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26강
자따숫땅
Jaṭāsuttaṃ
엉킴 경(S1:23)
불교승가에 문제가 생기면 스님들이 엉킴 경에 나오는 안또 자따 바히 자따(Anto jaṭā bahi jaṭā)라는 게송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말은 안에도 엉켜서 문제가 있고 밖에도 엉켜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유명한 문구입니다. 이는 출세간이나 세속이나 모두 엉켜있는 현실에 대한 지적입니다. 자따(jaṭā)는 고행자의 엉킨 머리, 땋은 머리, 변발(辮髮), 엉킨 나뭇가지들, 탐욕의 얽힘, 매듭, 그리고 엉킴입니다. 그래서 서로 엉켜서 복잡한 문제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따(jaṭā)는 탐욕이 복잡하게 엉켜있는 것을 말하는 갈애를 뜻합니다.
사실 갈애 때문에 안과 밖이 엉클어지고 꼬여있는 것은 무수한 생각의 매듭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매듭은 또 하나의 고정관념입니다. 그래서 갈애는 마음의 엉킴이며 매듭이고 혼란입니다. 욕망을 가진 마음은 고요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원래는 인도에서 햇빛이 너무 더워서 머리 위에 수건 같은 것을 말아서 썼던 것을 자따(Jatā)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머리가 헝클어졌을 때 모자를 써서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인도의 종교인들은 외부에서 볼 때 상징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머리는 종교인들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부처님의 제자들은 특징적인 것이 없이 단순하게 머리를 밀고 몸에 가사를 걸친 것이 전부입니다.
게송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안또 자따 바히 자따 자따야 자띠따 빠자,
Anto jaṭā bahi jaṭā jaṭāya jaṭitā pajā,
땅 땅 고따마 뿟차미 코 이망 위자따예 자딴띠.
Taṃ taṃ gotama pucchāmi ko imaṃ vijaṭaye jaṭanti.
2. 안에도 엉켜 있고 밖에도 엉켜있습니다.
사람들은 엉켜서 묶여있는데
고따마시여,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습니까, 라고 여쭈었다.
바가와(bhagava)
세존
3. 실레 빠띳타야 나로 사빤노 찟땅 빤냔짜 바와양,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cittaṃ paññañca bhāvayaṃ,
아따삐 니빠꼬 빅쿠 소 이망 위자따예 자땅
Ātāpī nipako bhikkhu so imaṃ vijaṭaye jaṭaṃ.
3. 지혜를 갖춘 사람은 계행을 지켜
마음과 통찰지 수행을 하는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4. 예상 라고 짜 도소 짜 아윗자 짜 위라지따
Yesaṃ rāgo ca doso ca avijjā ca virājitā,
키나사와 아라한또 떼상 위자띠따 자따.
Khīṇāsavā arahanto tesaṃ vijaṭitā jaṭā.
4. 탐욕과 성냄과 무명이 빛바래고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이 이 엉킴을 푼다.
5. 얏타 나만짜 루빤짜 아세상 우빠룻자띠
Yattha nāmañca rūpañca asesaṃ uparujjhati,
빠띠강 루빠산냐 짜 엣테사 칫자떼 자따띠.
Paṭighaṃ rūpasaññā ca etthesā chijjate jaṭāti.
5. 정신과 물질이 완전하게 소멸하는 곳
부딪힘과 형상에 대한 인식까지 소멸하는
여기서 그 엉킴은 잘려진다.
이상이 엉킴 경의 내용입니다.
이 게송은 붓다고사 스님이 청정도론을 쓸 때 스리랑카 마하위하라 전통에서 숙제로 준 게송입니다. 붓다고사 스님이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와서 빨리어로 부처님의 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리랑카 마하위하라에서는 인도에 온 비구를 믿을 수가 없어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 전통에서는 인도에서 불교를 공부를 했다고 하면 가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인도에서는 스리랑카에 자주 스님들을 보내서 나라를 지배하는 사건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사람이 들어오면 스리랑카 왕이 싫어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붓다고사 스님도 처음에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스리랑카에서는 붓다고사에게 이 엉킴 경(Jatā-sutta)의 게송을 주고 여기에 대해 논문을 쓰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청정도론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마하위하라 전통 때문에 붓다고사가 쓴 청정도론을 숨겨두고 두 번이나 소실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이 스님이 믿을만한 분인가 시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을 다시 3번을 썼는데 붓다고사 스님이 매번 쓸 때마다 똑같이 썼습니다. 그래서 이 비구를 의심하지 않고 이런 확인 끝에 경전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입니다. 불교에서 뭔가를 하면 목숨 걸고 합니다. 붓다고사 스님이 그 만큼 훌륭한 스님이기 때문에 5세기에 쓴 청정도론을 21세기인 지금도 우리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붓다고사가 쓴 주석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석서는 번역이고 청정도론은 붓다고사 스님이 쓴 경전에 대한 논문입니다. 붓다고사 스님의 면접이 바로 위대한 논문이 된 것입니다.
