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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3월 23일(제12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고린도후서 3:1-11
제목 :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
제가 어렸을 때는, 멀리 있는 사람들은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습니다. 급할 때는 전보를 쳤습니다. 분실되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등기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오늘날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음성으로, 영상으로, 문자로 소식을 주고받습니다.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아마도 편지 이야기를 하면 옛날 사람이라고 외면을 당할 것입니다.
편지라는 것은 반드시 수신자에게 전달되어야 그 목적과 기능이 완수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편지나 배달사고가 나서는 안 될 편지는 보통우편 대신에서 ‘등기우편’을 사용했었습니다.
오늘 은혜를 나누려는 말씀을 보면 수신자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할 어떤 편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것은 우체국과 집배원을 통하여서는 보내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편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던 옛날을 추억하며 이 편지 수신자가 누구이며, 이 편지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본문에는 편지라는 말이 2번 사용됩니다. ‘우리의 편지’ 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편지는 무엇이며 누가 그리스도의 편지일까요?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
본문 1-3절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에 쓴 것이라.”
1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추천서가 없는 거짓 선지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에 대한 변론입니다.
1절의 ‘자천’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자기 자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맥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천하는 것’이라고 의역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추천서’라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분이나 자격을 제 3자가 증명해 주기 위해서 추천서를 써 주는 일은 오늘날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에서도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지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진짜 사도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슨 추천서 따위를 너희에게 보내 주어야 하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시절에 고린도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에 난무했던 거짓 교사들이 자기네들의 신분을 위증하기 위해서 가짜 추천서들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신학교 졸업장을 위조해서 목사 안수를 받는 격이었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도 성경에 보면 다른 사람에게 추천서를 써 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로마서 16:1-2절에 나오는 ‘여집사 뵈뵈’라든지 고린도전서 16:10-11절에 나오는 ‘디모데’ 등을 어떤 다른 교회에 파송할 때 바울 사도가 친히 추천서를 써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처음으로 대면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파송된 교회에 가서도 그곳의 교인들로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고 또 합당한 영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바울 사도는 자신으로 말하자면 그런 추천서가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고 바울 사도가 스스로 밝히는 그대로 고린도교회 교인들 자체가 바로 바울 사도의 소개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하여 세우고 그 교회의 교인들을 복음으로써 거듭나게 했던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떤 사도이며 어떤 인물인가, 무슨 사명을 받은 사람이며 그것을 지금까지 어떻게 수행해 왔는가 하는 것들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의 이마 위에 다 적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추천서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있는 바’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 사도 같은 진짜 사도들은 어디로 가나 그런 추천서를 편지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써서 간직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런 추천서를 종이에 쓴 것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사도직은 그 진위성과 정당성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라는 아주 특별한 편지를 통하여 더없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절에서 말하고 있는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여 세운 고린도교회는 바울 사도의 편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도들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의 사역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편지입니다. 부연 설명하자면 인천은혜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제 목회 사역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가 어떤 목회를 했는지는 바로 그 교회의 교인들을 보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짜 목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슨 추천서나 이력서나 학력 증명 따위만을 내세우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자신의 무자격과 부적격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정말 성경적으로 목회를 잘하면 그 목사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교인들이 이미 그 목사에 대한 최고의 소개장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 앞에서도 예수님을 잘 믿고 사는 표시를 내면, 그것이 바로 그 교회의 목사가 삯군이나 이단이 아닌, 진실하고 충성된 주의 사자임을 가장 잘 증명해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인천은혜교회가 어떤 교회냐고 하는 것은 제 학력이나 경력이나 얼굴이 아니라 바로 성도들의 엿새 동안의 삶을 통하여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에게 인천은혜교회를 소개해 주는 대표는 제가 아니라 바로 인천은혜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들 각자가 바로 목사의 소개장이며 인천은혜교회의 얼굴임을 기억하면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인천은혜교회를 통하여 누리고 있는 믿음생활의 기쁨과 축복을 자랑하면서 전도하는 특별한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볼 때, ‘야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편지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편지된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멘.
