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도
명성황후 찌른 칼, 현재 일본 신사에서 보관
- 시해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로 추정
- 신사 관계자 “ 이번 공개는 극히 이례적인 일 ”
-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 성공. 13일 (일)10시 35분 방영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110년전의 그날, 명성황후의 목숨을 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일본인 자객 토오가쯔아키(藤勝顯), 신사에 칼 기증
<사진 1> 쿠시다 신사 정문 (사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혜문스님)
<사진 2> 쿠시다 신사 내부. 신전(神殿)의 모습
(사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혜문스님 )
쿠시다 신사는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해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은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 등 일행에 대해, 신사 관계자는 대단히 난처해 했다.
“ 이 칼을 공개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쿠시다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阿部憲之介) 궁사는 상기된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 자주색 보자기에 싼 칼을 취재진에게 풀러 놓았을 때. 가슴 한쪽에서 피가 울컥 쏠리는 느낌이었다. 전체 길이 120㎝. 칼날 90㎝. 칼이 뿜어 내는 살기는 방안을 서늘하게 흥분시키고 있었다.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적혀있었다. 칼주인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라고 한다.
궁사는 잠시동안의 정적을 깨며 이 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 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립니다.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입니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다시 말해 사람을 베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명치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란 분이 신사에 기증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
<사진 3> 칼을 빼고 있는 궁사의 모습 (사진 혜문스님 )
<사진 4> 칼집에 새겨 놓은 글씨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르다 ’
( 사진 혜문스님 )
쿠시다 신사측 <명성황후를 이 칼로 베었다>고 기록
토우는 후쿠오카의 우익 민족주의 단체 겐요샤의 일원이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당 중 연장자에 속했다. 토우는 사건 13년 뒤인 1908년
'민비를 베었을 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번민을 하다 범행에 사용한 일본도를 신사에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 칼은 신칸센의 시종점인 후쿠오카 히카타역 인근의 사찰 밀집지 고후쿠마치 소재 셋신원 근처의 쿠시다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
길이 1m20cm의 이 칼의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는 문구가 적혀있어, 당시 일본의 군인, 외교관, 거류민, 낭인등으로 구성된 명성황후 시해범들이 작전명을 '여우 사냥'이라고 붙였다는 이야기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자료출처 : 부산일보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