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색을 적어보자. 연두색, 자주색, 하늘색, 회색 .....이런 이름들은 색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재료 또는 물질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어의 색 이름 중 시에나 브라운, 씨 울프, 챠콜 그레이, 쌜먼 레드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색채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로수에도, 흙에도, 우리의 몸에도 있는 것이다. 색채는 물질의 한 속성에 불과한 것이며, 그리고 물질이나 재료는 그것이 있어야 할 어떤 필연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의 색채환경을 개선한다는 것은 단순히 색의 문제가 아니라 색이라는 결과를 만든 재료의 문제이고, 그것은 재료를 존재하게 한 공간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공간을 필요로 했던 교육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학교에 대한 올바른 비전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좋은 예로『우리교육』에 연재되었던 박계해 선생님의 글 일부를 소개한다.
"...꿈을 꾸어본다. 교실 벽 가득 책들이 꽂혀 있다. 한쪽 벽은 언제든 영화를 볼 수 있는 커다란 스크린이 내려올 수 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향 시설이 있고 카펫과 소파가 놓여있는 바닥은 아늑하다. 책을 뒤적이는 소리, 책을 고르는 소리만 조그맣게 들릴 뿐 아이들은 독서에 몰두해 있다. 다른 방에는 지금 사진 수업이 한창이다..."
꿈처럼 될 수는 없어도 현실을 바꾸는 시작은 꿈이다. 색채계획이든 공간계획이든 그것은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의 하나이다.
색채에 관련된 몇 가지 오해들
소위 싸구려 페인트 문화가 건축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색채라는 것이 재료에서 분리되었다. 색채가 독자적인 분야로 개발되면서 색채를 색채의 문제로만 취급하곤 하는데, 그 인식을 바꾸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색채와 관련되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오해의 몇 가지 예를 통해 색채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린빌딩: 근래에 '환경친화적'이라는 것이 미덕이 되어서 그런지, '그린'이라는 외래어가 좋은 환경을 상징하는 기호가 되어 범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그린 아파트'에서 살고 '그린 소주'를 마시는 '그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는 것인지, 그린색 즉 녹색이 좋은 환경에 꼭 필요한 색으로 인식되어 녹색 유리, 녹색 프레임, 녹색 페인트를 마구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녹색의 벽이 있는 학교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녹색은 채도가 높은 색인 까닭에 삶의 배경이 되는 건축물의 주조색으로 쓰기에는 대단히 곤란한 색채이다. 녹색을 꼭 써야 하는 경우는 병원의 수술실뿐인데, 그것은 녹색이 피의 붉은색과 보색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녹색환경은 성장과 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지 녹색 페인트로 덧칠하여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예쁜색: '예쁜 색으로 해 주세요.' 이런 말을 종종 듣을 때가 있다. 예쁜 색은 도화지에 그려진 색 자체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학교와 같이 넓은 공간으로 확장되어 나타날 때, 그 속의 사람과 가구들과 어울리기 어렵다. 예쁜 색을 쓰고 싶을 때는 액센트 색으로 좁은 면적에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예쁜 색보다는 그것이 벽돌이든, 목재든, 금속이든 좋은 재료를 권하고 싶다.
슈퍼그래픽: 요즈음 아파트의 측벽을 보면 창문하나 없는 높고 큰 벽이 허전해서인지 갖가지 방식의 그래픽르로 장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좋지 않는 모습을 가리는 화장술에 불과한 것이지 슈펴그래픽 본래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리고 그래픽의 속성에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싫증을 느끼게 하는 점도 있지만, 더욱 나쁜 것은 물질 본래의 속성을 개선하려 하지 않고 몇 통의 페인트로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하는, 배후에 깔린 폭력성이다. 학교의 멀쩡한 벽을 유치한 그래픽으로 도배(?)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하는데,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슈퍼그래픽은 우리의 걸개그림같이 거리에서 사람들과 호흡하기 위해 태어난 해방의 미술이지 못생긴 것들을 가리는 화장술이 아니다.
