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절망의 나날
귀를 찢는 듯한 디스코곡이 실내를 꽉 채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담배 연기에 젖은 실내 공기가 고영혜의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 다섯 병이 그들의 지금 상태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 신나게 디스코나 한판 더 추어요."
고영혜가 담배만 피우고 있는 오민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집에 들어가 봐야 하잖아?"
민수는 영 생각이 없었다.
그의 평소 실력으로 보아 맥주 다섯 병을 혼자 다 마셨더라도 몸 가누기 어려운
상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따라 모든 게 시들했다.
마지못해 영혜와 몇번 무대에 올라가 허리를 흔들기는 했으나 그곳에 더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요. 우리 밖에 나가 걸으며 얘기 좀 해요."
영혜가 잡았던 민수의 손을 그대로 끌고 나왔다.
"얼마예요?"
카운터 앞에서 영혜가 민수를 뒤로 제끼며 말했다.
"이러지 마. 이거,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니까."
민수는 정말 화가 난 듯 영혜를 거칠게 잡아당겨 문 쪽으로 밀고는 계산을 치렀다.
두 사람은 네온도 없는 공원 담 옆으로 걸었다. 한동안 서로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희주 생각하는 거야?"
한참 동안 말없이 걷던 영혜가 돌연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지금 와서 그런 걸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만."
"뭔데? 따질 건 따져야죠."
"희주를 고사장에게 소개한 장본인이 영혜였잖아?"
"아녜요."
"그럼?"
"희주 걔는 아닌 척하면서 실은 계획적으로 큰오빠에게 접근했던 거예요.
그 방향으로 나가기로 한 것 같았어요.
돌멩이들고 뛰어다니며 전경들하고 실랭이 쳐 보았자 노동자 주인 되는 세상은 애당초
글렀다고 본 거죠. 그래서 자기가 공장 주인 되어 공돌이 해방시킬 생각한 거지."
"그럼 희주 쪽에서 먼저 고사장에게 접근했단 말인가?"
"꼬리를 친 건 아니예요. 우연한 기회가 왔던 거죠."
"우연한 기회?"
"신라대학 앞에서 시위하다가 내가 머리를 다쳤을때 그희주가 나를 병원까지 데리구 갔어요."
"올케를 그렇게 늘 부른 거야?"
"올케 이전에 내 친구였으니까. 걔가 우리집으로 연락을 했는데 그때 큰오빠가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아버지나 다른 식구들은 내가 데모하다 다쳤으니까 죽게 내버려 두라고 화를 벌컥냈대요.
거기서 희주와 오빠가 인사를 나눈거죠 뭐.
그 후로 우리 오빠가 첫눈에 반해서 희주를 쫓아 다녔죠. 바람둥이 재벌 2세의 장난인 줄 았았는데."
"그 얘기를 왜 그때 나한테 숨겼지?"
민수가 영혜의 팔을 잡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화난 얼굴 같았다.
"흥! 그런 신나는 사건을 내가 왜 형한테 한단 말이에요?
오히려 설희주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라구?"
"정말 한심한 여자로군. 귀띔도 해 줄 수 없있어?"
"그런 소리 말아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형이 언제 나한테 고운 눈길 한번 보내 준 일 있어?
언제나 나를 재벌의 앞잡이로만 보았지. 그래요, 우리 아버지가 재벌이지
만 내가 그렇게 행동한 일 있었어? 난 언제나 희주나 형편이었어."
"거기 대해서 난 견해가 달라. 영혜가 그때 한 일은 진심에서 우러난 절실한 일이 아니었어.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는 절규가 아니었어. 피흘리며 고문당하다 죽어간 동료들의
참뜻에 동조하는 게 아니었어. 재벌의 딸이니까 저렇게 한다는 비아냥이 듣기 싫어
운동권을 돕는 척했던 거야."
민수는 말이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혜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헝이 뭐 오빠와 설희주 관계 귀띔해 주도록 자리 한번 만든일 있었어요?"
영혜는 이야기의 촛점을 계속 딴 곳에 두고 있었다.
"그 당시는 구속된 후배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
"솔직이 말해 설희주는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두 가지만 빼고는."
"두 가지가 뭐야?"
민수는 가로등 밑에 돌벤치를 발견하고 영혜를 그곳에 앉히며 말했다.
"형, 우리 한잔 더 할까?"
영혜가 갑자기 앞에 있는 카페 간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가 좋아. 별도 잘 보이고."
정말 하늘에는 유난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밝은 가로등이 수은 불빛을 기를 쓰고 쏘아댔지만 멀리서 오는 별빛을 이길 수 없었다.
"난 설희주가 오빠에게 넘어가 주길 바랐지만 그럴 여자가 아닐 것이란 걸 믿었어."
"근데 아까 말한 두 가지 빼놓은 건 뭐야?"
