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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은 Bf 109가 최초의 실전 경험을 쌓은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1930년대는 온갖 이데올로기들이 뒤섞여서 광란의 역사를 만들어내던 시기였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추가로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까지 다수의 이념을 숭배하며 자신들의 이념이야말로 20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바이블과 같은 진리라고 자신하였던 탓에 자신들의 이념에 부정적인 상대들은 절대악으로 규정지어 총구를 겨누기를 서슴치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원인은 수십년 동안 스페인 역사와 정치가 양극화된 결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국가주의(파시스트)와 공화주의(공산주의)들의 대립
국가주의자는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군부세력,지주,기업가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편 공화파는 도시 노동자, 농업 노동자,교육받은 중산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이질적인 구성원의 세력들의 양끝단은 파시즘을 신봉하는 팔랑헤당(국가주의자)으로 집결되었고 한편은 호전적인 무정부주의자(공화파)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이에 군주주의,보수주의,자유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세력들이 포진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란은 다수의 정치 사상을 신봉하는 세력들이 내란이 진행되면서 양끝점을 향해 집결되어 커다란 양대 진영이 구성되면서 내전으로 발전해나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국가주의자라 불리는 파시스트 성격이 강한 세력과 공화파라 불리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성격이 강한 세력으로 모아지면서 스페인 영토는 양세력들에 의해서 나뉘어 점령되었습니다.
(1940년 10월 스페인 내전의 승리 후에 프랑코 총통과 아돌프 히틀러의 만남.
불과 5년 후에 히틀러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 속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만
영악한 독재자 프랑코는 천수를 누리고 1975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와 동맹을
맺었던 두 독재자들(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비극적인 최후에 비교하여 그는
"성공한 독재자"였다는 평가가 맞을 것 같습니다.)
국가주의자의 지휘권은 프랑코 장군이 쥐고있었고 1936년 10월 국가주의 정부를 구성하고 국가수반임을 공포합니다.
반면 공화파 정부는 1936년 9월에 사회주의 지도자인 프란시스코 카바예로가 이끌게 됩니다. 1937년 5월 카바예로의 후임으로 집권하게 된 우한 네그린 역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각자 정부를 구성하고 점령한 영토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전쟁이 임박하게 되었는데 양쪽 모두 승리를 위해서는 외국의 군사 지원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국가주의자 진영에 프랑코 장군은 이념적으로 맥을 같이 하는 이웃 나라들의 강력한 독재자 두명에게 손을 내밀게 되는데 첫번째가 1차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을 짧은 시간동안 재건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회복하게 만든 아돌프 히틀러였고 두번째는 이태리에서 파시스트 정부로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였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유럽대륙 정복을 위한 침략 전쟁을 계획하던 히틀러에게 스페인과의 동맹은 전략적으로 필요했으며 로마제국의 재건의 망상에 사로잡혔던 무솔리니 역시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부의 동맹 요구는 바라던 바였습니다. 독일과 이태리의 독재자들은 즉각적으로 프랑코에게 병력,탱크,전투기를 지원하였습니다.
(1936년 공화군 부대의 모습)
공산주의 정부인 공화파는 이미 프랑스와 멕시코의 지원을 확보한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맹주국인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장비와 물자를 공급했습니다. 게다가 무려 4만명의 외국인 용병들이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공화파에 가담하게 됩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어 양진영간에 치열한 전투와 살육이 거듭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국가주의 정부의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과 이태리 파견군들과 공화군을 지원하는 소련의 붉은 군대 지원군들과 불과 몇년 후에 벌어질 독소전쟁의 복사판처럼 스페인 영토를 무대로 진검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20세기 최고의 종군 사진 작가인 카파가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군 병사가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순간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24살의 이 젊은 병사는 즉사하였으며 카파의 이사진은
전쟁의 비정함을 너무나 잘 표현한 사진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결국 1939년 2월 국가주의 정부군의 승리로 무려 25만영의 공화군들과 비슷한 숫자의 그들을 따르는 민간인들은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패퇴하게 되었고 3월 5일에는 공화파 정부가 프랑스로 망영하게 됩니다. 3월말에 모든 공화군 부대들은 해산하거나 투항혔고 프랑코가 이끄는 국가주의 정부군은 마드리드에 입성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내란이 시작된 1937년부터 공화국 정부가 축출되고 프랑코가 스페인을 평정하게 된 1939년까지 엄청난 숫자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내전 기간 중에 무려 50만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였습니다.)
