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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한국교회사 /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고영표 추천 0 조회 65 19.10.20 23: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교회사 /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성서번역자들

 

1893년 한국성서번역자회가 구성된후

1900년에 신약성서가, 1910년에 구약성서가 각각 번역 완료되었다.

사진은 1904년에 당시의 번역자들이다.

 

 

텬로력뎡


1895년 게일과 이창직이 번역 출판한 것으로

가장 많이 읽힌 기독교 문서의 하나가 되었다.

 

 

이수정역 성서


이수정이 일본에서 한문성서에 이두(吏讀)토를 달아 펴낸 <신약성서 마가전>(1884)이다.

 이수정은 이 외에도 마태, 마가, 요한복음 및 사도행전을 같은 식으로 펴냈으며

한글성서로 <신약마가젼복음서>를 냈다.

 

 

경산학당 교사와 학생들


서울에 1886년 설립된 구세학당 학생들로 1893년 경의 교사와 학생들이다.

 


선교사들의 순회 전도


1891년경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서북지방 순회전도광경이다.

마펫, 게일, 베어드 등의 모습이 보인다


죠션크리스도인의회보


1891년 아펜젤러가 창간한 것을 한국 기독교 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소민필지


헐버트선교사가 1892년 지은것으로 초기 모든 학교의 교과서로 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한국교회사(55)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4) 구약성경 번역

신약성경의 출간은 구약성경의 출간을 재촉하는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다. 1900년 신약성경 번역이 완성되어 그 공인본 출판을 위해 개정 작업을 추진키로 결정하는 동시에 번역자들은 구약성경의 번역에 들어갔다. 조속한 구약성경의 완성을 위해 구약 부분을 나누어 아펜젤러가 창세기를, 언더우드가 시편을, 게일이 잠언과 사무엘서를, 스크랜톤이 이사야서를, 레이놀즈가 여호수아서를 각각 맡아 번역에 착수했다. 성경번역자회는 신약성경 번역의 개정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구약성경을 번역하는 이중적인 짐을 떠안게 된 셈이다. 때문에 구약 번역을 착수하고 3년 동안은 거의 신약의 개정 작업에 전념하느라 구약의 번역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헨리 루미스에 의해 성서매서인으로 파송받아 한국에 입국한 피터스(Alexander A. Pieters, 彼得)가 1898년 시편 중 저주시를 제외한 62편의 시편을 번역해‘시편촬요’를 출판하고, 이것을 저본 삼아 언더우드가 시편의 번역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구약의 번역은 1907년 봄까지 거의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1906년에 창세기와 시편, 1907년에 잠언과 출애굽기, 사무엘상·하, 말라기 그리고 1908년에 열왕기상·하와 이사야가 출판되기는 했지만 다른 구약성경의 출간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부 구약의 번역 책임을 맡았던 아펜젤러가 세상을 떠나 번역에 차질이 생긴 데다, 건강 악화로 언더우드가 병가를 얻어 본국으로 잠시 귀환하고, 1902년 스크랜톤이 그리고 이어 그 이듬해 게일도 안식년으로 한국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추가로 임명받은 북감리교 존스, 남감리교 하디(R. A. Hardie), 북감리교 노블(W. A. Noble), 북장로교 마펫(Samuel A. Moffett),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 그리어슨(R. Grierson)이 선교회 및 개인 사정으로 이 일에 전념할 수 없어 구약성경의 번역은 자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감리교 선교사 그램(W. G. Gram, 奇義男)이 추가되었고, 기대를 모았던 피터스도 번역진에 참여했으나 이들 역시 몇 개월 만에 사임하는 바람에 더 이상 구약성경의 번역 추진은 진행되지 않았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구체적인 실천, 사경회운동의 활발한 전개 그리고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한국의 영적 각성운동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도 신약성경은 물론 구약선경의 번역 작업은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글 성경 출판에 관심을 갖고 있는 미국 성서공회와 대영 성서공회에서도 속히 신구약 성경이 한글로 번역 출간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1907년 봄,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 한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던 그때, 미국 성서공회의 팍스(Fox)와 영국 성서공회의 릿슨(Ritson)이 내한하여 한국의 성서실행위원회와 만나 한글 구약성경의 조속한 완성을 위해 레이놀즈와 두 명의 한국인 조사 이승두와 김정삼에게 구약성경의 번역을 일임하기로 결정하고, 두 명의 한국인 조사를 정식 번역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라틴어뿐 아니라 헬라어, 히브리어에 대한 조예가 깊고, 체계적인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교육을 받은 레이놀즈의 책임 하에 구약성경의 번역 작업은 놀라운 진전을 보였다. 전킨의 사망으로 레이놀즈가 불가불 1908년에 전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도 번역에 전념해 1910년 4월에 번역을 완료했다.

번역 완료 이듬해인 1911년 3월 완성된 구약성경이 2책 혹은 3책으로 나누어 전체가 인쇄되었고, 5월‘성서주일’에 출판 감사예배가 드려졌다. 1906년 신약성경 공인본이 출판된 지 5년 후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이 출판됨으로써 1911년까지는 신구약성경 번역이 모두 완료된 셈이다. 첫해 무려 8,000권이 팔릴 정도로 구약성경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이때 완성된 신구약 역본을 구역이라고 하고, 그 후 개정 작업을 거쳐 1937년에 나온 역본을 개역이라고 한다.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전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성경 보급이 더욱 활기를 띠었고, 오랫동안 기대를 모았던 구약 번역이라 출판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구매했기 때문이다.

