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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부터 천천히
박솔뫼
문학과지성사
2016 5
6
저녁이 되고 나와 도미는 마치 퇴근을 하듯이 주유소를 나와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안녕 잘 들어가 잘 자 그런 말을 하고서 나는 계단을 오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방을 찾고 화장실을 찾고 하느라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천장은 어떤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의 집에 온 다음 날에야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어째서 그 전날에는 불을 켜고 찬찬히 살펴볼 생각을 못 하고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렸을까. 술에 취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베란다에는 안 나갔을 것이다.
우선 나의 방은 그럭저럭 넓지만 보통은 미닫이문을 닫아놓고 쓴다. 그렇게 방이 마치 두 개인 것처럼 쓰다가 환기를 시킬 때나 더울 때 미닫이문을 열고 창문도 열고 드러누워 있는다. 내가 잠을 자는 방은 현관을 기준으로 오른쪽 방이고 왼쪽 방에서는 다른 것을 한다. 무언가 생각을 한다든가 혼잣말을 한다든가 일기를 써볼까 한다든가 그런 것들을 한다.
왼쪽 방의 벽지는 해바라기인데 가끔 해바라기가 입체적인 형태로 그러니까 이런 것을 양각이라고 하지 그런 형태로 활짝 피어 있다. 나는 해바라기를 아주 좋아하고 늘 좋아했는데 미닫이문을 열자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 있었고 그날은 해가 선명한 아침이었고 해바라기에 햇살이 비치고 그 해바라기는 평면적이지 않고 꽃잎과 가운데 갈색 부분이 올록볼록하게 나와 있었다. 그 장면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문턱을 밟고 서서 꽃밭을 보는 기분으로 벽을 보았다. 아주 분명하고 조금 무서운 해바라기였다. 아름답고 무엇보다 선명한 해바라기였다. 어릴 때부터 이런 방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어째서 이제야 이런 방이 있음을 이런 벽지가 가능함을 알게 된 걸까. 아주 때늦은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도미가 나를 부르러 벨을 눌렀을 때에야 방문을 닫고 나올 수 있었다.
이상하게 주유소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불을 잘 켜지도 않고 더듬더듬 화장실을 찾고 씻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누가 채워 넣은 건지 늘 차 있는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베란다에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다 가끔 이 공간의 소유주 이름을 그 한자를 그 영어를 읽어보려고 노력하다가 만다. 불을 켜고 문을 열면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 있을까. 해바라기는 어느 때고 시들지 않고 활짝 피어 있었다.
다음 날 입에서 나는 술냄새를 지우려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다시 문을 열면 해바라기는 여전히 활짝 피어 있고 그 방에는 해바라기와 함께 드문드문 유채꽃이 피어 있는데 나는 해바라기만큼은 아니지만 유채꽃도 정말 좋아하는데 어떻게 집주인은 내가 좋아하는 꽃들을 알고 벽지로 써주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벽들이 나를 알아서 꽃을 피우는 것 같았다. 방 안에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을 본 이후로 어쩐지 혼잣말을 하거나 이걸 할까 저걸 할까 하는 생각들이 어색해졌다. 드러누워 꽃을 보거나 일어서서 꽃을 보았다. 꽃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면 안 될 것처럼 꽃이 빈틈없이 피어 있었고 문을 열자마자 와 하고 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날 밤에는 자다가 일어나 미닫이문을 열고 왼쪽 방으로 들어갔는데 피어 있는 꽃들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벽지의 단정한 방이었다. 그 방 한쪽에는 왠지 책을 읽기 좋아 보이는 갈색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천장은 오른쪽 방보다 조금 높아 보였고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커다란 창이 보였다. 높아진 천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어딘가로 사라진 듯했던 해바라기가 그곳에 있었다. 해바라기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었고 해바라기의 삐죽삐죽한 형태를 따서 천장 가운데가 높았으며 그 가운데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해바라기 형태가 모여 있었다. 일곱 개 아니 여덟 개가. 해바라기는 어디에나 피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잠을 자러 갔다.
그러고 보니 도미는 매일 나를 깨우러 오고 나를 챙겨주는데 도미네 집에는 가본 적이 없네 하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아침 내가 먼저 도미의 현관을 두드렸다. 도미는 역시나 놀라지도 않고 무심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고 도미의 집은 내가 사는 곳과 거의 똑같았다. 나는 혹시 몰라 하는 생각으로 방으로 들어가 닫혀 있는 미닫이문을 열었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그렇게 보이는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문을 연 순간에는 그럼에도 물고기들이 정말로 유유히 헤엄치는 것으로 보였다. 도미는 하루만 있던 겨울 그날에도 물고기가 죽는 것을 보았고 이름도 물고기 이름이며 벽지도 물고기들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도미가 안 가니 물었고 우리는 매일 하는 것처럼 다시 주유소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주유소 사무실에서 철조망을 바라보았다. 철조망은 늘 언제나 바뀌지 않는 철조망이었고 그 너머는 선명한 녹색이었고 그 둘은 변함없었다. 그럼에도 아무 생각 없이 그 둘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은 갔고 한낮의 태양도 저무는 때가 왔고 한낮의 태양이 어떻게 저무는가를 볼 수도 있었다. 단지 철조망만을 바라보는 것으로 말이다. 혹은 그런 날도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지 않는 때부터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때의 숫자를 세는 것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서서히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때를 하나의 세트로 숫자를 세는 것이다. 어떤 날은 한 세트도 없을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열 세트가 넘어서야 낮이 끝났다. 언제 보아도 철조망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고 나는 저것이 정말 끝없이 이어지나 이어지지 않나 확인할 만큼 적극적이거나 그것을 위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만큼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대신 이어진다면 얼마나? 멈춘다면 어디서? 어디서 어떻게 멈추는 것이 좋은가…… 그런 것만은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것에 관해 생각하려 했으나 문득 아주 지겨운 것을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들자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것처럼 보이는 철조망은 정말로 끝이 없나 보군 나는 걷고 또 걸었고 하늘은 선명한 하늘색이었다. 