색채에서 재료로
초가집의 겸손하면서 포근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초가집의 색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흙벽의 다소 거친 질감, 가늘고 약한 지푸라기들이 모여 이룬 지붕의 무게, 그리고 창호지로 스며드는 여과된 빛... 이런 것을 좋아할 것이다. 사대부의 사랑채를 고쳐 만든 찾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깊은 회색의 기와가 주는 고상한 느낌과 정연하게 결구된 목재들이 만들어 내는 정신성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은 색채 그 자체보다는 재료의 질감과 물질이 갖고 있는 어떤 정신성이다. 옷을 고를때는 면인지 가죽인지를 꼼꼼히 따지는 사람들이, 집의 벽을 목재로 할까 벽돌로 할까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흰색으로 할지 파란색으로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때론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의 건축문화에 대량생산과 편의주의가 판치면서, 몰탈(mortar)위에 칠해진 페인트나 기껏해야 안료를 사용하는 타일 같은 재료가 우리 주변에 둘러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의 환경르 보아도 콘크리트 위에 페인트를 바른 경우를 많이 본다. 차라리 노출 콘크리트는 나름대로 좋은 물성을 갖고 있어서, 최근에 세계적인 건축가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콘크리트를 깨끗하게 노출하는 것이 공이 많이 들어서인지 대충 공사한 다음 페인트로 끝내는데, 이 때 페인트 색깔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대개 밝고 차분한 색이 무난하게 받아들여지지만 페인트는 자주 칠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길게 보면 결코 경제적인 재료라고 할 수 없다. '색채에서 재료로'라고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재료'라는 본질을 '색채'라는 한 현상으로 오도하는 우리의 인식 때문이다. 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존중하는 자세는 결국 하나 하나의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와 관련되어 있다. 페인트라는 것으로 재료의 성질을 획일화하는 일, 녹색 페인트로 녹색환경을 만들었다고 기만하는 것, 예쁜 색의 페인트로 예쁜 교실을 만들었다는 오해의 본질 속에 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가장 비교육적인 강요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으면 한다. 교육적인 환경이란, 학교라는 일상의 틀 속에서 학생들이 나무와 풀 그리고 물질과 공간을 다양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된 곳이다. 토끼와 꿩을 키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진실한 재료와 아름다운 비례와 색채, 그리고 좋은 공간을 일상 속에서 저절로 배우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들의 건축과 인테리어, 의상과 가구, 자동차와 조명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디자인을 석권하고 있는 가닭이 그들의 아름다운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몇가지 가능한 실천들
나무,꽃,화분 :교실이 아무리 삭막한 색과 재료로 되어 있어도 커다란 창과 햇살,그리고 그속에 여러 가지 식물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식물을 키우는 것을 통해 아이들도 자연과 생명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외부 공간도 마찬가지여서 학교 주변이 온통 공장지대라 하더라도 학교에 좋은 나무와 꽃들로 가득하다면 그곳을 좋은 환경으로 만들 수 있다.
교실:교실은 아이들의 생활 공간이다.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면 주인 없는 교실이 많아지겠지만 교실에는 어떤 형태로든 주인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학교뿐 아니라 우리 도시의 모든 구석이 그렇다. 주인이 없는 장소는 항상 피폐해진다. 교실의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교실의 주인이고, 그들 스스로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일이다. 그것은 학교환경르 개선하느 주체가 학생이기도 하다느 것을 넘어서 그 자체가 매우 의미 있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영역을 자기화한다는 것으 교육적인 과정리 뿐 아니라 모든 동물의 본능이기도 하다. 자기의 영역이 없는 학교, 그곳이 그들에게 머물고 싶은 장소일 수 없다. 전문가의 수준 높은 공간계획이나 색채 및 재료계획을 수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학금의 문을 아이들에게 칠해보게 하거나, 교실 벽의 일부를 아이들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는 등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해 교육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교탁,주전자, 커튼 등 소품이나 가구들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건축물이라는 배경에서 그림으로 존재하는 귀한 것이다. 오랫동안 사용하는 것들은 신중한 선택이 필요한데 물론 좋은 디자인이어야 하며, 되도록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린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에, 1년 동안 또는 그 이하로 사용되느 소모품인 경우 교사나 학생들의 기호를 반영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실이 교실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집 같은 교실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교실환경에 대한 여러 가지 기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에 학생들이 ajaf고 싶어하는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교실의 모데릉鱁 개발하고 다시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어떤 교실의 유형이 어떤 나이와 성격의 학생들에게 바람직한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작업을 개별학교에서 하기는 러렵고 전국적인 차원의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당장 겪게될 교육과정의 변화 등을 고려하면 절실한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교무실 : 교무실은 선생님의 공간으로 교실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여햐 하는 곳이다. 아이들을 위해 교무실의 환경을 희생하기보다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그 자리에 언젠가 앉아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 교육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무실은 학생과 선생님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 발자국 소리 등 소움이 많다. 바닥에 카펫타일을 깔아 소음을 흡수하고 진동을 방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관리도 어렵고 너무 이상적인 재료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카펫타일은 청소기로 청소한다는 것 외에는 관리가 쉬운 편이다. 화장실에 카펫을 까는 시대에 선생님의 공간인 교무실에 소음과 진동을 줄이기 위해 카펫타일을 설치하는 것은 그리 사치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카펫타일은 되도록 차분하고 다소 어두운 색이 공간에 안정감을 주고 관리도 용이하다.