이 게송에서 중요한 것은 계, 정, 혜인 삼학(三學) 말하는 것입니다. 삼학(三學)이란 세 가지 배워야할 덕목을 말합니다. 자따(jaṭā)는 일반적으로는 엉킴. 문제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갈애인 땅하(taṇhā)를 말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의해서 번뇌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항상 마음이 엉켜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혼란한 상태로 들떠서 지냅니다.
게송에서 천신이 부처님께 질문하기를 ‘사람들은 서로 엉켜서 묶여있는데 과연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때의 엉킴이 바로 앞에서 말한 갈애입니다. 인간은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즉각 좋아하고 싫어하는 갈애로 넘어갑니다. 이때의 갈애는 새로운 업을 일으키는 감각적 욕망이면서 새로운 차별입니다. 그래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때의 갈애는 내가 갈애인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결국 이 갈애로 인해 들뜨고 혼란이 온 상태가 되므로 마음이 엉켜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꼬여서 엉켜있는 상태가 바로 대나무 숲 덤불의 가지와 뿌리들이 엉켜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천신은 이처럼 중생들도 하나같이 갈애로 엉켜있는 현실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특히 이처럼 갈애로 인해서 일어난 엉킴이 비구들이 생활할 때 느끼는 불만족으로 나타납니다. 천신이 숲에서 수행하는 비구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일반인도 아닌 숲속에서 수행을 하는 비구도 네 가지 필수품 때문에 갈애로 엉켜있는 것을 보고 과연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는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스님들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네 가지 필수품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공양(piṇḍapāta), 거주처(senāsana), 가사(cīvara), 의약품(gilānapaccaya)입니다. 재가자들이 스님들에게 이 네 가지를 올리는 것이 스님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스님들은 다른 스님의 네 가지 필수품을 보고 완벽하고 좋다고 생각하고 나는 부족하다는 갈애가 생깁니다. 숲 속에서 갈애가 생길 일이 없는데 그런 것에 대해 갈애가 생깁니다.
천신이 스님들의 이런 생활을 보고 있다가 부처님께 이와 같은 게송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쪽에도 문제가 있고 밖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세간의 정신적인 세계도 문제가 있고 세속적인 세계도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신은 스님들 세계와 재가자 세계가 똑같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잘 표현하는 것이 대나무 숲입니다. 여기서 대나무 가지나 뿌리는 엉킴을 말합니다. 이번에 우리 절에 대나무를 심을 때 조경하는 분이 밑에 항아리를 넣고 심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밖에 있는 논에까지 뿌리가 간다고 합니다. 왜 부처님께서 대나무 이야기를 했을까 생각하니 대나무 뿌리는 엉켜서 멀리까지 뻗어가기 때문입니다. 논에 가면 논 가운데서도 대나무가 올라옵니다.
게송의 처음 문장에 ‘안또 자따 바히 자따 자따야 자띠따 빠자(Anto jaṭā bahi jaṭā jaṭāya jaṭitā pajā)는 ’안에도 엉켜 있고 밖에도 엉켜있습니다.‘라는 뜻인데 안에도 갈애가 있고 밖에도 갈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갈애가 있고 남도 갈애가 있습니다. 또 감각기관에도 갈애가 있고 감각대상에도 갈애가 있습니다. 또 세간에도 갈애가 있고 출세간에도 갈애가 있습니다. 오직 해탈의 자유를 얻은 아라한만 안과 밖이 청정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갈애는 세속적인 갈애를 말하는 것으로 오온을 집착하는 것이지만 출세간에서도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미약한 갈애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일곱 가지 거주처를 이야기했습니다. 출세간과 세간이 똑같이 문제가 있습니다. 천신들의 세계에도 이 문제가 있습니다. 일곱 가지 거주처에 태어나는 존재의 세계가 어디서나 똑같습니다. 사실 한 인간이 가진 문제는 어느 생명에게나 똑같은 문제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나를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의 나라는 것이 바로 일체, 전부, 모든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았다는 것은 바로 나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게송에서 천신이 부처님을 부를 때 고따마(gotama)라는 말을 썼습니다. 붓다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신심이 있는 천신은 아니라서 부처님을 친구처럼 부른 것입니다. 비구를 부를 때 마리사(māris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리사(mārisa)는 신심이 있는 분이 존경의 뜻으로 부르는 호칭인데 친해하는 벗이여, 존자시여, 스승이시여,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고따마(gotama)는 신심이 없는 사람들이나 처음 부처님을 보는 사람들이 사용합니다.
고따마(gotama)는 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고따마(gotama)의 고(go)가 바로 암컷소나 수컷소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소는 인도에서 최고의 존재입니다. 인도에서는 소가 거의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입니다. 명절 때 음식을 준비하면 가장 먼저 소한테 줍니다. 고따마(gotama)라는 말은 인도에서 원래부터 있었던 말인데 높은 가문, 훌륭한 민족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도사람들은 고따마(gotama)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부처님의 어머니는 고따미(gotami)입니다. 이는 마치 한국 분들에게 혈통적으로 몽골민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싯다르타가 만약에 부처님이 되지 않으면 전륜성왕이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그 만큼 높은 카스트의 왕족입니다.