저런 하늘색을 무어라 하겠지 아쿠아 블루라거나 뭐 그런 말이 있겠지. 나는 순간 부산이라는 이름마저 잊은 것처럼 중앙동과 광복동의 거리들을 잊은 것처럼 느껴졌고 그럼에도 나의 친구들은 거기서 계속 커피를 마시겠지 레모네이드를 마시겠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곧 내가 떠나는 것으로 그 거리들은 스르르 몸을 접어 사라졌을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내가 길을 잘못 드는 것으로 가볍게 날아가버렸을 것이고 어느 때고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많은 시간이 그래왔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어딘가로 사라졌을 것이다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런 확신은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부산으로 돌아가고 싶어 어떻게 돌아가나요 그런 것을 묻고 싶어 주유소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미 사라졌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슬프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눈앞으로는 또다시 뛰어가는 빠른 사람이 보였다가 사라졌고 철조망과 풀밭은 변하지 않고 이어졌지만 그 반대편의 풍경은 집들이 보이거나 버스 정류장이 보이거나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버스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보다는 그저 잠시 앉아 있었다. 버스가 가는 곳은 버스가 오는 곳은 알 수 없는 한자들의 조합이었고 어느 버스인가를 타고 주유소 근처에 내린다면 나는 그 주유소가 적어도 어디 근처인지는 알 수 있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버스가 아니라 익숙한 트럭이 한 대 지나갔고 그 트럭은 서서히 멈추었다. 아이스커피를 달라고 했던 아저씨는 웃으며 문을 열고 나왔다. 여전히 빨간 얼굴이네 생각했는데 매일 술을 마시나 원래 빨간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느라 웃으며 인사하는 아저씨에게 어색하게 네 네 하며 인사를 하려는 모양도 못 내고 나란히 앉았다. 너는 주유소를 관둔 것이냐 물었고 너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이냐 묻고 그래서 계속 걸을 것이냐 물었다. 주유소는 관두고 말 것도 없지만 관둔 것은 아니었고 어디를 가는 것은 아니고 그저 걷는 것이고 곧 돌아갈 것이다 말하고 그러면 나는 또 당신은 어디를 가느냐 묻지만 이 사람은 나는 언제나 같은 곳을 가려고 하지만 그곳은 찾을 수가 없어서 찾을 수가 없겠지만 계속 갑니다 말했다. 그곳은 어떤 문이었지요? 파리의 개선문과 베를린 장벽과 뉴욕의 톨게이트를 앞서 말한 파리의 개선문 양식으로 파낸 혹은 열어젖힌 문. 그곳으로 환자의 침대는 들어갔다는 것이지요 혼자서 속으로 말한다. 내가 찾는 곳은 지금 내가 찾는 곳은 광화문 로열빌딩 지하 화장실 문과 광주극장 검안석의 문과 그 둘을 합한 것보다 가려면 갈 수 있지만 왠지 비밀스러운 그런 문입니다 하고 아저씨는 말하고 나는 그런 문이라면 그런 문이라면 환자의 침대는 복도와 복도와 계단과 계단과 그리고 복도를 밀면서 가고 있나 그곳은 어디인가요 또 속으로 말하고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끄덕끄덕끄덕 그런 문이군요 말하고 만다.
“당신은 부산이라는 곳을 찾는다고 했지?”
“부산이라는 곳을 찾는다고 했지요.”
“부산을 찾으려고 했어?”
“찾으려고 하지 않았고 찾으려고 하지 않아서인지 내가 있던 부산만은 사라졌어요. 나는 거기서 하려고 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할 수 없어요.”
“나는 계속 찾으려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데 찾으려고 해도 자꾸 숨어버리네.”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찾는다면 환자의 침대를 내가 밀며 가야지.”
“무겁겠네요.”
“바퀴가 있으니까. 그런대로 할 수 있지.”
아저씨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리며 트럭으로 간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고 어쩐지 문은 트럭 뒤에 있어요 문은 트럭 화물칸에 있어요 실제로 보이지도 않는 것을 그렇게 소리치고 싶어지다 말았다.
주유소에 도착한 것은 해가 막 지려 할 때였다. 주유소에 가까워지자 아 도미가 혼자 집에 가겠구나 싶었지만 그것은 왠지 머리에 그려지지 않았다. 주황색 노을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떠나기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는 도미가 팔짱을 끼고 나를 보고 있었다. 도미는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오자 여전히 조금 멍한 표정으로 왔구나 말했다. 왜인지 아무렇지 않게 도미에게 입을 맞추고 내 볼을 두드렸다. 도미가 키가 큰 것이 좋았다. 비슷한 키의 우리는 껴안은 채로 해가 지는 것을 잠시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도미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고 도미를 데리고 사무실 소파로 갔다. 사무실 테이블에는 이미 얼음이 많이 녹은 아이스커피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단숨에 마셨다. 도미의 가슴은 작고 귀여웠다. 도미는 크게 신음 소리를 내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돼 애쓰지 않아도 돼 도미야 말하니 도미는 고개를 젓다가 웃었다. 아니야 아니야 혀가 차가워서 그래 말하다가 웃었고 나도 웃음이 나왔다. 혀가 차가웠구나. 내 몸에서는 땀냄새 내 몸은 짠맛이 나겠지. 곰 같은 표정에 날씬하고 키가 큰 개 같은 도미. 물고기를 보는 물고기를 모는 도미. 도미를 안고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던 것은 아니지만 고개를 드니 노을은 사라지고 어디는 푸르고 어디는 검정에 가까운 밤의 색이 되었다. 도미에게 집에 가자고 말했다. 도미의 티셔츠를 입혀주고 나의 티셔츠를 입고 남은 것들도 입고 우리는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 우리의 손은 끈적거렸지만 곧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에 묻은 땀과 손바닥의 끈적임을 가져가주었다. 그 모든 바람에 고마워했고 언제나 가장 그리워하고 있었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는데 뭐라고 묻거나 왜라고 물으면 바람이야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여름의 밤은 길었고 우리는 어디로든 끝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미의 방에서 젓가락처럼 길게 누워 잠이 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씻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다. 어딘가의 부산은 사라졌다고 이제 정말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어딘가의 부산이 부산이 아니라 그 부산이라거나 어딘가의 부산 혹은 어떤 부산이라는 것 역시 알았다. 두 명의 간호사도 희미했고 나는 아무런 수사를 달고 다니지 않는 부산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가더라도 갈 수 없더라도 무엇이 진짜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려고 하자 책장이 넘어가듯 철조망의 풍경들이 차례로 넘어갔다. 트럭을 모는 아저씨는 중환자실에 실려 간 딸의 침대를 찾고 있지만 이미 설명도 필요치 않는 문은 이 문을 닫아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면 오키나와를 닫아야 할 것이라고, 나는 남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되어서야 어째서 확실한 것을 말할 수 있는지 웃음이 났고 조금 슬퍼졌다. 하지만 역시 우스웠다.
