ ‘산그늘’ ‘나무 무덤’ ‘이별의 풍습’ ‘밥풀’ ‘노끈으로 묶인 상자’ ‘마당에 자갈을’ ‘저녁의 눈동자’ 14개의 소제목이 달린 「백 년 동안의 이별」에는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흔적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가신지 세 해 째”(「백 년 동안의 이별-노끈으로 묶인 상자」)이지만 일상 속에서 그의 존재는 무시로 끼어들어 그의 부재를 알린다. 편지 겉봉을 붙일 때 쓰는 밥풀을 기억하다 염습할 때 입에 물렸던 쌀을 연상한다(「백 년 동안의 이별-밥풀」). 수목장을 치른 뒤 “나무에게 이마를 숙였으니 돌 하나 풀잎 하나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다가 “세뱃날 절을 가르치시던 당신의 마지막 가르침도 절이다”(「백 년 동안의 이별-나무 무덤」)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병상 밑에서
주인의 발을 기다리다
이별을 했다
(중략)
구두만 남겨놓고 어딜 갔는가
무덤구덩이 속처럼 컴컴한
구두 속에 내 발을 집어넣는다
발등 위에 어린 내 발을 올려놓고
걸음마라도 하듯이
- 「백 년 동안의 이별-우는 발」 중
기차가 덜컹거린다 차를 타야만 잠이 드는 병을 얻었다
당신이 가신 뒤부터다
(중략)
잠을 자기 위해서라면 세상의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시절이
내게라고 왜 없었을까 귀향도 귀가도 없는 경계 위에서만,
경계를 떠도는 순간들에만 잠시 눈을 부치며
요람처럼 기차가 흔들린다 사내의 뻥 뚫린 입속 같은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 「백 년 동안의 이별-세상 끝에서의 잠」 중
그리고 그는 구멍을 본다. 「백 년 동안의 이별-우는 발」의 사연을 보자. 유품을 정리하다 신발을 발견한다. 그 신발은 “주인의 발을 기다리다/이별을” 한 상태이다. 곧 그는 신발을 신어본다. 주인 대신 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주인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그는 신발의 주인이 아니다. 신발을 신자 마치 누군가의 발등을 밟은 느낌이다. 그 구멍에는 이미 누군가의 발이 채워져 있는 것이다. 기억의 끝에 “발등 위에 어린 내 발을 올려놓고/걸음마라도 하듯이”가 있다. 그는 발을 매개로 아버지와 마주한 최초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 년 동안의 이별-세상 끝에서의 잠」에서 시인은 “당신이 가신 뒤부터” 차를 타야 “잠이 드는 병”에 걸렸다. 그러다 문득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자는 옆 사내를 본다. 잠자는 사내의 피곤함과 시인의 피곤함이 겹쳐진다. 시인은 자문하는 것 같다. 왜 나는 편히 자지 못하고 이렇게 차를 타야 잠을 잘 수 있나, 왜 그가 가신 뒤에 이런 병이 생겼나.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귀향도 귀가도 없는 경계 위”에 ‘나’가 있으며, “경계를 떠도는 순간”에 잠시 눈을 부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는 “요람처럼 기차가 흔들린다”가 있다. 최초의 시간이 다시 한 번 환기된다.
첫째 시에서는 신발의 주둥이가, 둘째 시에서는 잠든 사내가 벌린 입이 나와 아버지를 매개한다. 이들은 입구 앞에서 볼 때는 구멍이었으나, 들어가 보니 아버지와 함께 있던 시절과 닿아 있는 터널이었다. 구멍 속 암흑은 죽음이면서 동시에 기억이었다. 그는 이 구멍을 통해 아버지의 발등 위에 자신의 발을 올려놓고 걸음마를 하던 시간과 마주하게 되고, 또한 흔들리는 요람 위에 누워 있던 시간과 마주한다. 그가 돌아간 시간은 생전의 고인을 돌보던 가까운 과거가 아니라, 고인이 자신을 돌보던 최초의 과거이다. 그곳의 고인은 건장하고 신성하다.