(5) 신구약 개역성경(1911-1937)

구약성경의 번역이 완성되자 그 해(1911)에 곧바로 구약성경 개역을 위한 개역자회(The Board of Revisers)가 구성되었다. 구약성경의 개역자회가 먼저 구성된 것은 신약은 한 번 개역과정을 거쳤으므로 신약보다는 구약의 개역 작업이 보다 시급하다는 일반적인 의견 때문이었다. 고도의 집중력과 경험과 실력을 요구하는 개정 작업을 위한 개정위원에는 15년 이상을 성경번역에 시간과 정열을 쏟으며 전념해 온 레이놀즈와 언더우드, 게일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헌신적으로 이 일을 맡아 수고해 온 레이놀즈가 위원직을 사임하고, 위원장직을 맡아 성경 번역에 처음부터 주도적인 일을 감당해 온 언더우드가 1916년 세상을 떠난 데다,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위원장직을 맡아 수고하던 게일마저 다른 개역위원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위원장직을 사임하면서 구약성경의 개역작업은 큰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다른 위원들은 원어의 문법적인 구조에 충실하려 했던 반면, 게일은 한국적 스타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게일의 접근 벙법은 과거 신구약 번역 과정에서 레이놀즈가 사용했던 접근 방법과 달랐다.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게일은 한국적 스타일의 번역을 추구했고, 반면 언어학자며 신학자인 레이놀즈는 원문과 신학에 충실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1921년 구약 개역위원회에서 게일이 번역한 창세기 시범 본문을 놓고 선교사들 간에 격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1922년 이원모 장로와 함께 구약 개역위원회를 탈퇴한 게일은 그동안 한국어 풍에 맞게 정성스럽게 번역한 원고를 정리하여 1925년 신구약전서를 기독교 창문사에서 출간했다. 이 번역의 의의는“한국어 풍을 어기지 아니하기로 노력하였다.”고 서문에 밝힌 대로 성경의 원어 사고 형태에서 정확한 저자의 의미를 제시하기보다“원어의 의미를 취해 한국인의 언어와 문법을 따르도록”시도하였다는 점이다.

게일이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이원모가 개역위원회에서 떠난 후 그동안 위원직을 사임하고 자문 역할만 하던 레이놀즈가 1924년 위원회에 다시 합류하고, 1926년 히브리어에 능통하고 ‘시편촬요’를 출판했던 유태인계 개신교 선교사 피터스,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취임한 남궁혁, 프리스톤에서 구약을 전공하고 돌아온 김관식 그리고 베어드의 조수 김인준이 위원으로 추가 임명되면서 구약성경의 개역 작업은 놀라운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평양신학교와 숭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레이놀즈, 남궁혁, 엥겔, 베어드를 축으로 한 평양 지역에 거주하는 번역위원들이 구약의 개역 작업을 주도했다. 특히 베어드가 1925-1926년의 안식년 동안 프린스톤신학교와 시카고대학에서 히브리어를 연구하고 돌아와 번역 작업을 추진하면서 개역 작업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26년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개역 작업이 끝났고, 1930년에는 구약 39권 중 17권의 개역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년 사이에 놀라운 진전이 있었던 이면에는 베어드의 숨은 노력이 컸다. 그러나 그가 서울로 옮기고 얼마 후인 1931년 11월 28일, 갑자기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개역 작업은 또 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베어드가 세상을 떠난 후 개역 작업은 피터스와 레이놀즈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다. 히브리어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던 피터스가 개역이 미완료된 나머지 구약성경을 개인적으로 개정을 한 후 이것을 다른 위원들이 교열,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일은 1934-1935년 겨울, 레이놀즈와 게이블이 시편, 레이놀즈가 전도서와 스바냐, 엥겔이 아모스를 맡아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위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35년에는 전도서와 시편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안식년에서 돌아온 피터스, 레이놀즈 그리고 1935년에 위원으로 다시 영입된 이원모 등 세 명은 서울, 지리산, 평양 등지를 옮기며 개역 작업에 몰두해 1936년 봄, 구약 개역 작업을 완료하고, 구약전서 개역을 출간했다. 선교사 11명, 한국인 4명이 참여한 구약성경개역 작업은 1911년에 시작해 1936년에 완료되었으니 무려 4반세기의 작업과정을 거친 셈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 일에 생명을 걸었던 레이놀즈와 1926년부터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혼신을 다했던 베어드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개인적인 역본을 만들어 준 피터스 세 사람의 숨은 노력과 남궁혁, 김관식, 김인준 그리고 이원모 등 네 명의 한국인 위원들의 희생과 협력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신약개역이 완료된 것은 구약이 완료된 이듬해인 1937년이었다. 1926년 신약개역자회가 조직된 이래 구약개역 작업에 비해 그 기간이 단축된 것은 내용의 분량이 적은 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신약의 경우 이수정, 존 로스 역 그리고 여러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 시험 역본을 만든 다음 출판했기 때문이다.

신약개역자회는 남감리교 스톡스, 남장로교 윈(S. D. Winn, 韋仁仕), 호주 장로교 커닝험(F. W. Cunningham, 權任咸), 북장로교 로스(C. Ross, 盧世永), 북장로교 베어드 2세(W. M. Baird Jr. 裵義林), 남장로교 크레인(J. C. Crane, 具禮仁) 그리고 남궁혁이었으며, 1934년 여름 레이놀즈가 이 일을 지원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37년 신약개역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해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인쇄되었고, 1938년 개역된 신약전서와 신구약 합본 성경개역이 발행되어 개역 작업을 착수한 지 26년 만에 신구약 개역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외에도‘원산번역’으로 알려진 1919년에 출간된 펜윅의 사역(私譯) ‘신약전서’와 게일이 1923년 개역위원직을 사임하고 그의 조수 이원모와 함께 1925년 기독교창문사에서 발행한 ‘신역신구약전서’가 있으며, 유성준의‘신약전서’(1906년, 국한문성경의 효시), 동양선교회(성결교) 카우만의‘부표관주신약전서’(1910년, 최초의 한글 관주성경) 등이 출판되었으며, 1925년에는 한국맹인선교의 창시자인 홀 부인이 점자신약성서를 출판했다.