민수가 이야기의 촛점을 되돌렸다.
"천한 집에 태어나 어쩔 수 없이 몸에 밴 매너, 비굴해 보이는 듯하고 자신 없어 보이는 태도.
둘째는 저 혼자 세상을 다 건질 듯이 운동권 리더가 된 것."
"영혜처럼 상류 사회의 냄새를 풍기는 것은 품위가 아니고 오만이야.
가진 자의 어쩔 수 없는 자만심.
그러나 설희주는가장 민중다운, 이 나라 보통 집안의 딸다운 매너를 가진 학생이었어.
그걸 지금 와서 나무라진 말아요."
민수는 멀리 별만 바라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어쨌든 희주는 큰오빠 같은 돈 많고 바람 많은 멍텅구리 한테 무너질 여자는 아니란
생각을 했어.
그때 희주가 오빠를 차지하려는 음흉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결국 설희주는 우리 집으로 시집을 오고 말았지. 난 처음엔 속으로 오빠 보고 설희주는
그런 애가 아니니까 냉수 먹고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희주와 오빠 일이 잘 되어서 걔가 민수씨 곁을 떠나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어.
결국 그렇게 되자 처음엔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왔는지몰라.
적어도 민수씨의 나에 대한 감정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말예요."
민수는 아직도 별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위인 설희주는 우리들의 선배이면서 친구 였어요.
우리 모두가 존경하고 따르는 무사였지. 나의 속셈은 좀 달랐지만 말야.
설희주의 변절은 우리에게 커다란 절망을 안겨 주었어.
모두가 너무 큰 충격에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요.
난 기쁜 면도 있었지만 한켠에선 분노 같은 것이 자꾸 고개를 쳐들어 혼났어요.
어쩜 난 민수씨보다 걔를 더 사랑했는지 몰라요. 민수씨보다 인간적 실망이 더 컸는지 몰라요.
개인적으로는 기쁘고, 뭐랄까 공적으로는 슬프고."
"난 고봉식 사장을 더 이해할 수 없어. 왜 자기 집안에 걸맞지 않는 그런 여자를 아내로
택했을까? 일시적 노리개 감이라면 오히려 그다운 일이야.
그런데 재벌은 장차관집이나 재벌끼리 혼인하는 것 아니야? 소위 상류 사회끼리 말이야."
"큰오빠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그렇게 몸이 달아 쫓아다녔으면 적어도."
"처음부터 두 사람은 물과 기름이었지요. 잘못된 출발 아니에요?
어쩌면 두 사람은 그것을 알고 결혼했는지도 몰라요. 설희주는 오빠의 재산과 위치를 이용했고,
오빠는 설 희주의 미모와 우리 집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충격에 반한 거겠지요."
"신혼 한 시절은 사이가 좋았다고 그러지 않았어?"
민수는 여전히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영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한 시절이 아니고 한 순간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육체를 탐험하는 한 순간 말이에요."
"더러운 상상은 하지 맙시다."
"불행한 결혼의 전형이라고 보아야지요."
"오빠가 설희주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뭔가? 보잘
것없는 집안 출신에, 상류 사회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 그런 것인가?"
오민수가 돌벤치에 다시 앉으면서 말했다.
"홍! 오빠가 그런 형이상학적 문제로 올케를 싫어한 줄 아세요? 그런 게 아녜요.
오빠는 설희주의 치장부터 우선 싫었던 겁니다.
입술에 루즈를 바르지 않는 것부터 촌티나는 옷차림까지."
영혜는 설희주와 고봉식의 사이가 금가기 시작한 부분을 극히 사소한 것에 두고 있었다.
설희주는 모든 의식 있는 여학생들이 그랬듯이 지극히 수수한 매너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화려한 재벌집 맏며느리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맞지 않았다.
늘 고봉식으로부터 핀잔을 받았다.
"뭐야, 여자가 그게. 우리집에 초상이라도 났어! 생머리를 풀어 너울거리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푸르죽죽하고, 옷은 그게 꼭 한강 다리 밑 구걸꾼 여편네 모습이군.
흥! 배운 여자는 그렇게 차리는 거야? 머리에만 고상한 생각 들어 있으면다야?"
늘 그랬듯이 술 한잔 들고 들어오는 고봉식은 아내 설희주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희주는 화장을 싫어했다 입술을 빨갛게 바르고, 푸르죽죽한 아이새도우, 그린 눈썹,
그리고 요란하게 지지고 볶은 머리, 손가락 사이에는 수천만원짜리 다이어 반지, 화사한
홈웨어, 그런 것들이 딱 질색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재벌 집에 시집와 동료를 배신했다는 자책감때문에 늘 괴로워하는 그녀가,
외모로도 그렇게 타락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난감처럼 예쁘게 치장하고 애교를 떨면서 남편을 맞이하고,
침대 위에서는 날렵한 창녀가 돼 주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고봉식에게 그녀의 모습은
지극히 못마땅했다.