새벽에 잠이 깨 베란다에 나갔다. 바람은 시원하다기보다 무거운 느낌이었다. 도미의 집에도 표지판이 있나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는 하나의 표지판이 뽑히지 않은 채로 꼿꼿하게 서 있었고 그 표지판에 쓰인 것은 누가 주인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주인이었다 같은 내용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빽빽하게 누군가의 일기인지 회고인지가 적혀 있었고 그것은 유언이나 선언 같기도 했다. 한자와 일본어가 섞인 그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사람을 죽인 사람이며 또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던 사람이라고 그런 내용이 쓰인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그 글을 쓴 사람은 괴롭게 토해낸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은 작은 집 베란다에 묻혀 있는 혹은 묻어둔 표지판으로, 이것을 커다란 벌판에 묘비처럼 꽂는다면 대리석으로 커다란 기둥을 만들어 새겨둔다면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읽는 사람들은 알게 될까. 넓은 곳에 당연하게 당당하게 서 있는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게 될까. 어떤 벌판에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누군가를 죽였습니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이런 사람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세워둡니다. 누군가를 죽인 사람의 수만큼. 또 다른 벌판에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나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를 죽인 사람은 이렇소,라고 죽은 후에 그것을 쓸 수야 없겠지만 그럴 수 있다고 하고 표지판을 세워둡니다. 죽임을 당한 사람의 수만큼. 그리고 가장 넓은 벌판에는 도미의 집 베란다에 꽂힌 표지판과 같은 내용을 돌에 써 세워둡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의 수만큼. 각각의 벌판에 이름을 붙이고 공원을 만든다고 하고 우리는 다 같이 우리라 함은 표지판을 읽는 모든 읽는 사람들은 세 개의 벌판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세 개의 벌판에 아니 공원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도 우리는 가장 적합하고 알맞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까.
자고 있는 도미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방으로 들어가 미닫이문을 열었는데 그 방에서는 여전히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으나 다시 문을 닫으려 할 때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 되었다. 다시 문을 연다면 사람 같은 물고기 한 마리가 누워 죽어가고 있을 것 같아 열 수 없었다. 열 수 없는 채로 가만히 문 뒤에서 물고기의 아가미가 움직이는 아주 작은 소리를 듣다가 도미의 옆으로 갔다. 물고기의 이름을 한 사람의 옆으로 갔다.
다음 날 주유소로 갔을 때 사무실에는 한 마리의 물고기와 전구가 각각 소파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도미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또는 떨지 않기 위해 익숙한 행동을 하려고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물고기가 앉은 자리에는 비린내가 나지 않을까. 나는 생선이라고 부르면 정말 내가 그 물고기를 잡아먹어야 할 것 같아서 생선이라고 부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물고기에게서는 의외로 비린내가 나지 않았고 테이블 위의 전구는 고민을 하고 있어서인가 온몸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움직이며 누가 보아도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여주었다.
“안녕. 내 이름은 도미야.”
그제야 눈치챈 것인데 실제로 긴장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 도미가 아니었나 싶었다. 새 학기를 시작한 학급처럼 자기소개를 유도하는 도미는 그러고 보면 내게는 무엇이라도 새삼스럽게 물었던 적이 없던 것이다. 도미는 자기가 매일같이 출근하는 주유소 사무실에 웬 물고기와 전구가 앉아 있는 걸 보곤 긴장하여 긴장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아무렇지 않게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그런 어색한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름이 없지.”
“나도야. 굳이 뭔가로 불러야겠다면 전구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아. 그런 것으로 마음 상하지 않아.”
“아.”
도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수긍해서 끄덕이는 것은 아니고 어색하게 끄덕이는 것이었고 나는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이냐고 물으려다가 이 자리에서 그런 질문은 마치 이곳은 내가 잘 알지 하는 마음으로 묻는 것 같아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부산에서 떨어져 나온 부산에서 길을 잃은 나는 부산으로 되돌아가려다 주유소에 온 것인데 그때 도미에게 이곳이 국제라는 말을 듣고 국제는 어디일까 생각하다 며칠은 보냈고 그 후에 만난 어떤 아저씨는 이곳이 오키나와라고 했지만 나는 이제 주유소와 집으로 가는 길이 익숙해진 어떤 골목과 모퉁이에 익숙해진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말할 수도 너희가 가고 싶은 곳을 알려줄게라고 말해줄 수도 없었다.
“이 물고기가 물에 넣어달라고 하는데 나는 손이 없어.”