 

 

한국교회사(56)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6) 한글 성경 번역의 의의

복음을 받아들인 지 4반세기 만에 신구약성경의 번역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중국과 일본 같은 국외에서 한글 성경이 출간된 데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어떤 사역보다도 성경 번역에 전념했던 결과였다. 1909년‘전환기의 한국’에서 게일(J. S. Gale)은 한글 성경 번역의 중요성을 그 필요성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개척 선교사들이 한 일 가운데는 성경 번역하는 작업이 있었는데,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그것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뉴욕의 60층짜리 생명보험 빌딩을 짓는 일도 이 일만큼 큰 작업은 못 된다. 그 일을 하는 데는 약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놓기 위해 땅을 파야 하듯 문장들을 골라내고 단어들의 의미를 파헤치며 엄습해 오는 말라리아와 피곤과 싸우면서 선택하고 재어보고 판단하고 기록하는 모든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우리에게 파나마운하 파는 것을 연상시킨다. 말 그대로 파나마운하인 이 신약성경은 두 거대한 대양, 즉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양과 인간 필요의 측량할 수 없는 대해를 연결시키는 운하이다.”라고 하였다.

성경 번역의 완성의 뒤안길에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깊숙이 깔려 있었다. 언더우드는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생 동안 위원장직을 맡아 이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성경번역 사업을 추진하였고, 아펜젤러도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모이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다 배가 난파당하는 바람에 생명을 잃었고, 언더우드는 1915년 여름 동안 한글 성경의 개정 작업에 몰두하다 결국 건강을 잃은 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때의 상황을 그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15년 여름은 소래 해변에서 보냈다. 이 무렵에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에 여름 오두막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긴장을 풀고 편안한 휴식을 필요로 하는 때라 가족들이 크게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는 레이놀즈 박사와 함께 구약성서 중의 한 권을 최종 개역하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성경 번역을 하는 데 수반되는 긴장감과 강한 정신집중은 그가 피해야만 할 것이었다. 따라서 비록 여름을 소래 해변에서 보냈지만 예전에 심신을 푹 쉬어 건강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별로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희생이 불가피했던 것은 성경 번역의 과정이 성경 원문의 정확한 이해는 물론 한글에 대한 정확한 식견도 겸비해야 하므로 어떤 선교사역보다도 고도의 집중력, 인내 그리고 지혜가 동시에 요구되는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이 만난 난관은 한글에서 정확하고 명료한 개념을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때로 한글에는 이러한 추상적이고 영적인 진리를 담은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내거나 설명을 하거나 예시를 하는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또한 정확한 개념이 파악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업은‘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딱딱하고 고전적인 말로 표현하지 않도록’평이한 언어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위원회는 고상한 문체와 상스러운 문체의 두 암초 사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 애써야 했으며,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체이면서도 동시에 학문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정숙하고도 깔끔한 문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으로 정규 번역위원에 참여한 김정삼, 이원모, 이승두는 좀 더 우리의 정서에 맞게 번역을 다듬었고, 상급 번역자 게일과 레이놀즈는 원문의 의미를 살려 번역의 질을 한 단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고전어에 능통했던 레이놀즈는 구약성경 상당부분을 맡아 번역하고, 다른 선교사들이 번역한 것을 좀 더 원문의 의미에 가깝게 수정하는 일을 감당함으로써 한글 성경의 완역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성서번역위원회 위원들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의 지혜였다. 언더우드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기도하는 일이었다. 각 사람들은 이 일을 맡은 것에 대해 큰 책임감을 절감하고 있었으며, 성령의 도움 없이는 자신이 이 일에 부적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지혜를 간구했다. 이 지혜 없이는 일을 완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글 성경은 한국에 파송된 번역위원회 소속 선교사들의 탁월함, 지치지 않는 끈기와 인내 그리고 훌륭한 한국 번역위원회의 헌신적인 협력이 어우러진 걸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모든 번역 작업이 주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이룩될 수 없었다며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한글 성경 출간은 역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번역의 우수성이다.

번역위원회는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고전어 성경뿐만 아니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외국 성경을 참고했다. 모든 성경 번역이 그렇듯이 그 성경을 번역한 번역진과 참고한 역본은 번역의 질을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한데, 번역과정에서 성서번역위원회가 참고한 역본은 고전어로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이고 현대 역본으로는 영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 성경이었다. 이렇게 성경 원문에 기초하면서 현대 외국성경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을 진행했기 때문에 한글 성경은 그 번역에 있어서 매우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둘째, 한글 성경이 복음주의적 시각으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의 사상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성경 번역 역시 번역과정에서 번역자의 신학적 입장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점에서 한글 성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레이놀즈, 스크랜턴 등 한글 성경 번역에 참여한 번역진들 모두가 성경의 권위와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을 존중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지닌 이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한글 성경에는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반영되어 번역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한글 성경 번역진에 끝까지 남아 한글 성경을 완성했던 인물들 대부분이 보수적인 장로교인들이었다. 한글 성경에 복음주의적이고 장로교 색깔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글 성경이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신의 개념을 표현하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성경의 유일신 개념을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이 일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었고,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절대자 개념,‘ 하나님’을 성경 히브리인들의 유일신 개념으로 채택함으로써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흔히 다신론 백성들이 갖기 쉬운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유일신 개념을 바르게 심어 줄 수 있었다.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는 한글 성경을 번역하면서‘하나님’을 사용했으나, 1894년 출간된 한글 복음서에서는‘텬쥬’와‘하나님’을 동시에 사용한 후‘텬쥬’,‘ 하나님’,‘ 샹뎨’,‘ 참신’등을 혼용하다 1906년 신약성경 공인본에서‘하나님’으로 통일시켰다.

셋째, 한글 성경이 민중 사이에 널리 보급되면서 한국의 민족복음화와 한글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민중 사이에 복음이 놀랍게 저변 확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민중의 언어인 한글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계층이 주로 사용하던 한문에 밀려서 한글은 아녀자나 어린이들 그리고 천민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글로 인식되어져서 한글 자체가 천시되고 있었다. 이런 한글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들여 민중의 언어로 대중화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복음을 전파하자 식자나 무식자나 양반이나 천민이나 남녀노유(男女老幼) 할 것 없이 복음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연히 한글 성경은 한글의 저변 확대를 통해 한글 문화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1934년 해리 로즈가 언급한 것처럼 사장된 언어를 민중의 언어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글 성경이 감당한 것이며, 민경배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한글 가치의 발견이나 그 보급에서 교회가 끼쳤던 공헌은 실로 절대적”인 것이었다.

