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전문 속을 걷는 예술가들의 초상;
상호 배타적이면서 보완적인 예술성을 위주로
—김기택,『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 지성사 2012)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
최 용 훈
김기택 시의 특질은 시적 탐구대상의 세밀한 부분까지 감각적으로 묘사하는데 있다. 이런 김기택의 개성은 먹이를 쫓는 매의 눈처럼 시적 탐구대상에 내재돼 있는 본질을 좇는 동시에, 그 본질이 시인의 이성적 상상력에 의해 변주할 수 있는 반경을 놓치지 않는 통찰력에서 기인한다. 『갈라진다 갈라진다』는 김기택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김기택은 탈 인간화한 시선으로 사물들의 즉물적 사실관계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거나, 역으로 사물의 시선으로 인간의 본성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시편들을 다수 편재시켜 놓고 있다. 김기택의 이런 시도는 대체로 구조주의 입장에 충실한 모더니즘 양태로 이해되지만, 그 시편들이 풍기는 뉘앙스는 탈구조주의에 가깝다. 이런 느낌은 김기택이 보여주는 시적 대상들의 어떤 정서들은 생물학적 자아에서 발현되는데 시인이 펼쳐 보이는 세계관은 우주 자체를 자아로 보는 무자아의 영역에 포섭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 한 예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사무원』에 처음 등장하는 「우주인」을 보면, 「우주인」의 화자가 위치한 공간은 현실세계다. 그런데 『갈라진다 갈라진다』에 다시 등장하는 「우주인2」의 화자는 우주공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우주인」에 나오는 화자의 정서는 생물학적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우주인2」에 와서는 그 정서가 무자아의 세계에 편입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의 이런 인식 기저의 변화는, 현실세계에서는 “누구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의혹” 때문일까? 꼭 이런 현상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김기택이 이전까지 보여준 시집과 이번 시집의 차별성은 우선 표제에서부터 드러난다. 표제가 문장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시집 『태아의 잠』과 두 번째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은 그렇다고 쳐도 세 번째 시집부터 『사무원』, 『소』, 『껌』 같은 보편성이 담보된 보통명사를 표제로 달다가 이번 시집에 이르러서는 표제가 『갈라진다 갈라진다』라는 동사로 변화하고 있다. 표제를 보통명사로 쓴 것은 시인의 정체성이 시적 대상의 입장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라면, 동사를 표제로 정한 이번 시집은 시인이 어떤 구조 하에서 일어나는 시적 대상들의 행위나 행태의 구조적 작용에 대해 모색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뒤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런 시도는 어쨌든 구조주의에 충실한 모더니즘인 것이다. 하지만 구조주의가 드러내는 노정의 한계성 때문에 그 대척점에 구조주의를 탈피하려는 탈구조주의가 있고 그 탈구조주의가 지향하는 예술로써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김기택 시의 시적 주체들의 정체성이 무자아에 포섭되는 시적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큰 틀에서 보자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태생적으로 회전문 속에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는 풍경과 같다. 투명한 유리칸막이 속에 서로 격리되어 회전하는 이 풍경은 선후의 구별이 의미 없기도 하지만, 어느 한쪽의 일방적 운동은 회전문의 작동을 중지시킨다. 이처럼 예술성이 작동하는 풍경은 서로 배타적이면서 서로 보완적이다. 따라서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가 충돌하거나 협조하는 현장의 순간적 묘사에 치중하는 김기택의 시적 태도는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집 표제의 변천에 따라 시인의 인식이 변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표면적 이유일 뿐이고, 예술가들의 예술성이 갈등하거나 융합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제한된 공간 속에서 무한히 확장하는 시간 때문에 시간의 유속을 느끼게 되는 우리의 삶의 유한성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입장에서의 이성적 판단이라면, 시간이 펼쳐 보이는 현상계의 계절을 인식하는 우리의 인식도 제한성이 없기 때문에 시적 대상들의 주체의식도 해체되는 경향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예술 사조로써의 모더니즘이 지적 자아(cogito)로부터 파생된 근대성이라면, 확장성을 갖는 예술로써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자아의 세계를 추구한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전까지는 시인이 사물의 의인화를 통해 시적 대상에 인격을 부여하는 주체적 입장(modernism입장)에서 시를 써왔다면, 이번 시집은 그 주체들이 보이는 어떤 행위들이(postmodernism입장) 무자아의 세계에 어떻게 포섭되는가를 객관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시의 기능적 측면보다 예술의 본태성인 예술성을 구현하는데 보다 더 큰 주안점을 두고자한 것으로 판단된다. 