전구는 말하고 우리는 물고기를 들고 바다를 향해 가야 하는 것인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지 잠시 주춤하다가 우왕좌왕하다가 큰 대야여도 충분하다고 말을 전하는 전구의 말을 듣고서야 주유소 화장실에서 대야를 찾아 물을 담아올 수 있었다. 물고기가 살랑거리며 움직이자 왜인지 도미는 밖으로 뛰쳐나갔고 도미를 따라갔더니 도미는 철조망까지 뛰어가 토하고 있었다. 도미의 등을 두드려주다가 나도 같이 토하게 되었고 물고기가 말을 하며 앉아 있는 것보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어쩌면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속을 뒤틀리게 했던 것이다. 한참을 토하고 여러 번 침을 뱉고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나서야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면서도 우리가 토했다는 것을 들키면 어떡하나 혹은 왜 갑자기 마치 물고기와 전구에게 불만이 있다든가 불편한 일이 있다는 것처럼 자리를 비운 건가 하고 마음 상하면 어쩌나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물고기는 여전히 대야에서 살랑거리는 움직임을 하고 있고 전구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앉아 있거나 서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누워 있다고 말해도 좋을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3분의 1쯤 남은 티슈의 입구 부분을 조금 늘려 그 안에 전구를 넣어두었고 물고기는 트럭 아저씨든 누구든 차가 주유소로 오면 바다에 가자고 하여 놓아주기로 하였다. 그 모든 것을 지휘한 것은 전구였다. 내가 깨지지 않도록 적당한 데를 찾아보아 뭐 저 티슈 곽 정도가 좋겠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왠지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져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생각해보니 대충 어어 하는 말을 하고 손을 드는 것도 내리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동작을 하고 나서야 주유소를 나갔다. 나갈 때 전구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것도 같았는데 안 들렸다고 하면 안 들렸다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한 거리여서 급히 나와 집을 향해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걷기만 했다. 집 앞에서 도미는 내 방에서 자도 되냐고 묻고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다 손을 흔들었다. 도미는 잠시 후 샤워를 했는지 젖은 머리를 하고 멍한 표정으로 문 앞에 있었고 나는 맥주를 마시며 금방 취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씻고 맥주를 더 마시고 나와 도미는 어색하고 불편하게 펼쳐질 내일 일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떴다 감았다 떴다 감았다 하며 새벽이 되어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이 들 무렵에 도미는 정말 물고기를 모는 사람 물고기를 부르는 사람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눈치 채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날은 아무 꿈도 꾸지 않았고 잠결에 도미의 이마를 짚었는데 도미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작은 땀방울이 만져졌다. 아주 덥지는 않은 날이었다.
다음 날 나와 도미는 하루가 지나서인가 생각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유소로 향했고 도미는 여전히 긴장을 해서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혼자서 피식피식 웃으며 걷고 있었다. 왜 웃냐고 물었지만 대답 없이 걷기만 했다. 나는 이제 부산 같은 것은 잊어버린 것 같은데 실은 부산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든가 어딘가로 가야 한다든가 꼭 돌아가야 하는 곳이 있다거나 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어떤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를 잃어버린 것 아닌가. 거기에 조금의 슬픔이나 불안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였고 무엇인가 혹은 어딘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때 다시 그것을 찾으려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전구는 손이 없다고 하면서, 물론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전구는 보통의 전구와 똑같이 생겼으니까.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티슈 곽에 머리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라고 해도 전구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또 아이스커피를 만들고 나도 마시고 도미도 주고 소파에 앉았다. 도미는 컵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따라 내려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관두었다.
“너희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구나.”
“어찌해야 하니?”
“아니. 그러니까 어찌하지 않아도 되니 너무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고개를 끄덕이고 너는 어디서 왔니 정말로 궁금한 그것을 물었고 전구는 자신은 어느 대도시 구도심의 오래된 식당의 화장실 전구였다고 말한다. 오래되었다는 말은 낡고 더럽다는 뜻이 아니야 정말로. 강조하며 덧붙였다. 대도시 구도심은 몇 군데나 있고 대도시 구도심의 오래된 식당도 골목마다 있을 것이며 화장실 전구야말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구를 들이밀고 바로 그 전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있던 곳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정확하고 중립적이게 그다지 위험하지 않게 어디라도 될 수 있어서 듣는 사람들 아무나 그리운 풍경을 그리도록 할 수 있나 내 눈앞의 전구는 기본적으로는 유일하겠지만 어쩌면 어느 곳에도 이런 전구가.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해줘 어느 대도시에서 그쳐도 좋고 어느 대도시 구도심 정도에서 그쳐도 좋아 할 수 있는 만큼 해줘 하고 청했다. 전구는 티슈 곽에 머리를 걸친 채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곳은 오래된 국숫집이었는데 전통이 있다는 말은 조금 낯간지럽고 대체 어느 정도를 전통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런 것이 이곳에 남아 있기는 한가 나는 그것이 우습다고도 생각하니까 그렇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되고 손님도 늘 많은 국숫집이었다. 그곳의 화장실은 늘 손님이 오가고 물론 없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나는 그것을 다 보고 있다. 가게의 문을 닫고 정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식당과 주방을 청소하고 그 후에 물론 화장실도 청소를 하고 불을 끄고 정리를 마치고 나면 나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누가 다음 날에 들어올까 어떤 사람은 문을 잠그고 두 시간이 넘게 화장실에 앉아 벽을 바라보았다. 국숫집은 고깃집도 횟집도 아니고 술을 팔지도 않으니까 국숫집에서 한참을 머무는 사람은 별로 없지. 화장실은 다른 곳으로 가도 되니까 화장실이 두 시간이 넘게 닫혀 있어도 크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벽을 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사람이 거울을 부수고 나도 부수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까 봐 긴장이 되고 떨렸다. 그 사람은 일을 보고 손을 씻고 거울을 좀 보다가 옷을 입은 채로 다시 변기에 앉아 그저 벽만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천천히 자세히 보았다. 그 사람은 그렇게 벽을 보다가 화장실을 나갔다. 그 사람은 내가 기억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전구가 이야기를 많이 해서 목이 마르면 어떻게 하나 전구는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 같으니 말하기 전에는 묻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전구는 할 수 있는 말이 그러니까 어느 대도시에 관해 어느 대도시의 구도심이나 그곳에 있던 오래된 국숫집에 관해서라면 할 수 있는 말이 많다고 했다. 그것을 나는 계속해서 들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물고기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어제 이름을 물었을 때 이름이 없다고 했던 것 이후로는 없었다. 대신 물고기는 물방울을 튕기는 소리를 내었고 나는 물고기의 비늘을 보았고 바로 소름이 돋고 속이 안 좋아졌다. 말을 할 때 마주쳤던 것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물고기였는데 왜 그렇게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지? 가까운 거리여서? 아니면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티슈 곽에서 전구를 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어제 대야를 찾다 발견한 쌓인 수건들 가운데 하나를 꺼내와 그 위에 전구를 두었다. 전구는 그게 더 편하다고 말하며 몸을 한 바퀴 굴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도미는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고 나는 옆의 소파에 앉는다. 전구가 어디서 왔는지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도미가 지하로 내려가는 것은 그 생생한 것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도미는 눈을 깜박이더니 또 누가 오는 걸까 하고 말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째서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을까. 너무 잠깐 보아서 인상만이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몰라 그런 이야기를 천장을 보며 했다. 도미의 이마를 짚었다. 어제 땀을 흘리며 자던 도미가 생각이 났다. 흰 이불을 덮고 땀을 흘리던 도미의 얼굴.
