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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원인, 지속, 절대
스피노자(Spinoza, 1970)(PUF); [III]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들의 색인」에서
들뢰즈, Sup “Philosophes”: PUF, 1970, pp 39-99(P. 128)
-[이 내용은 수정 및 첨가를 하여, 스피노자: 실천 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81)(P.177)에 있음,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민음사, 1999) 속에 들어 있음]
상층에서 완전함과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선전제로서 두는 사고는 인류가 결과물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시기에 와서야 형성되었으리라. 그 시점이 철기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기원전 5세기 경이리라. 그래서 완전, 절대, 영원, 불멸의 개념이 구성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개념의 성립은 플라톤에서 보면 사물 또는 만들어진 물체(사실)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천체의 원원동이 완전, 영원하여 불멸을 대상(pragmata)으로서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인간의 조작에 의한 사물이든 물체든 소멸한다. 그런데 천체는 인간의 조작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월성 같은 대상을 생각했으리라. 이 초월성은 파라오의 신격화나 그리스 설화에서 가이아 크로토스 제우스의 신격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설화와 전승에는 경험적 실재성을 담지하는 선험성인데 비해, 천체의 운행은 인간의 능력과 노력의 범위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천체의 완전함을 결과 또는 과정의 원인으로 삼을 수 있을까? 무한정하게 거슬러 올라가는 원은은 천체의 운동 만일까?
르네상스에서 갈릴레이는 천체의 운동이 항상성이 지구 운동의 항상성과 같다는 것을 제시했다. 지구 또는 세계의 근원적 원인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지구의 원인과 우주의 원인을 동등하게 놓고 보면, 원인은 항상성, 영속성, 지속, 계속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 될 것이다. 하늘의 영원성을 지구 영원성으로 바꾸기에는 아직은 모자란다. 지구의 지속성과 항상성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무한정하게 지속하는 무엇(사유대상)을 구해낸다. 스피노자의 작동하는 권능이다. 이것은 물체적이고 사물적인 실체로서 대상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든 보편 편재로서 운동(지속)하는 권능으로서 현존한다. 이 권능은, 이데아의 대상도 아니고 추론의 대상(프라그마)도 아니지만, 현존하며 실재하고 또한 현실화로서 작동하는 점에서 사유의 대상이 된다. 작동하는 권능이 자연이며, 그 신이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 지속한다. 혹시다 모습을 드러내면, 부타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부타를 신으로 영원히 존속하는 것으로 받드는 순간에 정태적 종교에 빠질 것이고, 무지몽매한 신앙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받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는 가운데 얼마만큼의 실현을 하는 것이다. 이 노력의 실현을 유전적으로 말한 이는 라마르크이다. 퀴비에와 다윈은 이미 형성된 것(사실)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논의를 어렵게 한다. 공자 시대의 공자는 초월성으로 향하는 고착성에 머물지 않고 삶의 터전의 확장으로 즐겁게 사는 활동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노자는 세상의 변화는 겉보기이고 세계는 하나의 완전성이 있고 그 완전성에서 흘러나오는 과정을 잘 알면 즐거운 삶이 되리라고 한다. 공자가 현실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을 중요시 한 것인데 비해, 노자에서는 완전성을 깨닫고 흐름을 따르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 깨달음은 그 시대에도 어렵지만 현재도 어렵다. 대부분, 그 깨달음이 무척 어려워 신앙처럼 가지고 살다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또한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도가와 불가에서 말하듯이, 이미 그것은 대상으로서 가치가 없다. 즉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슬며시 모순 또는 배중율이 끼어드는 것이 논리에서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미 삶의 영역을 떠난 것이다. 삶이 먼저이고 그리고 철학한다. 철학한다에서 진위를 따지거나 추론을 하거나 최후의 심판을 하거나 하는 경우에는 그 한다는 자의 자기 이익과 연관이 더 많다는 것을, 일반인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53PKC)
18) 원인 (causa, la cause) 77 / 86
19) 영원성 (aeternitas, l’éternité) 100 / 112
20) 지속 (duratio, la durée) 86 / 96
21) 절대 (absolutus, l’absolu) 63/ 69
22) 부정 (negatio / la négation) 123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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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원인 (causa, la cause) 86
“나는 자기 원인에 의해서(par cause de soi)[causa sui], 그것의 본질이 현존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그것의 본성이 현존하는 것으로써 밖에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이해한다.”(E, I, 정의 1)
자기 원인의 정의에 의해서 윤리학을 시작하면서, 스피노자는 하나의 의도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자기원인의 용어는, 작용인(causalité efficiente)([원인과] 구별된 결과의 원인)과 유비(analogie)에 의해서, 따라서 단지 파생된 의미에서, 매우 신중하게 사용되었다; 즉 자기 원인은 “마치 어떤 원인에 의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졌으리라. 스피노자는 이런 전통을 뒤집어엎고, 자기 원인을 모든 원인성의 원형으로 만들고, 그것의 원래적이고 철저한(originaire et exhaustif) 의미로 만든다.