"설희주, 너 버릇 고치지 못한다 이거지? 생과부나 된 것처럼 엄숙하고 거지 같은
그 모습 끝까지 고집하겠다 이거지? 좋아. 오늘 밤도 침실에 들어올 것 없어.
그런 꼬락서니로 명왕성 그룹 황태자 수청들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같은 침실을 쓰는 날이 드물었다. 어쩌다가 인사
불성이 되도록 마신 날 옷이라도 벗져줄 양이면 느닷없이 희주를 때려눕히고 짐승처럼
제 욕심을 채우는 경우가 있었다.
희주의 감정은 아예 짓밟아 버리고 아랫도리 옷만 끌어내린 채, 사랑의 말 한마디 없이,
얼굴 한번 쳐다 봐주지 않고 황급하게 제 욕심만 채우고는 옆으로 나 뒹굴어 져 코를 곯았다.
그럴 때 학대받은 하체를 오므릴 생각도 않고 내버려둔 채, 희주는 남 모르는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결혼 생활인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런 꼴로 버림받은 짐승이 되어 허송
세월만 헤야 하는 것인가?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함께 눈물 흘리며 함성을 지르던 동료들이
이 모양을 보면 무엇이라고 한까? 설희주는 참으로 지옥 같은 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무슨 파티가 그렇게 많은지 파티에 동부인해서 갈 때마다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하잘 것 없는 차림새 때문이라고 희주는 생각했다.
그러나 고봉식은 그것이 아주 중요한 사업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옷이야 아무려면 어때요. 정신이 문제 아녜요? 이 차림 이 어때요.
우리 민족이 가장 줄겨 입던 흰 저고리, 그리고 실용적인 검은 치마. 화장올 해야한다구요?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입술에 색칠은 하지 않았어요.
제가 화장 안한 것 같아요? 연지 곤지 대신 크림 바르고 분단장했으면 됐지 않아요?"
"아이구, 나 못 살아. 어떻게 저런 촌뜨기를 내가 여편네라고 얻어 가지고 이 고생인지.
빨리 그 피양 여자 동무 같은 옷 벗어 던지고 양장 하지 못해? 1천5백만원짜리
밍크 코트는 공연히 사준 줄 알아? 여편네가 반사업가 돼야 사장 사모님 노릇 한다는
소리 못 들었어!" 고봉식 사장이 펄펄 뛰었다.
"밍크 코트 없앴어요."
"뭐라고? 그거 아버님이 사준 혼순데 맘대로 없앴어?"
"팔았어요."
"뭐야?"
고봉식은 어이없어 하며 발로 거실을 굴렀다.
"돈 몇푼이 없어 배를 곯아 가며 야간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내 후배들이 하는 야학에 학용품과 간식 비용으로 그 돈 썼어요.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에요? 내가 그 밍크 오바 입고 다니면 이 나라가 부자가 돼요?
가난한 노동자들이 따뜻해져요?"
"아이구, 두야."
고봉식이 통탄을 하며 머리를 싸맨 것이 한두 번이 아니 었다.
설희주도 꼭 그렇게 어긋지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고봉식의 태도가 너무 미워 마구
쏘아불였다.
처음 시집 왔을 때는 그런 대로 사람 대접을 받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설희주는
이 집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나중에는 용돈 한푼 챙겨 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재벌집 맏며느리가 친구들과 만나도 점심 한끼 낼 돈이 없었다.
그러나 돈 쓰지 않고 사는 버릇이 몸에 밴 그녀는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시집 올 때 받은 반지며 온가지들은 밍크 사건이 있은 후 한점도 건드리지 않았다.
치사해서 그것 팔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을 단단히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남편인 고봉식이 설희주에게 빨리 분단장에 파티복 입고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외국 바이어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했는데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 대신 양경숙이하고 가면 안 될까요?"
설희주는 그런 자리가 제일 싫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한 말이었다.
남편이 양경숙과 죽이 맞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물적인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희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희주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희주는 아내로서의 위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고봉식이 그런 식으로 나돌면서 자기를 침실에서 괴롭히지 않는것이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경숙이는 비서야."
"그럼 전 뭐예요?"
"이런 쯧쯧."
"저보다 경숙이가 아내 역할 더 잘하잖아요?"
"이 바보야, 그 바이어는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려 경숙이가 마누라 아닌 것을 다 알고 있단 말야."
"또 입술 연지 발라야 되나요?"
"바르든 지랄하든 맘대로 하고 다섯시까지 여기 나와. 박기사 지금 집으로 갔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경숙이 명왕성 자동차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넓은 공장 마당을 거치고 작업장을 돌아 언덕 위로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