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신앙의 증인들 (4) 몰리마르 신부와 평택 성당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시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신앙의 증거자”인 이분들 가운데에는 어쩌면 살아생전에 직접 뵌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원장 유흥식(라자로) 주교님의 바람대로 “특별히 이분들이 하늘에서 우리 교회와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승훈 베드로가 평택에 복음의 씨를 뿌리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 평택(平澤)이라는 지명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1791년 6월에 잠시 평택 현감으로 부임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가 처소에서 30여 리 떨어진 대추리(大秋里)를 찾아가 처음 복음을 전하였다는 구전(口傳)이 내려옵니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때 용산의 미군 부대를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지역 주민들이 오랫동안 반대 시위를 벌였던 바로 그 ‘대추리’입니다.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이승훈이 비록 전교를 위해 현감으로 온 것은 아닐지라도 평택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린 첫 사도였다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대추리 공소는 1888년 7월 왕림(旺林, 옛 갓등이)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이곳에 속해 있다가 양촌(陽村, 현 구합덕) 본당, 공세리(貢稅里) 본당, 안성(安城) 본당으로 관할이 계속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1925년 6월 왕림 본당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일제의 탄압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왕림 성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평택 지역 신자들을 위해 적봉리 가마골에 진위(振威) 본당을 설립하였습니다. 1905년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평택역이 생기고 1911년경부터 국도와 지방도가 개설되어 발전 가능성이 엿보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쓴 『허생전(許生傳)』에도 나오고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안성보다 철도 개통으로 사통팔달 지역이 된 평택이 인근의 농산물과 생필품 집산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점도 영향을 미쳤겠지요. 초대 주임으로는 왕림 본당 보좌로 있던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였습니다. 그러나 1927년 7월 마룡리(馬龍里, 현 용문)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진위 본당은 설립 2년 만에 목자 없는 공동체가 되어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몰리마르 신부가 평택 본당과 서정동 본당의 기초를 다지다
1897년 3월 22일 프랑스 님(Nîmes) 교구의 가르(Gard) 지방 보베르(Vauvert)에서 태어난 몰리마르(J. Molimard, 牟, 요셉) 신부는 1924년 6월 29일 사제 서품을 받고 9월 14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가 1920년 대신학교 시절에 바친 기도 가운데 “주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이 보내시는 어디라도 가렵니다. 당신과 더불어 일할 것이며 당신과 함께 죽으렵니다.”라는 구절로 보아 선교사의 꿈은 신학생 때부터 품었던 것 같습니다.
1925년 11월 12일 부산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한 그는 이듬해 5월 황해도 매화동(玫花洞) 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하였고, 그해 11월 30일부터는 경기도 수원 병점(餠店) 공소에서 우리말을 배우며 폐쇄된 진위 본당 지역 신자들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안성 본당 공베르(A. Gombert, 公安國) 신부의 도움을 받아 1928년 2월경 현재의 성당이 자리 잡은,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비전리(碑前里) 야산을 매입한 뒤 4월 14일 평택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습니다. 당시 신자수는 78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몰리마르 신부는 본당 부임 전, 병점에 머무르면서 중국인 기술자를 모집하여 30평 규모의 사제관과 5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였기에 11월 7일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보좌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1929년 4월 주님 부활 대축일에는 고향에 있는 프랑스 신자들이 보내준 ‘천상의 모후’ 대상본을 성당에 안치하였고, 매월 「성모 월보」를 발행하여 본당 소식과 교리 내용을 본당과 공소 신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또 서울의 라리보 주교가 설립하여 직접 관리해 오던 서정리(西井里) 공소가 지역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자 그는 이곳에 성당을 짓고 1934년 9월 29일 라리보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한편 몰리마르 신부는 1930년 11월에 충북 괴산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에게 간청하여 평택 본당에 남을 만큼 그는 이곳을 각별하게 사랑하였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지 12년 만인 1937년에 휴가를 얻어 고국 프랑스로 갔다가 귀국해서도 평택 본당 제3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였으니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평택으로 돌아온 몰리마르 신부는 서정리 공소에 더욱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곳에 서양식 벽돌로 사제관을 건축한 것도 본당 승격과 함께 이곳으로의 전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제관이 신축되자 몰리마르 신부는 1938년 10월 서정동 본당 초대 주임이 되었으나 곧이어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39년 9월 징집 명령을 받았습니다. 