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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조문국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
공룡의 거대 서식지?
오층석탑 등등
<의성탑리오층석탑>
국보77호로서 화강암으로 조성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부분적으로
전탑의 수법을 모방한 목조건물의 양식도 보여준다.
경주분황사 모전석탑 다음으로 가장오래된 석탁입니다.
<금성면 제오리의 공룡 발자국 화석>
<금성산>
<오동산>
소풍을 자주 갔던 곳입니다.
<당나무-느티나무>
<마늘밭>
의성마늘 전국적으로 유명하지요.
옛날에는 안평면, 사곡면이 유명했는데, 지금은 전지역이 마늘재배를있습니다.
살구꽃 핀 마을은...
걱정이 됩니다. 꽃이피고 꽃술이 얼어 결실을 기대하기엔 절망이랍니다. 농심의 걱정이 최고조에...
<의성 금성산 고분군 안내도>
대리리, 학미리, 탑리에 약 200여기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습니다. 어릴적에 들은바로는 그 때 많은 도굴꾼들이 파헤쳤다고 하네요.
먼 훗날 이렇게 복원되어 조문국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어 그래도 다행입니다.
폐교된 조문초등학교에 조문국박물관이 설립되어 운영중이나 사료가 부족하답니다.
행여나 가정에 보관중인 귀한 자료가 있으시면...
<제2호 고분>
지금 한창 발굴중인데, 접근이 곤란하여 되돌아 왔습니다. 귀한자료는 도굴꾼에 의해 사라지고, 몇 점의 귀한 자료가 출토될지 기대해 봅니다.
<경덕왕릉>
<그 때 것은 아니고, 복원 설치>
옛날 삼한시대 조문국의 수도였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옛날 저의 마을 이름이 '죽리'라고 한답니다.'
지금은 '대리'이지만 여하튼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어 반갑습니다.
마을을 너무 과대 포장했나?
들리실 기회가 있으시면 한 번 들러 보십시오.
아련한 역사속으로의 여행을..^^*
들머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성읍 남쪽에서 영천방향 28번 국도를 따라 11km쯤 금성면소재지 끝지점에서 유턴하듯 금성면소재지와 마주하게 된다. 오른편 굴다리를 지나 68번 지방도를 따라 2.2km정도쯤 진입하면 산운교를 만난다. 도로 왼편 산운생태공원 방면 수정사로 향하는 새로 2차선으로 조성된 길을 따라 주차장까지 향한다. 2.1km거리이다. 수정사 뒷편에서 산행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수정사 주차장까지 차를 끌고 간다.
일부 비봉산을 들머리로 하여 오르는 경우도 있다. 이때에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채 수정사 방면으로 걷는다. 용문지 오른편 비치골 방면으로 들머리가 나선다. 그러나 통상 금성산을 들머리로 비봉산으로 돌아나서는 코스를 선택한다. 이때 들머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다음 가에 있는 금성산과 비봉산에 얽혀진 전설을 안내하는 간판 뒤쪽 소나무 사이 길이다. 개울 건너는 정자골 가는 길이다.
금성산 품안으로 접어들자 경사가 초반부터 급하다. 제법 숨이 가쁘다. 가파르게 치닫는 길 힘은 들어도, 짧은 거리여서 벌써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기도 하나 순간일 뿐이다. 어떤 이는 16분 만에 정상에 이르렀다하니 정말 매우 짧은 순간이다.
시골의 밭가에 있는 돌담 같은 산성 너머로 등산길은 이어진다. 이 석축은 천혜의 요새지를 활용하여 조문국 시대에 산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조한 둘레 2,730m, 높이 4.3m의 금성산성이다. 이 옛 성을 조문성, 금산석성, 금학산 고성이라고도 한다. 산정식[山頂式]과 포곡식[包谷式]을 갖춘 복합식 성이다. 이 산성은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에서 고려태자 무와 백제 태자들이 겨루는 1차전을 치룬 곳으로 비정하는 곳이자, 그 이전 신라 제9대 벌휴왕(184~196, 發暉尼師今) 2년(185년)에 군주 구도[仇道]와 구수혜[仇須兮]를 앞세운 신라군과 전투하던 곳이다. 그야말로 조문국이 최후를 맞이한 패전장[敗戰場]인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25권 경상도 의성현 고적조[古跡條]에 금성산 고성[金城山 古城]에 대해 "둘레 9,100척, 높이 13척으로 아주 높고 험하다. 안에는 네 곳의 샘물이 있다"하고 기록하고 있다. 성벽은 동쪽 건너의 산 능선까지 연결되어 있다. 급경사지는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흙과 돌로 쌓았고, 경사가 완만한 능선에는 자연돌로 쌓은 협축법, 경사가 거의 없는 기슭에는 편축법[片築法]으로 쌓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 제7 문무왕 하편에 신라 30대 문무왕 13년 계유년 9월 (서기 673년)에 시중 천광에 명하여 조문성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뤄보아 고려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또는 왜적과 대치할 목적으로 이후도 여러차례 수축[修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구한 세월 속에서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할 것이다. 성은 무너졌으나 주변의 돌들을 살펴 과거 형태나 규모를 가늠해 본다.