(스페인의 거장 피카소(1881년~1973년)의 "게르니카" 1937년 스페인 내란 중에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콘돌 군단의 무차별
공습에 살육되는 스페인 바스카 지방에 작은 도시 게르니카의 끔찍한 상황을 거대한 벽화로 제작하였습니다.
마침 그해에 파리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만국박람회에 스페인관 벽화 제작을 의뢰받은 피카소가 조국의 비보를
접하게 되자 한달 반만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실제로 독일 공습에 폐허가 된 게르니카 마을의 모습)
(미국의 문호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실제로 참전하였고
그경험을 토대로 명작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하였습니다.
1943년 이 소설은 영화화 되어 게리 쿠퍼와 잉글리드 버그만의 뛰어난 연기로
그해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오르게 되었으며 잉글리드 버그만은 최우수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냉전 시대 민주 진영의 맹주가
되었던 미국에서 온 주인공은 사회주의 공화군에 가담한 지원병으로 공화군
편에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앞에서 설명하였 듯이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1936년 60명의 루프트바페 조종사와 복엽기들을 파견하여 국가주의 정부군을 지원합니다. 콘돌 군단이라 명명된 독일 조종사들은 초기에 소련이 공화군을 위해 지원한 무려 1,500대의 전투기 (당시로서는 신형 단엽기 I-15와 I-16.)과 스페인 상공에서 격돌하게 됩니다. 하지만 숫적으로 열세인데다가 소련측 전투기보다 성능적으로 열세였던 복엽기로 1937년에 Bf 109와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를 지원하기까지는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콘돌 군단의 전투기 하인켈 He 51C-1)
(슈투카 이전에 급강하 폭격기로 사용된 헨셀 Hs 123A)
(소련이 스페인 내전에 지원한 단엽기 폴리카르포프 I-16)
하지만 성능적으로는 아직 몇가지 결함을 개선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양산이 막 시작되었던 Bf 109B가 스페인에 도착하자 소련 공군과의 공중전의 양상은 역전됩니다. 월등한 스피드로 Bf 109B는 소련 전투기들과의 공중전에서 뛰어난 성능을 입증하게 되었으며 엄청난 숫자의 소련 전투기들은 Bf 109의 기관총 세례를 받으며 격추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고질적인 Bf 109의 결함이었던 미익의 불안전한 설계는 공중전 중에 급선회를 하는 경우 쉽게 부러지는 경우가 발생하였는데 후에 이런 결함이 개선된 후에도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은 미익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공중전을 하게 될 때 급선회를 주저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Bf 109가 갖고 있는 보다 치명적인 결함은 앞에 글에서도 메서슈미트 엔지니어들을 고심하게 만들었던 상대적으로 빈약한 무장에 있었습니다. 비록 공중전에서 월등한 스피드로 소련 전투기들의 꼬리를 손쉽게 따라붙었지만 7.9mm MG 17 기관총 3정만으로는 일껏 사격권에 잡아놓은 적기를 쉽게 격추시키기에 부족한 파괴력이었으므로 무장의 강화는 시급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1937년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Bf 109B)
스페인 내전에 투입하기 전에 20mm 기관포를 동축에 장착하였으나 잦은 고장과 발사 반동으로 전투기 기체에 불필요한 진동이 발생하여 위험하게 되는 현상에도 불구하고 기관포 장착을 다시 한번 시도하였는데 똑같은 부작용으로 결국 Bf 109 C에 기관포 장착은 포기해버립니다. 대안으로 7.9mm 기관총 2정을 기체 전면에 장착한데 추가로 주익에 2정의 동일한 기관총을 장착하여 총 4정의 기관총으로 화력을 강화시키게 됩니다. 주익에 장착한 기관총으로 인해서 비행시 불안정한 현상이 다시 발생하였는데 미익의 설계 조정으로 밸런스를 잡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제 3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했던 Mf 109B에 이어서 4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한 Bf 109C-1이 등장하게 됩니다.