시인의 사물에 대한 인식이 적확하다고 보장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사물들을 의인화는 하되 그 사물에 인간 사유의 개념을 부여하거나 판단의 기능은 탑재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객관적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시인의 이성적 심리는 매우 타당성 있는 행동이다. 이런 시적 방법론을 통해 보다 높은 예술성을 담보하려는 시도는, 김기택이 갱신하고자 하는 시의 방향성을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될까? 그 답으로 「우산을 잃어버리다」를 구조주의에 대비해 살펴보면 방향성이 보다 명확해 진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우산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우산은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가
남에 바지를 두어 번 슬쩍 적셨다가
좌석에 잠깐 기댔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구두들에게 밟혔다가
슬픈 눈이 잠시 헛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슬며시 없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비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우산을 찾았으나
우산은 제자리에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잃어버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비가 그치기만 하면 사라졌다는 듯이
우산은 민첩하게 제 길을 찾아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
스스로 찾아낸 자리를 영영 떠나지 않았다.
비가 내렸으므로 나는 다시 우산이 필요했다.
비가 더 많이 내렸으므로 잃어버릴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떨어진 꽃잎들은 껌처럼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하나같이 우산이 들려있었다.
우산들은 어떻게 공기 속에서 비 냄새를 찾아내
첫 빗방울이 떨어지자마자 활짝 펴지는 것일까.
눈물은 어떻게 슬픔이 지나가는 복잡한 길을 다 읽어두었다가
슬픔이 터지는 순간 정확하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저 많은 꽃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봄과 나뭇가지에 마련된 자리에 찾아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면 저 많은 우산들은
어떻게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리를 찾아 일시에 증발해버리는 것일까.
흙바닥에 뒤엉켜 있는 꽃잎들은
어떻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저 자리를 찾아낸 것일까.
슬픔이 흘러나오던 자리는 어떻게 감쪽같이 명랑해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자마자 저 많은 손들은
어떻게 우산을 잃어버린 걸 완벽하게 잊어버리는 것일까
내 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우산을 잃어버리다」 전문
「우산을 잃어버리다」를 읽다보면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마치 예비 되어있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받게 된다. 구조주의가 “사물의 참된 의미는 사물 자체의 속성과 기능에서가 아니라, 사물들 간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며, 사물은 세계 안에서 언제나 다른 사물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따라서 그 관계망 안에서 사물이 지니는 위치에 따라 사물의 의미는 규정되며 변화한다.” 고 주장하는 것처럼 김기택은 비와 관계되는 사물들의 관계망을 통해 “전체 체계 안에서 사물들의 관계를 기술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즉 비와의 관계망에 놓일 때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되는 우산에 인격을 부여함으로써 발명되는 우산의 생물학적 자아로 인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비나 눈물, 심지어 관념에 지나지 않는 슬픔까지도(이 모든 것이 시차를 두고 일어나지만 우주자체를 자아로 보는 무자아의 관점에서는 동시다발적이라서) 스스로 주체적 인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런 착각은 구조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물들 간의 관계망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이로 인해 독자들은 자아가 없는 사물들까지 거부감 없이 무자아의 세계에 편입시키게 된다. 결국 우산의 독립된 행동(modernism적)은(사물에 대한 인식이 적확하다고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화자의 지적 자아를 의혹에 빠뜨리게 되고, 이를 감지한 시인은 더욱 세차게 쏟아 붓는 비의 행동(postmodernism적)에 주체성을 부여해 착각마저도 예술성으로 구원하고자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자아건 철학적 자아건 결국 자아의 세계는 무자아의 세계에 포섭돼야만 납득 가능해진다. 김기택의 이런 인식은 「모녀」라는 시편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딸의 얼굴이 조금 들어가 있는 엄마가
소곤소곤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딸이 엄마의 웃음을 똑같이 그리며 웃고 있다.