그래도 역시 작용적 원인성이 있다: 즉 그 원인성에서 효과[결과]는 원인으로부터 구별되어서, 결과의 본질과 현존이 원인의 본질과 현존으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이고, 또는 결과가 그 자체로 자기의 고유한 본질과는 구별된 현존이기 때문에, 현존의 원인처럼 다른 현존의 어떤 것에 되돌려 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연은]은 모든 사물의 원인이다: 현존하는 모든 유한한 사물은 다른 유한한 사물에게 귀착하는데, 마치 그 사물을 현존하게 하고 작용하게 하는 원인에게 귀착하듯이 말이다. 본질에서 현존에서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공통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 할 것이다(E, I, 17 주석; 슐러에게 보낸 편지 64). 그럼에도 다른 의미에서 공통의 어떤 것이 있다: 속성이다. 이 속성 안에 결과[양태]가 생산되고, 속성을 통해서 원인이 작동한다(올덴부르크에게 보낸 「편지 4」: 슐러에게 보낸 「편지64」). 그러나, 신의 본질을 마치 원인처럼 구성하는 속성은 결과의 본질을 구성하지 못하며, 그것[속성]은 단지 이런 본질에 의해서 단지 감싸여질 뿐이다(E, II, 10).
신이 자기 본질을 구성하는 이 동일한 속성들 안에서 생산한다는 것은, 따라서 신이, 자기원인과 동일한 의미에서,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라는 것을 끌어낸다(E, I, 25 주석). 신은 마치 그가 현존한다는 대로 생산한다. 이처럼 속성들의 일의성과, – 속성들은, 자신들이 본질을 구성하는 실체의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에서 말 된다고 한에서 – 생산물들의 일의성은 – 생산물들은 속성들을 자신들의(leur) 본질 속에 감싸고 있다는 [점에서] - 원인의 일의성으로 [죽 연결되어] 이어지는데 - “작용인”이 “자기 원인”과 동일한 의미에서 말 되는 한에서 – 그렇다. 이리하여 스피노자는 이중적으로 전통을 전복한다. 왜냐하면 작용인은 원인의 제1의미가 아니기 때문이고, 또 작용인은 작용인과 다른 의미에서 말해지는 자기 원인이 더 이상 아니며, 오히려 자기 원인과 동일한 의미로 말해지는 작용인이기 때문이다. (78, 88)
현존하는 유한한 사물은 마치 원인처럼 유하한 다른 사물에 귀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유한한 사물이 이중 원인성에 종속된다고 말하는 것을 회피할 것이다. 이중 원인성이란, 그 하나는 수평적 원인성으로 다른 사물들의 무한정한 계열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수직적 원인성으로 신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계열의 각 항에서 사람들은 마치 원인의 결과를 갖도록 원인을 결정하는 것에게로 되돌려 보냈던 것처럼 신에게로 되돌려 보냈기 때문이다(E, I, 26). 이와 같이 신은 결코 멀리 있었던 원인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역행(la régression)의 첫 항에서부터 달성되었다. 따라서 원인이라는 신만이 있으며, 원인성의 모든 모습[형태]들에서는 단 하나의 의미와 단 하나의 양상(modalité)만이 있으며, 비록 이 모습들이 그 자체로 다양하다(자기원인, 무한 사물들의 효과인, 서로 서로 연관하는 유한 사물들의 효과인)고 하더라도 말이다. 원인의 단일한 의미에서 또 원인의 유일한 양상에서 파악된다면, 원인은 본질적으로 내재적(immanente)이다. 말하자면 내재적 원인은 생산하기 위해서 자체로 남아있고(타율적인(transitive) 원인과는 반대로), 그리고 결과는 원인 자체로부터 더 이상 벗어나지 않는다(유출적 원인(cause émanative)과는 반대로). (79, 88)[들뢰즈가 여기서 유출이란 의미를 플로티노스와 달리 쓰는 것 같다.(53NLF)]
# 19) 영원성 (aeternitas, l’éternité) 100 / 112
현존인 한에서 현존의 성격은 본질에 의해 감싸여져 있다(E, I, 정의 8). 따라서 본질 자체가 영원인 것처럼, 현존은 “영원한 진리”이며, 그리고 이성적 구별에 의해서만 본질로부터 구별된다. 이처럼 영원성은 비록 무한정일지라도 지속(la durée)과 대립된다. 지속은 양태의 현존에 자격(성질)을 부여한다.