도미는 계속 누워 있고 나는 앉아 있었으나 곧 누워버렸다. 눈을 깜박이다 천장을 보다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도미와 나는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안 되겠다 일어나자 서로를 두드리며 일어나 올라갔다. 또 누가 오는 것일까 말하던 도미의 혼잣말이 누구를 불렀는지 주유소 사무실에는 까무잡잡한 단발머리 여자애가 앉아 있고 그 애는 경계하는 모습으로 전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초에 이곳은 역이라고 도미가 말했지. 도미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물고기나 전구보다야 놀랄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도미는 냉장고 쪽으로 가더니 식빵을 구워서 잼과 가져왔고 나는 얼음이 많이 녹은 아이스커피를 들고 여자애에게 보여줬지만 그 애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세 사람은 식빵을 먹고 전구는 할 말이 많은 할 수 있는 말이 많은 전구는 먹지 않으므로 여자애에게 이런저런 참견을 하느라 바빴다. 덥지 않니 운동을 좋아하는 편인가 어떻게 온 거니 이마에 땀 좀 닦는 것이 어떠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여자애는 여전히 경계하는 표정으로 전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물론 전구는 눈이 없지만 전구를 보면 전구를 눈으로 확인하면 그게 눈을 마주치는 기분이었으므로 그러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똑바로 볼 엄두가 안 나는 물고기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전구가 무언가를 먹을 수만 있었다면! 우리는 조용히 지낼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물고기가 움직이는 소리를 견뎌야 했겠지! 낯선 사람들과 어색해서 괴로웠겠지! 내일쯤 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빵 석 장을 쉬지 않고 먹은 여자애는 말하기 어려워하는 눈으로 어두운 곳에서 잠을 자고 싶다고 말했고 우리는 여자애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도미의 슬리퍼가 착착 하는 소리를 내자 나는 또다시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기억났는데 그런 것은 이제 그만 곱씹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고 어느 곳에 있든 어느 곳이라 말할지도 모르는 어느 곳에 있든 그랬었지 하는 생각에 잠기는 것을 싫어하네 도무지 싫고 화가 나서 그런 것은 관두고 싶어 하네. 나는 막연한 회상의 장면 그런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나와 도미는 집에 갔고 잠을 잤고 아침이 되어 다시 주유소에 왔다. 그다음 날도 비슷한 일들이 이어졌다. 전구의 이야기를 듣고 물고기를 곁눈질로 보다가 지하에 있는 여자애가 소파 아래에서 담요를 덮고 웅크리고 자는 것을 보다가 해가 지면 집에 가 잠을 잤다. 전구를 데리고 가야 하나 생각했다. 어째서 여자애보다 전구를 데리고 가야 하나 생각했다. 어째서 여자애보다 전구를 데리고 가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지 스스로도 놀랐다. 여자애는 쉬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고 흔들어 깨워 물어도 계속 지하에 있겠다고 말을 했고 전구는 언제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으므로 당연히 전구를 먼저 생각했다. 그다음 날은 주유기 앞 의자에 앉아 철조망을 바라보았고 수건을 싼 전구를 들고 철조망을 따라 걷다가 돌아왔다. 돌아와보니 도미는 며칠 전처럼 식빵을 구워 쟁반에 잼과 함께 들고 왔다. 나는 전구를 테이블 위에 놓고 아이스커피를 만들었다. 나와 전구와 도미는 테이블에 앉아 식빵을 먹으려 하고 있었고 나는 갑자기 여자애가 생각이 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 애는 쉬지 않고 3일을 내리 자고 있었고 흔들어 깨우자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그 애를 데리고 사무실로 올라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물고기는 여전히 살랑거리며 움직이는지 물방울을 살짝살짝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물고기는 세 인간들보다 생생한 생물이었다. 세 사람과 전구는 구워진 식빵을 잠시 바라보다가 전구는 또 식빵이구나 말을 하고 세 사람은 잼을 발라 먹기 시작한다. 물고기는 저렇게 두어도 되는 것일까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빵을 다 먹고 여자애는 또다시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고 왜 어두운 곳을 찾으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그 애는 들키고 싶지 않다고 했다 누구도 자신을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 차 소리가 나 주유소 밖으로 나가보니 트럭을 몰던 아저씨가 주유를 하고 있었고 나는 고개를 까닥하고서는 옆으로 가서 섰다. 혹시 바다가 근처에 있느냐고 묻고 아저씨는 당연하다고 말하고 나는 어쩌다 물고기가 나타났는데 바다에 풀어줘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아저씨는 사무실로 들어와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는 물고기를 보고 가져가 트럭 뒤에 싣는다. 그러고는 인사도 못한 채 차를 빼서 나갔다. 물고기에게 들은 말은 이름이 없다는 한마디뿐이었다. 그런 물고기를 보통 물고기처럼 생선처럼 취급하여 보내버려도 되는 것인가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물고기인 것을 다른 무엇처럼 대할 수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도미가 뛰어나와 다시 철조망 앞에 서서 토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처럼 왠지 가슴 속이 뒤틀리고 머리가 복잡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토하지 않았다. 물고기 이름을 가진 물고기를 몰고 다니는 도미는 실은 물고기가 아주 불편한 것이 아닌가 때때로 어울리지 않는 것과 불편한 것과 강한 연결 고리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나 보다 생각했다.