두 웃음이 하나의 얼굴에서 웃는다.
엄마가 나직나직 이야기할 때
두 얼굴은 모두 엄마가 되었다가
딸이 생글생글 이야기하면
두 얼굴은 금방 명랑한 딸의 얼굴이 되곤 한다.
〔……〕
하나가 없어진다면
둘 다 영원히 없어져버리고 말 것 같은
십대 엄마와 사십대 딸.
―「모녀」부분
딸과 엄마의 생물학적 자아는 각각이 독립된 존재다. 그러나 시인은 그 독립된 존재가 하나의 물상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인식한다. 이런 인식은 시인이 핏줄이라는 관계망을 의식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든 이런 인식은 지적 자아의 세계에서는 호환불가능하고 무자아의 세계에서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자아와 무자아와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와 무자아가 늘 길항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살갑게 인사하기」를 통해 자아와 무자아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목젖을 뭉개고 올라오려는 말을
흰 손이 저절로 주먹이 되려는 말을
〔……〕
결코 근대화되지 않는 좆의 DNA에 새겨진 모든 짐승이 다 드러나는 말을
꽉 졸라맨 넥타이로 틀어막고
단단하게 채운 바지 지퍼로 틀어막고
〔……〕
반가워요 반가워요 반가워요
볼 때마다 행복해지는 웃음, 잡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 손을
다시 만나니 정말정말정말 행복해요
―「살갑게 인사하기」부분
「살갑게 인사하기」에서 시인은 가식적 행동의 전말을 통해 자아가 해체되는 구조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런 가식적 행동은 일견 지적 자아에 의해 통제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세계가 무자아의 세계에 포섭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흰 손이 저절로 주먹이 되려는 말”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자아가 무자아의 세계에 포섭돼 일어나는 일이지만, 자의식을 해체시켜 참게 되는 것도 자아가 무자아의 세계에 포섭돼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국 학자들이 밝혀낸 진화론에 따르면 “손가락은 주먹을 쥐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진화가 욕망에 의한 것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김기택은 “결코 근대화되지 않는 좆의 DNA에 새겨진 모든 짐승이 다 드러나는 말을” 주체적으로 인식해냄으로써 욕망의 DNA는 결코 근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적 자아가 근대적이라도 근대화의 DNA에는 파괴적인 분열성이 있음을 고발한다. 이 고발을 통해 시인은 세계와 무자아의 관계를 정립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즉 예술 사조로써의 모더니즘의 범위 안에는 욕망으로써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상반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정황이 어떤 결과를 도출하든 그것은 모두 구조적인 것일까?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세 번 반복되는 “반가워요”라는 시어는 어법에 맞춰 예절에 어긋나지 않게 구사하면서도 그 후 세 번 반복돼는 “정말”이라는 시어는 어법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시인은 자아와 무자아의 갈등관계 또한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김기택은 자아와 무자아를 구분 한다던가 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기택은 이런 자아와 무자아의 관계망을 통해 모더니스트의 면모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지적 자아는 어떤 방식으로 갈라지고 갈라져 무자아의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는지를 「커다란 나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나무들이 갈라져 우주를 향해 가지를 뻗는 방식은 구조주의 측면에서 보자면 구원의 행위지만, 그것은 “살을 찢”는 고통스러운 일이며, “이글이글 불꽃모양”의 열망이며,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있듯” 예정되어 있던 과정이다. 그것이 구조적이 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지고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지고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지기 때문이다. 김기택은 그러나 자아가 분열하는 과정을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동시에 구조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인지하고 자기성찰을 통해 반성에 이르고자 한다. 그에 합당한 시편들을 보자.
그러나 다 경험한 것 같은 비밀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너무 많이 보아온 것 같은 눈빛으로
이미 알아보았다는 듯 꼬리를 흔들고 있는 눈빛으로
어쩌면 내 것이었는지도 모르는 눈빛으로
그놈은 나를 재미있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주친 순간, 그놈의 눈과 내 눈은 세차게 붙어버렸다.