양태의 본질도 영원성의 형상(une forme d’éternité)을, 즉 영원의 상(species aeternitatis)을 덜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양태의 본질이 자신[양태]에게 고유한 필연적인 현존을 갖는다는 것이다. 비록 이 본질이 자신에 의해서 현존하지 않고 오히려 원인으로서 신 덕분에 현존한다고 하더라도. 따라서 무매개적 무한 양태는 영원할 뿐만 아니라, 그것[양태]의 일부분을 이루는 - 무한히 계속되는 다른 모든 부분들과도 적합한 - 각각의 특이한 본질도 또한 영원하다. 지속 안에서 현존들을 질서지우는 매개적 무한 양태에 관한한, 그 양태는, 구성과 해체의 규칙들 일체가 영연한 진리들의 체계인 정도에서, 그 자체로 영원하다. 그리고 이런 규칙들에 상응하는 연관들의 각각은 영원한 진리이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이 신체의 특이한 본질을 영원의 형상 하에 생각하는 한에서, 또한 정신이 현존하는 사물들을 공통 개념들에 의해 –말하자면 현존 속에서 사물들의 구성과 사물들의 해체를 규정하는 영원한 연관들 하에 - 생각하는 한에서, 정신이 영원하다고 말한다(E, V, 29, 증명: 이 두 가지를 제외한 다른 어느 것도 정신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et praeter haec duo nihil aliud ad mentis essentiam pertinet) .
영원한 현존과 (비록 무한정할지라도) 지속하는 현존 사이의 본성상 차이는 여전히 존속한다. 왜냐하면 지속은, 현존하는 양태들이 연관들을 – 이 연관들에 따라서 그 양태들은 발생하고 사멸하며 결합되고 해체되는데 - 실행하게 하려는 한에서만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관들 자체와 하물며 양태의 본질들은 영원하지만, [계속해서] 지속하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로 특이한 본질의 영원성은 기억의 대상도 아니고 예감 또는 계시의 대상도 아니다. 영원성은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적 경험의 대상이다(E, V, 23, 주석). 영원성은 영혼의 한 부분으로 현실적 현존에 상응한다. 그 영혼의 부분이란 단일한 본질로 구성된 영혼의 내포적 부분이며 영혼의 특징적 연관이다. 이 때 지속은 외연적 부분들에서 영혼에게 감화를 주며, 이 외연적 부분들은 이 똑같은 특징적 연관 하에서 시간적으로 영혼에 속한다(참조: 두 종류의 부분들, E, V, 38, 39, 40).