『삼국사기』기록을 통해서 볼 때, 신라에서 축조한 산성으로 추정되는 것이 약 100여개 정도이고, 실제 조사된 성곽은 약 160여 개소로 추산된다. 이 중 경상북도 지역에 있는 성곽과 신라의 서북진출로와의 관계에서 경주-영천-의성-안동-영주-죽령에 이르는 길은 초기 조문국으로 통하는 길을 죽령까지 연장시킨 것으로, 북진과 적군 침투를 방비하는데 있어 요충지에 위치한 중요한 시설인 것이다. 서영일,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산성을 따라 지그재그로 오르는 길, 450고지에는 관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편평하고 솔숲이 무성하여 쉬기에 좋은 이 곳의 산성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어 높다.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한다. 조문국 망루가 있던 곳으로 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곳이었던 만치 조망이 좋다. 건너편에는 머리를 풀어 헤친 여인 형상의 비봉산, 골짜기 안쪽에는 수정사 남쪽으로는 수정마을과 산운마을 그리고 강물같은 비닐하우스 군집들이 보인다. 병마훈련장에 도착하니, 과거 조문국이 최후를 맞아 성안에 갇혀 있을 동안 병마를 훈련시키던 500여평 평지는 숲에 덮이고 산정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경사져 있다. 평지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감이 오지 않는 분들은 절골로 들어서 왼편의 큰 바위를 만나게 되면 자세히 보라, 옛날에 "베틀바위"라 하던 바위인 모양인데, 그 아래 있는 땅은 비를 맞지 않아도 되므로 오랜 세월 주변의 흙과 돌들은 비와 바람에 씻겨 내려갔으나 바위 아래는 그대로 남아있어 세월이 주는 변화를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병마훈련장 오른편은 용문으로 향하는 길이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절벽이 사과상자를 옆으로 세워 놓은 모양으로 생긴 바위 가운데, 움푹 안으로 파져서 문처럼 생긴 바위가 '용문'이다. 용가매골을 두고 인근 주민들은 금성산에서 가장 절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용문 왼편으로 용이 승천했다하는 용가마가 있어 바위사이에서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용출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 없다. 다만 '용문'은 암벽을 즐기는 이들 사이 천장 부분에 큰 구멍이 나 있는 등 절경이라 '무지개 바위'라 하는데, 암벽타기 좋을 암장이다. 이곳에서 용문정으로 향하는 길은 외지길로 왔던 길로 되돌아서야 한다.
비탈길 솔숲과 암괴 사이 밧줄을 잡는 구간을 지나며 마사토 오르막길을 꾸준하게 오르자 앞이 훤하게 트이며, 헬기장이 나타난다. 금성산 정상이다. 비록 풍수를 바라보는 눈이 트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여기서는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는데,산정에 있는 500여평 평지로 이뤄진 산정에 있는 무덤을 쓰고 또 파 헤쳤다 하던 큰 웅덩이는 영남에 널리 알려진 풍수일화를 간직한 곳. 부근 최대의 명당터로 알려진 이 곳에 매장을 하게되면, 그 후손은 3년 이내 큰 부자가 되고 인근 마을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등 액운이 겹친다 하는 속발지지[速發之地]의 풍수설로 인한 것이다. 이런 연유[緣由]로 인한 것인지, 주변 일대에 가뭄이 들면 금성산 정상은 기우제를 지내는 하늘과의 통로가 되곤 하였다.
금성산은 벌판 한 가운데 우뚝하니 솟아난 관계로 가까이 있는 오토산을 비롯 칠곡의 유학산, 의성 최고봉 선암산 등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산들을 바라보기에 좋다. 금성산에서 출발하여 비봉산을 거쳐 나오는 가운데 골골마다 전답을 거느리고 있는 99개나 되는 소류지를 바라보게 된다.
