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이 기울어진 만큼 삶의 근육은 그 각도로 수축한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시월, 산비탈
이숙경
눈높이를 모르고 가슴 높이로 살아서
얹히고 맺힌 응어리 자꾸만 생겨나네
맥없이 뭉쳐 다니는 구름만도 못한 것
부딪히면 비를 쏟아 뿌리라도 적시지만
부딪히면 화근이라 뿌리 뽑는 사람살이
비슬산 오르는 사이 눈에서 멀어지네
닫힌 맘 열어 놓고 찬바람 등에 지면
구불구불 다랑이논 타고 나는 새처럼
어느새 초롱한 눈에 하늘빛 가득 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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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진 곳에 서 보지 않은 삶이 얼마나 될까? “기울어진 운동장”이 난무하는 오늘 아닌가? 그 경사의 정도가 생애주기 별로 짊어지고 가는 짐의 무게가 된다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또 해마다 시월쯤 하늘과 땅 사이에 주눅 든 적 없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가슴 높이’의 삶이라는 것이, 자꾸만 위를 쳐다보는 삶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객관적이지 못한 수치에 갇히게 하고 눈금이 세밀할수록 헤어나지 못하는 “비교 우위”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상대적 박탈감”이 우울증의 대표적 원인이라고 한다. ‘공동체 사회’라는 판에서 아웃 사이더로 자처하지 않는 이상 시인이 말하는 ‘맥없이 뭉쳐 다니는 구름만도 못한 것’들이 ‘응어리’를 내려놓지 못하는 시월은 스산하다.
‘부딪히면 화근이라 뿌리 뽑는 사람살이’, 피할 수 없어 즐기다 보면 피하지 않는 것이 부딪힘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언제 어디서나 ‘화근’은 그 뿌리를 스스로 거두지는 않는다. “구름이 산을 넘어야지 어찌 산더러 구름을 넘으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력을 낮추려 심신을 ‘화근’의 씨에서 멀어지게 할 수밖에 없어 시인은 해발 높은 비슬산을 올랐다고 짐작된다. 그곳에도 수많은 비탈이 있건만....., 비슬산으로 시월의 습성이 시인의 등을 밀었는지 시인의 근성이 발길을 옮기게 했는지 모르지만, 한결 가벼워진 셋째 수에 다다른다.
닫힌 맘을 여는 비밀번호는 해킹되지 않는다. 안에서 여는 문이기 때문이다. 문밖에 이는 ‘찬바람’을 감수하고 산비탈에 서도 더는 뒷걸음치지 않겠다는 것으로 비친다. ‘사람살이’에서 이제 ‘비를 쏟아 뿌리라도 적시는’ 삶, “그까짓 것 못 할 것 없지.”라는 윽박지르는 소리 들린다. 자기 체면을 건다는 말은 자제해야겠다. ‘구불구불 다랑이논’ 같은 산비탈을 ‘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당신에게 내가 많이 기울어져 있음으로......,
비탈이 기울어진 만큼 삶의 근육은 그 각도로 수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