2. 성도는 복음의 편지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단지 자기 교회와 목사를 소개하는 편지일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구원 은혜를 알려 주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만이 참된 성자 하나님이신 동시에 죄인의 구세주가 되심을 땅 끝까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 라는 말은 쉽게 표현하자면 ‘너희는 우리가 직접 쓴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이마에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직접 글을 썼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런 편지에는 아주 특별한 필기도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연필이나 펜이 아닌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었습니다. 또한 그 편지의 편지지 역시 당시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파피루스도 아니었고 가장 오래 보존될 수 있었던 돌비도 아니라 ‘육의 심비’ 즉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전파하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감화 감동시켜 주심으로써 사람의 심령에 새겨진 편지는 종이는 물론이요 돌판에 새겨진 것보다도 훨씬 더 잘 보존되는 영구적인 편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육의 마음 판에 영구히 새겨지는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듣고서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격의 중심에 구원의 확신이 자리 잡게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확실한 거듭남의 체험을 받은 성도는 그 심령 속에서 변화된 것이 절로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그런 체험이 있지 않겠습니까? 삼국지에서 유래된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사람이 3일만 공부를 해도 다른 사람들이 눈을 비비고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될 정도로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성도는 어떨까요?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지옥의 멸망으로만 치닫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얼굴빛부터 시작해서 언행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전과는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바로 그처럼 변화된 거듭난 사람의 삶이 그 어떤 전도지나 현수막보다도 주위의 사람들 눈에 가장 잘 보이는 전도의 메시지가 됩니다. 오늘날 전도가 잘 안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성도들 자신의 인격과 생활에 아직 뚜렷이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한 구원의 확신이 그 심령에 넘치지 않으면 겉으로 교인 노릇만 간신히 유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코 불신자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전도자가복음의 편지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확실히 영접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와 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본인이 엿새 동안의 생활을 통하여 설교를 생활에서 체험하면서 살지 못하면, ‘우리 목사님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의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라고 목사나 교회를 소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편지는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속에부터 성령님께서 친히 새겨 주신 은혜의 말씀이 없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남에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불신자들에게도 복음의 편지로 읽혀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된 주님의 사자를 통하여 진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성도라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편지요 복음의 편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본인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성도야말로 불신자들에게는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설득력 있는 복음의 편지가 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변화된 모습을 자기 이웃 사람들과 직장 동료들에게 마치 시청각 자료처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문서전도나 방송선교보다도 훨씬 더 감동력 있는 복음의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새로운 예술 형태 가운데 행위예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행위예술이란 글, 음악, 그림, 영상물 등을 통해서만 표현되어 왔던 이전의 예술과는 달리 예술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술을 가리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성도들은 행위 전도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편입니다. 그저 전도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전도하거나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세요’ 라고 말로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다운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불신자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복음전도가 필요합니다. 내가 복음의 편지가 될 때에 그 효과는 훨씬 더 크고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생활의 기쁨과 힘과 은혜와 축복의 체험들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과 생활 속에 새겨 놓고 살아감으로써, 먹으로 쓴 것보다 더 똑똑하게, 돌비에 새겨진 것보다 더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빛내고 전파하는 복음의 편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 이기주의 때문이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복을 받으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내가 잘하면 많은 사람이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내가 잘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실족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고 읽는’(수동분사)은 ‘세밀하게 알려지고 읽혀지고 있는’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즉 성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성도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들을 실족시키면 하나님의 나라 사업에 큰 지장을 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성도는 개인의 이익보다 하나님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왕과 나라의 이득을 생각하지 않았던 하만이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참조하라(에7:5). 뭇 사람들이 보고 있다. 그런데 성도들마저 자신의 이득과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강렬하고 뜨거운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편지입니다. 3절 말씀에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3. 성도는 성령의 편지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3절에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편지를 누가 썼을까요? 당연히 바울 사도가 쓴 편이입니다. 그런데 3절 중반 절에서 “...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즉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감동으로 써진 성령의 편지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성도는 율법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먹으로 쓴 것’ 또는 ‘돌 판에 쓴 것’ 즉 율법으로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성도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의롭다고 자부한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을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인간의 노력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좀 더 설명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율법의 포기가 아니라 완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의 의(조문)를 추구하는 차원을 넘어 그리스도의 의(정신)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그리고 특히 도덕적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심령의 변화를 받아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을 충만하게 채워야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시는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새 언약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성령의 편지입니다. 