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7 弟(제) 澤暎(택영)과 함께 廣李(광이) 漆谷(칠곡) 入鄕祖(입향조) 承仕郞(승사랑) 李祉(이지) 祖(조)의 外舅主(외구주), 永川崔氏(영천최씨) 司直公(사직공) 崔河(최하)의 墓所(묘소)에 들러 略少(약소)하나마 簡略(간략)하게, 墓祭(묘제)를 지내고 잊혀진 外先祖(외선조)의 䕃德(음덕)을 기리는 행사를 하였습니다.
崔河 公(최하 공)은 漆谷廣李(칠곡광이)의 始原(시원)이자 根本(근본)이었습니다.
三年前(3년전) 宗親(종친) 澤東(택동) 兄(형)의 案內(안내)로 지천골에 계신다는 傳喝(전갈)을 듣고, 영진전문대 영어마을 隣近(인근)에 수차례 訪問(방문)하였으나, 墓所(묘소)를 찿지 못하던 중 다행히 發見(발견)하여 墓祭(묘제)를 지낸바 있었습니다.
그때 碑石(비석)을 撮影(촬영)하였으나 畫質(화질)과 撮影未熟(촬영미숙)으로, 여러 글귀를 判讀(판독)할수 없는 안타까움과 약 六百年前(6백년전)의, 外先祖(외선조)를 뵙는다는 敬畏(경외)함과 肅然(숙연)함과 그동안 參拜(참배)하지 못했던 罪悚(죄송)스러움을 自責(자책)하였습니다.
올해는 올바른 碑石(비석) 判讀(판독)을 위해 精密(정밀)하게 寫眞(사진)을 撮影(촬영)하였고, 精誠(정성)을 다해 墓祭(묘제)를 지내고 나니 오랜만에 미뤄둔 宿題(숙제)를 끝낸듯 마음이 편해지는 날이었습니다.
碑碣(비갈)은 2016년의 未判讀分(미판독분)을 추가로 判讀(판독)하였으며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 래
崔河 公 碑碣 全文(최하 공 비갈 전문)
漆谷(칠곡) 廣州李氏(광주이씨) 外舅主(외구주) 司直公(사직공) 崔河(최하) 墓所(묘소) 碑碣內容(비갈내용)
여기에 누워 계시는 분은 漆谷(칠곡) 땅에 우리 廣李(광이)의 뿌리를 내리게 하신, 承仕郞(승사랑) 諱(휘)摯(지)公(공)의 外舅主(외구주) 内外(내외)분 이시다.
淸德(청덕)과 隱逸(은일)의 선비로서 當代(당대)에 名望(명망)이 높았으나 親孫(친손)이 없어, 外孫(외손)인 우리가 代代(대대)로 墓域(묘역)을 守護(수호)하고 世世年年(세세년년) 祭(제)를 올렸다.
그러나 山所(산소)에는 床石(상석)도 한 조각의 標石(표석)도 없이 生前(생전)에 萬石長者(만석장자)이시던, 公의 幽宅(유택)으로서는 그지 없이 초라하고 쓸쓸하다.
이에 短碣床石(단갈상석)이나마 갖추어 우리 外先祖(외선조)의 蔭德(음덕)을 追慕(추모)하자는 論議(논의)가 일어나, 이제서야 막상 돌비를 세우자니 五百星霜(오백성상)의 時空(시공)을 超越(초월)하여 感懷(감회)가 새롭다.
山紫水明(산자수명)한 漆谷(칠곡) 땅에 우리들에게 삶의 터전을 베풀어 주신 두분 靈前(영전)에, 다시금 感謝(감사)의 拜禮(배례)를 올리면서 外孫(외손)들의 조그만 精誠(정성)을 모아 삼가 이 碑(비)를 세운다.
西紀 一九九八年 戊寅 閏五月
(서기 1998년 무인 윤5월)
外後孫 李珣煥 謹撰
(외후손 이순환 근찬)
外後孫 李英煥 謹書
(외후손 이영환 근서)
廣州李氏 漆谷宗會 謹堅
(광주이씨 칠곡종회 근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