멍하니 선채 교접한 눈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개 안에서 나오지 못하는 개와
내 안에서 나오지 못하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알아보았다는 것인지 꼬리 치거나 웃으며
막무가내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개 안에 있는 개」부분
화자의 반성이 돋보이는 시 「개안에 있는 개」는
개도 사람도 아닌 것이
안락의자 위해 한껏 늘어진 채
돋보기 같은 눈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늙은 개1」부분
「늙은 개1」로 전이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보이다가,
저 무진장한 허공이 다 시간인데
〔……〕
개는 고집스럽게 개줄의 반경 안에만 갇혀있다
끝없이 퍼져 있는 허공에다
더듬이를 들이밀고
작은 소리 희미한 냄새까지 다 잡아채지만
천지간에 가득 찬 시간도
개가죽 속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개줄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
그 놈은 이제 뭔가 눈치를 챈 것 같다
주인이 올 때마다 맹렬하게 흔들어대던 꼬리 속에도
깊고 컴컴한 굴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시력이 있는 동그란 울음 두 알로
주인이 부르는 소리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늙은 개2」부분
「늙은 개2」에 와서는 개의 행위와 자세를 통해 놀랍게도 무자아가(postmodernism영역) 자아에게(modernism영역) 역 포섭되는 반전을 보여준다. “천지간에 가득 찬 시간도/개가죽 속으로 들어오기만 하면/개줄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는 발설이 그것이다. 이처럼 김기택은 개의 견성(犬性)을 통해 자아와 무자아의 경계를 통합시키고자 하는 견성(見性)을 보여준다. 이런 인식은 주종관계마저 무시해버리는 “시력이 있는 동그란 울음 두 알”을 통해 물질적 존재는 모두 고유의 존재성이 없다는 색즉시공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시인의 이런 시적 견성(堅城)은 첫 시집 『태아의 잠』에 나오는 식육으로 키워지는 고막 없는「개」를 통해 이미 예견된 일이다. “생로병사를 넘어 어디에선가/먹을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개의 눈 속에서” 이미 예견돼 왔던 것이다. 이런 개의 견성(犬性)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견성(見性)에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개」 연작 시편들의 우월적 성취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탈피하려는 시인의 초월적 의지에 의해 진화돼 온 것일까? 확답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내면에 정제된 상태로 고여 있는 어떤 정서들이 시인의 만만찮은 공력에 의해 의식의 표면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갈라진다 갈라진다』의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거품」이라는 시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통성기도로 구원을 간구하는 신앙자의 방언 같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방울’이라는 단어, 그것도 맞춤법을 지켰다 무시했다하면서 자유자재로 솟구쳐 터지는 방울들의 이미지에서 초극의 의지가 읽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김기택은 “방울”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기포 방울이 솟구치는 이미지는 그리면서도 그 방울을 물방울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방울이라고 기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울이라는 사전적 의미에는 “작고 둥글게 맺힌 액체 덩어리”라는 뜻도 있지만, “얇은 쇠붙이를 속이 비도록 동그랗게 만들어 그 속에 단단한 물건을 넣어서 흔들면 소리가 나는 물건”이란 뜻도 있다. 종교에서는 이런 방울을 제의의 도구로 쓴다. 즉 “방울”에는 종교적 주술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거품」은 수없이 겹쳐지는 기포들의 즉물적 이미지만을 사실적으로 보여줄 뿐이지만, 수압을 이겨내고 수면으로 솟구치는 물방울에서 구도적(求道적的)인 모습이 연상된다. 따라서 예술이 삶의 형식을 보다 높은 단계로 견인한다고 가정할 때 특유의 감각적 묘사를 통해 삶을 구원하고자 하는 시인의 인식은 견고히 하면서도 주체의 행위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 이런 시적 방식은, 그것이 삶이든 예술이든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탈구조주의적인 방식에 부합된다. 