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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65
요한계시록 17:1-5
큰 음녀가 받을 심판
요한계시록 강론을 계속 해 오는 중 전체 결론이라 할 수 있는 본문에 와 있다. 계속 성경을 읽었지만 오늘 17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에게는 이제까지 요한 사도가 전한 계시의 말씀이 미래에 일어날 어떤 비밀스러운 것으로 읽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의해 발생 된 종말의 현상으로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상태로 읽어지기 때문이다.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 관점에서 심판과 구원에 대해 반복된 말씀을 거쳐 17장 이하에서는 결론을 맺기 위한 말씀으로 전환되었다. 17-18장은 악의 권세에 대한 심판을 최후로 언급한다. 이 부분을 좀 더 세분화하면 17:1-19:10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과 멸망, 19:11-21은 두 짐승, 20:1-10은 용, 20:11-15에서는 용을 좇았던 존재에 대한 심판과 멸망에 대해 전한다.
그리고 19장-20장에서 악의 권세에 대한 심판과 중첩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의 구원을 진술한 후 21장-22장 5절에서 최종적인 완전한 승리와 영광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한다. 22:6-21에서는 서두의 말씀을 다시 반복하는 듯한 표현으로 교회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최종적으로 전한 후 마무리한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1절).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 사도에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의 하나가 전한다는 것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일곱 대접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일곱 인, 일곱 나팔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까지 전한 것과 동떨어지거나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닌 이미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과 반복된 심판의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이리로 오라”라는 말씀은 장소적 이동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계시를 보여주고자 한 것에 집중하도록 한 표현이다. 요한은 이미 “하늘의 열린 문” 안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4:1). 그것은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많은 물”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가? 12:15에 보면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물은 교회가 떠내려가도록 뱀(용)이 토한 물이다.
우리가 알기에 성경에서 ‘물’은 말씀을 상징한다(시 147:18, 암 8:11). 또한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1:15)라고 하였고, 하늘에서 주어진 말씀을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14:2, 19:6)라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물”로 나타내었다. 그래서 창조 때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어서 보여주셨다(창 1:6-7).
그런데 15절에 보면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라고 하였다. 즉 “많은 물”은 이 땅의 모든 자를 지칭한다. 궁창 아래의 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비진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드러내는 모든 땅적 존재를 의미한다. 많은 물 위에 앉은 자는 “음녀”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우상 숭배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을 음녀라고 하였다(겔 16:30-35, 사 1:21, 렘 3:6-10, 호 4:12-13).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도 “큰 바벨론”(5절), “큰 성”(18절)이라고 하였다. 즉 큰 성 바벨론을 의인화한 표현으로 어떤 시대적 상황에 있는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체제나 조직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초대 교회 당시의 로마나 오늘날 미국이나 EU 또는 일루미나티나 프리메이슨 같은 것이 아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와 대조되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 받을 존재로 나타내기 위해서 “큰 음녀”로 표현한 것이다. 한마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존재이다. 큰 성 바벨론에 대해서는 이미 14장에서 이렇게 선언하였고, 18장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한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 14:8)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그래서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11:8)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곧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종교적 행위로 영생을 이루려는 것을 진리로 삼는 땅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무너진 상태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다 드러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런 점에서 2절은 음녀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2절)라고 말씀한다. 즉 땅의 왕들, 땅을 거주지로 삼는 땅적 존재들의 실상은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상태이다. 결국 자칭 이 땅의 통치자, 지도자라는 존재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속이며 다른 복음, 거짓 예수를 전함으로 땅의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마시게 하는 것이다(고후 11:4).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기 때문이다(갈 1:6-10).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3절). 요한 사도는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서 거기서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음녀를 본다.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성령 안에서’라는 말이다. 즉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갔다는 말씀은 지리적인 위치 이동이 아니라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가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면서 악의 세력에 대해 심판을 행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여 사탄에 대한 정체를 폭로한다. 이제 요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에 대해 심판하시는 그 심판에 참여 되었다는 의미이다.
여자가 붉은빛 짐승을 타고 있다는 것은 여자가 어디에 속하여 있고 그가 누구와 결탁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음녀는 짐승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자가 붉은빛 짐승을 탔는데”라는 표현은 단순히 말이나 자동차를 타는 그런 것이 아니다. “탔는데”라는 말의 헬라어 ‘카데마이’는 ‘앉다, 머무르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짐승과 거주함으로 하나 되어 음행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음녀가 짐승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곧 용이라는 마귀와 관계를 맺어 하나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음녀는 마귀의 사주를 받아 짐승과 결탁하여 세상을 음행에 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라고 말씀한다. 이미 밝혀주신 내용들로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12:3)라고 하였고,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13:1)라고 하였다.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4절). 여자는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금잔을 들고 있다. 당시에 자줏빛과 붉은빛 옷이란 흔한 옷이 아니라 왕족이나 통치자, 부자들을 상징하는 옷이다(삿 8:26, 단 5:7, 눅 16:19). 음녀는 그렇게 화려한 옷을 걸치고 왕족처럼 자신을 드러낸다. 또한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라고 하였다. 두로 왕과 바벨론에 대한 묘사를 배경으로 한다(겔 28:13, 렘 51:7).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에덴동산을 이렇게 말씀하였다.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 2:10-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 그런데 물 위에 앉은 음녀가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금잔을 들고 있다는 것은 세상을 장악하고 비진리로 충만하게 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비진리, 율법적인 행위로 하늘을 차지하려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라고 말씀한다. 즉 가증하고 음행의 더러운 것을 진리의 말씀과 그 말씀에 의해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요 성도는 어린 양의 피에 씻은 흰옷을 입는다(3:4-5, 7:9, 14).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5-6)
광야란 음녀가 진리 아닌 다른 복음을 나타내는 현장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어 언약을 맺어 그 언약의 말씀으로 먹이고 기르시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듯 하나님은 여자를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고 기르시어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신부로 만드신다. 이것이 이 땅의 상황이고 종말의 상태이다. 그래서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5절)라고 말씀한다. “어미”란 출처라는 의미이다. 즉 가증한 것들이 음녀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비밀”이란 감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때가 되거나 상황이 오면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기에 그 시기가 이르기 전까지는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채 존재한다(골 1:26). 음녀, 바벨론의 비밀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폭로하시면서 하늘의 비밀을 나타내셨다. 그러기에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비밀이다(엡 1:9, 2:4, 6:19).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이 비밀을 아는 존재이다.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맡은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믿음이다’라는 말이다. 교회요 성도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 곧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2024021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