영원의 형상(species aeternitatis, 영원의 상)에서, 형상(species, 상, 모습)은 언제나 개념 또는 인식에 귀착한다. 영원의 상 아래서(sub species aeternitatis) 어떤 신체의 본질을 또는 사물들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관념이다. 그 본질들 또는 진리들이 그것들 자체로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원인에 의해서 영원하지 그것들 자체로서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들은 원인으로부터 파생된 영원성을 갖는다. 원인에 의하여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생각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형상(species, 상, 모습)은 끊을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형식과 관념, 형식과 개념작용을 의미한다. (53OMI)
# 20) 지속 (duratio, la durée) 86 / 96
[지속이란] 시작에서부터 현존의 연속과정(continuation)이다. 지속이란 현존하는 양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시작을 감싸고(둘러싸고) 있으나, 끝은 감싸고 있지 않다. 실제로 양태가 효과인[작용인]의 활동[작동]아래서 현존으로 이행할 때, 그 양태는 단순히 속성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양태는 지속하거나(E, II, 8), 또는 오히려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거나, 다시 말하면 현존 속에서 끈질기게 지탱하려는(persévérer) 경향이 있다(E, III, 7). 그런데 사물의 본질도 현존을 제시하는 효과인도 지속의 기한을 할당할 수 없다(E, II,정의 5의 설명). 이런 이유로 지속은 그 자체에 의해서 “현존의 무한정한 연속성”이다. 지속의 마지막, 말하자면 죽음은 한 현존하는 양태와 다른 현존하는 양태 -즉 한 양태와 연관을 해체하는 양태)와 만남으로부터 온다(E, III, 8; IV, 39). 또한 죽음과 탄생은 전혀 대칭적이지 않다. 양태가 현존하는 한, 지속은 감동들로 정의되는 살아온 과정들의 이전(des transitions)으로, 즉 다소 큰 완전함들로 향하는 영속적 이행(des passages)으로, 또 현존하는 양태로부터 작용하는 권능의 연속적인 변이들(des variations)로 이루어져 있다.
지속은 영원성에 대립된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시작이 없으며, 변하지 않고 완전한 작동하는 권능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성은 무한정한 지속도 아니고, 지속 후에 시작하는 어떤 것도 아니고[불사, 영혼불멸], 오히려 영원성은 마치 본성적으로 다른 우리들 자체들의 두 부분이 공존하는 것처럼, 지속과 더불어 공존한다. 여기서 두 부분이란 신체의 현존을 감싸는 부분과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부분을 의미한다[두 부분은 신체 능력과 영혼의 권능인 셈이다]. (53PKB)
# 21) 절대 (absolutus, l’absolu) 63/ 69
1) [절대란] 모든 속성들에 의해 구성된 실체의 자격을 부여한다(qualifier). 반면에 각 속성은 단지 자신의 류(genre) 속에서 무한할 뿐이다. 물론 류 속에서 무한은 다른 류들의 결핍도, 심지어는 다른 류들과 대립도 함축하지 않으며, 단지 실재적 또는 형식적 구별만을 함축할 뿐이다. 이 구별은 모든 무한한 형식들이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동일한 온존재에 연관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E, I, 정의 6과 설명).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는 이런 존재의 본성(la nature)이며, 반면에 무한은 각각 “류” 또는 속성들의 각각의 특성(une propriété)일 뿐이다. 스피노자주의 전체 안에서 사람들은, 특성과 같은 무한하게 완전함을 온자연과 같은 절대적으로 무한함으로 향해 넘어서는 데 참석하고 있다. 그러한 것이 존재론적 증명의 “이동(déplacement, 전위, 轉位)”이다.
2) [절대란] 신의 권능들이라는, 즉, 현존하며 작동하는 권능과 절대적 권능이라는, 사유하는 권능과 이해하는 절대적 권능이라는 자격을 부여한다(qualifier)(E, I, 11, 주석: 절대적으로 무한한 현존 권능infinitam absolute potentiam existendi / I, 31, 증명: 절대적인 사유absolutatam cogitationem). 따라서 절대성의 두 반쪽처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의 두 권능처럼 있다. 이 두 절반은 동등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두 속성들과 혼동되지 않는다. 이 두 권능의 동등성(l‘égalité)에 관하여 2부 명제 7의 보충명제를 참조.
일반적으로 ‘절대’ 또는 절대자는 실체자체 또는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이다. 이러한 의미는 첫째에 속하며 공간적 또는 논리적 추론의 사고에서 나온다. 이에 비해 2)에서 권능의 절대는 다르다. 아페이론(즉 자연자체)이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성으로서 자기 자체의 현존을 스스로 실행하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전개되었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신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능동적으로 실행 중이라 할 수 있다. 벩송에서는 인성에게 기억에게 생명체에서 생명에게 그 자발성이 내재 하며, 실재적으로 권능의 실행은 유전 또는 진화에서 지속하고 있다. 그래서 벩송도 작동하는 권능이라는 표현을 창조적 진화(EC, 1907)에서 쓴다. (53PKC)]
# 22) 부정 (negatio / la négation) 123-126/번 136-140
스피노자의 부정이론(부정의 근본적 제거, 추상작용과 허구라는 부정의 지위)은 언제나 긍정적인(positive 적극적인) 구별(la distinction)과 부정적인(negative 소극적인) 규정(la détermination) 사이에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편지 50, 엘레스에게) .
