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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WAR & GENDER]
와카쿠와 미도리/ 김원식 옮김. 2007
1.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신 셋째 형님의 간병을 시작하였는데, 7월 말일 형님은 선암과 폐암이 전이가 되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급작하게 운명하시게 되었다. 병원이 시키는 대로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도 여러 달 동안 받았건만, 아무런 효력도 없이 너무도 어이없게 삶이 무너져버렸다.
나는 지난 3월에 형님이 폐암과 선암이라는 병원의 판정을 듣고는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하니 차라리 시골에서 정양하실 것을 권유했다. TV에도 나온 바 있던 항암치유자의 마을에 가서 섭생하면서 산책도 하고, (말씀은 못드렸지만) 마음의 정리도 해보는 기간을 얻기를 바랬다. 하지만 가족회의 끝에 병원 치료에 몸을 맡기게 되었고, 불과 5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형님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내심으론 암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평소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알게 된 지식으로 많이 걷고, 생수를 마셨으며, 거래처 인도인의 방식대로 10여 가지 야채를 섞어 죽으로 만든 스프를 저녁마다 먹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담배를 끊지 못했다. 작년에 같은 병원에서 폐기종 수술을 받고도 담배를 끊지 못한 채, 이러 저러한 요법으로 암에는 안 걸릴 것으로 믿으며 살았다.
운명하시는 그날 아침에도 일어나 앉아 간병인의 도움으로 세수를 했고, 그 전날에는 다른 병원으로 간다면서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했지만, 오후에 들자 의식은 꺼져들었다. 가족들은 부랴부랴 임종실에 모여 앉아고, 의식 없는 형님을 보다 못하여 목회 공부중인 조카 사위에게 세례와 영혼의 안식을 줄 것을 요청했다. 의식은 없어도 귀는 들린다는 말을 믿고, 조카 사위는 가족의 요청대로 해드렸다.
2.
방학 내내 힘들고 우울해하던 내게 아내는 영화 <고지전>을 보자고 하였다. 아내는 신하균이 아니라 고수 때문에 보자고 권유했는데,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을 다룬 것으로 <웰컴투 동막골> 이후에 나온 수작이라는 영화평을 읽고 상영관으로 갔다.
1953년 휴전선 부근 애록고지[Korea를 거꾸로 읽어 Aerok]에서 벌어진 남북한군의 고지 쟁탈전을 다루는 영화는 신하균과 고수, 그리고 많은 조연들의 빛나는 연기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나갔다. 허구 헌 날 고지전을 치르면서 뺏고 빼앗기는 남북군은 어느 날 본의 아니게 내통하게 되는데, 이를 포착한 방첩대가 신하균을 내려보내고, 애록고지의 ‘악어중대원’들은 너무나 부당한 전투 명령을 내리는 상관을 죽여가면서 자신들의 삶을 도모한다.
드디어 그해 7월 27일 오전 10시 남북간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남북군은 모두 살았다는 안도감에 환호하였으나, 협정은 밤 10시에 효력이 발생한다는 조항 때문에 남은 ‘12시간의 애록고지 전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전쟁은 어떤 자들이 만든 것인가? 짙은 안개 속에서 대치하던 남북군은 ‘전선야곡’을 함께 부르면서 제발 안개가 걷히지 말고 전투가 재개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안개는 걷히고 고지전은 재개되어 남북한군 모두 죽는다. 신하균이 살아 남아 남한측 영토가 되었겠다.
<고지전>은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쓴 박상연 작가의 작품이다. 지난달 20일에 개봉해서 300만 이상의 관객이 다녀갔다. 작가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남북간의 해빙을 기대하였는데, 이제는 다시 반전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면서, “전쟁이란 거대한 체가 있다고 했을때, 3년의 전쟁기간 동안에 그 체에서 흘러내리지 않고 버틴 병사들은 어땠을까란 생각에서 영화는 출발했다.”고 말한다.
고지의 주인공이 바뀔 때마다 땅에 파묻은 ‘귀중품’(술, 담배, 편지, 사진 등)을 서로 맞바꾸면서 정을 나누기도 하지만 결국은 서로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남북한군. 북한은 전쟁의 목표를 잘 알기에 승리한다고 호언하던 북한군 장교도 오랜 전쟁 탓에 그 목표를 잃어버리게 되고, “네가 사람이냐?”고 호통치는 신하균에게 “사람은 진작에 다 죽었어. 3년 지랄에 사람이 살아남았겠어?” 라고 되묻는 고수.