타 지역에 소재한 명산들은 계곡과 함께 차가운 물과 바람이 있다. 그러나 금성산은 화기[火氣]가 센 산인 만큼 사시사철 넉넉한 물이 흐르는 계곡은 없다. 대신 지근거리에 월척방죽 얼음낚시터로 알려진 16만평 규모의 가음 양지저수지를 비롯하여 골골마다 소재한 소류지에서 음이온을 함유한 바람과 더불어 시원하다. 또한 소나무향 가득한 산이다.
과거 조문국의 도읍지였던 탑리리 일대를 바라보자면 남쪽 아래로 잠시 내려선다. 솟을바위 위 소돌방구라 하는 조문전망암 위에 서면 과거 조문국 도읍지 일대가 한 눈에 바라다 뵌다. 시원한 조망이 '일품'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낙조와 더불어 스러져간 조문국 옛터를 바라보기 좋을 너럭바위이다. 또한 야외로 나온 예술의 전당 '수수농원'이 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서 살짝 엿볼 수도 있다. 아래로는 탑리2리 우매마을로 향한다. 탑리 사람들이 아침 운동하는 코스이자, 수차 금성산에 들렀을 경우 달리 선택해 볼 코스이다.
탑리2리 '우매'마을 표지석을 바라보며 직진, 마을 가운데를 지나며 오른편 윗길로 들어선다. 체육공원과 우매농장을 지나 1.8km 정도 금성산으로 향하면 오른편으로 샘터가 나온다. 샘터까지는 승용차량의 진입이 가능하다. 이후로 수정골 갈림을 만난다. -수정골까지 향할 수는 없다. 다만, 금성산을 향해 읍소하듯 서있는 큰 바위 주변 운동시설을 설치해 둔 곳까지만 이를 수 있다.- 청학사 갈림을 지나며 정상에 이르는 길은 나사 선형과 같다. 조문전망암에 이르기 이전 화강암 암맥이 기존 암석에 관입하여 기존 암석이 화강암의 마그마 속에 굳어져 이루어진 포획암(捕獲巖, Xenolith)을 발견할 수 있다. 화산에 의하여 금성산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바위지대에는 병풍처럼 높고 긴 바위들이 일렬로 나열되어 있다.
산길은 정상표지석 뒷편으로 열린 소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부드러운 솔가리와 하는 쿠션 좋은 바닥에, 솔향기에 취해서 걷다보니 흔들바위 갈림길이다. 주 등산로 서편 아래로 15m쯤 내려서면 흔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경사진 비탈 위에는 3개의 바위가 엇박자로 포개어져 있다.
우뚝히 솟아있는 바위를 건들면 간들간들 하고 흔들린다. 그래서 통상 흔들바위라고 이르지만 건들바위 또는 간들바위라 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견디며 서 있는 3층의 석탑처럼 생긴 바위 너머로 배나무골과 금성면 일대가 바라 보인다.
그 아랫편은 풍화로 절개된 암편들이 그대로 흘러내려 너덜컹 지대를 이루고 있다. 흔들바위가 급경사인지라 오를 때 된비알 먼거리라 지레 겁먹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짧은 거리이다. 이어서 왼편으로는 기도원 갈림길, 오른편으로는 용문정 갈림길이 나선다.
안부에서 만나는 갈림길 왼편 내리받이는 기도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푸른 소나무가 우점하니 겨울철에도 그 푸른 느낌이 들지만, 왼편 학미리 기도원으로 향하는 길은 스프링처럼 구불구불하고 오전에는 그늘지고 잔설이 남아 겨울철에는 다소 미끄럽다.
내려서는 길 왼편으로는 조문국때 병사들이 식수로 사용했다는 용구무에 석간수가 흘러 내리고 있다. 그 아랫편으로 나무가 심겨지고 요즘 농사짓는 사람들이 없지만 옛 적에는 근방에서는 제법 농사가 잘 되던 곳이다. 또한 1698년(숙종 24년) 현령 이광조가 1698년(숙종 24년) 창건[創建] 불사이군의 충절, 사육신을 배향하던 학산서원[鶴山書院]이 있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5년(1709년) 기록을 살펴보자. "경상도 의성 금학산[金鶴山] 밑에 성삼문[成三問]이 살던 옛터가 있는데, 유생들이 사우를 창건하고서 박팽년[朴彭年] 등 5사람의 충신들도 아울러 향사하고, 또 이세화, 오두인은 일찍이 관찰사의 좌막[佐幕]을 지냈고, 박태보는 또한 어사로 왔던 일을 들어 곁에다가 따로 사당을 세웠었다. 이에 상소를 진달하여 사액[賜額]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그 상소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에서 복명하므로 시행하도록 윤허했다"고 나온다. 빙계서원과 더불어 또하나의 사액서원이었음과 성삼문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다소 새롭다.
