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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숙종 4)년∼1894(고종 31)년] "엽전 한 닢, 가벼운 무게로 세상을 바꾸다"
상평통보(常平通寶)란?
1678년(숙종 4)에 주조되기 시작한 동전(銅錢)으로 동그랗고 납작한 모양에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다. 호조(戶曹)의 관할하에 여러 관청과 각 도의 감영(監營)에서 만들어졌다. 앞면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글자가 적혀있는데 이는 언제나 일정한 가치를 유지하며 통용되는 화폐라는 의미이다. 1892년(고종 29)에 ‘ 신식화폐조례(新式貨幣條例)’가 공포되기 전까지 꾸준히 주조되고 유통되었는데 시기별로 모양과 크기에 차이가 있다.
상평통보 이전의 화폐 정책
경제사의 흐름을 살펴볼 때, 화폐의 등장과 변천만큼 중요한 사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교환과 매매의 수단으로 활용된 화폐는 실물을 교환하던 물품화폐(物品貨幣)에서 금속으로 주조하는 금속화폐, 종이로 만드는 지폐를 거쳐 가상으로 거래하는 예금화폐로 발달해 나갔다. 이 중에서 금속화폐는 국가의 공인을 받은 규격화된 화폐의 등장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역사에서 최초의 금속화폐는 고려의 성종(成宗)이 996년(성종 15)에 주조한 철전(鐵錢)이었다. 이후 고려는 은화(銀貨)나 종이로 만든 저화(楮貨) 등을 공식 화폐로서 만들어 유통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조선 역시 초기부터 공식 화폐를 사용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1423년(세종 5) 10월에 동전(銅錢)인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주조하기도 하고 명나라의 동전을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렇지만 시중에서는 동전보다 쌀과 포목이 교환수단으로 더욱 선호되었다.
상품화폐경제가 점차 발달하면서, 장거리 무역이나 시장에서의 거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쌀이나 포목 같은 기존의 물품화폐가 지니는 한계가 부각되었다. 가격에 비해 부피가 커서 운반에 불편함이 있었고, 보관하는 데에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개성 인근 지역은 상업이 번성하면서 동전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동전을 주조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같은 양의 동이나 철을 은으로 바꿀 때에 비해 동전으로 만들어 가치를 높이게 되면 더욱 많은 양의 은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차익은 동전의 주조를 주도하는 국가의 재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동전의 주조와 유통에 대한 논의는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전란으로 농업 생산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면서 민간의 생활은 물론이고 국가의 재정도 크게 부족해졌다. 더욱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사들에게 급료와 식량을 지급해야 했는데 이 역시 큰 재정적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선조(宣祖)는 동전 주조의 부작용을 우려하며 동전 사용을 확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인조(仁祖)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으로 동전을 주조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1625년(인조 3) 11월부터 호조(戶曹)에서 독점적으로 동전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규모가 크지는 않아서 이듬해 6월까지 겨우 600,000닢을 주조하는 데 그쳤다. 이마저도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으로 중단되었다.
1633년(인조 11) 10월에 상평청(常平廳)의 쌀과 포목을 활용하여 동전을 다시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명나라의 주화인 만력통보(萬曆通寶)를 본떠서 새로운 규격의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러나 만들어야 할 동전의 수가 늘어나고 유통 범위도 확대되면서 호조에서 단독으로 주조하기에 무리가 따르게 되었다. 한 곳에서 만들 수 있는 동전의 수에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서울에서 지방으로 운반하는 비용도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634년(인조 12) 2월부터는 개성과 안동에도 주조소(鑄造所)를 만들었고, 3월에는 대구에, 이듬해 2월에는 해주와 수원에도 주조소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동전의 주조와 유통을 확대하던 가운데 1636년(인조 14) 12월에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다시금 주조는 중단되었다.