1) 속성들은 실재적으로 구별되어 있다. 말하자면 [속성의] 각각의 본성은 다른 속성에 아무 연관 없이도 사유되어야만 한다. 각 속성은 속성의 류 또는 각 속성의 본성 안에서 무한하며, 동일한 본성의 어떤 것에 의해 제한되거나 규정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속성들이 서로 서로들 간에 대립에 의해 정의(定意)된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실재적 구별의 논리는 [속성의] 각각의 본성을 그 자체로, 또 각각의 독립적인 긍정적 본질에 의해, 정의한다. 모든 본성(la nature)은 긍정적이고, 따라서 자기의 류(類) 안에서 무제한적이고 비결정적이며, 그러한 방식으로 그 본성은 필연적으로 현존한다(편지 36 휘드에게). 무한한 본질로서 긍정성(la positivité)에게 필연적 현존으로서 긍정주장(l’affiramtion)이 응답한다(E, I, 7, 8). 그러한 이유로, 실재적으로 구별된 모든 속성들은, 정확히 말하여 대립 없이 그것들의 구별 덕분에, 속성들이 실체의 현존과 본질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유일하고 동일한 실체로서 동시에 서로서로를 긍정 주장한다(E, I, 명제 10, 주석 1과 명제 19). 속성들은 실체 본질의 긍정적(positives) 형식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실체 현존의 긍정주장적(affirmatives) 힘들이기도 하다. 실재적 구별의 논리는 공본질적 긍정성들(des positivités coessentielles)의 논리이며 또 공현존적 주장들(des affirmations coexistantes)의 논리이다.
2) 반면에, 유한[자]는 잘 제한되어 있고 규정[결정]되어 있다. ‘제한되어’란, 유한의 본성에서이며, 그리고 동일한 본성의 다른 사물에 의해서이다. ‘규정되어’란, 유한의 현존에서이며, 이런 장소 이런 순간에 유한의 현존을 부정하는 어떤 사물에 의해서이다. 정해지고 규정된 양태(modo certo et determinato)[E, I, 36증명에 나온다]라는 표현은 바로 ‘제한되고 규정된 양태’를 의미한다. 유한한 현존 양태는 그것의 본질에서 마치 그것의 현존에서 규정되었던 것처럼 제한되어 있다. 제한은 본질에 관한 것이고, 규정(la determination)은 현존에 관한 것이다. 이 둘은 부정의 두 형태(les deux figures)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추상적으로만 진리인데,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양태를 그 자체로 고려할 때, 즉 양태를 본질과 현존으로 있게 만드는 원인에서 분리된 것으로 고려할 때 참이다.
왜냐하면 양태의 본질은 권능의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차]는 그 자체로 어떤 제한이나 한계를, 다른 정도[차]들과 대립을 의미 하지 않고, 오히려 내부적 긍정 구별을 의미하는데, 마치 모든 본질들 또는 모든 정도들은 일체[emsembe함께] 적합하고, 이것들의 공통적 원인 덕분에 무한 일체[un ensemble 전체]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현존하는 양태에 관하여, 그 양태는 사실상 현존하고 작동하는데 따라서 규정되고, 또한 그 양태는 다른 양태들에 대립되고, 또 그 양태는 다소 큰 완전함들로 이행한다(passer).
그러나, (1) 양태가 현존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무한히 많은 부분들이, 양태의 본질을 특징짓는 연관들 아래로 들어가도록, 밖으로부터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에 이 외부적인 부분들은 양태의 본질에 속하나 그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런데 양태가 아직 현존하지 않거나 또는 더 이상 현존하지 않을 때, 그 양태는 이런 본질에서 결코 부족함이 없다(E, IV, 서문의 마지막). 그리고 양태가 현존하는 한, 양태를 자기의 모든 부분들을 통하여 자기 현존을 주장[긍정]한다. 따라서 양태의 현존은 새로운 유형의 구별이며 외재적 구별인데, 이 외재적 구별에 의해 본질은 지속 안에서 스스로 긍정[주장]된다(E, III, 7).