본문 4-6절을 보면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6 그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5절의 ‘만족’이라는 말은 ‘충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만족’ 이란 본인 스스로 느끼는 무슨 만족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채워 주신 어떤 ‘충분함’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바로 사도로서의 자격이 충분함을 뜻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4절과 5절을 다시 번역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자격이 우리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친히 세움 받은 사도라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 직분을 두고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고, 즉 자기 자신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무엇인가 남다른 영력이 있어서, 그런 자격을 획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즉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시고 기름 부어 주심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바울 사도는 인간적으로만 따져 본다면 도저히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박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사도가 되기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경력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부끄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자기의 사명과 직분에 대하여 그토록 확신이 넘치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그 이유를 두고 바울 사도는 6절에서 “그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만족하게’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자격 있게’라는 뜻입니다. 즉 새 언약에 대한 확신이 바울 사도를 그처럼 사명의식으로 충만하게 만들어 준 것이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이루어진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의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문자’라는 뜻으로서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라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얻으려 하는 것은 실상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자처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게 만드는 기능, 그리고 끝까지 죄인으로 남아 있는 자에게 사망을 선고하는 역할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 죄를 깨달은 자에게 다시 생명을 주는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명 구원은 오직 새 언약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된 새 언약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만 가지고서 죄인을 의롭다고 칭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런 놀라운 새 언약을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으로, 즉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6절 마지막에서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한 것도 바로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 이 새 언약을 믿는 것만이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행하고 계시는 이 언약 성취의 역사에 대한 체험과 확신이 먼저 자기 속에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그 새 언약의 복음을 전파하면 자기를 변화시켜 주셨던 바로 그 성령께서 똑같은 감화 감동으로 역사해 주실 것 역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던 성령편지 역할입니다. 바로 그 점이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성과만을 자랑하던 당시의 거짓 교사들과 바울 사도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내가 잘해서 사람들을 믿게 한다’ 라는 자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택자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신다’라는 확신 가운데 그의 사도직에 대한 사명의식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전도자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그리스도 피의 새 언약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 얻었음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확실히 믿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만 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참된 자격은 사람 앞에 알려진 명성이나 자기 자신의 특별한 영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에 대한 진짜 체험, 바로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의 편지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지침서를 따라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신자가 전도할 때에도 역시 자신의 어떤 기술이나 경험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조차 그것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공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성령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다면, 오늘날의 목사나 성도에게도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전도나 믿음의 삶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기적적인 역사는 항상 하나님께서 그 택자의 심령에 성령으로 도장을 찍으심으로써 일어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의 미련한 전도를 통하여서도 믿는 자가 생기게 되는 이유 역시 오로지 성령 하나님께서 똑같이 역사해 주시기 때문일 뿐입니다. 오직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시는 능력에만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아직도 죽이는 율법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이처럼 살리는 새 언약으로 돌아오게 하는 성령 하나님의 편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가 과연 진짜 종교이며 목사가 전파하는 복음이 과연 진리라는 사실을 제일 잘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의 편지요, 복음의 편지요, 성령이 편지가 된 성도들입니다. 이 편지는 반드시 수신자에게까지 도달해야 할 편지입니다. 목사에게까지만 가서도 안 되고 교인에게까지만 도달하고 그쳐서도 안 되는 편지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편지의 최종수신 장소는 ‘땅 끝까지’이며 최종 수신인은 14만 4천인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즉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는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이 소중한 영혼 구원의 복음을 교회를 중심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성령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가운데 온 세계 만민에게까지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고 복음의 전도자로 이방세계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성령님에 이끌리어 가는 곳곳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역사의 결과가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적 자녀의 출생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교회가 바울 사도에게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사랑의 지체들이었다.
그리스도의 편지인 성도는 바울 사도의 복음 전파를 통해 새롭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십자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들을 가리켜 잉크와 먹으로 쓴 자가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쓴 자, 곧 새롭게 거듭난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돌판에 쓴 자가 아니라 육의 심비, 곧 성령으로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었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죽이는 것이지만 성령은 십자가 복음으로 생명을 줍니다. 율법은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인을 날마다 정죄하지만 성령은 십자가 복음으로 우리의 마음 판에 영원히 그리스도의 편지란 신분과 정체성을 새겨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복음의 편지요 성령의 편지입니다. 먹이나 잉크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쓴 편지입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영원한 편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편지요 복음의 편지요 성령의 편지인 우리들을 세상 사람들이 읽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는 살아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죄와 사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영원히 폐하시고 승리하신 구원의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의 신분과 권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내용과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또 다른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누군가를 우리의 편지로 사랑하고 읽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편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활용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롭게 쓰게 될 그리스도의 편지를 우리를 통해 출생하도록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영광스런 편지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허우적거리고 사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육체의 노예들을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은 놀랍게 복음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편지요 복음의 편지요 성령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써진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영원한 복음으로 믿고 성령의 인도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임을 잊지 않으시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세상이 그리스도를 보고 읽도록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야 합니다. 이 예배 후에 그리스도의 편지요, 복음의 편지요, 성령의 편지로 읽혀지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