넷째, 성경이 민중들 사이에 저변 확대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권서인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이다.

1882년 10월 존 로스에 의해 영국 성서공회 권서가 되어 의주와 서울에서 성서를 보급하면서 이 제도는 널리 보급되었고, 후에 예수교서회에서도 1915년부터 전임 권서제도를 도입해 기독교 문서를 보급하는 데 활용했다. 1916년 염재로, 박화연, 김성삼, 남기원 등 네 사람의 권서가 마산, 목포, 안동, 경기도에서 맥래(F. J. L. Macrae), 맥칼리(H. D. McCallie), 앤더슨(W. J. Anderson) 및 본윅(G. Bonwick)의 감독 아래 기독교문서를 보급했다.

권서는 유급과 무급 권서로 나뉘며 유급 권서는 성서공회에 소속되어 일정액의 월급과 여비를 받는 전문권서들을 말하고 무급 권서는 성서공회로부터 성경을 할인받아 정액으로 팔아 마진을 남기는 자들로 매서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급 권서중에는 서포라 하여 서점이나 선교부에 설치된 보급소에서 성경을 보급하는 자들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성경을 보급하거나 갑지(대도시), 을지(중소도시), 병지(시골)를 다니며 성경을 보급하는 이들도 있었다.

권서인들은 주로 성서공회나 선교회 혹은 개인 선교사와 교회에 의해 파송을 받아‘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어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성서공회 총무 벡크(S. A. Beck)가 지적한 대로‘권서는 복음의 능력을 증언하는 설교자며, 개척자요, 선구자’였다.

성경보급의 확대는 곧 복음의 저변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0년 3월 코리아 미션 필드는 1900년과 1918년 사이에 대영 성서공회에서 6백 2십만 부의 한글 성경을 보급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다 밀러(Hugh Miller)의 통계가 제시한 1908년과 1925년 사이 18년간 보급된 970만 부의 한글 성경을 합친다면 한국인들에게 보급된 성경은 참으로 경이적인 숫자라 아니할 수 없다. 놀라운 일은 대영 성서공회의 경우 전체 반포 성경 중 85.3%, 미국 성서공회의 경우 97.79%가 권서에 의해 반포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통해 한국 전역에 복음이 편만하여감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한국교회사(5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7) 찬송가 발간

선교 초기 한국에는 찬송가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를 통해 전도를 받은 한국인들이 중국 찬송을 배워서 한국에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백홍준이 즐겨 불렀다는‘주 예수 애워’(主耶蘇愛我, 현행 찬송가 411장, 예수 사랑하심은)가 있다.

이후 찬송가가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1886년 이후 배재, 이화, 경신, 정신 등의 학교가 세워지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배재 학당의 교과목을 보면 성경, 영어 등과 더불어 창가라는 이름의 음악과목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음악수업은 1887년부터 시행되었고, 교재는 서양의 찬송가였다. 당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서는 처음에는 영어 찬송을 그대로 가르치다가 점차 한두 줄씩 번역하여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렇게 번역된 찬송가들을 편집 출판하여 사용하였다.

① 한국 최초의 번역찬송가 모음집인 감리교의 찬미가

한국 최초의 찬송가집은 1892년 감리교의 존스(George H. Jones)와 로 스 와 일 러 (Louise C. Rothweiler)가 발행한‘찬미가’인데, 여기에는 모두 27곡의 번역 찬송가가 악보 없이 가사만 실려 있고, 감리교 전용으로 제작되었다. 1895년 감리교는 찬미가를 수정 증보하여 81편을 수록하고, 곡명과 운율을 표시하고 곡이 수록된 원찬송가의 명칭과 수록된 장수나 쪽수를 표시한 ‘찬미가’를 출판하였다. 이 찬송가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사용하던 감리교 교파 찬송가에서 57곡의 예배 찬송이 왔고, 19세기 미국의 부흥집회 노래인 복음찬송들이 복음찬송가집에서 14곡이 왔다. 그 후 1897년에 9편의 찬송을 더 수록하여 찬미가 제3판을 발행했다. 이 찬미가에는 십계명과 주기도문 그리고 사도신경이 수록되어 있는데, 사도신경에 하나님 대신에 천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독특하다. 이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한국어 어학교사였던 조성규가 천주교인이었으므로 감리교에서 천주라는 천주교의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② 한국 최초의 악보찬송가인 장로교의 찬양가

1894년 언더우드는 존스 목사에게 의뢰하여 장·감 선교부에서 공동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악보를 삽입한‘찬양가’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감리교 선교사들은 언더우드가 원번역자의 허가도 없이 다른 사람의 번역을 포함시켰고, ‘신’의 호칭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여호와’로 대치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번역을 마음대로 고쳤다는 이유를 들어 찬양가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거절하였다. 이 일로 초기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 약간의 불화가 있었다.

찬양가는 한국 최초의 악보 찬송가로 117편의 찬송을 4성부 악보와 같이 찬송가로서의 규모를 갖춘 것으로, 역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찬송가이다. 찬양가는 한국인이 창작한 9편의 찬송과 108편의 번역찬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③ 초기 장로교 찬송가인 찬셩시

언더우드의 찬양가를 채택하지 않은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는 1895년 선교사 리(Graham Lee)와 기포드(M. H. Gifford) 부인의 공편으로‘찬셩시’를 발간하였다. 이것은 가사판으로 54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영어가사 첫줄과 곡명과 운율만 표시되어 있다. 찬셩시는 영문 서문에 한국인들이 뜻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번역찬송을 선택했으며, 번역자는 언더우드, 존스, 로스와일러 그리고 베어드 부인이라고 썼다. 이후 찬셩시는 1898년에 가사판 84편으로 증보되어 북장로회 선교부 편집위원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1905년까지 계속 증보되어 11판이 발간되었다.

