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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2008.11) 인터뷰① -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SGI(국제창가학회) 회장
이 지구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싶다
이케다 다이사쿠
⊙ 1928년 도쿄 오타구 출생.
⊙ 夜學으로 동양상업고교, 대세학원(現 후지대학) 졸업.
⊙ 1960년 창가학회 3대 회장 취임, 창가대학(1971년)ㆍ창가여자단기대학(1985년) 설립.
⊙ 저서: <인간 혁명의 세기로> <20세기 정신의 교훈> <희망의 세기를 향한 도전> 등 50여 권의 대담집 발간.
⊙ 상훈: 세계 27개 국가로부터 국가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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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토인비, 고르바초프, 저우언라이(周恩來), 마거릿 대처, 인디라 간디, 헨리 키신저, 프랑수아 미테랑, 넬슨 만델라 등 세계의 지도자들과 교우하며 세계 평화를 주제로 대화를 한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 21세기의 철학ㆍ문학ㆍ종교ㆍ교육을 말하다
⊙ “‘활자의 힘’이 인간 정신 고양에 큰 도움, ‘文의 힘’은 영원하다”
⊙ 한국을 ‘文化大恩의 나라’로 칭송, 在日 한국인 참정권 보장 주창
⊙ 서울올림픽 때 舊소련과 중국의 올림픽 참가와 지원 약속 받아내
⊙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 “리더의 조건은 솔선수범. ‘자애’와 ‘봉사’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
徐喆仁 月刊朝鮮 기자 (iron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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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I를 아세요?”
필자가 아는 사람 중 특별한 종교가 없는 남녀 10명에게 SGI(국제창가학회)를 아느냐고 물었다. 이 중 8명은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고, 2명은 “국제창가학회 아니냐”고 했다.
모르겠다는 8명에게 “SGI가 국제창가학회의 영어 약자이고, 국제창가학회는 일명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로 불리는 종교”라고 설명하자 그제 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SGI가 한국에 뿌리내린 지 근 반세기가 되었고, 회원이 100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에 10명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적지 않은 신도에 제법 긴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SGI에 대해 낯설어 하는 이유는 우선 이 종교가 비교적 조용히 포교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 온 종교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쓰고 볼 것을 우려해 회원들 각자가 자기 존재를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SGI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렸던 이도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회장에 대해서는 그리 낯설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종교 지도자로서 손에 꼽히는 인물”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세계 유명 인사들과 대담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SGI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 시대 승려인 니치렌(日蓮)이 주창한 佛法(불법)을 신앙의 근간으로 하는 대승불교 단체다.
니치렌의 불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설하고, 우주생명의 근본법인 법화경을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세계적 인물들과 교우
지난 5월 도쿄 하치오지에 있는 창가대학에서 중국 옌안대학이 수여하는 종신교수 수여식에서 기념 연설하고 있는 이케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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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창가학회 제3대 회장에 오른 이케다 다이사쿠는 니치렌의 불법을 기조로 세계 평화 구현을 위해 헌신해 온 인물. SGI를 세계적인 종교로 키운 이도 이케다 회장이다.
그는 서른두 살에 회장에 취임한 이후 54개국을 순방하며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고르바초프 前(전) 소련 대통령,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중국 총리,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인디라 간디 전 인도 총리, 헨리 키신저 전 美(미) 국무장관,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등 수많은 지도자들과 세계 평화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대담 내용은 50여권의 책으로 엮여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한국에는 토인비와 나눈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가 2003년 출간됐다.
이케다 회장은 석학들과의 대담 외에 젊은이와 서민들을 상대로 한 강연도 수없이 했다. 그 덕에 세계 27개 나라로부터 국가 훈장을 받았고, 570여개 도시로부터 명예시민증, 243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와 명예교수 자격을 받았다. 젊은 인재 육성을 위해 일본과 미국에 창가대학도 설립했다.
SGI는 현재 전 세계 192개국에 진출해 있으며, 회원이 2000만 명에 이른다. 이 거대한 조직을 이끌고 있는 이케다 회장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다방면에 지식이 풍부했고, 에너지가 넘쳤다. 한국의 고전을 즐겨 읽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꿰뚫고 있었다.