이후로 전개될 과정을 지켜봐야 알겠지만 그동안 김기택이 해온 시적 작업의 성과와 연륜으로 봤을 때, 이번 김기택의 『갈라진다 갈라진다』는 김기택 시의 예술적 독창성이 정점에 이른 시집 중 하나로 평가될 만하다. 성찰적 자세에서 파생된 이런 김기택의 예술적 성취는 매우 고무적인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삶의 예속성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라면 감각이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행위로 충족되기 위한 조건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각이 시를, 또는 예술을 충족시키는 요소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삶을 구원하는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실재적 삶과 예술 간의 괴리를 메우는 어떤 실천성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생하게 죽어있는 존재들을 ‘믿는 자의 행복’
진은영의 세 번째 시집인『훔쳐가는 노래』는 문단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비평가들로부터 현실 참여에 대한 정치성과 문학의 결합을 독창적으로 보여준 시집으로 평가 받았다. 한편 시인은 “『훔쳐가는 노래』는 세상과 결합하는 방법으로 예술만한 게 없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시기에 쓴 것들”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현실 참여의 정치성과 문학의 결합에 대한 논의를 계속 덧붙이는 것은 또 하나의 불필요한 요설(饒舌)에 지나지 않게 될 뿐이다. 따라서 진은영의 이런 시적 성취에 대한 논의는 그 동안의 비평가들의 비평으로써 갈음하고, 철학적 개념을 탑재시켜 독자들을 긴장시키는 진은영식 시적 발화가 예술과 결합될 때 시적담론의 전경이 어떻게 예술적 경지를 획득하게 되는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인간의 열등의식에서부터 생산되고 소비 된다는 생각을 필자는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인들에게 있어 세계는 더할 수 없이 비참한 곳이고, 시에게 있어 패배주의는 익숙한 장르며, 시인들은 패배주의에 빠진 회의론자들이다. 그러나 승리에의 도취는 사고의 경직을 가져오지만 패배가 가져오는 좌절, 슬픔, 분노, 공황 같은 상처들은 매우 여리고 무른 것이어서 패배주의는 숙명적으로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패배주의에 내재돼 있는 회의 혹은 의혹은, 부정(否定)을 확신하는 불구적 감성이기는 해도 부드러워서, 어떤 때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의식을 해체시켜 무의식의 세계로 편입시킨다. 그러니까 패배는 강직되려고 해도 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이다. 한편 부드러운 존재들의 형상은 내부가 완전하게 밀폐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그것들에는 다른 어떤 존재들이나 현상이 스며들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다. 따라서 꽉 차있지 않고 어딘가 비어있는 공간적 구조로 인해 패배주의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게 패배는 결국 또 다른 패배를 양산하고 순환하면서 패배주의를 더욱 견고히 구축해간다. 이렇게 구축되는 패배주의의 세계는 패배와 패배가 서로 결합하는 알고리즘으로 해서 그 공간구조가 벌집처럼 짜여 지며, 그 패배의 구멍 하나하나마다에서 시는 깨어난다. 따라서 각각의 시편들이 독립된 의미에서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여질 때, 그것은 하나의 우주를 형상화시킨 모습으로 우리의 눈앞에 현현하게 된다. 우주는 허공에 떠있으나 추락하지 않는 존재다. 그러므로 각각의 시는 또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미완의 우주와 같다. 이로써 시인들이 시를 쓰는 행위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도전이 되며, 세계는 패배주의를 극복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시인들은 계속 팽창하는 우주를 수축시켜 언어 속에 편입시키려는 무모한 자들이다. 하지만 시인은 또 그런 패배를 직시하고 수용함으로써 존재하거나(진실) 존재하지 않는(거짓) 모든 것들에 대해 시적 발화를 가능케 한다. 그럼으로써 패배는 공기처럼 부드러워져서 어떤 장애물과 마주쳐도 마찰 없이 세계, 또는 우주 속으로 확장한다. 이런 패배주의의 구조 때문에 당연히 성찰이나 깨침은 패배로부터 비롯된다. 문학이, 특히 시가 철학이나 다른 학문들과 다르게 예술성을 담보하게 되는 것은 자유롭게 변형하는 부드러움 때문이지만, 부드러움은 또 맹랑하게도 부드러움으로 채워진 공간을 유체 이탈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패배주의의 세계는 다시 비어져 결국 공(空)으로 남겨지게 된다. 