④ 최초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 찬송가인‘찬숑가’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년)를 장로교와 감리교가 같이 쓰기 위해 만들었으나 선교사들 간의 불일치로 감리교는 찬미가를 장로교는 찬셩시를 따로 만들어 사용해 왔다. 그러다 1905년 9월 재한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이 교파연합운동의 일환으로 복음주의 공의회를 조직할 때에 장·감 공용 찬송가의 편성과 간행을 결의하였으며, 이를 위해 통합공의회 찬송가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통합공의회의 합동 원칙은 이미 사용하던 찬송가를 토대로 새 찬송가도 첨가하되‘말은 존경어로 구조가 명확하며 의사가 정당하고 교리에 덕절한 것’만 쓰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1908년에‘찬숑가’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찬숑가에는 곡조 이름과 그 곡조가 수록되었던 원자료집의 명칭과 장을 수록해 주고 있어 그 출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찬숑가에 수록된 262곡 중 삼분의 일이 19세기 미국의 부흥회 노래가 차지하고 있고, 찬셩시나 찬미가보다 소위 복음찬송이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찬숑가에서 주목할 점은‘Korean Music’이라 하여 한국 고유의 곡조로 부르게 한 찬송 5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제10장(높은 일흠 찬양하고), 제11장(하나님이 텬대내고), 제12장(해가 가난 길과 갖치), 제13장(전능하신 아버지의), 제40장(하나님 내 목쟈시니)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한국 고유의 곡을 붙인 찬송들은 인도자가 먼저 한 줄을 부르면 회중이 그것을 따라 부를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곡조가 10장에만 나와 있고 나머지는 10장과 모두 같은 운률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10장 곡조를 사용하든지 아니면 인도자의 재량에 따라 다른 한국 가락으로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고유의 가락이라는 제10장의 노래는 4분의 2박자의 사장조로서 점8분음표와 16분음표의 반복인 당시 전형적인 창가 형태의 노래이며, 한국 창가가 일본 노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5음음계의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상으로는 한국 고유의 맛이 없다. 또한 곡 도중에 숨을 쉴 만한 여유가 없이 계속 같은 리듬이 반복되고 있고, 마지막 부분도 종지(終止)의 느낌이 들지 않는 불완전하고 전통 가락적이지 못한 노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찬숑가’는 우리나라 찬송가 역사상 최초의 한국 가락의 출현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가사적인 측면에서도 이전 찬송가집과는 달리 우리말의 억양을 잘 살려 거의 완벽하게 번역되었으므로 현행 찬송가 가사의 초석이 되었다.

찬숑가는 최초의 통일 찬송가로, 1930년대에 와서 다시 감리교의 신정찬송가와 장로교의 신편찬송가로 갈라지기까지 20여 년 동안 한국 교회의 부흥기에 사용한 찬송가였으며, 신정찬송가에 180편, 신편찬송가에 220여 편, 현행 통일찬송가에 178편이 수록되어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핵심을 이루어온 찬송가라 할 수 있다.

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합동찬송가’

조국의 해방과 함께 장·감·성 세 교파에서는 위원 각 2인씩을 파송하여 1946년 찬송가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찬송가를 하나로 합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49년에 ‘찬송가’란 명칭으로 통칭‘합동찬송가’를 출간하게 되었다. 이 찬송가는 한국인의 손으로 편집된 최초의 찬송가란 점에서 의의가 컸다. 그러나 새로운 편찬이 아니라 세 가지 찬송가를 합한 것이었기 때문에 곡과 가사의 중복이 많고, 처음부터 불리던 미국의 부흥회 노래인 복음 찬송이 성결교의 부흥성가와 합해져서 더욱 증가되어 한국 찬송가의 중심이 되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찬송가에는 총 586장의 찬송가와 38편의 교독문이 실렸으며, 한국인 작사의 찬송은 모두 6곡으로(171, 195, 205, 363, 459, 486장) ‘신정찬송가’의 7곡 중‘예수난 우리의 생명되고’를 뺀 나머지 곡들이 그대로 실려 있다. 이 찬송가는 새찬송가와 개편찬송가가 나오기까지 한국교회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찬송가가 되었다.

⑥ 새찬송가와 개편찬송가

1960년대 교단이 분열되면서 찬송가도 분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고려파 총회는 1935년 장로교 단독으로 만든‘신편찬송가’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또한 예장 통합과 합동이 분열하면서 합동 측은‘합동찬송가’의 사용을 거부하고 별도의 찬송가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60년 12월 합동 측과 고려파가 새 총회를 구성하면서 합동 기념사업으로 새찬송가의 출판을 결의하고, 1962년 12월‘새찬송가’란 명칭으로 생명의 말씀사에서 발간하였다.

이어서 감리교·기장·예장·성결교 등 기독교연합회가 합하여 찬송가 개편 작업에 착수하여 1963년 3월 5일에는 찬송가 개편 8개 원칙에 합의하고 4년 동안 노력한 끝에 1967년 12월‘개편 찬송가’를 출간하였다. 이 찬송가에는 한국인 창작 찬송 27편을 포함한 600편의 찬송이 수록되었고, 성결 교단의 특색있는 복음 찬송 20곡을 후에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개편찬송가는 종래의 한국 찬송가가 선교사들이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복음가, 부흥가들로 주축을 이루고 있었음에 비하여, 예배 찬송과 교회의 의식에 관계된 찬송을 보강함으로 부흥회 중심의 경향에서 예배 중심의 찬송가로 변화
를 시도하였다.

⑦ 한국찬송가공회의‘통일찬송가’

개신교의 찬송가 통일 작업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다가 1981년에 와서야‘한국찬송가 공회’가 발족되어 통일찬송가의 편집, 간행, 관리를 주관하게 됨으로써 박차를 가하게 되어 1983년 11월 9일에 한국 교회가 염원하던 통일찬송가의 출간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찬송가’로 그 동안 한국 개신교회가 사용해 오던 세 가지 찬송가인‘합동찬송가’(1949년), ‘새찬송가’(1962년), ‘개편찬송가’(1967년)를 하나로 통일한 것이었다.