천신이 말한 질문에 뿟차미(Pucchāmi)가 있는데 이는 물어본다는 뜻입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가 서로 가릴 것이 없이 엉켜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풀 수 있는지 천신이 부처님께 물어봅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문제를 풀려면 계행을 지키고 선정수행과 통찰지를 닦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불교에서는 세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뚜 빠리숫다 실라(catu pārisudda sīla)입니다.
첫 번째는 빠띠목카 상와라 실라(pātimokkha-saṃvara-sīla)입니다. 이것은 비구, 비구니 계행입니다.
두 번째는 인드리야 상와라 실라(indriya-saṃvara-sīla)입니다. 이것은 감각기능의 단속이라고 합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는 6근(根)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주석서에 나오는 것인데 어떤 스님께서 탁발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부부가 싸워서 아내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거기서 스님을 보고 화풀이를 했습니다. 스님은 아무 반응 없이 지나갔는데 남편이 와서 물어봤습니다. 여자가 지나갔는지 물었습니다. 스님은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모르고 뼈가 지나가는 것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이 스님은 여자나 남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뼈로 보는 백골관을 수행하시는 스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명상센터에 가면 다 해골이 하나씩 있습니다. 스님들이 명상센터에서 돌아가실 때 기증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무덤을 파서 해골을 준비해서 명상센터에 두고 수행을 했는데 요즘은 무덤을 파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돌아가시면서 시신을 기증합니다. 서양에서는 요즘에 플라스틱으로 해골을 만들어서 집에다 놓고 있기도 합니다. 집에서 명상할 때 쓰면 좋습니다.
세 번째는 아지와 빠리숫다 실라(ājīva-pārisuddha-sīla)입니다. 지와(Jiva)는 삶으로 삶과 관계있는 계행입니다. 삶에 의해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계행입니다. 불교에서는 올바른 삶을 삼마 아지와(samma ājīva)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 사업을 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첫 번째는 고기 사업을 하지마라. 지금은 고기가 죽어서 나오는데 그 당시는 바로 죽여서 팔았습니다. 무기장사, 노예사업, 독약 사업, 술 사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스님들에게는 네 가지 필수품을 받기 위해서 거짓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빳짜야 산닛시따 실라(paccaya sannissita sīla)는 항상 내가 공양이라든지 네 가지 필수품을 알아차리고 사용해야 합니다. 나에게 올리는 모든 것이 내가 존경스러워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차리면서 받아야 합니다. 불교는 공양할 때 공양 계, 가사 계, 거주 계. 의약품 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1번과 4번은 스님들 위주고 2번과 3번은 일반 재가자도 같이 포함됩니다. 이 내용이 청정도론인 위숫디막가 계율장에 따로 나와 있습니다. 붓다고사 스님이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팔정도인 계, 정, 혜에서 계(戒)를 미얀마 수행자들은 사띠(sati)라고 합니다. 바른 알아차림인 정념(正念)이 계(戒)를 포함하므로 알아차림의 사띠(sati)를 말하는 것입니다. 필수품을 받는 것 자체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실라(sīla)는 계(戒), 또는 계행(戒行)입니다. 위나야(vinaya)는 규칙, 또는 훈련을 말하는 율(律)입니다. 실라(sīla)는 도덕적인 계(戒), 또는 계행(戒行)이고 위나야(vinaya)의 율(律)은 실천으로 승려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 또는 실천입니다. 그래서 계와 율을 합쳐서 계율(戒律)입니다. 비구는 227가지 율(律)이 있고 비구니는 311가지 율(律)을 지켜야 합니다. 재가자와 비구의 계율이 다른 것은 재가자는 도덕적인 계를 지켜야 하고 비구는 비구가 될 때 받은 율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계에 대한 자세와 역할이 다릅니다.
붓다고사 스님이 계(戒)인 실라(sīla)는 불교의 목숨이 아니고 위나야(vinaya)인 율(律)이 불교의 목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위나야(vinaya)를 잘 지켜야 오래오래 불법이 머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실라(Sīla)는 도덕적인 의미의 계(戒)를 말합니다. 규범을 지키면서는 도덕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도덕적인 계는 나를 위험으로부터 막아서 보호하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게송에 있는 사빤노(Sapañño)는 지혜를 뜻하는 빤냐(paññā)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인데 사(sa)가 붙어서 더 강한 의미를 줍니다. 업의 과보 때문에 욕계, 색계, 무색계에 태어남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빤노(Sapañño)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사빤노(Sapañño)를 통찰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빤냐(paññā)라고 쓰지 않고 사빤노(Sapañño)로 쓴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천신은 부처님께 “안에도 엉켜 있고 밖에도 엉켜있습니다. 사람들은 엉켜서 묶여있는데 고따마시여,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습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를 갖춘 사람은 계행을 지켜
마음과 통찰지 수행을 하는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의 부처님의 답변에 대해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에서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붓다고사가 쓴 주석서의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이것이 게송의 설명이다. 계에 굳건하게 머물러서라는 말은 항상 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계를 철저하게 봉행하는 자를 여기서 계에 머무는 자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계를 철저하게 받아서 지녀 계에 굳건하게 머문다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뜻이다. 사람은 중생이다. 통찰지를 갖추었다는 것은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을 통해 업에서 생긴 지혜를 가진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지혜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그리고 삼매와 위빠사나를 닦는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제목 아래 삼매를 서술했고, 통찰지라는 이름으로 위빠사나를 서술했다.