이 부드러운 세계를 탐색하기 위해서 시인이 꼭 지식으로 무장할 필요는 없지만, 지성에 대한 입장은 견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식은 패배보다 승리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학문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불완전한 것이다. 지식은 이런 불완전한 지식의 속성에 도취에 승리의 환상 속에서 현실과 내통해가며 자기의 입장이나 이념을 정립하지만, 지성은 패배의 체험을 통해 현상이나 실체를 성찰하고 깨침을 얻고자하며 그 성찰이나 깨침이 시의 생명을 지속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들이 시적 대상에 육화될 수 있을 때는 패배를 인정했을 때만이 가능해진다. 이런 인식하에 진은영의 『훔쳐가는 노래』를 살피다보면 ‘부드러운’ 이란 단어가 시집 전체를 통해 스무 번 넘게 등장한다. 정확하게는 쉰 편의 시편에 스물네 번 등장한다. 그 부드러움은 “부드러운 점자”, “부드러운 날개”, “부드러운 손” 등 형체가 있는 사물들뿐만이 아니라 “부드러운 하나님”, “부드러운 인내심”, “부드럽게 흘러가는 환멸”, “부드럽게 덮어 줄 유머”, “부드러운 세월”, “부드럽고 위태로운 장소”와 같은 관념적 언표로도 사용되며 “박하 향의 부드러운 망치” 같이 이질적 이미지를 조합시킨 감각적 의미로까지 확장된다. 이러한 이미지들도 매우 생소하지만 그 이미지를 수식하는 감각적 상징어들이 보여주는 의미들 또한 낯설고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훔쳐가는 노래』는 부드러운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이것은 진은영의 시적담론 역시 패배주의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진은영식 패배주의에는 보호색이 덧씌워져있다. 그 보호색은 주로 보랏빛 계통의 자주색이거나 푸른색 계통의 녹색이다.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이런 색깔들을 시인 개인이 선호하는 색깔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진은영에게 있어 색깔은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훔쳐가는 노래』이전부터 진은영이 고수해온 시적 발화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 진은영의 패배주의가 식물성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식물성은 방어기제다. 즉 방어기제는 자연스럽게 부드러움에 맞닿는다. 다시 말하면 진은영의 시에서 패배주의는 어떤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또한 이것은 진은영의 감각에 내재된 정서가 식물성임을 반증한다. 대개의 경우 식물들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파리가 녹색계통이거나 적색계통으로 변한다. 따라서 진은영에게 있어 자주 빛과 녹색은 패배주의에 노출된 자의식을 방어하기 위한 보호색이지만, 시인은 녹색과 적색을 개념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적녹색맹자처럼 동시에 인식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색 자체가 색깔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깔의 본질은 하나의 빛일 뿐이다. 색깔은 가시광선 중 어느 부분이 반사되느냐로 결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빛의 잔존물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우리의 무의식은 의식화 된다. 이런 의식은 가령 진은영식 패배주의를 거치면 이런 식으로 표출된다. 진은영의 시에 등장하는 단어 자체가 모두 상징이 되지는 않지만, 시인이 선택한 단어는 상징이 되는 것과 같다. 이런 시적 발상이 가능한 것은 진은영이 철학적 사유에 숙달됐기 때문일까? 하여튼 이런 방식은 진은영의 시가 가지고 있는 특질이며 장점이다. 진은영은 이런 식으로 언어적 감각에 보호색을 입힌다. 그 보호색은 주로 자줏빛이거나 녹색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은형에게 있어 어떤 단어들은 점술사들의 점을 치는 도구와 같은 것이며, 진은형이 언어적 감각에 보호색을 입히면 그 단어들은 시적 주술이 돼 예언적 의미를 내포되게 된다. 진은영의 시에서 이런 예지력을 감지하게 되는 것은 시편들에 상징적 수사가 넘쳐나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 상징적 수사들에 내포된 이미지나 의미가 단편적이지 않고 복합적으로 중첩돼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것은 진은영만의 독창성이기도 하지만 또한 진은영의 시가 보다 높은 단계의 예술로써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동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진은영은 부드러운 방어기제 사이사이에 “이빨” 같은 공격성을 상징하는 단어들을 배치해 둔다. 이것은 시적 긴장감을 잃지 않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패배주의에 대한 회의 때문이기도 하다. 시집에 나오는 「방법적 회의」를 보자.