통일 찬송가는 선교 100주년에 이룩한 교회 연합 사업의 결실이며, 세 종류의 찬송가를 사용하던 불편함을 해소하고, 한 가지 찬송가를 같이 부르는 기쁨과 감격을 한국 교회에 안겨 주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공적 찬송가로서 내용과 편집 면에서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표기방법, 작사자, 작곡자 표시에 오류가 있다는 점, 예배를 위한 찬송이 부족하다는 점 등의 아쉬운 점들이 지적되기도 한다.

선교사들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된 찬송가는 한국인들의 신앙 성장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찬송가 보급은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음악 장르인 교회음악(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에 교회음악과 서양음악이 정착 발전하는 데 한국교회 성도들이 일조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찬송가 보급은 한글을 저변 확대시키는 중요한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사(58)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8) 문서 선교

① 조선셩교셔회(대한기독교서회) 창립

선교사들은 선교 사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기독교문화를 한국문화 속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기독교 문서를 보급하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 일은 1888년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기독교문서 출판을 위한‘삼문사’(한글, 한문, 영문을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라 하여 삼문사라 이름하였음)를 설립하고, 배재학당 지하실에‘미이미활판소’를 설치한 데서 출발되었다. 이후 1889년 미이미활판소 운영을 위해 중국에서 올링거(F. Ohlinger) 목사가 내한을 하였고, 장로교 의료선교사 헤론(J. W. Heron)의 제안에 의해 서울 정동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택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독교문서 출판사 설립을 위한 비공식 회합을 가졌다. 그 결과 1890년 6월 25일‘조선셩교셔회’(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가 창립되었으며, 초대회장에 올링거 목사, 창립위원에 언더우드, 스크랜튼, 아펜젤러, 게일, 헐버트, 레이놀즈, 기포드가 되었고, 임시 사무소는 빈톤(C. C. Vinton)의 집에 설치되어 문서 보급의 새 장을 열었다.

② 신앙서적의 출간

1890년 언더우드의 셩교촬리(聖敎撮理)를 시작으로 1903년까지 25만 권의 종교서적을 출판했다. 1892년 장로교선교공의회에서는‘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모든 문서 활동에 있어서 한자의 구속을 벗어나서 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기독교 문서의 한글 전용 원칙을 확립하여 실행하였다. 여기서 출간된 마펫의 장원양우상론(長袁兩友相論), 게일의 천로역정(天路歷程), 헐버트의 사민필지(士民必知)와 같은 서적은 교인뿐만 아니라 온 한국 백성들에게 널리 읽혀 복음의 접촉점이 되었다. 장원양우상론은 1893년에 간행된 기독교 전도문서로 밀른(W. Milne)이 저술하고, 마펫이 번역한 것인데, 본래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된 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기독교 선교 초기에 가장 널리 읽혀진 전도책자였다. 형식은 친구 사이인 장씨와 원씨 두 사람이 대담하는 소설체로 엮여졌으며 내용은 보유론(補儒論) 입장에서 유교와 비교하여 기독교 진리를 변증한 것이었다.

1895년에는 최초의 번역소설인‘천로역정’이 기독교인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어 기독교 신앙의 저변 확대를 가져다 주었고, 한국 신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1897년에는 노병선의 저술로 기독교 전도문서인 파혹진션론(破惑進善論)이 간행되었다. 당시 배재학당 출신 감리교 전도사였던 노병선은 기독교를‘서양의 종교’라고 하여 배척하는 기독교 반대자들을 향해“기독교는 동양의 종교도, 서양의 종교도 아닌 하늘의 종교다.”라는 논리로 기독교를 변증했다. 이것은 문장이 부드럽고 평이하여 구어체 한글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1900년에는 병인사주(病人事主)라는 전도문서가 간행되었는데, 날 때부터 반신불수였던 톰이 죽음을 앞두고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 종이에 성경구절을 적어 집 근처에 매일 던져 놓았는데 그것을 주워 읽은 교인이 감동하여 선교회를 조직하고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소설식으로 적은 것이다.

1904년에는 길선주 저술의‘해타론’(게으름을 피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에 임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과 로스가 저술한 ‘원입교인규조’를 스크랜튼 부인이 번역한 기독교 안내서가 출판되었다.

1906년에는 노블(W. A. Noble) 부인이 저술한‘아모권면’이 기독교 계몽도서로 출판되었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선교사 노블 부인이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녀자들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아이를 대하는 신앙적 자세에서부터 아동 음식, 목욕법, 아동 질병, 아동 위생 등 다양한 분야의 상식을 소개하고 있으며, 부녀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씌어져 있다.

③ 사전 편찬

언더우드에 의해 1890년에 한영문법과 한어자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한영부(Korean-English)와 영한부(English-Korean)로 나뉘어져있음, 1890)>이 출판되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어 연구를 통해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후 송덕조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며, 이 땅에 온 첫 선교사로서 후임 선교사들을 위해서도 한국어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으며, 천주교의 프란치스칸 신부들에 의해 이미 편찬 간행된 한불자전이 그를 더욱 자극하여 사전 편찬에 열심을 내게 했다. 해서 그는 1887년경부터 사전 출판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1889년 8월에는 출판할 수준에 다다랐다.

이때의 상황을 언더우드는 선교부의 보고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는 또한 한국어 사전과 편람에 관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제가 매우 철저하게 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수년이 걸리는 작업이 되겠지만, 후자는 제가 1년 전 경에 말씀드린 것과 같은 내용이고, 그때 이후로 많이 진척되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계속해서 제게 그것을 출판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저는 그 일을 맡을 여유가 없습니다.… 만약 선교부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내년 봄에 저로 하여금 이것을 출판하는 일을 처리하도록 하기 위해 저를 일본에 보낼 것이고, 저는 그것을 출판하기 위해 노력하고 돈을 빌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출판 준비가 거의 끝난 한국어 사전의 출판 예상비용은 약 600-700달러나 되는 큰 금액이었지만, 이 경비를 선교부에서 부담하려 하지 않을 경우 언더우드는 자신만의 특유한 배짱으로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1889년 8월 말에서 9월 초에는 인쇄를 끝낼 예정을 가지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당시에 발행하고자 했던 사전은 포켓형 사전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인쇄 및 제본이 불가능해서 부득불 일본에서 출판해야만했다. 언더우드는 사전을 출판하기 위해 1889년 11월에 도일하여 한영문법, 한어자전을 출판했는데, 한어자전의 편찬에는 게일과 헐버트, 송순용의 도움이 있었다.

