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③번 출구에서 덕수정보산업고를 지나 행당중학교 정문 좌측에 있는 전관원(篆串院)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도로가 발달되면서 원(院)과 역(驛)이 생겼다.
역은 서울인 한양 도성에서 전국의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 길마다 도로가에 설치하여
중앙과 지방간의 문서전달 관문, 공세(貢稅)의 수송, 또는 관료들의 공무여행 때
마필의 잠자리나 먹이 등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원은 주로 공용여행자의 숙소 및 식사를 제공하기 위하여 역 가까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관원
전관원은 한양 도성 동쪽 광희문 밖 살곶이다리 근처에 있었다.
전관원은 대개 나루를 건넜으나 도성 문을 닫는 인정종이 올리기 전에 도성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나그네나
파루종이 울리기 전 새벽에 곧장 나루를 건너서 먼 시골까지 가려는 나그네들이 묵어가던 여관이다.
홍제원
북경을 출발한 명나라 사신이 한성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유숙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곳이 홍제원이다.
도성의 '내로라' 하는 한량모화관에서 마지막 환송 잔치를 받고 의주로 가는 사신의 첫 기착점 또한 홍제원이다.
사신은 물론 하인 종배들이 객고를 푸는 유곽이 번성한 곳이 홍제원 주변이다.
홍제원 인근에 자리 잡은 주막과 유곽은 명나라 사신단만이 기웃거리는 유흥처가 아니었다.
도성에서 '꽤 논다'는 한량들과 '잘 나간다'는 잡배들이 즐겨 찾는 유흥가였다.
술을 못하는 나그네를 위해 홍제원은 떡이 유명했다. 이곳 인절미는 북촌의 떡보다 장안에서 인기가 있었다.
순조 30년 1830년, 가을의 어느 날. 별안간 비가 쏟아지는데 좀처럼 그칠 것 같지가 않았다.
홍제원 고개밑에 있는 염과부의 한 오막살이에 한 선비가 비를 피해 들어섰다.
"이 빗속을 뚫고 주막까지 찾아갈 수도 없고 큰 낭패로구나."
행인은 혼잣말로 한탄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집의 문이 열리면서 20세쯤 되는 처녀가 얼굴을 내밀면서
"저희 집은 주막은 아니지만 사정이 딱하게 되셨으니
누추하지만 잠깐 들어와서 쉬었다가시지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얼른 집안으로 들어간 선비는 처녀가 있는 윗방에다 대고
먹다 남은 밥이라도 있으면 요기나 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저희 집은 떡집이온데 낮에 팔다 남은 것이 많아서 밥을 짓지 않아요.
그래서 대신 떡을 준비했지요." 그 처녀는 떡을 상에 차려가지고 선비 방으로 들어갔다.
떡을 몇 개 먹고 난 선비는 여자로 보이는 그 처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이 선비는 처녀와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연'을 맺게 됐다.
"나는 강화 어느 동네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이서방이란 사람인데
잘 재워준 신세는 후에 꼭 갚겠다."
다음날 아침에 날이 새고 비가 멎자 선비는 떡값을 내며 훌쩍 떠났다.
그 처녀는 태기가 있었서 점차 배가 불렀다.염과부는 강화도로 이서방을 찾았다.
강화의 이서방이 홍제원 염과부집에 묵고 간 다음에 뜻밖에도 처녀에겐 태기가 있어서 배가 자꾸만 불러왔다.
그 이서방은 다름아니라 순조임금의 삼촌이 되는 전계군(全溪君)이었다.
전계군의 부인 최씨는 딸이 아이를 낳으면 데리고 오라고 한다.
그 처녀가 아들을 낳자 곧 강화도로 전계군에게 아이만 보냈다.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했다.조선왕실에서는 헌종의 뒤를 이를 왕손을 찾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전계군의 둘째 아들 원범이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홍제원 인절미 떡집의 처녀가 낳은 아이는 바로 '강화 도령'으로
철종이 됐다는 전설이다.
보제원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조선시대 흥인문(동대문) 밖 3리 지점에 보제원이 있었다.
보제원이란 명칭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구휼기관이었다.
옛날부터 흥인문 밖 보제원 주위에는 경기도, 강원도 쪽에서 한약재를 캐서 가져와 파는 약재상인들이 많았다.
그곳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보제원에서는 바로 그 한약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보제원은 연고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죽으면 장례까지 치러 주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있은 후에 파발제도의 시행과 함께 참점(站店)이 설치되면서 원과 역이 흐지부지 되었다.
참(站)은 걸어서 하룻길이 되는 곳마다 설치되었다.
우리가 "한참 걸어가다 보면 보인다." 하는 '한참'이란 말은 바로 이 참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오늘날 서울약령시로 지정된 경동한약상가가 보제원 인근에 번창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태원
이태원은 서울 용산구 용산로2가 1번지 일대에 있었다.
조선시대 관리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숙소로서 고려시대부터 지방 유지가 나라에서 땅을 얻어 운영하던 여관지였다.
이곳이 외국인 거주지의 특색을 띄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투항한 일본인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이타인이라 하고,
운종사에서 혼혈아를 보육하였으므로 이태원이라고 하였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 진주했던 미군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고 1956년 이후 외국인촌으로 지정된 것도 이런 유래에 따른다.
서울 동대문 밖의 보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그리고 광희문 밖의 전관원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3권 역원 조에 보제원(普濟院) : 흥인문 밖 3리 <지점에> 있다.
다락이 있는데 (예순살이 넘은) 기로(耆老)들이 여기서 모여 술을 마셨으며, 조말생(趙末生)이 서문을 지었다.
홍제원(洪濟院) : 사현(沙峴, 모래재) 북쪽에 있다. 다락이 있는데 중국 사신이 옷을 고쳐 입던 곳이다.
이태원(梨泰院) : 목멱산(남산) 남쪽에 있다. 전관원(箭串院) : 살곶이 다리 서북쪽에 있다.
《용재총화》제9권에 성 밖 3면에 사대원(四大院)이 있는데 세조가 재간있는 중에게 명하여 이를 수축하게 하였다.
보제원은(普濟院)은 동대문 밖에 있고 3월 상사(上巳)와 9월 중양(重陽)에는 누위에서 기로(耆老)와 재추(宰樞)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홍제원은 사현(沙峴) 북쪽 교외에 있는데 들 가운데 높은 언덕이 있고 푸른 소나무가
그 위에 가득 찼으며 위에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천사(天使)가 들어오는 날에는 이 정자에 머물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 뒤 정자가 허물어지자 지금은 천사가 원(院)에서 쉰다. 사평원(沙平院)은 한강의 남사(南沙) 교외에 있는데
지세가 낮아 날이 저물어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행인만이 자고 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