근면한 자는 정진하는 자를 말한다. 왜냐하면 정진은 오염원들을 말려버리고(ātāpana)고 태워버린(paritāpana)는 뜻에서 열(ātāpa)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가진 자가 근면한 자((ātāpi)다. 슬기로운 자라고 할 때 슬기로움을 통찰지라고 한다. 이는 그것을 갖춘 자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깨어있는 통찰지를 나타낸다. 질문에 답하는 이 게송에서는 이처럼 세 번의 통찰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통찰지(jati paññā)이다. 두 번째는 위빠사나의 통찰지(vipassanā paññā)이다. 세 번째는 모든 일을 주도하는 깨어있는 통찰지(pārihārika paññā)이다.
윤회(saṃsāre)에서 두려움(bhayaṃ)을 보기(ikkhati) 때문에 빅쿠(bhikkhu)라고 한다. 그가 이 엉킴을 푼다. 첫째, 계가 있다. 둘째, 마음이라는 제목 아래 표현한 삼매가 있다. 셋째부터 다섯째까지 앞서 밝힌 세 가지 통찰지가 있다. 여섯째, 근면함이 있다. 이상의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마치 사람이 땅 위에 굳게 서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잡고 큰 대나무 덤불을 자르는 것처럼 할 것이다. 즉 그는 계의 땅위에 서서, 삼매의 돌 위에서 돌을 갈아 날카롭게 날을 세운 위빠사나 통찰지의 칼로 자를 것이다. 그는 정진의 힘으로 노력하였기 때문에 깨어있는 통찰지의 손으로 칼을 잡아, 자기의 상속에서 자란 갈애의 그물을 모두 풀고 자르고 부셔버릴 것이다. 그가 이런 도(道)의 순간을 가질 때 엉킴을 푼다고 한다. 그는 과(果)의 순간에 엉킴을 푼 자가 되어 천신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을 받을만한 자가 된다.”
이상이 부처님의 게송에 대하여 주석한 붓다고사의 청정도론 내용입니다. 여기서 도와 과는 열반을 의미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타서 공양을 받을 자격이 생긴 것입니다.
찌땅(cittaṃ)은 선정수행을 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선정에서는 집중이라는 사마디(samadhi)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마디(samadhi)는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의미합니다. 선정의 집중은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이 있는데 대상과 하나가 되는 집중을 말합니다. 빤냐짜(paññañca)는 지혜수행을 의미하는 위빠사나입니다. 바가양(bhāvayaṃ)은 바와나(bhāvana)라는 뜻인데 마음을 계발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수행을 해서 마음을 계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송에서 나오는 찌땅 빤냐짜(cittaṃ paññañca)는 선정수행인 사마타와 지혜수행인 위빠사나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두 가지를 말씀하신 것이 수행의 전부입니다.
아따삐(Ātāpī)는 번뇌를 없애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이때 수행자는 번뇌를 없애는 게 아니라 태워야 합니다. 니빠꼬(nipako)는 지식을 말합니다. 빅쿠 소 이망 위자따예 자땅(bhikkhu so imaṃ vijaṭaye jaṭaṃ)에서 계율, 집중, 지혜가 다 나옵니다. 이때 집중은 위빠사나의 찰나집중이 아니고 선정수행은 사마타수행의 집중을 말합니다. 이 천신은 선정수행을 해서 선정삼매를 얻은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선정의 삼매라고 말하기 전에 사빤노(Sapañño)라는 말을 먼저 사용하십니다. 사빤노(Sapañño)는 지혜인데 인과응보를 아는 지혜입니다. 과보를 안다는 것은 인과법인 원인과 결과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선정삼매와 위빠사나가 나옵니다.
3번째 게송은 아라한에 대한 해석입니다. 여기서 탐, 진, 치를 탐욕인 라가(raga)로, 성냄을 도사(dosa)로, 어리석음을 아위자(avijjā)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위자(avijjā)는 무명인데 사성제를 모른다는 의미로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라가(raga)는 감각적 욕망을 말합니다. 이 중에도 애욕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엉킴을 남김없이 풀어서 잘라버린 아라한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천신과 얘기할 때, 스님들과 얘기할 때, 일반적인 사람들과 얘기할 때, 불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과 얘기할 때가 다 다릅니다.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적절한 방편을 사용하십니다.
엉킴을 뜻하는 땅하(taṇhā)는 갈애라는 뜻인데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합쳐서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땅하(taṇhā)인 갈애의 노예입니다. 갈애는 오온을 목마르게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이 오취온이 됩니다. 갈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감각적 욕망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욕망을 말합니다.
천신의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변하신 가르침의 마지막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신과 물질이 완전하게 소멸하는 곳
부딪힘과 형상에 대한 인식까지 소멸하는
여기서 그 엉킴은 잘려진다.”