용구무 오른편으로는 홀로 떨어져 뾰족하게 서있는 호부래비골 호부래비 바위와 조망에 좋은 바위, 6·25때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비를 피하였다는 바위 아래의 널찍한 공간이 있는 절벽 "대바칭덤"등을 만날 수 있다. 낭길에 담쟁이 덩굴과 두릅 등과 특이한 식생을 만나게 된다.
오른편 용문정으로 향하는 길은 운곡 이희발 선생이 전원생활을 즐기며, 학문을 닦던 용문정과 공의 하사[下賜] 도상[圖像]을 모신 유초각으로 향하는 길이다. 용문정 지나 주차장에 이르는 길에 잠시 하천으로 내려서야 한다.
금성산 최고봉이라 할 550봉을 지나 해발 445m 높이의 산중턱 삿갓봉에서 영니산 봉수대 유지를 만나게 된다. 주변으로 골기와를 포함 기와조각이 많이 산재하고 있어 봉루를 위한 봉졸들의 기거 또는 후망을 위한 봉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주도 신양리 봉수대와 같은 형태는 아녔을 것이고, 주변 돌무더기 규모로 주정산 봉수대같은 소규모 봉수대였을 것이리라.
이곳 봉수대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의성현 기록에서는 "영니산[盈尼山] 봉수는 현 남쪽 25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남쪽으로 의흥현 승목산 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하였다.
북쪽에는 동서 15m 길이의 축대를, 남쪽에는 둑을 쌓았다. 현재 1m 정도가 남아있는 이 봉수대가 처음 기록되기는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부터이다.
처음에는 현재 군위군 의흥면과 우보면 경계지역 번개산이라 불리는 승목산봉수대에서 봉화를 받아 단촌면 관덕리의 봉화산의 마산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1460년경 의성읍 팔성리 구봉산의 고성산봉수대로 전달하게 되었다. 여지도서(1760년)에 노선의 봉수가 전면 개폐되면서 영니산봉수대가 빠진 것으로 보아, 1605년 봉수제도 개편 때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봉수대 유지를 지나며 잘록이 안부 4거리 못동골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은 제오2리 못동골로 향하는 길이며, 오른편은 절골로 향하는 길이다. 못동골 내리받이 길에는 아카시아 군락으로 봄철 산행에 좋을 듯 싶다. 오른편은 절골로 향하는 길이다. 옛날 날머리 쯤에 수정사가 있었다고 '절골'이라 한다. 금성산을 달리 '영산[靈山]'이라고 하는 것은 화산으로 형성된 금성산이 기가 세고 충만하기에 도 닦는 초야의 갑사들과 기도인들이 많이 찾아들기에 그렇다. '세도나'같은 역할을 해주는 가 보다. 굿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들기에 '굿골'이라 이르기도 한다.
부드러운 댕기풀을 마주하며 오르는 길에 노적봉으로 향하는 지능선을 만나게 된다. 잠시 에울러 전설을 간직한 노적봉에 이르렀다 수정사 또는 주차장으로 향할 수 있다(가을철 입산금지). 말발굽같은 두 산 사이로 손톱처럼 끼여있는 노적봉 지능선을 흘려보내고 상봉으로 향한다. 내리받이를 지나 마주하는 산봉우리 하나를 왼쪽으로 트래버스하면 경사지 위에 부드러운 이끼군락지를 만나게 된다.
이후 금성산과 비봉산을 구획하는 비봉산갈림길을 만난다.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서면 내려서는 길은 비봉산으로 향하는 길로 건천이나 드문드문 물길을 마주하게 되고 지금과는 달리 활엽수로 이뤄져 지금까지 와는 달리 봄철이면 신록을 그리고 가을이면 바삭이는 낙엽을 대할 수 있다.
수정리에서 바라다 보면 각자 독립된 산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비봉산갈림길 좌우 금성산과 비봉산은 연계된 산이다. 종주 산행을 하지 않고 수정사로 하산한다면 양 산이 발산하는 매력을 함께 즐길 수 없으리라.