그렇다면 장시의 제목인 ‘백 년 동안의 이별’은 최초의 그때와 지금의 거리를 뜻하는가. 하지만 그 시간이 백 년은 아니지 않은가. 백 년을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먼 시간’이라는 상징적 시간이라 보더라도, 이를 수식하는 ‘동안의’는 이해하기 힘들다. ‘동안의’는 한정된 시간을 환기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재회가 있어야 할 듯하다. 최초의 시간에서 백 년이 지나면 다시 재회가 약속되어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백년'은 고인이 살았고 자신이 살 시간의 합인가. 고인과 ‘나’에게 백 년은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가.
내가 내 살갗을 만졌는데 내 살갗이 아니라
샤워를 끝내고 내가 분명 내
살갗을 만졌는데 깜짝
당신의 살갗이 이식된 거라
나도 몰래 당신을 뒤집어쓰고
살고 있었던 거라
당신의 살을 내 살인냥
입고 있었던 거라
훌러덩 살을 갈아입는 일이 맘처럼 되지를 않지
떨어진 잎들은 끝내 기억을 놓지 못하고
나무의 새 살갗이 되어 돋아나지
껍질만 남겨놓고 빠져나간 매미는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거지
구름이 머무는 것인가 먼 대륙 황사가 쓸고 가는 것인가
부식토 속 감각들이 까마득 살아나는 것인가
나를 만지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 「백 년 동안의 이별- 당신은 누구인가」
영원히 이별한 고인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는 환생해 다시 ‘나’ 앞에 설 수 없으며 ‘나’가 죽어 ‘그’를 만난다는 보장도 없다. ‘그’를 기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성이다. 그러다 문득 살갗을 만진다. ‘그’가 느껴진다. ‘그’는 ‘당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있다. 이 재회는 인식의 바깥에 있으나 몸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해하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이 모순은 앞선 질문의 엉킨 실타래를 풀 빌미를 제공한다.
두려운 것은 ‘그’가 있는 곳이 기억이라는 점이었다. 기억이 스러진다면 ‘그’는 사라지는 것일까, 영원한 이별인가. 이와 같은 생각은 모두 추상적 세계 내에서 이뤄진다. 그런데 ‘그’가 어느덧 살갗과 같은 육체성으로 생생하게 ‘안’에서 느껴진다. 내 인식 범위 바깥에서 인연의 끈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낙엽이 “기억을 놓지 못하고” 다시 나무의 새 살갗이 되듯이, 매미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듯이. 이 우연한 사건들에 놓인 인과성은, 추상적 세계와 구체적 세계를 잇는 다리이다. 인식 바깥의 영역과 인식 안쪽의 영역을 이었다는 점에서 시인은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 그러나 바로 인식 바깥의 영역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시인은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백 년 동안의 이별’의 ‘백 년’은 고인과 시인이 사는 날의 합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만남과 이별이 같은 뜻이 되는데, 이 동일시는 거의 의미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만났던 시간이 곧 이별의 시간이라는 점이 아니라 만났던 시간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이다. ‘백 년 동안의 이별’은 그리움의 증폭보다는 재회의 기약을 강력히 전달해야 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동안의’가 지닌 한정성이다. 그 시간은 이별하는 시간의 마감을 지정하여, 그 뒤의 시간이 있음을 환기한다. 그 시간에 내 인식은 닿지 못한다. 하지만 내 인식은 거름이 된다. 마치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이 살갗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지만 백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당신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장시의 제목은 인식 범위의 바깥을 용인하는 말이며 동시에 자연스러운 만남의 시간을 기약하는 말이다. 시는 그 시간을 지금 이곳에 끌어당긴다.
김종훈 | 2006년 『창비』등단. 저서『미래의 서정에게』등. 현재 상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