효종(孝宗)은 즉위 직후 동전을 다시금 주조하도록 명하였다. 여기에는 김육(金堉)의 주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중국에 가서 동전 사용의 편리함을 눈으로 확인하고, 개성에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동전이 활발하게 사용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이에 적극적으로 동전 유통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되었고, 효종은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며 1651년(효종 2) 십전통보(十錢通寶)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후 시장에서 거래할 때 동전을 사용하도록 하고 백성들이 동전을 50닢씩 지니고 다니도록 하였다. 다소 부족한 측면이 있었음에도, 이상의 화폐 유통 시도들은 이후 숙종(肅宗)이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유통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상평통보의 주조
17세기 후반 상품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시장에서의 매매 역시 활성화되고, 동시에 동전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기존에는 동전보다는 은전을 많이 활용했으나, 소액 거래가 늘어나면서 동전의 필요성이 증가했고 위조된 은전이 많이 유통되면서 신뢰도가 떨어진 것도 동전에 대한 선호도를 높였다.
이에 1678년(숙종 4) 영의정 허적(許積)과 좌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은 새롭게 동전을 주조해 유통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새로운 동전의 이름은 상평통보(常平通寶)로, ‘상시평준(常時平準)’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는 항상 평준을 유지한다는 것으로, 상평통보는 언제나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통용되는 화폐라는 의미이다. 상평통보의 가치는 ‘1잎=1문/푼(文), 10푼=1전(錢), 10전=1냥(兩), 10냥=1관(貫)’으로 관이 가장 높은 단위였다. 당시 상평통보 400푼은 은 1냥, 쌀 10두와 교환되었다. 숙종은 동전 주조 규모를 확대하여 호조, 상평청, 정초청(精抄廳), 사복시(司僕寺), 어영청(御營廳), 훈련도감(訓練都監), 수어청(守禦廳) 등의 7개 관청에서 일제히 동전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때 만든 상평통보는 초주단자전(初鑄單字錢)이라고 불리는데, 숙종이 친히 완성 상태 등을 점검했다고 한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동전을 주조하려고 하니, 원료의 부족이 문제로 떠올랐다. 동광(銅鑛)의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동전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 동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원료를 꾸준히 공급받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상평통보의 규격과 가치를 조정하고자 1679년(숙종 5)부터는 당이전(當二錢)/절이전(折二錢)으로 불리는 대형전(大型錢)을 주조해 발행하기 시작했다. 초주단자전과 구별하기 위해 대형전에는 뒷면의 아래쪽에 ‘二’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와 동시에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상평통보의 가치를 2배로 인상하여 상평통보 200푼을 은 1냥과 통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상평통보의 유통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동전의 가치가 변동되자 민간에서는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몇 달 뒤에 다시 원래의 가치로 되돌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민간에서는 상평통보에 대한 화폐로서의 신뢰도가 떨어진 상태여서 1680년(숙종 6)에는 시장가치가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처럼 동전에 대한 불신이 생겨나자 이를 해결하고 동전의 사용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제기되었다. 우선 세금을 돈으로 내도록하는 금납화(金納化)가 추진되었다. 또한 서울의 시전(市廛)에 3년 동안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어 동전을 매매에 활용하도록 장려하였다. 상평통보의 가치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여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은과의 교환비율을 고정해두고 관청에서 언제든지 교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각 관청별로 만들 수 있는 상평통보의 수를 제한하여 일정한 양의 동전이 시중에 유통될 수 있도록 조정하였다.