―한국의 나이로 팔순입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많은 분들의 염려 덕분에 80세를 넘었습니다. 건강하게 공사다망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요. 아내도 ‘지금이 가장 건강하시네요’라며 기뻐할 정도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병마와 싸웠습니다. 결핵을 앓으면서도 전쟁 중이라 근로동원이나 군사훈련에 나가야 했고, 치료나 요양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도 “서른 살까지 살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걱정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아 언제 쓰러져도 후회하지 않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孔子(공자)는 ‘70을 從心(종심)이라 하여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교육자였던 공자의 심경을 저 나름대로 헤아려 80세를 정의하면 ‘청년과 함께 미래를 연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최근 들어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일 역시 교육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창립한 창가대학교에는 한국의 우수한 영재들이 찾아와 배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한국에 ‘행복유치원’을 개원했지요. 한국은 문화ㆍ교육의 나라입니다. 한국과 문화ㆍ교육의 교류가 한층 다양하고 넓어지고 있어 매우 기쁩니다.”
―저술 작업에도 열성적이라고 들었습니다.
“토인비 박사를 비롯해 세계의 지성들과 문명을 논하는 대담집을 발간해 온 것이 어느덧 50권이 되었습니다.
제주대 총장이셨던 趙文富(조문부) 선생과도 두 권의 대담집을 냈고, 지금은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과 나눈 두 번째 대담을 엮고 있습니다.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의 대담도 진행했고요.
그 밖에 우리 학회 기관지인 <세이쿄 신문>에 소설 <新(신)인간혁명>을 연재하고 있고, 각종 매체에 발표할 원고를 준비하는 시간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위대한 독립 지도자 金九(김구) 선생님은 ‘문화의 힘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다른 나라에도 행복을 전파한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평화와 善(선)을 가져다주는 ‘문화의 힘’은 양질의 활자문화가 아닐까 생각해요.
활자문화의 쇠퇴가 두드러지는 현대에 ‘언론의 힘’을 복권시키는 것은 세계적인 과제입니다. 여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매일 펜을 쥐고 있지요.”
―이케다 회장께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게 여겨질 만큼 좋은 습관이 있습니까.
“특별한 습관은 없지만 20여 년 전부터 틈틈이 걷거나 체조를 하는 등 몸을 부단히 움직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청년들을 만나 격려하는 일도 지금껏 쉬지 않고 계속해 온 일입니다. 이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회장이나 도다 2대회장이 실천한 우리 학회의 전통입니다.
동양에는 靑出於藍(청출어람)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어요. 청년들을 자기보다 나은 인재로 키우는 것이 창가학회의 교육 이념이자 전통입니다.”
<춘향전>, 李退溪, 尹東柱 글 즐겨 읽어
이케다 회장(왼쪽)은 1971년 유럽ㆍ북미 방문 중 영국 런던에서 아널드 J. 토인비 박사(오른쪽)와 세계 평화를 주제로 대담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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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이며, 그럴 때 기분은 어떻습니까.
“32세의 젊은 나이에 회장이 된 저는 항상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과 만나 왔습니다. 토인비 박사와 처음 만났을 때 박사는 83세, 저는 44세였습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만났을 때는 총리가 76세, 제가 46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만나는 분 대부분이 저보다 어리더군요.
저우언라이 총리가 ‘젊은 당신과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의 저야말로 저우언라이 총리와 같은 마음으로 젊은 분들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제가 경애하는 퍼그워시회의(핵무기와 세계평화에 관한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회의. 창시자인 조지프 롯블랫 경은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에 퍼그워시회의와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편집자 주)의 롯블랫 박사는 90세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런던에서 오키나와에 있는 저희 연수원까지 와 주셨습니다.
박사님께서 서거하시기 2년 전에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네요.”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많은 분들이 내게 자서전을 쓰라고 권하지만 나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헛된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으니까요. 미래를 향해 항상 앞으로 나가고 싶습니다’라고 했어요. 저도 지금 같은 심정입니다.
조선시대의 3대 시인으로 평가되는 朴仁老(박인로) 선생이 남긴 ‘立岩(입암)’이라는 시조가 떠오릅니다.