정말 우리는 전구보다 말 없이 가만히 있는 물고기가 불편했던 건가. 나와 도미는 밤이 되어서야 집에 가려고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에 있는 여자애에게 우리는 집에 갈 거라고 말했다. 여자애는 잘 가세요 하고 대답했다.
“이미 사방이 어두워졌는데 밤이 되었는데 위에 올라가 있어도 되잖아. 우리가 사는 데에 가도 되고 말이야.”
“이곳이 더 편해요.”
“누가 너를 찾으려 하니.”
“부모와 가족들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아니에요.”
나와 도미는 알겠다고 말하고 돌아서서 간다. 나의 부모가 이곳으로 나를 찾으러 오는 것을 생각해보았는데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곳이란 어디인지 누구도 알려주지 못할 것이다. 오키나와라고 해도 부모가 갈 수 있는 오키나와와 내가 있는 이곳은 왜인지 모르지만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닫자 아주 냉정한 기분이 되었다. 왜인지 차갑고 선명한 기분이 되어 길을 걸었다. 찾기 어려운 곳에 오든 찾기 쉬운 곳에 오든 등을 보인 후 방문을 닫고 싶은 때에는 어디든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나라도 다를 것 없다. 부모는 옆집에 산대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여자애가 자고 있을 때 트럭을 모는 아저씨는 다시 주유소에 들렀고 우리는 수건을 들고 아저씨를 따라나섰다. 물고기를 놓아준 바다에 가기 위해서였다. 물고기를 놓아주었는지 보러 가는 것인가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인가. 둘 다 아니었고 나와 도미는 매일같이 집과 주유소만을 오갔으므로 다른 곳을 가도 좋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서였다. 전구를 테니스공을 모아두는 얇은 플라스틱 통에 넣고 나와 도미는 수건을 덮고 눈을 감았다. 햇볕은 선명했다. 그늘이 잘 보이지 않고 명암도 잘 보이지 않는 온통 환한 도로였다. 전구가 혼자서 또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얇은 플라스틱 통에 김이 서렸고 나는 전구를 잠깐 빼두었다. 태양이 선명한 길을 지나고 또 지나고 나는 전구에게 아까 무슨 혼잣말을 하고 있었느냐 물었다. 전구는 수건 속에 감싸인 채로 또 다른 태양인 것처럼 빛을 반사하며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구의 한 점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구는 이전처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호를 그리며 주저하듯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빛나는 점을 가진 채로 흔들리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환한 날을 나도 보았는데 아주 환한 날에는 햇볕이 강한 날에는 화장실 문에도 사람들이 화장실 문을 열 때도 화장실 작은 창문에도 햇볕이 들어오고 마니까 나도 아주 환한 날을 보았지. 환한 날을 볼 수 있었다면 비 오는 날도 볼 수 있었지. 작은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리면 손님들이 흙발을 하고 화장실 바닥을 오갔으며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물 냄새가 났다 비 냄새가. 의외로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에는 국수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보통의 날씨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해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고 봄이 시작되는 나른한 냄새 같은 것도 나는 아는데 그럴 때는 사람들은 어딘가 들뜬 채로 거리를 헤매고 국수를 먹고 계산을 하고 문을 열고 가는 어깨는 거리를 다시 헤매고 또 헤매는 그런 박자로 움직인다. 그런 봄날 가운데 곧 여름이 오겠지 생각하는 날들이었는데 그런 날은 보통 환한 날이고 나 역시 화장실의 천장 가운데에서 곧 여름이 오고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오는 강한 햇살의 날들이 오겠지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환한 날에는 아무도 오지 않고 주인도 오지 않고 일하는 여자애도 일하는 남자애도 오지 않고 전날 비워둔 쓰레기통 그대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 곧 다시 청소를 하러 여자애나 남자애가 들어오고 양산을 쓴 아가씨들도 국수를 먹으러 오고 손수건을 바지에 넣고 다니는 남자들도 아가씨와 함께 오고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나는 생각했는데 그때 나는 무언가 그런 것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어떤 예쁜 사람이 오면 좋겠다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다 화장을 고치는 예쁜 사람이 오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그때 다른 걸 바랄 수 있었다면 하루빨리 누군가 화장실로 오면 좋겠다 그런 것을 바랐을 텐데 아무도 오지 않는 날들이 그렇게 길 줄 몰랐다. 손님들이 오고 국수를 먹는 날이 오기가 그렇게 힘들 줄도 몰랐고 나는 그 생각을 아직도 하고 또 한다. 그런 날이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던 날들에 나는 흰 벽과 수도꼭지와 변기와 거울과 천장과 어째서 아무도 오지 않는지 이야기를 하다 이야기를 해도 이유는 알 수 없고 며칠째 사방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비명 소리와 총소리가 순번이 있듯 번갈아 들렸다가 한동안은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던 시간들은 어째서인가 우리 모두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그 시간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건 간에 양동이든 변기를 닦는 솔이건 나와 창처럼 유리이든 산산이 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렇게 겨울의 밤보다 길고 긴 아무도 없는 시간들이 처참하게 지나고 있었다. 