<고지전>은 전쟁은 어느 한 쪽에게 승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삶과 도덕성을 송두리째 파괴시켜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위에 있는 사람은 전쟁으로 권력을 얻을 지 모르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나마 살아남은 상이 용사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했던가? 내가 어릴 적에 동네에는 상이 용사들이 많았다. 다리가 없고 팔에 의족을 낀 가난과 분노에 일그러진 흉한 얼굴에 아주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네거리에 드럼통 불을 피고 그 위로 커다란 솥을 걸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로 끓인 ‘꿀꿀이 죽’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던 그들의 처연한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3.
집에 돌아와 책장을 뒤지니,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라는 책이 잡힌다. 언제 사두었나? 기억도 없는데 2007년 쯤 구입했나 보다. 저자 와카쿠와 미도리는 가와무라가쿠인 여자대학 인간문화학부 교수 출신이다. 번역자 김원식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공해추방운동을 거쳐 반전반핵운동에 몰두하고 있다 한다.
미도리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가부장제 남성 지배형 국가’ 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젠더로서의 남성’은 자기중심적으로 조직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전쟁이라는 폭력장치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젠더’는 생물학적인 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의미한다.
남성은 단순한 수컷이 아니라, 경쟁을 이기고 가족을 부양할 육체적. 심리적. 지적 특징, 흔히 ‘남자다움’이라 불리는 특질을 형성해왔고, 여성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모성, 가사와 육아에 적합한 마음씨, 지루하고 단순한 노동을 견디는 인내심 등 ‘여자다움’ 이라고 불리는 특질을 형성해왔다. 이처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젠더’라고 한다.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성 보다는 차이와 다름에 주목하면서 남성은 여성들에게 ‘진취적 기상이 넘치고 전투력 있는 지적인 여성’이 길러지지 않도록 종교. 교육. 문화. 법률을 통해 계획적이고 필사적으로 여자들을 요람 옆이나 부엌, 빨래터 같은 곳에 붙들어 두었다. 젠더에 의한 ‘성별 역할 분업’이다.
이런 배분은 누구를 위해, 왜 이루어졌을까?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 기르며 부모를 모시고 음식을 준비했기에 남자들은 원로원 의원도 하고 단테도 괴테도 될 수가 있었다. 괴테가 괴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였다면 부엌에서 빵을 굽거나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야 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위대한 천재 가운데 여성이 없는 것은 천재가 원래 남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왔다.
젠더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결정하고 그 특질을 바탕으로 남녀의 활도 영역과 종류를 결정하고 사회적으로 조직화한 것이다. 그 조직은 가정과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의 영역에서 남성이 여성을 종속시키는 권력 조직이었다. 이런 지배 체제를 가부장제라고 한다.
가부장제는 첫째, 연장자인 남성이 여성과 젊은이, 아이들을 지배하고 권력을 독점한다. 둘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영역의 중추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주변화한다. 셋째, 가장이 여성의 재생산력과 신체를 사유화하고 가정에 구속시킨다. 넷째, 남성에 의한 공적 영역의 독점을 지킨다. 다섯째, 교육. 문화. 도덕을 통해 힘으로 지배하는 ‘남자다움’과 남성에 종속되는 ‘여자다움’이라는 ‘인격의 제도화’다.
젠더 이론은 20세기에 나타난 인류 최신의 해방 사상이며, 인류의 마지막 피지배 계급인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자유, 권리, 평등을 가져다 주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남녀의 차별성에서 출발하지 않고 똑같은 인간의 조건에서 출발한 젠더 이론은 남녀를 성적 신체와 생리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혁명적인 이론이라 한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일은 사회적인 혁명 보다 훨씬 어렵다. 계급, 당파, 국가를 넘어 개인적인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식혁명이기 때문이다. 모든 영역에서 남녀가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기존의 남성 중심형(지배형) 국가의 구조를 바꾸기 때문이다.
4.