여기서 정신(nāma)은 오온 중에서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인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을 말합니다. 이러한 정신을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 상, 행, 식입니다. 그리고 물질인 색온까지 완전하게 소멸했다는 것은 오온이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을 의미합니다. 다음에 ’부딪힘과 형상에 대한 인식까지 소멸하고‘라는 문장에서 ’부딪힘‘이란 욕계에서 일어나는 부딪힘입니다. 그리고 ’형식에 대한 인식‘은 색계를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욕계와 색계를 두 개의 세계를 포함하면 자연스럽게 무색계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 문장에 ‘여기서 그 엉킴은 잘려진다.’는 말은 여기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의 윤회가 끝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이 엉킴이 잘려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반을 통해서만이 갈애라는 엉킴이 소멸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세상에 남김없이 완전하게 소멸했다는 열반에 이르러 삼계가 소멸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빠띠강(Paṭighaṃ)은 욕계이고, 루빠산냐(rūpasaññā)는 색계이고, 엣테사(etthesā)는 무색계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천신이 무색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 천신은 무색계까지 아는 천신입니다. 부처님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일반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하게 이것을 아는 천신이니까 여기서는 말해 준 것입니다. 우리는 욕계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색계와 무색계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욕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색계, 무색계 선정수행을 하면 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로 이런 선정수행을 하면 다시 태어날 때 이곳에 태어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물질이 욕계에서도, 색계에서도, 무색계에서도 없어져야 열반을 얻습니다. 수다원이 되어서 욕계, 색계, 무색계에 갈 수 있습니다. 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윤회하는 것입니다. 선정수행은 윤회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위빠사나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어 윤회계를 벗어납니다. 그래서 가는 길이 다릅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으로 도과를 성취하여 열반에 이르렀더라도 선정의 힘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위빠사나라는 지혜수행을 해도 보이지 않게 선정의 지혜로 따라옵니다.
사람들은 고요한 상태가 열반인 줄 알았는데 부처님께서 그것은 무색계에 태어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색계 태어나면 잠시 멈춰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신한테 강조하는 것은 지옥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다시 지옥에 안 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있다고 해서 언젠가 지옥에 안 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천상세계에 있다고 해서 언젠가 지옥에 안 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삼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이 따르기 때문에 언젠가 이곳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딘가에 가도 윤회를 하니 팔정도 계, 정, 혜를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때의 팔정도가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 수행을 해야 탐, 진, 치가 소멸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완성한 사람이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가는 색계와 무색계는 선정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선정이 세계는 윤회하는 세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를 통해서 윤회가 끝납니다. 이때의 통찰지가 무상, 고, 무아입니다. 이렇게 꿰뚫어서 아는 지혜를 통찰지라고 하는데 이러한 지혜를 얻는 수행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은 선정삼매가 아닌 찰나삼매를 통해서 지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통찰지혜인 무상, 고, 무아는 생각이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열반에 이르는 통찰지는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을 듣는 것은 언젠가 매우 큰 이익을 얻는 유익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마노니와라나숫땅
Manonivāaraṇasuttaṃ
마음제어 경(S1:24)
1.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야또 야또 마노 니와라예
Yato yato mano nivāraye
나 둑카메띠 낭 따또 따또,
Na dukkhameti naṃ tato tato,
사 삽바또 마노 니와라나예
Sa sabbato mano nivāraye
사 삽바또 둑카 빠뭇짜띠.
Sa sabbato dukkhā pamuccati.
2. 언제 어느 마음이나 제어하면
괴로운 길을 가지 않습니다.
모든 곳에서 마음을 제어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3. 나 삽바또 마노 니와라예
Na sabbato mano nivāraye
나 마노 상야땃따마가땅,
Na mano saṃyatattamāgataṃ,
야또 야또 짜 빠빠깡
Yato yato ca pāpakaṃ
따또 따또 마노 니와라예띠.
Tato tato mano nivārayeti.
3. 마음이 이미 잘 제어되어 있다면
모든 곳에서 마음을 제어할 필요는 없다.
언제 어느 사악함이 생겨날 때
그 때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마음제어 경의 내용입니다.
불교에서는 정신과 물질이라고도 할 때는 나마 루빠(nāma rūpa)라고 합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마음과 몸이라고 할 때는 찟따 가야(citta kāya)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명색(名色)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정신이나 마음은 같은 말인데 쓰임이 다릅니다. 이러한 정신, 또는 마음은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 번째가 찟따(citta)인데 이것을 마음이라고 하고 한문으로 심(心)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찟따(citta)는 마음, 그림, 회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는 하나의 현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가 마노(mano)인데 이것도 마음이라고 하며 한문으로 의(意)라고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 의근(意根)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노(mano)는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기관 외에 나머지 하나의 정신적 감각기관인 의(意)를 의미합니다. 마노(mano)는 감각기관에서 대상과 접촉하는 역할을 하는데 감각기관인 마음이 감각대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노(mano)는 감각기관을 제어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자신의 대상으로 합니다. 이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법(法)이며 담마(dhamma)입니다.