너는 못 믿을 테지만,
동상이몽은 아름답다
너는 전나무의 보랏빛 꼭대기를, 나는 교회의 하얀 첨탑을 사랑한다
다정히 누운 댐 위로 물이 차기 시작하면 우리는 함께 잠길 거다
이 삶은 어리석게도 금잔화를 망치로 내리친다
너는 못 믿을 테지만
별이 우리 입속으로 달콤하고 어둡게 떨어진다
죽은 쥐와 고양이의 부패한 몸에서 흘러나온 녹색웅덩이
취객이 남긴 슬픈 웅덩이에 우리가 누웠을 적에
너는 못 믿을 테지만
딱총나무 열매가 너의 눈을 저격한다
만일 가을까지 살아있다면
들장미들아 너희들의 가시를 밤의 부드러운 목구멍에 꽂아 넣으렴
우리는 별과 죽음을 교환할 것이다
어느 그림 속
붓꽃 가득 핀 꽃밭에서 갇힌 사내가
부서진 배의 노처럼
두 팔을 휘젓는다
우리는 그림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그가 될 것이다
―「방법적 회의」전문
‘방법적 회의’는 데카르트의 고유한 철학적 개념이다. “이런 데카르트의 철학적 방법론은 대상에 대하여 사유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되는 회의, 즉 의심하는 방법을 철학적 사유의 기제로 사용하여 잠정적이지만 체계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함으로써 확실성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사용하여 사유행위 속에 자아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지식을 얻었으며 이 지식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의심할 수 없는 명제로 표현했다.” 시의 제목 때문에 철학적 개념을 인용해 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진은영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철학적 사유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냥 위에 서술된 개념만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방법적 회의」를
시인은 회의론자들이지만 그러나 진은영은 「방법적 회의」에서 그 회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회의론이 아니고 ‘방법적 회의’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서, 그 ‘방법적 회의’를 회의 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회의론은 불가지론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그것으로 끝이지만, 방법적 회의는 확실성을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 확실성에 회의적으로 부정한 후에 아무리 회의적으로 부정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확실성의 기반을 삼는” 방법론인 것이다. 따라서 진은영의 시가 깨어나는 시점은 ‘방법적 회의’를 회의하는 패배주의가 부활하는 지점이 된다. 이처럼 패배주의로부터 비롯된 시는 자의식의 세계에서 불가촉천민의 지위를 부여받지만, 시인이 패배주의에 올곧게 충실할 때 시는 예언이 된다. 시인은 그 예언(노래)을 훔쳐가는 자들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꿈은, 우리가 꿈 자체를 인식하는 그 즉시 현실세계로 편입돼 패배를 맛본다. 따라서 패배는 필연적으로 동상이몽을 배태한다. 때문에 패배주의는 진화의 한 방식이 되는 것이고, 패배주의 예술은 진화론의 한 축을 담당한다. 하여 패배주의는 무한히 아름답다. 화자가 들머리부터 “너는 못 믿을 테지만/동상이몽은 아름답다”고 발설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방법적 회의」를 통해 진은영은 논리적 근거를 예술로 견인하는 새로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적 기호에 숨겨져 있는 기의는 철저히 은폐함으로써 독자들이 시적 진실성보다 시인의 인식과 낯선 감각에만 매료되게 하는 오류를 범하게 만들기도 한다. 진은영의 이런 지적놀이는 혹시 의도적인 것일까? 다시 말하면 진은영의 예술성은 존재(진실)와 비존재(거짓)의 경계를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위치를 벗어나지는 않지만 나름 존재 쪽에 더 비중을 둠으로써 예술의 구원성이 패배주의에서 발원한다는 것을 은폐시키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인의 인식을 『훔쳐가는 노래』에 나오는 시「인식론」의 구절을 그대로 패러디해서 말해보자면 이렇다. “대체 뭘 바라는 거죠? 몰라요/이 시를 몰라요 너를 몰라요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