이러한 중앙의 노력과 함께 동전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힘입어 상평통보의 사용은 빠르게 증가하게 되었다. 동전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원료의 부족이 자주 문제시되었다. 더욱이 금속화폐의 특성상 동전은 거래 수단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녔는데, 상평통보 역시 그 자체를 재물로 여기고 모아두려는 경향이 있어 시중에 유통되는 양은 주조된 동전의 양보다 훨씬 적었다. 끊임없이 동전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면서 원료의 부족에도 만성적으로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이에 1752년(영조 28)에는 좀 더 작은 상평통보인 중형전(中型錢)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중형전의 가치는 대형전과 동일했지만 중량이 가벼워졌고 크기도 작아졌다. 5년 뒤에는 중량을 좀 더 줄였고 1807년(순조 7)에는 아예 소형전(小型錢)으로 규격이 바뀌게 되었다. 이처럼 크기와 중량이 줄어들게 된 것은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는데 동전을 만들 원료는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가치는 동일하면서 투입해야하는 원료의 양이 적어지면 동전을 만들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늘어나게 되므로 국가 재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상평통보의 주조는 적게는 2배, 많게는 5배의 시장 가치를 형성하였다. 이 이익을 국가가 전적으로 취하기 위해 중앙에서는 상평통보의 주조와 발행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하였다. 사적으로 동전을 주조하는 행위는 사형을 선고할 정도로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그런데 동전의 사용이 보편화되고 지방까지 유통되면서 여러 관청에서 동전을 만들다보니 다소 관리가 소홀해지게 되었다. 이에 1785년(정조 9)에는 호조가 상평통보 주조 업무의 총책임을 맡아 일원화된 관리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조(純祖)가 즉위한 이후 점차 민간에서의 동전 주조가 용인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평통보의 종류와 주조 방법
상평통보는 납작하고 둥근 모양에 중앙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다. 이처럼 동전의 중앙에 구멍을 만든 것은 실로 꿰어서 휴대하기 편하도록 한 것이다. 상평통보의 앞면에는 상하좌우에 ‘常平通寶’를 한 자씩 새겨두었는데,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동전의 크기가 조금씩 다르고 이름도 초주단자전, 대형전, 중형전, 소형전 등으로 각기 달랐다. 또한 주조한 기관에 따라 뒷면에 새기는 글자도 달라졌다.
초주단자전은 1678년(숙종 4) 발행된 상평통보로, 뒷면에 아무 글자도 없거나 상단에 동전을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축약해서 새겨둔 것이 일반적이다. 관청의 이름은 호조를 ‘戶’, 어영청을 ‘營’으로 표기하는 식으로 한 글자만 따서 새겨두었다. 현재까지는 36가지의 관청명이 새겨졌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1닢의 중량은 1전 2푼으로 4.5g 가량이었다.
1년 뒤에는 대형전인 당이전이 주조되기 시작하였다. 당이전은 절이전이라고도 불렸다. 초주단자전보다는 크기가 커졌고 중량은 2배 정도 무거워진 2전 5푼으로 약 8.4g이었다. 동시에 동전 1닢의 가치는 4배로 증가하였다. 뒷면의 아래쪽에는 ‘二’자를 새겨서 초주단자전과 구분하였다. 상평통보의 유통이 확대되면서 민간에서의 동전 위조가 증가했는데, 이를 막고자 1690년(숙종 16)에는 상평통보 뒷면의 하단에 ‘二’자 대신 주전소를 표시하는 글자를 천자문 순서대로 새기게 하였다. 예를 들어 호조 산하의 주전소가 20곳이면 각 주전소에 천자문을 한자씩 순서대로 배정하고 각각 주조하는 동전의 뒤쪽에 해당 천자문을 새기도록 한 것이다. 동시에 주전소별로 동전을 만드는 장인들의 명부를 작성해 관리하면서 동전의 질을 유지하고 위조된 동전을 쉽게 구분해 내도록 하였다.
1752년(영조 28)에는 작은 크기의 중형전이 만들어졌다. 액면 가치는 대형전인 당이전과 동일했지만 중량은 1전 7푼으로 줄어들었고, 5년 뒤에는 이를 더욱 줄여서 1전 2푼 무게의 동전을 주조하였다. 중형전의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의 이름이나 천자문 외에 오행(五行)인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 중에 한 글자가 새겨졌다. 이에 중형전은 오행전(五行錢)이라고도 불렸는데 점을 치는 이들에게 애용되었고 민간에서 복을 가져오는 물건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외에 숫자가 새겨지기도 했고, 해(○), 달(⊂), 별(●)을 나타내는 기호가 새겨지기도 하였다. 동전을 만드는 곳이 늘어나고 불법적인 위조도 증가하자 동전에 다양한 표식을 새겨서 공인된 상평통보임을 확실하게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1807년(순조 7)에는 동전의 크기와 중량이 더욱 줄어든 소형전이 발행되었다. 이처럼 동전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던 것은 상평통보의 원료인 동의 국내 생산량이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동전을 만들 때 쓰는 동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었는데, 여기에 주석(Sn)이나 아연(Zn), 납(Pb)을 더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철(Fe)은 일부러 첨가되지는 않고 불순물 상태로 존재하는 정도였다.