가부장제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미도리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이라크 전쟁이 있던 그해 미국영화 <트로이>를 보았다. 그리스의 유명한 시성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다. 주인공 아킬레우스이고 비극의 클라이맥스는 아킬레우스의 죽음이다. 아폴론 신전에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쏜 화살이 아킬레우스의 아킬레스건에 박히는 순간, 찬란하게 빛나던 젊은 영웅도 소리없이 스러진다. 때맞춰 코러스의 비통한 노래가 절규하듯 울려퍼진다. 그리스 군대가 이 영웅의 시신을 화장하는 장면에서 이 영화는 끝난다. “기억하라, 나를, 잊지마라, 나를...” 슬픈 노래가 이어진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가지 한결같이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찬가’를 노래한다. 트로이 원정에 참여한 영웅들은 많다. 로크리스의 아이아스, 테티스 여신의 아들 아킬레우스, 그 친구 파트로클로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 왕자, 제우스의 아들 사르페돈 등 젊은 영웅들은 모두 죽는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늘 아들을 돕지만 운명적인 죽음을 막지 못한다. “네가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면 아내를 맞아 자식을 낳고 손자들에 둘러싸여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죽으면 너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전쟁에 나간다면 너는 죽을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다. 하지만 네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승리의 왕 아가멤논이나 오디세우스처럼 권력을 가진 중년 남자들이다. 영화는 살아남은 늙은 권력자의 추악한 살찐 몸매와, 어린아이와 젊은 아내를 남기고 산화한 젊은이의 빛나는 육체를 대비시켜 관객들의 비분을 자아낸다. 브래드 피트(아킬레우스)는 연인에게 “신들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어. 왜냐하면 우리는 죽기 때문이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지금이 아름다운 것이야.” 하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지금 왜 호메로스인가. 걸프 전쟁,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터에서 수많은 미국 병사들이 죽었다. 대의명분도 없는 전쟁에서... 아킬레우스는 “나라를 위해 죽는다”고 하지 않는다. “전쟁은 젊은이가 죽고 늙은이가 살아남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죽음을 운명으로 알고 죽음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일리아스>는 젊은 영웅들의 죽음을 노래한 서사시다.
중세 유럽에서는 예수의 비쩍 마르고 쇠약한 몸매로 정신성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바티칸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의 예수는 긴장된 복근, 힘줄이 두드러진 긴 팔다리, 참혹하지만 피가 말끔히 닦인 상처, 죽기엔 너무 아름다운 몸매를 보여준다. 근대에 들어서도 젊은이의 죽음은 최대한 미화되었다. 남성의 신체를 통해 궁극적인 미를 표현하는 흐름은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일어난 신고전주의에서 절정을 이룬다.
벤야민은 20세기초의 잔혹하고 무차별적인 대규모 폭력을 긍정하게 된 배경에 다윈의 생존경쟁 개념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1895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오자 생물이 자체적인 메커니즘에 따라 진화한다는 기존의 관념은 깨지고, 생물은 생존경쟁에 의해 기계식으로 진화하는 존재가 되었다. 더욱 흉악한 것은 ‘사회진화론’이다. 생물계의 생존경쟁을 인류사회에 적용하여 제국주의 열강이 약한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도한 다위니즘은 인종주의에 영향을 주어 백인, 그리스 남성의 신체를 최고의 미적 가치를 지닌다는 의식이 19세기 유럽 예술 세계를 지배했다.
일본의 근대화에도 ‘생존경쟁과 자연도태’,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나치 독일의 우생학이다. 히틀러는 단종법을 제정하고 약자와 범죄자의 단종을 시행했으며, 게르만족 지상주의를 내세워 600만 유대인을 학살하였고 수만 명의 독일인 장애자와 범죄자를 가스실로 보냈다.
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는 1963년 《공격 행위에 관하여》에서 동물들이 같은 종을 공격할 수는 있으나 서로 상처입히고 죽이는 것을 막는 여러 행동생리학적 구조가 동물의 세계에 있다고 발표했다. 큰가마귀나 늑대는 일격에 동족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억제 장치가 있다. 그러나 토끼나 비둘기나 침팬지는 같은 크기의 동물을 죽이지 못하므로 그런 억제 장치가 없다. 인간은 원래 비둘기나 침팬지 정도의 존재였으나 무기의 발명으로 큰까마귀의 부리를 지닌 비둘기, 손도끼를 지닌 침팬지가 되어버렸다. 결국 인류는 동족살해의 억제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살상력 높은 무기를 쥔 상황이 되었다.
콘라드는 인류가 서로 절멸을 걸고 싸우는 것은 본능의 ‘기능 오차’라고 주장하며, 그 기능 오차를 찾아내는 것이 정언적 임무라고 말한다. 무기의 발명과 함께 서로 죽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게 한 인류의 부자연스러운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기능 오차를 찾는다.
5.
전쟁 없는 시대가 있었다.
마리야 짐부타스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독일과 미국에서 공부한 미국 고고학계의 권위자다. 그녀에 따르면 기원전 7000~5000년 에게 해에서 체코. 우크라이나 서부에 걸친 ‘고유럽’ 문명이 꽃을 피웠다. 남동부 유럽과 발칸 반도 부근의 소아시아 지역이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그 문화는 채색토기와 조각상이 특징을 이룬다.