언더우드가 출판을 위해 도일(渡日)하여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사전 편찬에 대한 언더우드의 열정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아직도 출판을 하느라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저는 기계적인 교정 작업이 굉장히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특히 한국어와 같은 언어에는 너무나도 엄격한 적용을 요구합니다. 비트는 소리(twisting sound)나 문자를 거꾸로 돌리는 경우에는 큰 차이가 납니다. 물론 제게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교사가 있고, 그가 우선 전체적으로 훑어보지만, 그가 지나쳐 버린 오류를 발견한 이후부터는 그가 훑어본 모든 것을 제가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3개 국어로 되어 있는 책의 절반을 교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사전을 거의 마무리짓게 되어 기쁘고, 만약 모든 일이 잘 된다면 화요일에는 문법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 문법책에는 영어가 더 많으므로, 일본인 인쇄공이 더 빨리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언더우드가 편찬한 한어자전의 한영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한 한불자전에 이은 중요한 성과로서 그 뒤 게일의 한영자전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어자전의 영한부는 한국의 영한사전 편찬에 효시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는데, 그의 후예들은 이를 영한자전으로 증보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게일에 의해 사과지남(辭課指南, Korean Grammatical Forms, 1893)과 한영대자전(Korean-English Dictionary, 1897)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언더우드가 출판한 한어자전과 함께 천주교 선교사들에 의해 간행된 한불자전(1880), 한불문전(1881) 못지않게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언더우드에 의해 한국어회화입문(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 이 1890년에 출판되어 널리 사용되다 1914년에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언더우드의 영한자전은 언더우드가 죽기 전에 개정 작업이 진행되어 그의 아들 원한경(H. H. Underwood)에 의해 1916년에 완성되어 192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그 외에도 1897년에는 베어드 여사(Mrs. Annie L. baird)에 의해 초보자를 위한 한국어 회화 50문형(Fifty Helps for Beginners in the Use of the Korean Language) 이 출판되었고, 1921년에는 원한경에 의해 한국어일상회화(Every-Day Korean)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교본이 출판되었으며, 1924년에는 게일이 오늘의 영한사전(Present Day English-Korean)이라는 제목으로 3,000단어로 구성된 작은 영한사전을 출판했고, 1928년에는 베어드가 영한-한영 회의, 종교, 그리고 기타 용어집(An English-Korean and Korean-English List of Parliamentary, Ecclesiastical, and some other terms)이라는 제목으로 작은 책을 출간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은 성경 번역과 전도문서의 번역 및 출판과 함께 이루어졌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도 한국 문화 발전에 일정하게 독자적인 업적을 남긴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사(5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8) 문서 선교

④ 학술서적 편찬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한 수많은 한글 작품의 번역, 외국 작품의 한글 번역,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언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어로 된 한국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도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통해서이다. 알렌이 1889년에 코리안 테일스(Korean Tales)를 출간했고, 1901년에는 그의 연대기(Chronological Index)가 간행되었고, 2년 후인 1903년에는 부록이 출판되었다. 1904년에는 이들 세 권을 합쳐 코리아 팩트 앤 팬시(Korea, Fact and Fancy)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1898년에는 기포드(D. L. Gifford)의 한국의 일상생활(Everyday Life in Korea)과 그동안 코리안 리파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에 기고된 원고들을 정리 보완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의 코리안 스케치(Korean Sketches)가 간행되어 한국의 풍물과 환경과 역사를 단편적이지만 서양에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4년에는 선교사역이 수행되고 있는 환경, 주변여건 그리고 조건들을 제시하려고 한 뱅가드(The Vanguard)를 출간했다. 그해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선교 초기부터 선교사역의 역사를 제시한 상투쟁이와 보낸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과 극동에서 한 미국 어린아이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 낸 한국의 토미 톰킨스(Tommy Tompkins in Korea)가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아담스(J. E. Adams)의 한국 대구에서의 10년간의 하나님의 역사(A Decade of God''s Doing at Taeku, Korea, 1908)와 동아시아 종교(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1910), 블레어의 한국의 오순절(The Korea Pentecost, 1908), 블레어 여사의 한국의 새벽(Daybreak in Korea, 1909)과 선교사 삶의 내면(Inside View of Missionary Life, 1913),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의 전환기의 한국(Korea in Transition, 1909), 한국의 민화(Korean Folk-Tales, 1913), 구운몽(The Cloud Dream of the Nine, 1922), 그리고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코리아 미션 필드(KMF)에 게재한 원고를 단행본으로 모은 한국 민족사(The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릴리아스(Mrs. L. H. Underwood)의 한국의 언더우드(Underwood of Korea, 1918), 곽안련(Charles Allen Clark)의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s, 1930), 고대 한국의 종교(Religions of Old Korea, 1931), 소열도(T. S. Soltau)의 한국, 은둔의 나라와 기독교에 대한 반응(Korea, The Hermit Nation and Its Response to Christianity, 1932)이 있다. 위에서 언급된 것들은 출판된 저술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출판되어 한국의 역사, 문학, 민족, 문화, 사회, 종교 전반을 학적으로 정리, 한국 근대화에 적지 않게 공헌했다. 또한 에비슨(O. R. Avison)에 의해 의학에 관한 서적들이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하였다.

⑤ 교과서 및 신학서적, 경건서적 출판

1889년에 헐버트(H. B. Hulbert)에 의해 간행된 천문지리서인‘사민필지’(士民必知)는 초보 단계의 천문과 세계지리에 관한 교과서로 국립학교인 육영공원 초빙 교사로 온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저술한 것이었다. 이 책은 서구 근대 과학과 지리, 천문지식을 한국에 소개한 것으로 근대 한국인의 세계관과 우주관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책이 교과서 출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06년에는 밀러 부인이 저술한‘초학지리’(初學地理)가 기독교계 초등학교 교과서로 사용되기 위해 출판되었는데, 세계 각국의 지리를 서술형식으로 위치, 풍토, 정세, 역사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8종류의 천연색 지도가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대한지도’에서 두만강 이북, 장백산 남쪽 동만주 지역을 우리나라 영토로 표시한 것이 눈에 띈다.