나는 창문이 천장과 흰 벽 정사각형의 흰 타일이 박혀 있는 벽이 그 벽과 벽 안의 시멘트가 변기가 변기 옆 솔과 붉은색 양동이가 후들후들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한 몸 같았다. 내가 달려 있는 화장실 천장은 화장실의 일부이고 화장실은 식당의 일부이며 식당의 옆집은 화장품 회사 사무실과 가발 회사 사무실이 들어와 있는 건물이고 식당 위에는 변호사 사무실이 그 위에는 식당만큼이나 오래된 치과가 있었는데 식당의 화장실의 전구인 내가 알 수 있을 정도로 화장품 회사 사무실도 가발 회사 사무실도 변호사 사무실이나 오래된 치과도 모든 벽과 천장과 바닥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누군가 쿵쿵 하고 몇 번 발을 구르면 바닥이 꺼지고 벽이 무너질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우르르하고. 며칠은 정신을 잃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정신을 차리면 변기가 정신을 잃고 오물을 토해내고 더러운 점들을 벽에 찍었다. 나보다 두꺼운 화장실 창은 불안을 못 이겨 금이 갔다. 화장실의 하나하나가 불안으로 금이 가고 틀어져가고 있었다. 창에 금이 가는 것을 본 후 다시 정신을 잃었고 며칠이 지났을까 정신은 잃고 있었지만 아무도 누구도 오지 않은 채로 한 달이 지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식당 주인이 화장실 문을 열고 이미 오물을 토해낸 변기에 대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토하고 주인이 토한 소리를 듣고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는데 주인은 물을 퍼다가 변기와 벽을 씻어주었다. 작은 창엔 테이프를 붙였다. 그다음 해에야 창을 갈았다. 청소를 하고 음식을 나르던 남자애는 그 후로 볼 수 없었고 나는 그 애가 아무도 오지 않고 벽과 천장과 전구가 후들후들 떨던 그때 죽었다는 것을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천장도 벽도 바닥과 수도꼭지도 식당의 그릇과 의자도 그 위의 변호사 사무실과 변호사 사무실의 고동색 소파도 재떨이도 알고 있었다 모두.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가발 회사 사무실에서 여태 가발을 세 개나 맞췄던 젊은 은행원이 죽었다는 것을 가발 회사 사무실의 가발은 철제 캐비닛과 접어 쓰는 의자들은 알고 있었고 그 은행원은 식당에서 국수도 자주 먹던 사람이었는데 식당의 물컵들도 식칼과 도마도 알고 있었다. 주인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사모님은 친척들과 식당을 치웠는데 누군가 거기서 숨어 있었는지 절반도 못 먹은 삶은 면발과 계란과 단무지가 바닥에 놓여 있었으며 거기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이미 상해서 시큼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슨 불은 면발 사이에 꽂혀 있었는데 그것을 먹으려던 사람이 질질 끌려간 흔적이 식당 입구까지 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는 것이었고 더 자세히는 그릇들과 젓가락 숟가락들과 수세미들이 말해주었다. 그 모든 주방의 것들은 어떤 것을 보았는지 겨우 이야기해주었는데 나는 내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잃었다고 믿고 있는지 언제쯤 말할 수 있을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모든 것은 바다로 가는 지금 태양이 아주 선명하기 때문에 시작된 이야기이다. 식당 천장에 달려 있었지만 아주 선명한 날씨에는 어느 쪽으로 선명한지 태양이 환한지 비가 주룩주룩 오는지 알 수 있었다.
전구는 수건 사이로 고개를 묻듯 파고든 채로 입을 다물고 나는 잠을 잔다고 생각을 하려고 했다. 수건으로 덮어주고 나도 다시 눈을 감았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부적”에는 전구 같은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대학 화장실에 갇혀 수일을 보냈다. 수십 일을 보냈다. 그 책을 3분의 1쯤 읽고 더는 못 읽었는데 어째서였나 어째서였느냐 하면 나는 사고를 당했고 그래서 읽을 수 없었다. 사고를 당했지만 이렇게 트럭에 탄 채로 눈을 깜박이며 전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다를 보러 간다. 오키나와라고 하는데 국제라고 하는데 어느 곳이든 나는 이전에 와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오키나와는 지금과는 달랐는데 어떻게 달랐느냐면 글쎄 생각하면 그리 다른 것 같지도 않으며…… 국제시장과 국제거리는 어땠느냐면 좀더 정신없는 느낌이었다고, 이 사실은 겨우 말할 수 있었고 몇 개의 국제공항을 오갔다 나는. 몇 개의 항구도 오갔다. 볼라뇨의 “부적”에 나온 사람은 간신히 변기에 앉아 온갖 애를 쓰며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발을 들고 그렇게 있었다. 유령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언제까지 알 수 없을까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화장실에 대해 말을 하겠지. 본 것은 화장실뿐이었으므로 화장실에 대해 증언을 할 것이다. 화장실은 그 사람에 대해 증언을 할 것이다. 누가 어떤 오키나와에 대해 증언을 해줄 수 있을까, 어떤 국제에 대해. 수많은 오키나와에 대해 그중의 하나인 내가 있는 오키나와에 대해 나는 증언을 할 수 있나. 나는 햇볕에 깜박거리던 눈을 세게 감았다. 무슨 소리가 들려 옆을 보니 도미의 잠꼬대 소리였고 도미는 며칠 전처럼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작은 땀방울이 도미의 이마에 맺혀 있었다. 수건으로 도미의 땀을 닦아주었다.