금성산은 무엇이든 품에 안을 것 같은 넉넉하고 부드러운 능선과 호젓한 송림사이 이뤄진 후덕한 길이라면, 비봉산은 수백길 단애를 이룬 절벽 위를 걷는 암릉 길로 솟대바위 등 내리꽂이는 수직의 절벽과 기암괴석들이 장관이다. 이름만큼 날렵한 9개의 올망졸망 연 이어진 봉우리 따라 춤추듯이 오르내리는 암릉미가 압권이며 조망이 좋다. 또한 아래쪽을 내려다 보면 아찔함과 현기증 그리고 산행에 따른 충만감이 전율처럼 다가오는 등 강인함을 느끼게 한다. 마주하고 있으나 그야말로 분위기는 상반된다.
비봉산으로 향하는 길에 오토산 갈림길을 마주한다. 오토산에서 아홉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구봉산, 비봉산 봉황이 놀던 오동산과 조문국 마지막 경덕왕[景德王] 왕자의 태를 묻던 태실감이 있던 곳으로 전해져오는 태봉산으로 나눠진다.
비봉산으로 오르는 길은 내려설 때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치받이 길, 부지런히 발품을 팔자 갑자기 하늘이 환히 열리면서 헬기장이 나타난다. 산발한 여인의 이마에 해당하는 비봉산 정상이다. 산정은 달리 특별할 것 없으나, 선암산 등 주변지역이 한 눈에 조망된다.
산정을 뒤로하고 올망졸망 묏부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윗길을 지나 큼직한 바윗돌이 있는 3봉 솟대바위를 만나게 된다. 3봉에서는 속이 다 후련하게 한 점 막힘도 없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더불어 "유쾌, 상쾌, 통쾌"한 조망을 즐길 수 있다.
고만고만한 길을 지나다 갑자기 뚝 떨어지는 15m쯤 되는 수직의 절벽을 만나게 된다. "여인의 턱"에 해당할 이 곳을 밧줄을 타고 하강해 보는 스릴을 제공해 준다. 낭떠러지 밧줄을 타고 내려서며 약간의 스릴을 느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안전을 고려 우회 등산로가 오른쪽으로 조성되어 있으므로 굳이 밧줄타고 내려설 필요는 없으나, 암릉 길을 벗어나기 이전 왼편 앞쪽에 있는 전망암에 올라 방금 내려온 암벽 맨 오른쪽 끝단의 남근석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절벽가 날등으로 깎아 세운 듯 천길의 낭떠러지 단애가 아찔하고, 벼랑에 뿌리박힌 수백년 인고의 세월을 느끼게 하는 소나무 아래 절묘하게 자리하고 있는 남근석이 신기하기 그지없다. 너무 많이 우회하여 그대로 스쳐 지나가 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길. 내림길에는 수정사 갈림길이 나선다.
요사채의 천 수백년된 싸리나무가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수정사, 숲 속에 새가 노래하고 나비가 춤추는 것을 보고 성지라 여겨 지었다는 수정사는, 깊은 골짜기 울창한 송림사이 수정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개울가에 지은 아담한 절이다.
절 이름처럼 법당 밑으로 새어나오는 수정과 같이 맑은 물이 석함[石函]으로 흘러들어 우물이 되었다. 그 물빛은 맑다기 보다는 보얀 유자색을 띠고 있고 물맛은 완전하게 감미를 느낀다. 최근 사찰아래 주차장에 수도가 있다. 지하 암반 아래로 여덟구비, 아홉 돌림하여 흘러내린 샘물인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다. 물맛이 좋아 차를 우리는데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수정사는 구봉산에서 전투를 치뤘던 의성의진과 1996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의성출신 조선말의 김하락 의병장이 경기도 이천에서 단발령에 반발 창의[倡義]한 이래 남하한 이천이병이 연합한 연합의 진이 천마봉[天馬峰] 등에서 비봉산 전투를 치를 당시에 본진을 설치하고 머물렀던 곳이다.
수정사 주변의 식생은 전반적인 모습과 다르다. 입구의 남쪽 경사지에는 암벽[岩壁]이 노출된 가운데 불량한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하상[下床]에 진달래, 싸리, 담쟁이 덩굴, 칡, 옻나무, 노간주 나무 등과 억새, 맑은 대쑥, 산거울 등이 분포하나 그 식생은 불량하다. 또한 계곡 입구에는 물오리나무도 혼생하며 절 주변에는 하상식생이 빈약한 굴참나무 숲이, 주변의 경사지에는 소나무, 굴참나무 혼효림[混淆林]이 형성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소나무가 우점하고 있는 금성산과 비봉산일대의 모습과는 다르다.