세 번째가 윈냐나(viññāṇa)인데 이것도 마음이라고 하고 한문으로 식(識)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마음, 또는 식(識)은 오온이 식온(識蘊)에 해당하면 대상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상 세 가지는 모두 정신, 마음이라는 뜻이 같지만 기능에 따라서 쓰임이 다릅니다.
이상의 세 가지 마음은 서로 다른 마음이 아니고 똑같은 하나의 마음입니다. 다만 기능이 달라서 다르게 사용할 뿐입니다. 세 가지 마음을 다르게 알면 혼란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육식, 칠식 이런 식으로 분류할 때 똑같지 않는 마음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 마음조차도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져서 새로운 마음입니다. 이 게송에서 마노(mano)는 정신적 감각기관의 하나인 의(意)를 말하지만 편의상 그냥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야또(Yato)는 어디로부터, 언제부터, 때문에, 어느 것, 무엇이라도, 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에서 야또 야또(Yato Yato)가 두 번이나 강조되어서 ‘언제 어느’라고 했습니다. ‘언제’라는 시간의 뜻이며, 어느 마음이나 라는 뜻의 종류를 의미하는 ‘어느’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마음이나’는 여러 가지 마음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니와라나(nivāraṇa)는 보호, 방지, 방어, 막음, 거절 등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제어로 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인데 이렇게 알아차리면 번뇌가 제어됩니다.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번뇌가 제어되지만 나중에 지혜가 나면 이 번뇌가 소멸합니다. 그래서 니와라나(nivāraṇa)를 제어라고 했는데 이는 막아서 보호한다는 계(戒)라는 도덕적 의미를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언제 어느 마음이나 제어하면(Yato yato mano nivāraye)’은 오온에서 어느 정도 단속된 마음, 어느 정도 고요한 마음, 아무 생각이 없는 마음, 선정상태의 마음을 말합니다. 이때 니와라예(nivāraye)는 단속하고 보호하고 제어하는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면 괴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신이 감각기관을 제어하면 괴로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밤을 새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때로는 밤중에 많은 천신들을 만나기 때문에 주무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이 이미 잘 제어 되었다면 모든 곳에서 마음을 제어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알아차림을 하지 않아도 알아차림이 있는 알아차림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알아차림은 처음에 ‘두는 알아차림’이 있는데 어느 정도 집중력이 생기고 지혜가 나면 처음처럼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나중에는 알아차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때의 알아차림이 ‘있는 알아차림’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사악함이 생겨났을 때 선하지 못한 아꾸살라(akusala)가 생긴 것입니다. 공덕을 의미하는 뿐냐(puñña)의 반대가 빠빠깡(pāpakaṃ)인데 여기서 나오는 마음을 제어해야 합니다. 빠빠깡(pāpakaṃ)은 악한, 사악한, 비열하다는 뜻이라서 공덕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불선업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마음이 악행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는 이유는 악행을 짓지 않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항상 부처님은 뭔가를 하지 말라고 할 때는 대신에 할 것에 대해 말해 주십니다. 추구 하지 말라고 하면서 다른 것에 대해 할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악행을 하지 말고 선행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아꾸살라(akusala)입니다. 선행을 하려고 하면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악행을 하지 않으면 그 행위 자체가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악행을 하는 마음은 바로 잘라야 한다고 천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선행을 하라고 말하시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말이 하나 나옵니다. 마음은 벗어나야 하는 상황도 있고 계발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악행에서는 벗어나고 공덕은 계발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니와라나(nivārana)의 제어는 만약에 코로나 걸렸다고 생각해 보면, 치료하면 나아지고 없어집니다. 그때도 니와라나(nivārana)라는 말을 씁니다. 병을 회복했다고 할 때도 씁니다. 마음을 제어한다는 것은 마음을 단 도리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마노(mano)는 마음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어한다는 것은 이 움직임을 단속하는 것입니다. 천신이 와서 얘기하는 것은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마음을 다 단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때 오직 악행을 하는 마음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와라나(nivārana)는 ‘들어가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하는 표지판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모든 것에 출입금지 표시를 전부 하지 말고 악행만 통제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게송의 마지만 문장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어느 사악함이 생겨날 때
그 때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여기서 천신은 유익한 마음(kusala)이나 해로운(akusala)이나 상관없이, 또 세간적(kokiya) 마음이나 출세간(lokuttara) 마음이나 상관없이 모든 경우에 마음을 다 제어해서 아예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uppādetabba)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복주에서는 천신이 여기에 대해서 어떤 마음이든 일단 일어나면 그것은 모두 다 괴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무의식 상태(acittaka bhāva)가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선정수행의 위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잘못하면 극단적인 견해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경우에는 이렇게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는 아라한이 되어서 스스럼없이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을 때 가능한 말입니다. 천신이 아직 그 단계가 아니라면 선별적 알아차림이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세존께서는 ‘이 천신은 벗어남으로써 바르게 인도하지 않는 말(aniyyānika)을 하고 있다. 마음은 제어해야할(nivārana) 마음이 있고, 계발해야할(bhāvetabba) 마음도 있다.’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이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내가 모르는 의식세계는 나의 인식의 수준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위대하신 붓다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또 주석서의 안내가 필요하고 직접 지도하는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학과 수행이 균형을 이룰 때 해탈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라한따숫땅
Arahantasuttaṃ
아라한 경(S1:25)
이 게송은 숲 속에 사는 여신이 숲 속에 사는 수행자들의 언어표현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 부처님께 여쭈어보는 내용입니다. 여신은 숲 속에 사는 깨달은 수행자들이 ‘나’, ‘나의’, ‘나에게’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듣고, 불교적인 가르침은 ‘자아’가 아니라는 ‘무아’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어떻게 그러한 언어사용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존재가 어디에 태어나든 몸과 마음은 있습니다. 무색계는 몸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앞서가고 모든 것을 마음이 이끌기 때문에 마음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는 나의 몸과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소유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서의 ‘나’는 불가피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나라고 말하면서 이때 내가 있다고 알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관습적인 세속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너와 우리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고 알고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데와따(Devatā)
천신
1. 요 호띠 빅쿠 아라항 까띠위
Yo hoti bhikkhu arahaṃ katāvī
킨나사오 안띠마데하다리,
Khīṇāsavo antimadehadhārī,
아항 와다미띠삐 소 와데이야
Ahaṃ vadāmītipi so vadeyya
마망 와단띠띠삐 소 와데이야띠
Mamaṃ vadantītipi so vadeyyāti.