(Bf 109C-1, 4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주익의 밸런스를 개선한 버젼으로 1938년에 투입됩니다.)
일단 주익의 무장시 안전성을 확보하게 되자 다시 한번 주익에 7.9mm 기관총 대신에 20mm 기관포로 교체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런 끊임없는 노력은 Bf 109C 시리즈가 풀어야 할 지상 과제가 되었습니다. 급한대로 Bf 109 C-1에 20mm 기관포를 동축에 장착하는 시도는 여전히 기체 진동으로 포기하게 되었고 스페인 내전에 최초로 투입된 Bf 109B에 이어서 1년 후 1938년에는 Bf 109C-1이 투입됩니다. 이때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콘돌 군단에서 최고의 에이스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베르너 밀터즈가 이끄는 편대가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특히 베르너는 루프트바페의 편대 전술을 창안한 뛰어난 편대 지휘관으로도 명성을 떨칩니다.
(스페인 내전 중에 최고 에이스로 명성을 떨친 베르너 멜더스
(1913년~1941년), 통산 115대의 격추 기록을 달성하였고
루프트바페 조종사중에 최초로 100대 격추를 성공한 에이스
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1941년 그의 상관이자 슈투카 개발의
공로자인 언스트 우뎃이 자살한 후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승객 신분으로 군 수송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오다가 추락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한편 Bf 109의 엔진 출력의 강화를 위하여 당시 다이믈러 벤즈社에서 개발 중인 무려 960마력의 DB600 엔진을 Bf 109B에 장착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DB600 엔진은 Bf 109를 또 한번 업그레이드 해주게 되는데 Bf 109B에 비해서 최고속도가 50km나 증가하였고 작전 가능한 고도를 31,170피트까지로 상승시켰습니다. 결국 4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한 Bf 109C형에 DB600 엔진을 장착한 Bf 109D형이 생산됩니다. 하지만 다이믈러 벤즈는 새로운 DB601 엔진을 이어서 개발에 성공함에 따라 Bf 109D형은 연대 분량의 숫자가 생산된 후에 다음 버젼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Bf 109 D-1, 다이믈러 벤즈 DB600 엔진 장착)
DB601 엔진은 "꿈의 엔진"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걸작입니다. 다이믈러 벤즈는 DB601 엔진의 개발이 끝난 1939년에 DB600 엔진의 생산을 멈추고 DB601 엔진 양산에 주력하게 되는데 이 엔진을 장착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기종은 Bf 109E라고 명명되어 드디어 그 서막을 올리게 될 2차대전 초기 나치의 전격전 전술에서 슈투카와 함께 공포의 전투기로 명성을 얻게 되는 Bf 109 가문의 진정한 맏형이 되었습니다.
(다이믈러 벤즈社가 개발한 "꿈의 엔진" DB601. 1,000마력을 넘는 파워는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 개발한 스핏파이어에 장착된 롤스로이스 메를린 엔진과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엔진이었습니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에 Bf 109D-1은 대부분 스페인 공군에게 넘겨졌고 같은 해에 폴란드 침공과 함께 시작된 Bf 109E의 전설은 다음 글에서 이어지도록 하겠습니다.