동전의 주조는 원료를 화로에 녹여서 쇳물을 만들고 형틀에 붓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형틀은 여러 개의 동전이 서로 연결되는 모양으로 제작하여 한꺼번에 다수의 동전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형틀에서 굳힌 것을 하나씩 잘라서 매끈하게 다듬었는데, 떼어내기 전의 모습이 나뭇가지에 달린 잎과 비슷하다고 하여 상평통보를 엽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70여 종류의 기구가 사용되었고, 각 공정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 분업화되었다.
상평통보의 사회적 영향
거래 수단으로서의 동전은 개성 인근에서 이미 1640년대부터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었고, 1650년대에는 평안도 일부 지역까지 동전의 사용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공식 화폐로서 동전이 전국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숙종이 상평통보를 주조할 것을 결정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평통보의 유통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지는 못했다. 금속화폐의 특성상 동전 자체가 재물로 인식되었기에 상평통보는 주조하는 양에 비해 시중에 유통되는 것이 많지 않았고 집안에 쌓아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국가는 세금을 돈으로 납부하게 하거나 시전 상인들에게 동전을 공급하면서 동전의 사용을 권장하였다.
상평통보의 유통 지역이 확산되고 화폐로서의 지위가 굳건해지자 민간에서 이를 불법적으로 주조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진짜와 비슷한 형태의 동전을 사주(私鑄)한 것이다. 이러한 위조 동전은 시중에 갑자기 많이 유통되면서 물가를 불안정하게 만들기도 했고 낮은 품질로 인해 상평통보 자체에 대한 불신을 낳기도 하였다. 중앙에서는 일시적으로 동전 주조를 중단하면서 유통되는 동전의 양을 조절하고자 하였으나 사주 자체를 근절하지 않는 이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에 사적으로 동전을 주조할 경우 사형으로 다스리고 이를 제보한 사람에게는 도둑을 잡은 것에 버금가는 포상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전의 주조는 막대한 이득을 가져왔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위조하는 이들이 줄지 않았고, 각 관청에서 동전을 만들었던 장인들도 사주에 가담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숙종은 상평통보 위조를 주도한 이는 교수형에 처하고 제작을 담당한 이는 한 등급 아래의 형벌을 내리도록 했다가 사주가 줄어들지 않자 가담한 사람들은 경중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양반들이 노비를 내세워 동전을 위조하는 등 사주는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점차 성행하였다. 결국 순조는 이를 양지로 끌어내어 동전 주조에 민간의 도움을 받으면서 비용을 절감하고자 하였다.
한편 상평통보의 주조는 국내 광산업의 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전의 주원료를 일본에서 들여오다 보니 원료 구입비는 물론이고, 구입하는 양도 항상 문제가 되었다. 결국 1731년(영조 7) 이후에는 동전을 주조하면서 필요한 원료를 조달하기 위해 동광(銅鑛)을 개발하여 임시적인 채굴을 허용하였다. 동전의 주조와 유통의 확대가 동광을 개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892년(고종 29)에 ‘신식화폐조례(新式貨幣條例)’가 공포되기 전까지 활발하게 사용된 상평통보는 200여 년간 조선 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 화폐경제가 확대되면서 상업의 발달이 가속화되었고, 일상의 계산 방식에서도 쌀이나 포목이 아닌 돈이 기준단위가 되었다. 금속화폐가 물품화폐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상품의 매매나 세금 납부, 소작료 지급 등을 동전으로 해결하면서 조선 사회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