고유럽인은 농경과 교역으로 풍요로운 도시 문명을 이루었지만 기원전 4000년경 유럽 중동부에 침입한 반농반목의 인도유럽어족 조상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그 흔적은 기원전 2000년경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으로 남았다. 기원전 6000년경 아나톨리아에서 여신과 함께 크레타로 이주한 소집단이 농업을 가져왔다. 그후 4000년 동안 고도의 도시 문명을 이루었다. 크레타의 미술은 그리스 본토의 것과 다르다. 비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이며 생명력이 넘친다. 여신은 가슴을 드러낸 미인이며, 수영을 하거나 소를 타기도 한다. 젊은 남녀가 팀을 이루어 소를 타고 재주넘기도 했다.
짐부타스는 어머니 여신의 형상이 존재했으며, 그 여신은 생명의 탄생에 관여하는 우주적 힘의 표상이었다. “생명을 끊임없이 이어간다는 것이야말로 고유럽 신화의 주된 동기였다.” 남성과 여성의 분열이 없었고, 모계제 사회여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았으며, 여성과 남성 공히 잠재해 있는 모든 근원적인 요소가 생명과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쿠르간족(인도유럽어족 등)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부계 문화에 지배권을 빼앗기게 된다.
영국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는 아나톨리아 하칠라르Hacilar와 차탈회익Catal Hoyuk 유적에서 수 천년 동안 지속되었던 여신 숭배 문화를 발견했다. 이곳은 근동 아시아 최대의 유적지로 5천~6천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마을과 수백 개의 신전이 있었으며, 벽화, 토기, 옷감, 돌 부조, 여신 상 등을 발굴하였다. 이 신석기문화는 구석기와 청동기를 잇는 ‘잃어버린 고리’였다. 탄소연대측정 결과 1만년 전에 농업혁명이 일어났음을 실증한 곳이다.
이 농업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코카서스 남쪽, 카스피 해 남쪽 그리고 남유럽으로 확대되었으며, 바닷길로 크레타와 키프러스로도 전해졌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는 메소포타미아가 도시 문명의 요람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보다 오래된 아나톨리아 문명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신 숭배, 농업혁명, 모계제 사회. 짐부타스는 마치 신과 자연이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던 남성 지배 문화 보다 훨씬 전에 존재하였던 고유럽의 모권 문화를 부각시켰으며, 그것이 남성 원리가 지배적인 인도유럽어족에게 차례차례 유린되었다고 지적한다.
6.
이밖에도 미도리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국가다>, <여성 차별과 전쟁>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일본인이면서 서구 역사의 고유럽인 이야말로 전쟁을 모르며 살았던 모계제 사회를 유지했음을 발견하고, 인도 유럽어족이 유럽과 중동을 휩쓸고 내려온 기원전 4000년경부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전쟁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역사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전쟁이 일상화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역사를 거꾸로 돌려서 모계제 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반전을 넘어서 평화를 창조하는 페미니즘 운동을 통하여 일본의 재군사화 전략을 막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북유럽처럼 여성 정치인을 많이 배출하고, 세계의 여성과 긴밀히 연대해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국가의 군사화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전쟁은 국가가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도리는 콜롬비아 대학 평화교육센터 소장 리어든의 주장을 들어서 자신의 결론을 대신한다. 지금의 국제적인 안전보장 제도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로, 인간 아닌 남성 중심의 개념 위에 서있다. 둘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안보라는 것. 셋째, 전세계 인류가 진정으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지 않고 국가간의 적대와 분쟁뿐만을 문제 삼고 있다.
리어든은 참다운 안전보장으로 다음을 제안하고 있다.
1.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지키는 안전보장
2. 기본적인 생활, 의식주, 교육, 의료 등 생활의 기본에 관한 안전보장
3. 모든 사람의 존엄 - 아이덴티티, 인권의 존중 - 개인, 민족, 젠더의 안전보장
4. 인재(人災)로부터의 안전보장 - 집단 간. 국가 간의 분쟁과 적대적 관계로부터의 안전보장
마지막으로《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에서 미도리는 벤야민이 전쟁과 살육, 전체주의의 근원적 악이라고 한, 평화를 위해 폐기해야할 국가는 당분간 폐기할 수 없겠지만, 국경을 넘는 여성의 시민운동. 평화운동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노력해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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