(Bf 109E, 1000마력의 강력한 다이믈러 벤즈 DB601 엔진 장착)
첫댓글 수많은 BF-109 키트가 있을만 하네요. 후~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
아하!!! 피카소의 저 작품이 저렇게 나온거구낭!!! 아하!!!
지식도 쌓이고 견문도 넓어지는 김만준의 세계사!!
제 이름 아직 기억 못하시나보네......T T
어라...그러고 보니 거꾸로 써놨네ㅋㅋㅋ
여기 형동생분들 성도 마음대로 바꾸어 씁니다. 주인장이 머리가 좀 나쁜게 흠인데 인간성은 또 좋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정말이지.. 남편님 덕분에 견문넓히고 좋습니다.^^
남편님....ㅋㅋㅋㅋㅋ 오늘 가게에서 철야 근무 중에 저장해놓은 글들 중에서 한개 정리해서 올려봤는데 좋은 정보 된 것 같아서 기쁩니다. 문득 "따블오남편"의 의미를 안밝혔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년 전이지요? 007 최초로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왔던 영화가 "카지노 로얄"입니다. 그 영화 속에서 007이 해변 바닷물 속에서 걸어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근육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와이프를 위해서 따블오쎄븐처럼 근육맨이 함 되보자고 다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좀 비만이었었거든요. "따블오쎄븐처럼 근육맨이 되어서 와이프에게 사랑받는 남편"를 줄여서 따블오남편이 된겁니다. 지금은 免비만했구요! ㅎㅎㅎㅎ
아... 그런 유래였군요! 평소 궁금했는데 이렇게 자세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준만님 닉네임도 결국 사모님에서 유래된 거군요. 저 또한 그러합니다. ㅎㅎ (붕어가 와이프를 지칭합니다.)
그나저나 맨 앞의 이미지는 너무 느낌이 좋네요. 모형을 딱 저 느낌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집니다. 저 그림 제가 찜 !!!
아하! 그랬군요! 그런데 어부인님을 붕어라고 지칭하는 것이 독특하시네요??? 그리고 Bf 109 참 아름다운 기종입니다. 작지만 독일인 특유의 각진 디자인도 매력적이고.... 그런 날렵하고 얄쌉한 디자인이 결국 무장을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하는데 고충을 주었지만 말입니다....
준만형님 덕분에 재미있는 전쟁사를 읽을수 있다는것이 너무 좋습니다. ^^
감사합니다. 이렇게 관심 가져주시면 앞으로 쓸 얘기들이 끝도 없을 것 같네요. 게시판이 세개가 되니까 훨씬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동시에 풀어나갈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김작가님 많이 기다렸습니다. 역시 기대를 져버리시지 않는군요 참 전투기 한대를 개발하는데도 이렇게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명품이 나온다는 진리를 모형을 하고 이글을 읽으며 새삼 느껴집니다. 늘 카페들어오면 오늘은 김작가님이 글을 올리셨나 하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철야 근무 끝내고 일어나서 커피 한잔 마시는데 댓글이 올라왔네요. 앞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세개의 게시판에서 쏟아낼 생각입니다. 휴머니스트님같은 분들의 응원만 있다면 말이죠!
이번주 정신이 없어 게시판의 글들도 못읽어서, 휴일에 한가하게 준만형님의 글들을 감상합니다.
2차 대전 때 독일 에이스의 격추 기록이 연합군에 비해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는 것이 기술력의 차이였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듭니다. 그 무지막지한 기술력을 가진 독일을 전쟁에서 물리쳐낸것이 정말 다행이네요.
일전에 키트 정리할 때 BF-109를 다 팔아버린 것이 갑자기 아쉬워 집니다. ^^'
저는 토요일 아침 카운터 보는 중입니다! 금주는 추수감사절이 목요일이라 좀 바쁘겠네요. 응원 감사드립다. 바쁜 중에도 진도는 뽑아볼랍니다. 기술력의 차이가 맞는 말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