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새재 답사기 (650 미터)
우리 민족이 일제의 폭정 아래에서 고통 당하면서 신음하고 있을 때에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세계 만방에 크게 기세를 떨치던 3.1절 국경일에 문경 새재 답사에 나섰는데 원래 계획은 주흘산 산행이었으나 산불 예방 기간으로서 입구부터 통제를 해서 새재 3관문까지의 답사로 변경을 하고 문경의 문화 테마파크로 자리잡았으며 드라마 "대조영"을 촬영중인 셋트장을 지나서 주흘관(제1관문)에 들어서니 우람한 성문과 성벽이 떡 버티고 있었으며 한쪽에는 공성무기등 옛날의 촬영장비도 놓여 있었다.
백두대간의 등뼈를 이룬 고산준령이 병풍처럼 이어져 충북과 도계를 이룬 천험의 요새인 새재는 신라시대 진흥왕시기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교통의 요지로 인식되어 뚫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 (영남 대로)로서 "영남"이란 명칭도 조령의 남쪽 지방이란 뜻이었다.
영남대로상의 중심인 동시에 사회, 문화, 경제의 교류와 군사상의 요충지였으며 조선 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의 고개" "새로 만든 고개"의 뜻이 담겨 있으며 당시의 교통 여건으로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가장 짧은 고갯길이었던 새재는 영남의 선비를 비롯한 보부상, 영남의 세곡과 궁중 진상품등 각종 영남의 산물이 새재를 통하여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한강 나루터에 닿았으니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운을 활발하게 연결시켰던 교통의 요충이었다.
이런 문화 유산을 간직한 문경시에서 차가 없는 길로 만들어서 마사토의 부드러운 흙을 깔아 놓으니 신을 벗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좌우로 우뚝 솟은 주흘산과 조령산의 계곡에서 흘러 내리는 맑고 푸른 옥같은 청정수의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면서 올라가니 저절로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산들거리는 봄바람에다 소나무숲의 향기를 맡으면서 갈수록 곳곳에 정자요, 가슴속까지 시원한 약수요, 쉬어가라는 긴의자를 비치해 놓아서 답사객들에 대한 편의와 배려가 눈에 띄었으며 일제말에 우리나라의 자원을 송두리째 수탈하고자 소나무의 송진까지 채취해간 흔적으로 소나무의 몸통에서 패어나간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우람한 소나무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고려, 조선 시대의 국영 여관격인 조령원터를 지나서 옛주막도 복원을 해 놓았는데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을 오르던 선비들을 비롯한 보부상들이 험준한 이 길을 오르다 한잔의 술로 피로를 달래며 쉬어가던 곳을 옛 형태대로 초가 지붕에다 이엉을 이어 놓았는데 마루에 걸터 앉아 잠시 휴식을 하노라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지저귀는 산새소리에 쉽게 자리를 뜰수 없을것이고 그 당시에도 오늘의 무인 판매대같은 "무주점"이라는 주막도 있어서 필요한만큼 술과 안주를 먹고 엽전을 놓고 가는 양심주점도 있었다고 하였다.
조금 더 올라가니 교귀정이라는 넓직한 정자가 있었는데 성종시에 문경 현감이 세웠다고 하며 경상도 신,구 관찰사가 관인을 인수, 인계하던 교인처로서 신임 감사의 도임 행차 그림을 보니 300명의 인원이 수행을 하였는데 지금의 도지사격인 감사가 도의 행정, 사법, 경찰, 군사의 전권을 행사하면서 경상도의 부,목,군,현 60여주를 다스렸던 것을 보니 위세가 가히 중국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제후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조곡관 (제2관문)에 다다르니 갑자기 계곡이 좁아지며 천험의 요새임을 짐작케 하는데 군사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하늘이 내려준 방어의 요지임을 느꼈는데 임진 왜란시에 조선을 침략한 15만의 왜군중 1진인 소서행장이 지휘하는 2만명의 왜군이 새재를 가리켜 "이 천험의 요새를 지키지 않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전진하기를 주저하고 척후병을 계속 보냈는데 조선 조정에서 급파한 신립장군을 도원수로 하는 8천명의 관군은 백만 대군도 능히 막을수 있었던 이 요새를 버리고 충주 달천강으로 물러서서 배수의 진을 쳤고 새재 위에는 허수아비로 만든 초병을 두었는데 척후병이 살펴보니 초병위로 소리개가 날아다니고 있어서 군사가 없음을 알고 무인 지경으로 새재를 점령하였으며 그후 신립장군의 관군은 탄금대전투에서 조총이라는 우수한 화력앞에 맥없이 참패를 당하고 신립장군을 비롯한 전군이 몰살당하였으며 부산에 상륙한지 보름만에 한양까지 진격하였으니 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었던 조정은 피란하기에 바빴고 애꿋은 백성들만 전란의 희생양이 되었으니 고금과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도자의 역할은 언제나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수 있으리라.
제3관문 못미쳐서는 책바위의 전설도 전해 오는데 옛날에 인근에 살던 어느 큰 부자가 자식이 없어 걱정인지라 하늘에 치성을 올려 천신 만고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자라면서 점점 몸이 허약해져 아무런 일도 할수 없었다. 몸을 고치고자 수소문 끝에 유명하다는 문경의 도사에게 물으니 "당신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담을 직접 헐어 그 돌을 새재 책바위뒤에 쌓아 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린다면 좋은 일이 있을것이오"라고 일렀다. 이후 아들은 돌담을 헐고 3년에 걸쳐서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니 허약하던 몸이 어느새 튼튼해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 급제까지 하였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과거객들이 책바위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한다는 영험스러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 있으며 특히 입시철이면 소원 성취를 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유래와 사연들을 이야기하면서 올라가니 2시간여 남짓만에 조령관 (제3관문)에 닿아서 점심을 먹고 쉬다가 다시 고갯길을 내려와서 도립공원 입구의 새재 박물관에 전시된 생활용품들과 세시풍속등을 둘러본후 최홍수 용궁중학교 교감의 안내로 소문난식당에서 동동주회식을 하였는데 다가오는 문경의 특산품인 찻사발축제준비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같이 산행을 하여 주었고 문경을 방문하는 친지들을 언제나 환대하는 인정과 매력이 넘치는 친구였으며 마신후에도 뒷끝이 깨끗한 동동주가 쉴새없이 나오고 빈대떡,묵무침, 더덕구이등의 안주도 맛나고 깔끔하였는데 이 자리에서는 오늘 30주년 결혼 기념일을 맞이한 김정우산악회장부부를 위한 축하연자리도 마련되어서 참석자 모두에게 박수를 받았다.
그후 김천에 와서 회장님의 찬조로 모교 후배가 운영하는 선산곱창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체격이 조종옥선생님을 닮은 김태섭체육선생(홍재룡선생님 후임으로 왔다고 함)이 모교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를 하였는데 경북에서 대구고보(현 경북고)에 이어서 두 번째, 전국에서는 남북한을 통털어 일곱 번째로 김천고보를 설립하고 송설학원을 열어서 송설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고 긍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김고 입학생이 미달을 겨우 면한 문제, 경북 서북부 지역의 인재들이 모이지 않는 문제, 혁신 도시가 세워지면 특목고가 생기는 문제, 공립인 이웃한 점촌고의 부상 문제등의 얘기를 들었는데 앞으로는 학교 운영진뿐만 아니라 재단과 동창회에서도 노력하여 변화와 혁신의 추세에 따라서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방안을 마련하여 송설의 밝은 미래를 열어나가야 하리라고 모두 공감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