1.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고
마지막 몸을 가진 비구가
‘나는 말한다.’ 거나
‘그들이 나에게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안띠마데하다리(antimadehadhārī)는 마지막 몸을 가진, 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아라한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안띠만데하다리(antimadehadhārī)에서 안띠마(antima)는 마지막이고, 데하(deha)는 몸이고, 다리(dhārī)는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 천신은 숲에 사는 신입니다. 그는 숲에서 생활하는 비구들이 대화할 때 ‘나는 먹는다’, ‘나는 앉는다’, ‘내 발우’, ‘내 가사’라고 하는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비구들이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내가 없는데도 ‘나’라고 하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 때문에 부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2. 요 호띠 빅쿠 아라항 까띠위
Yo hoti bhikkhu arahaṃ katāvī
키나사오 안띠마데하다리
Khīṇāsavo antimadehadhārī
아항 와다미띠삐 소 와데이야
Ahaṃ vadāmītipi so vadeyya
마망 와단띠띠삐 소 와데이야
Mamaṃ vadantītipi so vadeyya
로께 사만낭 꾸사로 위디뜨와
Loke samaññaṃ kusalo viditvā
오하라맛떼나 소 오하레이야띠.
Vohāramattena so vohareyyāti.
2.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고
마지막 몸을 가진 비구가
‘나는 말한다.’ 거나
‘그들이 나에게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잘 알아서
능숙한 사람은 일상적인 어법으로
세상의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게송에서 키나사오(Khīṇāsavo)는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이라는 뜻입니다. 꾸사로(Kusalo)는 오온에 능숙한 자라는 뜻입니다. 오온은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생긴 과보일 뿐이므로 단지 오온이지 이것을 소유하는 자아가 없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나라거나 너라고 할 때 이 말의 진실을 안다고 해서 능숙한 자라고 합니다. 로께 사만냐(loke samañña)는 ‘일상적인 대화 언어’를 말합니다. 이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표현(loka nirutti)’이라고 하거나,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상적인 어법(loka vohāra)’을 말합니다. 일상적인 대화의 언어의 틀을 깨지 않고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말하지만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이것을 관념으로 알고 사용합니다.
다만 여기서 ‘일상적인 어법으로 일상적인 말을 한다.(Vohāramattena so vohareyyā)’고 했을 때 자아를 가지고 나라거나 너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나라거나 너라고 할 때 일상적인 어법의 틀은 깨지 않고 관용어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수단으로 세속의 명칭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아를 구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불가피한 것으로 오온의 상온의 기능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그렇지 않고 ‘오온이 음식을 먹는다’, ‘오온이 잠을 잔다’, ‘오온이 가사를 입는다’라고 하면 일상적인 어법을 깨는 것이라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나 너를 사용해서 간편하게 의사를 전달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속적인 관념과 출세간적인 실재가 함께 공존합니다. 이것을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세속의 진리가 있고 아울러 출세간이 진리가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의 중도가 아니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디가니까야의 뿟타빠다 경(D9)에 있는 내용입니다. 세존께서는 “찟따여, 이런 것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세상이 언어이며 세상의 인습적인 표현이며 세상의 개념이다.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표현할 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어떤 마음으로 말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신견으로 말했는가, 자만을 가지고 말했는가, 번뇌를 가지고 말했는가,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말하지 않았다면 단지 이런 관념적인 말은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인류는 오랫동안 나와 너를 사용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있다는 유신견을 갖게 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언어를 사용은 하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실재하는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없는 나를 있다고 알아 괴로움뿐인 끝없는 윤회를 해야 합니다.
