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면 칠성리七星里 유래
북쪽은 수비면, 남쪽은 영양읍이며 서쪽은 일월면사무소 쪽이 된다. 동쪽은 영양읍 무창리이고 길가에 자연 부락을 일고 있다. 일월산을 따라서 내려오면 상운봉(塽蕓峰)이 있는데 골이 깊고 산기슭은 경치가 아름답다. 여기 자리 잡은 칠성 마을은 마을의 뒷산이 반달처럼 생겼으며 농사와 집짐승 기르기가 잘 된다.일월산맥이 동으로 뻗어 내려와서 문상천에 이르러 층암과 절벽을 이룬다. 일곱 개의 봉우리가 마치 북두칠성이 늘어선 듯하여 이를 칠성봉이라고 불렀으며 이로 말미암아 마을 이름을 칠성리라고 하게 되었다.본래 영양군 북초면(北初面)의 지역인데 1914년에 행정구역을 고칠 때 와구동ㆍ덕봉동ㆍ문상동의 일부를 합하여 칠성리를 이루게 된다. 특작물로는 고추와 담배를 들 수 있다.마을의 특징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정자(亭子)와 칠성봉(七星峰)을 들 수 있다. 정자는 칠선정(七仙亭)이라 하여 칠성봉 아래 있으며 이규학(李圭學)ㆍ목한상(睦漢相)ㆍ금익연(琴翊淵) 외 일곱 사람이 뜻을 합하여 정자를 세웠다. 한편 칠성봉(七星峯)은 칠성리 입구에 있는 산으로 산이 일곱 봉우리로 되어있다. 그 밑으로 절벽이 있는데 맑은 물이 흐르며 경치가 아름답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골마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한양 조씨(漢陽趙氏)에 의해서 개척된 마을로서 일월산(日月山)을 내려와 상운봉 골짜기에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산의 모습이 아름다워 마을이 이루어졌다. 한양 조씨 수월공(水月公) 묘소가 있고 그 앞에 재사가 있다(목영호(65) 제보).
*덕봉(德峯)
칠성봉 아래 덕봉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덕봉이라 불러 왔는데, 전에 덕봉면 사무소가 있었고, 한쪽은 섬촌리 덕봉거리가 되었다(목영호(65) 제보).
*도가몰
술도가가 처음 개업한 뒤부터 주변에 마을이 이루어져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도가몰이라 불려졌다고 한다(박동수(50) 제보).
*밤밭ㆍ율전(栗田)
칠성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앞 뒷산에 밤나무를 많이 심어 가을철이 되면 산이 온통 밤으로 덮인다고 하며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밤은 맛이 좋고 알이 굵어 전국 어디에서나 인기가 있다고 한다(박동수(50) 제보).율전(栗田)은 밤밭을 한자의 뜻을 빌려 쓴 것이다. 우리나라의 마을 이름 가운데에는 밤과 관계된 이름이 많이 있다. 이는 모자란 먹거리를 해결하는 데 큰 몫을 한 것이 밤으로 보이며『삼국유사』에서도 사라수(詐羅樹) 이야기가 나온다. 사라(詐羅)는 쌀을 뜻하는 말로서 이르자면 사라수는 쌀밤나무가 된다고 본다. '밤'이란 껍질을 벗겨서 먹는 모든 열매를 통틀어 이르는 형태인데 밤의 소리가 바뀐 것이 밥이 된다.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가 먹는 쌀밥도 벼의 껍질을 벗겨 내고 먹는 것이므로 예외일 수는 없다.
*반월형(半月形)
약 350년 전 임씨(林氏)가 처음으로 이마을에 와 살았다고 전한다. 칠성동의 중심 마을이며, 마을 뒷산이 반달처럼 생겼고 영양 남씨(英陽南氏) 시조의 묘소가 있는데 이 산 모양 때문에 마을 이름도 반월형이 되었다(이영석(68) 제보).
*새마ㆍ신촌(新村)
양지덕봉에서 약 1킬로 위쪽 동편에 자리 잡은 마을인데 1960년 개간(開懇)을 하였는데 땅이 비옥하고 곡식이 잘 된다. 개로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여 새마가 되었다(이영서(68) 제보). 신촌이라 함은 새마를 한자의 뜻을 따다가 붙인 이름이다.
*양지덕봉(陽地德峯)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개척된 마을로 덕봉 마을 양지쪽에 있으며 농사와 가축 사육 등이 잘 되어 넉넉한 마을이 되었다(임상필(63) 제보).
*음지덕봉(陰地德峯)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한양 조씨(漢陽趙氏)들이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덕봉 마을 음지쪽에 있다고 음지덕봉이라 한다(임성필(63) 제보).
*와두들ㆍ와구(瓦邱)
밤밭 북동쪽 언덕 위에 있는 마을로 임씨(林氏)들에 의해 지금으로부터 약230년 전에 처음으로 개척되었다. 기와를 굽는 기와굴 곧 요(窯)가 있었으며 여기서 구워진 기와는 질이 좋아 한때 외부로부터 주문이 많았다고 한다(임상필(63) 제보).
*음지몰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강씨(姜氏)들이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음지에 마을이 있어서 일조 시간이 짧아 오후가 되면 일찍 해가 져서 어둠이 빨리 찾아드는 마을이라 한다(임상필(63) 제보).