교무실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 중 하난가 가구이다. 교무실하면 철제가구와 커다란 칠판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지만 교무실 가구도 최근 OA가구로 바꾸어져 가는 추세이다. 가구는 인공적인 색채보다는 오크, 비치, 메이플 등, 무늬목을 사용한 것을 고르는 것이 교무실 분위기에도 좋고 오래 써도 싫증이 덜할 것이다.
낮은 칸막이나. 책꽂이를 고를 때에도 너무 튀지 않는 색을 선택하는 것이 좋고, 칸막이의 높이는 1,5미터를 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양호실 : 양호실의 바람직한 분위기는 집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아픈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은 심리적인 안정에도 필요하다. 어떤 경우 병원의 표백된 듯한 병실을 모방하는 경우가 있는데, 최근 병원 병실의 경향도 가정집의 거실이나 침실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화장실 : 화장실은 학교에 등교한 이상 누구나 한 번 이상 이용하는 곳이다. 물론, 청결이 제일 중요한 미덕이지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방수와 유지관리 때문에 타일이 널리 쓰이는데, 색채가 어떠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닥은 다소 어두운 색으로, 벽은 청결한 鍣미을 주는 밝은 색 계통이 무난하게 쓰인다. 대변기 칸막이 벽의 재료도 돌부터 경량 칸막이까지 다양하고 그 가격도 차이가 많은데 화장실의 전체 색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 외에 변기와 세면대 등의 색채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아이보리색이 선호된다.
근래에 갖가지 아이디어를 동원해 화장실을 꾸미는 경우를 보는데, 그 결과가 다소 유치하더라도 아이들의 개성과 노력이 배어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복도, 계단 등 공용공간 : 학교에서 복도 등의 공용공간은 학생들의 또 다른 생활공간이다. 그곳은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고 놀이의 장소이기도 하다. 바닥과 벽에 색채나 재료의 변화를 주고 식물도 배치하여 길고 지루한 복도가 아니라 또 하나의 즐거운 공간이 되도록 배려해야할 것이다.
액센트 재료, 또는 액센트 색채: 재료를 바꿀 예산도, 건물을 새로 칠할 여유조차 없는 학교가 더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 경우 작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차선의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교실 문짝이나, 학교 정문, 계단의 한쪽 벽, 화장실 출입문, 복도의 끝 벽 등을 액센트 색이나 다른 재료로 마감해도 나름대로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색채의 유희로 끝나서는 안되며, 입구의 표시, 통로의 끝, 수직동선의 암시 등 의미를 가질 때 그 색채나 재료가 존재하는 당위성을 갖게 된다.
CI(corporate identification): 학교의 로고, 안내표지판, 게시판, 교실표지판 등도 학교환경의 중요한 요소이다. 표지판뿐 아니라 CI계획은 교복, 서류양식에까지 일관된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학교의 환경개선의 효과도 쉽게 거둘 수 있다. 요즈음은 컴퓨터 환경이 좋아져서 학생과 교사에 의해 디자인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CI계획을 자체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사례조사를 하거나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보는 것도 좋다.
맺는말
학교가 소재가 된 글이나 영화를 보면 학교의 이미지에 대해 상반된 묘사를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최근에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여고괴담>과 <내 마음의 풍금>에 묘사된 학교의 풍경이 어땠는지를 떠올리면 보통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학교에 대한 인상이 퍽 다채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학교는 추억으로 채색된 아름다운 기억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추하다 못해 공포스러운, 그야말로 지겨운 장소로 우리의 마음에 함께 남아 있다. 좋은 학교의 환경이란 학생과 교사가 그곳이 자기의 장소임을 자부할 수 있고, 교육의 목표와 환경이 서로 일치하며, 좋은 나무와 뛰어다닐 마당과 책을 읽고 싶은 교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알맞은 공간과 균형 잡힌 비례, 솔직한 재료, 조화로운 색채가 함께 할 때 비로소 학교환상으로, 그리고 미래의 고운 추억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공포스럽고 추하고 , 탈출하고 싶은 학교는 이제 오래된 비디오로만 볼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