‘江頭(강두)에 屹立(흘립)하니 仰止(앙지)에 더욱 높다/風霜(풍상)에 不變(불변)하니 더욱 굳다/사람도 이 바위 같으면 大丈夫(대장부)일까 하노라’
언제나 이 바위처럼 강하고 신념에 찬 삶을 살고 싶습니다.”
―최근에 대담을 나눈 석학은 어떤 분이며,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지난여름 미국의 전통 있는 교육연구기관 ‘존 듀이협회’의 짐 게리슨 회장(버지니아공대 교수), 래리 히크먼 전 회장(서던일리노이대 카본데일 캠퍼스 듀이연구센터소장)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듀이 박사는 마키구치 초대회장과 도다 2대회장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행복을 추구하고 대화를 중요시하는 휴머니스트라는 점에서 박사의 철학과 창가교육의 이념은 깊이 통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마침 대담 날짜가 8월 12일, 유엔이 정한 ‘국제청소년의 날’이어서 교육을 테마로 대화했습니다.
듀이 박사가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에 경종을 울린 것도 화제가 되었죠. 창가학회 초대회장과 2대회장도 일본의 군부 권력과 맞서 옥중투쟁을 했기에 아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케다 회장께서는 독서를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즐겨 보시는 책은 어떤 것입니까.
“‘독서는 성숙한 인간을 만든다’ ‘지식인은 文字香(문자향)과 書卷氣(서권기)가 흘러야 한다’, 이것은 ‘歲寒圖(세한도)’로도 유명한 추사 金正喜(김정희) 선생의 신조였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문구인데, 독서하는 데 큰 자극이 되었죠.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철학자 듀이의 책과 청년시절부터 애독해 왔던 에머슨 문집입니다.
휘트먼의 시집 <풀잎>도 다시 읽고 있지요. 그밖에 톨스토이와 괴테 전집은 항상 곁에 두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전 <춘향전>도 즐겨 읽는 책입니다. 李退溪(이퇴계), 신사임당, 尹東柱(윤동주), 柳寬順(유관순), 安昌浩(안창호), 韓龍雲(한용운) 등의 글은 제가 청년들에게 자주 읽어주는 명문들입니다.”
시대 변해도 ‘文의 힘’ 영원할 것
1974년 중국을 두 번째 방문한 이케다 회장이 베이징 시내에서 저우언라이(왼쪽)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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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회장은 1928년 도쿄 오타구에서 가난한 김 제조업자의 7남1녀 중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기아와 질병으로 불우했다.
그는 “청소시절부터 인간의 生死(생사) 문제가 항상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창가학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일본이 敗戰(패전)으로 혼란스러웠던 1947년 8월, 스승 도다 조세이(戶田城聖)를 만나면서다.
이후 도다의 출판 사업을 도우면서 인문, 사회, 자연, 과학,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사사했다.
그는 “도다 선생을 모시고 있는 것 자체가 내게는 더 없이 좋은 교육이었고, 無形(무형)의 자산이었다”고 말했다.
―도다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선생의 삶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까요.
“물론입니다. 제 사상의 98%는 은사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제 나이 열아홉 살에 스승을 만났지요.
생명철학을 추구했던 선생님은 내가 품고 있던 모든 의문에 대해 성실하고 명쾌한 해답을 내놓으셨습니다.
솔직히 종교에는 회의적이었지만 그분의 인격에 매료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었죠.”
―창가학회와 인연을 맺기 전,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은 무엇이었나요.
“소년시절, 집 앞에 커다란 벚나무가 있었습니다. 봄이 되면 활짝 핀 벚꽃을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곤 했죠.
소년인 저는 언젠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벚나무를 수만 그루 심으리라는 꿈을 품었습니다. 그 꿈은 창가대학 캠퍼스 등 곳곳에 벚나무를 기념 식수함으로써 결실을 맺었지요.”
―지금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까.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고 후세에 남길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바랐던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문화의 힘’ ‘활자의 힘’이 얼마나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는지 저 나름대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잡지 <모험소년>과 <소년일본>의 편집장이 되었을 때의 기쁨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패전 후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소년소녀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고 싶다는 염원으로 심야까지 원고 작업에 매달렸던 일은 그리운 추억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글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다는 소원은 여전합니다.”
월간조선(2008.11) 인터뷰① - 이케다 SGI 회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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