*정자뫁(亭子-)
목씨(睦氏)가 처음으로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정자를 세웠다. 그 뒤부터 정자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정자나무가 마을 입구에 있어서 여름철에 마을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햇볕을 피해 쉬었다고 하여 정자뫁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임상필(63) 제보).
[ 참고문헌;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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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공글따리, 쪼메, 쌔배따, 꼰는, 모데, 그렁지, 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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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마실소개 /150, 229) 일월면 칠성리(七星里)가 궁금니껴?
칠성(七星)은 조선시대인 1895년까지는
영양군 북초면(北初面)땅이였니더.
마실 뒷산이 반달모양 가꺼러 생겼따 케가
반월형이라꼬 카게 된니더.
칠성산(七星山)은 그랑을끼고 돌고 돌면서
디게 아름다운 절벽캉 층암을 맹글면서
취적봉, 주월봉, 알운봉, 토하봉, 취성봉,
학소봉, 봉무봉 등 일곱개 산봉우리를
맹글었니더.
이 일곱개 산봉우리들은
북두칠성 가꺼리 쭈욱 늘어서 있따꼬 케서
칠성봉(七星峰)이라 카게 된니더.
칠성이라는 마실 이름또
이 칠성봉에서 따가 온거시더.
1914년에 행정구역 바낄때는
와구, 덕봉, 그리고 문상 일부를 엄체져가꼬
지금의 칠성리가 맹글어지게 됬니더.
(골마)
중심지마실(반월형)서 북쪼구로 약 600m
골짜기에 있니더.
1800년경 한양조씨(漢陽趙氏)들이
찔따란 골짜기 따라 경치가 댁낄로 좋은
산운봉(山蕓峰)알개 정착한 뒤.
꼴짝에 있는 마실이라꼬 골마라 켔니더.
(덕봉)
조선초(1413년) 영양현(英陽縣)이 분할될때
덕봉면(德峯面)이 설치되었떤 지역으로
덕봉원(德峯員)이 있었니더.
글꼬, 행인 편의를 제공하는 원(院)이
설치되어 있었꼬.
마실 앞에는 덕(德)이 디게 많은 데라서
신선이 내려와가 놀다 갔따는
선유봉(仙遊峯)이 있는데,
별칭으로 덕봉(德峯)이라 카니더.
덕봉이라는 산봉우리가 마실이름이 되었꼬.
섬촌리 쪼구에는
영양 소재지캉 칠성, 가천으로 이까지는
덕봉거리가 있었찌만
1960년 새로운 공글따리(콘크리트 교량)가
맹글어 지면서
삼거리는 칠성리 쪼구로 옮겨졌니더.
덕봉은 반변천 그랑을 경계로
양지덕봉캉 음지덕봉으로 나눠져 있니더.
삼거리에 있는
양지쪼구 마실은 양지덕봉(陽地德峯)
반변천 그랑 건네 있는
음지쪼구 마실은 음지덕봉(陰地德峯)
이라 카니더.
음지덕봉은 과거 한양조씨(漢陽趙氏)들이
모데가 맹근 마실로
지금은 새로운 공글따리(교량)를
맹글고 있니더.
(도가뫁)
중심지 마실(반월형)서
문암방면으로 국도따라 와두들을 지나면
우측에 있었니더.
과거 부(副)의 상징이었떤 술도가가
맹글어 지면서
도가뫁이라꼬 부르게 된니더.
(밤밭ㆍ율전)
칠성 본마실(반월형) 북동쪼구에 있니더.
밤낭기 쌔배따꼬 밤밭이라 카게 된니더.
율전(栗田)은 밤밭을 한자로 쓴거시더.
(반월형)
칠성리 마을회관이 있는
칠성리 전체 중심지 마실이시더.
1800년경 임씨(林氏)들이 마실을 맹근뒤
뒷산이 반달가꺼러 생겼따고
반월형(半月形)이라꼬 카게 됬니더.
(새마ㆍ신촌)
양지덕봉서 약 1km 북동쪼구에 있었니더.
1960년경 토지를 개간(開懇)하면서
새로 생겨난 마실이라꼬 새마라 켔니더.
신촌(新村)은 새마를 한자로 쓴거시더.
(와두들ㆍ와구)
밤밭 북동쪼구 언덕우에
임씨(林氏)들이 모데가 맹근 마실이시더.
기와를 꼰는(굽는) 기와굴인
요(窯)가 있었따꼬 와두들이라꼬 카니더.
와구(瓦邱)는 와두들을 한자로 쓴거시더.
(음지뫁)
와두들 그랑(반변천) 건네 있는 마실로
1900년경 강씨(姜氏)들이 모데가
마실을 맹글었니더.
그렁지(응달)가 디게 일찍 생기는
마실이라꼬 음지뫁이라꼬 카니더.
(정자뫁)
목씨(睦氏)들이 정착한뒤
마실입구에 있는 큰 낭구아래 칠성정(七星亭)
이라는 정자를 맹근뒤 부터
정자뫁이라꼬 부르게 되었찌만
칠성정은 2010년경
풍파를 이기지 못해 허물어져
지금은 터만 남가져 있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