산 아래 들머리 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길은 포장되어 있다. 내려서는 길가에서는 전설의 "아들바위와 딸바위"를 만날 수 있다. 입구 사방댐을 넘으면 금성산 동향에 '투구바위'라 하는 또 하나의 암장이 있다.
갈림길을 지나며 암릉길 전망능선이다. 여인의 가슴에 해당될 날등위 오른편으로는 방금 지나온 금성산 능선이 보인다. 인생의 여정같은 지나온 발자취들을 돌아보게 된다. 왼쪽은 가음 일대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구릉과 그 사이사이 들어서 있는 소류지들이 바라 보인다. 오름과 내림길 주변으로 피어나고 쓰러지는 참꽃을 비롯한 여러 꽃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나 범발톱을 비롯한 이끼류와 고사리류 등. 특히 초파일을 전후하여서는 솔방울 조차 색다른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601봉과 552봉을 지나며 비봉산을 향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두꺼비 바위 위에 올라서 금성산을 바라보며 쉬다 이른 곳은 산불감시초소. 비봉산 마지막 봉우리이다. 제1전망대라 할 산불감시초소 왼편으로는 가음으로 내려서는 길이며, 통상 하산하는 길은 용문지로 향하는 길이다.
하산하는 길에는 경이로운 관심거리가 또 하나 있다. "호랑이굴"이라 하는 동굴로 박쥐가 숙면을 취하는 관계로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는 않는다. 금성산과 비봉산을 이어 걷노라면 봄철에는 초록빛 나무그늘 아래 참꽃과 연달래 등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만발하고, 여름이면 된비알 길 땀 흘리며 걷노라면 소나무향 싱그럽고, 가을이면 외관은 딱딱하다 할 것이나 실상 푹신푹신한 느낌이 드는 육산으로 마사토 길 위로 뿌려진 신갈나무와 갈참나무 낙엽을 밟고 지나는 길에 오를때 힘들었던 기억은 어느사이 저 만치 사라지고 만다.
비봉산 올망졸망 9개 봉우리 암릉 위를 따라 흘러내리는 것을 소인국 사람이 거인나라 거대한 여인의 머리 숲을 헤치고, 이마에서 콧등으로 그리고 턱에서 목아래로 밧줄 잡고 내려서고 있다는 것쯤으로 상상해 보라.
가음면 경의제로 내려서는 길은 용문지로 내려설 경우 급한 경사가 부담될 경우 선택가능한 코스이다. 마을 입구에서 느티나무와 말채나무, 회나무, 버드나무 등으로 구성된 노거수[老巨樹]들을 만나게 된다.
300여년 이상된 노거수들과 함께 입석이 있는 노거수 앞에서는 지금도 동제를 지내곤 한다. 용문지로 하산 할때 길에서 조금 벗어나면 호랑이굴을 만나게 된다. 입구는 매우 좁아서 속이 넓을까 싶다. 그러나 등불을 밝혀 한참 낮은 포복을 하여 들어가면 성인 50여명이 서 있을 수 있는 넓이의 동굴이다.
용문지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뜻에서 인위적으로 조성한 소류지다. - 산 위에서는 그 지형이 보인다 - 일명 "옥샘"이라고 하여 성기형 지세이다. 용문정이라는 제명[題名]에는 용이 솟구쳐 오를 만한 용소[龍沼]가 저수지로 변한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다.
1993년 6월 1일 천연기념물 제373호로 지정되었다. 1987년 의성군내 도로 확장공사 중에
발견된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약 1억1500만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단일
층리면에 노출된 316개의 발자국은 초식공룡인 발굽울트라룡(Ultrasauripus ungulatus),
발톱고성룡(Koseongosauripus onychion), 발목코끼리룡(Elephantosauripus metacarpus)과
육식공룡인 한국큼룡(Megalosauripus Koreanensis) 등 4종류의 공룡 25필의 것으로 확인
되었다.
이 일대 1,656㎡ 지역에서 대형 및 중·소형 초식공룡과 육식공룡의 발자국이 함께 발견되어
이곳이 대규모 공룡의 서식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발자국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발의
구조와 크기·보폭·보행방향을 알 수 있어, 공룡의 생태 및 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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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6 년전 에 초암 산악회에서 겨울 등반 한번했는것같네요 , 정상에가면 소나무숲길이 좋았든것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