(2) 현존하는 양태는, 이 양태를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다른 양태들과 대립된다. 이 양태는 해롭거나 또는 유용한 다른 양태들에 의해 감화된다. 그리고 양태의 부분들의 감화들에 따라서, 양태는 자신의 작동하는 권능을 증가시키고, 또는 보다 큰 완전함으로 이행한다(기쁨과 슬픔). 그러나 매 순간에, 양태가 완전함 또는 작동하는 권능을 갖는 만큼이나, 양태는 자신이 체험하는 감화들에 따라서[기능으로 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양태의 현존은 그치지 않고서 긍정주장이 되고, 성질[자격]이 부여된 양태의 감화들에 뒤따라서 오직 변할(varier) 뿐이다(이 감화들은 여전히 긍적적인 어떤 것을 감싸고 있다). 현존하는 양태는 언제나 현존하는 힘(une force dlexister)을 긍정한다(참조 현존하는 힘vis existendi; 감동들의 일반적 정의).
양태들의 현존은 가변적인 긍정주장들의 체계(un système d’affirmations variables)이며, 양태들의 본질은 다양한 긍정성들의 체계(un système de positivités multiples)이다. 스피노자의 원리는 부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다고 하는 그 무엇은 어떤 것의 모자람 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부정(la négation)은 이유의 존재(un être de raison)이며, 비교의 존재(un être de comparaison)이다. 이 존재는, 우리가 구별된 여러 종류의 존재들을 추상적 개념 속에 - 이 존재들을 동일한 허구적 이상과 연관시키기 위하여 - 모아놓은 것으로부터 온다. 이 허구적 이상의 이름으로 우리는 이것[존재]들 또는 저것[존재]들이 이런 이상의 완전함을 갈망한다[완전함에 모자란다]고 말한다.(편지 19, 블레이은베르흐에게). 돌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만큼이나, 개는 말이 아니고, 원은 구가 아니다. 어떠한 본성도 다른 본성을 구성하는 것을, 또는 다른 본성에 속하는 것을 갈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한 속성은, 그 속성이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과 관련하여 완전할 수 있는 만큼 완전하기 때문에, 다른 한 속성의 본성에 결핍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 현존 양태는, 그 양태가 최소한의 완전함으로 이행하는 한에서 양태 그 자체와 비교될 때(예를 들어 맹인이 되는 것, 또는 슬프고 증오하게 되는 것), 그 양태가 현실적으로 자기 본질에 속하는 감화들에 관련하여 완전할 수 있는 만큼이나 항상 완전하다. [양태의] 자기 자체와 비교는 다른 사물과의 비교보다 더 잘 기초 지워진 것이 아니다(편지 21, 블레이은베르흐에게). 간단히 말하면, 모든 결핍(privation)은 부정이고, 부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부정적인 것에 속하는 무한한 유형 속에 각각의 사물을 다시 모아놓는 것으로 충분하다(이런 것과 같은 무한이 구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다).
부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무는 특성(속성)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는 주제는 소위 말해서 칸트철학 이전의 철학에서 통상적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주제에 독창적인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 그 주제를 창조의 가설에 반대로 돌리면서 또한 어떻게 아무것도 아님과 무가 어떤 사물의 본성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지를 보여줌으로써, - 완전히 새롭게 한다. “자연[본성]이 제한작업(la limitation)을 요구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물의 본성은, 그 사물이 [현재에] 있지 않는 한 요구할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소론, I, 2장, 5장, 각주 2). 실천적으로 부정적인 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슬픔을 토대로 하는 모든 정념들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통과하는 것이다. (53PKE)
(8:13, 53P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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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 올덴부르크(Henry Oldenburg ou Oldenbourg, Heinrich Oldenburg, 1619경-1677) 독일 태생 영국활동 외교관, 과학자. 영국 왕립학회 비서[서기]를 지냈다. 1661년 네델란드 여행 중 스피노자 만나 편지교환(1665), 그는 위험한 사상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스피노자 사상에 반대의 글을 쓰기도 했다.