데와따(Devatā)
천신
3. 요 호띠 빅쿠 아라항 까따위
Yo hoti bhikkhu arahaṃ katāvī
키나사오 안띠마데하다리
Khīṇāsavo antimadehadhārī
마낭 누 코 소 우빠감마 빅쿠
Mānaṃ nu kho so upagamma bhikkhu
아항 와다미띠삐 소 와데이야,
Ahaṃ vadāmītipi so vadeyya,
마망 와단띠띠삐 소 와데이야띠
Mamaṃ vadantītipi so vadeyyāti.
3.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고
마지막 몸을 가진 비구가
‘나는 말한다.’ 거나
‘그들이 나에게 말한다.’고
자만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가와(Bhagavā)
세존
4. 빠히나마낫사 나 산띠 간타
Pahīnamānassa na santi ganthā
위두삐따 마나간탓사 삽베,
Vidhūpitā mānaganthassa sabbe,
사 위띠왓또 만냐땅 수메도
Sa vītivatto maññataṃ sumedho
아항 와다미띠삐 소 와데이야
Ahaṃ vadāmītipi so vadeyya.
마망 와단띠띠삐 소 와데이야,
Mamaṃ vadantītipi so vadeyya,
로께 사만냥 꾸사로 위디뜨와
Loke samaññaṃ kusalo viditvā
오하라맛떼나 소 오하레이야띠.
Vohāramattena so vohareyyāti.
4. 자만을 버린 자에게 매듭이란 없으니
그에게 자만과 매듭은 모두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 현자는 모든 망상을 넘어섰지만
‘나는 말한다.’ 거나
‘그들이 내게 말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모두 잘 아는 자
능숙한 그 사람이 일상적인 어법으로
세상의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이상이 아라한 경의 내용입니다.
‘망상을 넘어섰다(vītivatto maññataṃ)’는 것은 갈애, 삿된 견해, 자만에 따르는 이상 세 가지 망상을 넘어섰다는 뜻입니다. 거듭 강조해서 말하지만 아라한들은 이러한 ‘일상적인 대화의 표현법(vohāramattena)’을 사용합니다. 이때 말하는 것이 의도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표현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설명하십니다. 천신이 ‘무아’인데 왜 나를 쓰냐고 하는 것은 관념과 실재가 불가피한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하지만 아라한은 이런 말을 사용해도 일상생활을 문제없이 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은 특이한 사람이 아니고 일반적인 사람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특이한 사람들입니다.
마나간타(mānagantha)는 마나(māna)와 간타(antha)의 합성어입니다. 마나(māna)는 자만, 아만이고, 간타(gantha)는 묶음, 매듭, 마디, 편집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이 말을 ‘마나 짜 간타 짜 앗사(mānā ca ghanthā ca assa)라고 병열복합어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원래 문장의 해석으로는 자만의 매듭이라는 뜻의 마나사 간타(mānassa ganthā)라고 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자만과 매듭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분리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원래 마나간타(mānagantha)는 자만을 편집한다는 뜻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자만을 편집하거나 제작해서 자만이라는 매듭을 만들지만 아라한은 자만을 편집하지 않아서 매듭을 만들지 않습니다. 빨리어 경전에서는 마나간타(mānagantha)라는 자만과 매듭이 복합단어로 많이 나옵니다.
자만(自慢)이란 뜻의 마나(māna)는 열 가지 족쇄 중의 하나입니다. 매듭이라는 간타(gantha)는 네 가지인데 첫 번째가 탐욕의 몸의 매듭입니다. 두 번째가 악의의 몸의 매듭입니다. 세 번째가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의 매듭입니다. 네 번째가 이것만이 진리라고 하는 독단적인 신조를 가진 몸의 매듭입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자만의 매듭을 가진 사람들, 자만에 의해서 묶여진 사람들, 자만이 족쇄에 채워진 사람들이라는 여러 가지 표현을 합니다. 그러므로 자만은 다양한 형태의 마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자만은 내가 있다는 자아와 유신견으로부터 나옵니다. 물론 근본원인은 무명입니다. 이것을 제거하면 무명이 지혜로 바뀌고 자아가 무아로 바뀌어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상으로 아라한 경을 마치는데 한 가지 아라한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라한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타서 소멸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윤회가 끝나는 것은 벽지불이나 붓다나 아라한이나 똑같습니다. 윤회가 끝났다는 것으로 붓다도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이런 아라한은 붓다와 다릅니다. 아라한의 아직 습관이 남아 있지만 붓다는 습관까지 완전하게 소멸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라한을 응공(應供)이라고 하는데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물론 아라한도 신통이 있는 분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은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아라한에게 어떤 힘이나 남다른 능력을 기대한다면 아라한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아라한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져서 업을 만들지 않는 가장 청정하고 순수한 분이십니다. 붓다는 전지(全知) 전선(全善)한 분이시고 전능(全能)하지는 않습니다. 아라한은 오직 전선(全善)한 분이십니다. 이러한 아라한에게 붓다도 가지고 계시지 않는 전능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괴로움이 소멸한 아라한이 되는 것이 최종목표라면 아라한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