1908년에는‘진리편독삼자경’(眞理便讀三字經)이라는 기독교 계몽 도서를 간행하였다. 이 책의 원저자는 존(G. John)인데, 마펫(S. A. Moffett)이 번역하여 대한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하였으며, 줄여서‘삼자경’이라고도 하는데, 기독교의 주요한 교리를 한자 3음절로 짓고 다시 문장을 구성하였으며, 그 전체의 내용을 다시 장별로 구분해서 한글 해설을 덧붙였다. 천자문식으로 되어 있어 초등학교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한자와 한글을 배우며 기독교 도리를 깨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베어드(W. M. Baird)와 베어드 여사(Mrs. Annie L. Baird), 피터스여사(Mrs. Eva Field-Pieters), 밀러(E. H. Miller)부부, 번하이셀(C. F. Bernheisel)이 일반 미션스쿨에서 사용할 교과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고, 클락(C. A. Clark), 스왈른, 베어드, 게일과 많은 다른 이들이 신학교재를 출간했다.

신학교재 출간 중 눈에 띄는 것은 1908년에‘예수천주양교변론’(耶蘇天主兩敎辯論)이라고 하는 기독교 변증서가 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본을 대본으로 최병헌 목사가 역술한 것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상세히 논술하였다. 이 책은 천주교 측에서 개신교 비판용으로 펴낸‘예수진교사패’에 대항하는 성격으로 출판된 것인데 선교 초기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논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27년에는 레이놀즈(W. D. Reynolds)의 편집으로‘성경 사전’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영국기독교서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들이 영문 사전들을 참조하여 편집한 것으로 당시 가장 방대한 성경 사전이었다. 4,500여 항목을 수록하였는데, 이것으로 성경 어휘의 한글 표기 원칙이 확립되었다. 본문 첫 면 하단에 한글 자모를 표기한 것이 눈에 띈다.

마펫, 베어드, 스왈른, 언더우드 그리고 릴리아스는 경건 서적을 출판하였으며, 베어드 여사, 스왈른, 게일, 밀러(E. H. Miller와 F. S. Miller), 헌트 그리고 로즈 등은 성경공부 관련 서적을 출판했으며, 스왈른과 곽안련은 신학서적을, 스왈른, 곽안련, 밀러는 설교와 설교 재료와 교회사를 출판하였으며, 게일, 베어드, 언더우드 부부는 성경강해를, 캐더린 매큔(Catherine McCune)양, 릴리아스, 게일 여사, 램프(H. W. Lampe), 크로터스(Crothers), 윈(Winn)은 개인 전기를, 게일, 홀드크로프트, 베어드, 피터스는 주일학교에 필요한 책과 어린이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⑥ 신문 및 회보 발행

선교회가 발행하는 신문은 교회통신, 신앙강좌, 성경연구, 교계 소개가 주목적이었지만, 새로운 서양 문화와 과학을 소개하고 해외 교계의 소식을 전해 주어 한국 민족이 세계 속에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아펜젤러가 발행한 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 이를 이어 발행된 대한크리스도인회보(1897), 언더우드에 의해 간행된 그리스도신문(1897), 이 두 신문이 합쳐져 간행된 그리스도신문(1905), 이후 감리교가 발행한 예수교신보(1907), 예수교회보(1910) 그리고 장·감이 합동으로 연합하여 출판한 기독신보(1915) 모두 장·감을 대변하는 교단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한국 속에 기독교 문화를 창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게일, 헐버트, 알렌, 호레이스 언더우드, 곽안련 등 수많은 이들이 한국의 역사, 언어, 문화 전반에 걸친 심도 있는 연구서를 출간하였고, 이와 같은 연구들은 코리안 리파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1892-1898),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1901-1906), 코리아 매거진(The Korea Magazine, 1917-1919), 코리아 미션필드(The Korea Mission Field, 1905-1942), 아시아왕립학회 한국지부회지(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에 상당히 나타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문 잡지로는 코리아 미션 필드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901년 빈톤에 의해 첫 출판된 코리아 필드(The Korea Field)와 거의 같은 기간에 존스(J. H. Jones)에 의해 시작된 코리아 메쏘디스트(The Korea Methodist)가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결성되면서 연합운동의 일환에 따라 통합되어 코리아 미션필드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 선교지는 자주 다른 정기간행물 편집인들과 해외 선교부 총무들에 의해 탁월하다는 예찬을 받아 왔다. 이 선교지의 편집인으로 수년 동안 릴리아스(L. H. Underwood)가 수고하였고, 1913년에는 디캠프(A. F. DeCamp)가 그 뒤를 이어 1927년까지 봉사하였고, 이어 수년 간 윌리엄 커(William C. Kerr)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와그너(Ellasue Wagner) 양이 편집 책임자로 봉사했다.

한국 초기 교회가 전한 복음은 단순히 사람을 구원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시대적 정황 속에서 기독교 이상과 정신으로 문화를 변혁시키며 문화 전반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이 실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감당했는데, 그 주요한 도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문서 선교였다.

선교사들은 성경을 포함한 기독교 문서를 통해 신자들의 전도와 양육을 담당했으며, 교과서 및 기타 문서를 통해서는 한국인의 의식을 개혁하고, 문화를 변혁시켜서 애국, 애족, 애민하는 의식을 가지고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또한 더 나아가 선교지(宣敎誌)들을 통해 한국을 세계에 소개하여 선교에 관심을 가진 많은 이들이 한국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였고,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나 한국을 방문한 이들, 혹은 외국에 있는 이들이 한국의 풍물, 관습, 전통, 문화, 역사, 문학, 언어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서 선교의 효과는 직접 선교 못지않게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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