차가 달려가는 방향과 반대였지만 어지럽거나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도로 양옆으로는 키가 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의 군락이 펼쳐져 있었다. 염소 몇 마리가 보였고 이것은 내가 몇 년 전에 가보았던 오키나와의 풍경으로 이런 것은 열대의 풍경이지 아열대의 풍경이지 그러나 어떤 풍경이지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한 면을 접고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 것이다. 태풍이 자주 오고 갠 날은 태양이 선명하고 그러나 언제 다시 비가 올지 모르고 부는 바람은 무겁고 후덥지근하며 잎이 큰 나무들이 자라고…… 이곳은 오키나와입니다 아열대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풍경은 곧 자신의 몸을 접어 다른 곳으로 향하며 그것이 아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공간을 보이며 이곳이 오키나와입니다 말할 것이다.
도착한 바다는 푸른 보석 색이었고 햇빛에 반사되어 수면이 반짝이고 있었다. 몇 년 전 오키나와에 갔을 때도 나는 그런 바다를 보고 잘도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말하고 독한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잠이 들고 그때 나와 함께 잠이 들었던 사람들은 여자들은 모두 여전히 오키나와에 오키나와의 풍경에 점을 이루며 살고 있을까. 잠을 자듯 수건에 파묻혀 있던 전구는 바다의 색깔 바다의 색깔 작은 호를 그리며 중얼거렸고 도미는 수건으로 땀을 닦고 바다를 보았다. 전구는 대도시 구도심의 한 식당 화장실에서 왔고 나는 부산의 여름에서 왔으며 도미는 여름의 시장에서 왔다. 부산의 여름에 가기 전은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직전에 나는 사고를 당했을 것이고 지금의 나는 아무 흔적이 없는 사람으로 푸른 보석 색의 바다를 보며 더 가까이 보려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흔적이 남은 나의 몸은 다른 장소에 있을 것이다. 흔적 하나하나를 실감하며 마치 전구가 벽과 창을 실감하듯이 모든 것을 각자가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아저씨는 한적한 곳에 차를 대고 나와 도미와 전구는 차 문을 열고 나와 기다린다. 아저씨는 풀숲을 헤치며 따라오라고 했고 얼마간 키가 큰 풀들을 헤치며 내려가다 보니 도로에서 보던 그 푸른 보석 색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색색의 물고기들이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꼬리를 살랑거리며 돌아다닐 것이다. 우리가 돌려보낸 물고기는 어떻게 생겼더라 20센티미터쯤 되는 은색 물고기였다는 정도만 기억이 났다.
문득 도미의 집 베란다에 꽂힌 표지판을 떠올렸는데 그 표지판의 내용을 광장이 아니라 이 바닷가에 바닷가 모래밭에 커다란 바위를 세워 써둔다면 그것은 가끔 아주 가끔 오는 사람들이 볼 것이고 대부분은 바다와 바람이 볼 것이다. 그 내용은 광장에서보다 실감할 수 있는 슬픔으로 상처로 다가오겠지, 나는 누구를 죽인 사람으로 또 다른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누구는 누구를 죽이고 또 죽인 사람입니다. 이곳은 무덤은 아니지만 무덤이 되지도 않겠지만 그 옆에 역시나 큰 바위를 세워 누구를 또 누군가를 누군가의 누구의 이름으로 새기고 그 사람이 누구를 죽이고 그 사람이 누구에게 죽었는지를 적습니다. 누구는 아들의 이름이고 딸의 이름이거나 할머니의 이름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버지이거나 친구, 할아버지, 고모의 이름이 됩니다. 그러고 나면 이 바다는 무엇이 되며 사람들은 이 바다를 무어라 부를까. 이 바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나의 오래된 숙제라면 나는 이 바다의 이름을 무어라 붙여야 할까. 도미는 발만 담그고 가만히 걷고 있고 전구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지만 어쩐지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눈코입이 없고 얼굴도 표정도 없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아저씨는 뒤쪽 모래밭에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아저씨가 찾고 있는 문은 아무래도 아저씨가 닫아야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고 아저씨가 오키나와로 들어온 문이야말로 아저씨가 찾아 헤매는 바로 그 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에서 잠을 자고 있는 여자애는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주유소로 향하면 다시 모습을 감추어버릴 것이다. 누구에게도 당분간은 말하지 않을 생각들을 하며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물안경은 없었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푸른 바다의 색이 선명하게 내 눈앞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화려한 색의 작은 물고기들이 혼자 지나가거나 무리를 지어 지나갔다. 그 모습은 조금 지나니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전혀 지겨워지지는 않았다. 모래밭 쪽으로 다가가니 길고 흰 도미의 다리가 보였고 그것을 마치 표지판처럼 여기며 다시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물에서 나와 숨을 헐떡이며 모래밭에 누웠을 때 도미는 수건을 머리 위로 던져주었고 몸을 닦고 간신히 부신 눈을 떠 바라보자 수건에 싼 전구를 들고 있는 도미가 보였다. 도미는 천천히 내 옆으로 와 앉았고 내게 얼굴을 가까이해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도미는 아저씨가 여자애에 대해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주유소로 돌아가는 길은 왠지 짧고 빠르게 느껴졌다. 전구에게 너는 어느 곳에 있을 것이냐고 물었고 전구는 사무실에 있겠다고 했다. 지하로 내려가 보았는데 소파 위에 여자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도미와 집으로 돌아갔다. 전구에게 인사를 하고 끈적거리는 손을 털며 집으로 갔다. 몸을 털고 털고 또 털고 모래 한 알이라도 남아 있지 않도록 다시 몸을 흔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 나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여전히 꽂혀 있는 표지판 몇 개와 여전히 뽑혀 있는 표지판 몇 개를 들여다보다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꾸벅꾸벅 졸다 깨다 다시 졸다 마침내 간신히 일어나 냉수로 입을 헹구고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참으로 익숙한 하루의 끝으로 나는 이것이 아주 익숙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는데 무엇을 위한 시간인가 하면 어디에서 죽을지를 결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것은 생각한 대로 되거나 결정할 수 없는 것일지 몰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꿈을 꾼 적이 없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