동료 선교사 5명과 함께 중국 톈진(天津)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소집령 해제를 받아 본당으로 곧바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 무렵이라 일제의 감시가 점점 더 심해져 사목 활동도 힘들고 경제적 어려움도 극복해야 했지만, 몰리마르 신부는 본당 정착에 더욱 노력하여 본당 공동체의 기초를 다지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1948년 5월 8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된 신설 교구가 대전 지목구를 맡아 충청남도 전역을 관할하게 됨에 따라 몰리마르 신부도 애정 깃든 서정동 본당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평택과 서정리 모두에 사제관과 성당을 신축하고 본당을 설립하여 이 두 지역 사회에 20여 년 가톨릭을 전파한 그였기에 아쉬움이 누구보다도 컸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여 금사리 성당을 지키다 끝내 순교하다
1948년 7월 30일 부여 금사리(金寺里) 본당 제9대 주임으로 부임한 몰리마르 신부는 이곳에서도 복음 전파와 본당 분리·설립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1950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한국전쟁이 6월 25일 주일 새벽 터졌습니다. 전쟁 발발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7월 20일 대전마저 함락되자 몰리마르 신부는 도앙골 공소로 잠시 피신했다가 신자들의 만류에도 성당으로 돌아와 한동안은 별일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인근의 민가에서 권총 한 자루가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공산군은 이를 빌미로 8월 어느 날 성당과 사제관을 수색하여 성물과 집기를 압수한 뒤 몰리마르 신부를 부여 내무서로 연행하였습니다. 내무서에서 약 한 달 동안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은 그는 대전으로 압송되어 이곳에서 또다시 지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9·28 서울 수복이 임박한 9월 16일 정치보위부로 사용되던 목동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으로 끌려가 23~26일경 파리외방전교회 동료 신부 5~6명과 700명이 넘는 민간인 수감자들과 함께 피살되었습니다. 유엔군이 빠르게 진격해 오자 공산군은 이들을 성당과 수도원에 빽빽하게 몰아넣고 증오와 격분에 차서 지근거리에서 총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몰리마르 신부의 시신은 공산군이 퇴각한 뒤인 9월 30일경에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2명의 금사리 본당 청년 신자들에 의해 찾을 수 있었습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겹겹이 쌓인 수백 구의 시체더미에서 몰리마르 신부의 시신만은 체포될 때의 수염을 기른 얼굴 모습과 수단을 입은 복장 그대로여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마에 총탄 한 발을 맞고 그대로 순교하였답니다.
1950년 11월 13일 거의 모든 금사리 본당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생제(P. Singer, 成載德) 신부의 주례로 슬픔 속에서 장례 미사가 치러졌고, 이듬해 1월 25일에는 그의 고향인 프랑스 님 교구의 주교좌성당에서 장엄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 후 1953년에 그의 유해는 목동 성당 경내에 조성된 프란치스코 수도원 묘역으로 이장되었고, 대흥동 본당 주임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는 1954년 9월 26일 수도원 경내에 순직비를 건립하였으며, 1960년 3월 24일에는 대전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습니다. 그리고 평택 본당에서는 초대 주임으로 본당을 개척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대전교구장의 허락을 받아 2003년 5월 10일 성당 경내로 유해를 이장하고 대리석 묘비를 세웠습니다. 2008년 11월 30일에는 본당 교육관을 ‘몰리마르관’으로 명명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고, 2016년에는 흉상 제막식, 자료집 발간 등 몰리마르 신부의 생애를 본받고 현양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 도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자료집 제2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18.
수원교회사연구소 역편, 『몰리마르 신부 자료집』, 수원교회사연구소, 2016.
「몰리마르 신부의 최후」, 『교회와 역사』 27호(1977년 12월), 한국교회사연구소.
『평택 성당 7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평택 성당, 1998.
『서정동 본당 75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서정동 성당, 2013.
[평신도, 2020년 겨울(계간 70호), 글 · 정리 김주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