1620 옐레스(Jarig Jelles, ca. 1620-1683) 네델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내밀한 친구. 프로테스탄트로서 메논니트(Mennonite) 분파에 속한다. 1661년에 스피노자(1632-1677)와 편지교환, 1674년 출판, -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 재침례파, 네델란드 종교개혁가.
1628 후드/휘드(Johannes (van Waveren) Hudde, 1628–1704) 암스테르담 시장(1672–1703), 수학자,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총독(governor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a, 1632-1677) 세파라드 유대인, 네델란드 철학자.
1632 블리젠베르그/블레이은베르흐(Willem van Blijenbergh, Blyenbergh, 1632–1696) 곡물 중계상인, 칼빈파 신학자. 네델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와 악에 관한 논의.
1650 슐러(Georg Hermann Schuller, 1650/51-1679), 라이덴에서 의학학도, 스피노자와 같은 집에 살면서, 철학에 관심있는 것 같았다.
(8:31, 53PKE)
# 참조: 플라톤에서 원인(aitia)*****
[<결국 이 물리적 세계는 자기 동일적인 것과 방황하는 원인이 서로 관계를 맺어서 성립시키는 것이야. 그런데 그것은 모순하고는 다른 제3자의 세계이지. (263.) - 박홍규: "「고별강연(1984)」 검토(3)" (1988, 08).. ]
[<그런데 내가 그때 얘기 한 것처럼 그 무한정자의 원인(aitia)으로서의 성격이 방황해(errant).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은 방황해. 그런데 원인은 확실해야 돼. 그렇지만 여기서는 충족이유율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523) [무한정자가 장소가 아니다. 장소란 무한정자가 이데아와 첫 접촉하는 장소(공간)이다.> -「고별강연(1984)」 검토(4). 1989. 02.
[박홍규: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1987). - <플라톤은 <동일한 것에 따라서 동일한 방식으로(kata tauta hôs autôs)>란 말을 자꾸 사용하잖아? 결국 이 물리적 세계는 자기 동일적인 것과 방황하는 원인이 서로 관계를 맺어서 성립시키는 것이야. 그런데 그것은 모순하고는 다른 제3자의 세계이지. (263-264) / 플라톤은 방황하는 원인을 생성(genesis)을 받아들이는 것(hypodochê)이라고 했지, 그것을 바로 생성이라고 하지 않았어. 생성은 거기에 동일한 형상(eidos)과 합쳐져서 나오는 것이야. 형상은 항상 동일한 존재(kata tauta on)야. 방황하는 원인 자체는 원인이니까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상태이므로 무규정적인 것(aoriston), 아무 성격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해. ... 그러니까 방황하는 원인은 하나도 잘라지지 않고 아무 것도 안 가지고 있다는 것이야. (264) / 플라톤은 이성이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을 설득시켜 생성계의 대부분을 좋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지, 전지(全知)하다고 안했어. 이론상 전지한 지식이 있을 수 있어, 없어? 전지한 능력이 있어 없어? (271) / 이 우주를 정적인 입장에서 구조적으로 보면 형상(eidos), 방황하는 원인, 영혼(psychê)이 있게 되는데, 형상과 영혼은 왜 갈라져? 이것이 플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야. 방황하는 원인은 과정(process) 자체거든. 과정 자체는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몰라. .. 과정은 어떤 일자와 타자의 집합이 아니라 연속인데, 연속이란 것은 구별이 없어져서 동일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지 모르게 계속해서 변했다는 뜻이지. .. 양자(운동과 정지)는 어떻게 보면 공존하고 어떻게 보면 공존 안 해. 원칙적으로 연속 속에서 양자는 분열되지 않는데, 감성에 있어서 우리가 자꾸 분열시키기 때문에 논리적 시간(logical time)과 논리적 공간(logical space)이 이렇게 분할되어서 나와. 공간에서 사물이 구별되어 나오는 것이 형상(eidos)이고 시간에서 그리고 운동에서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작용하는 것은 영혼(psychê)이야. (272-273) / 플라톤은 형상만 자꾸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방황하는 원인도 파르메니데스 존재론에서 플라톤으로 넘어가는 데 통과해야 할 존재론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관문이야. (274-275) / . 이 관문을 플라톤은 방황하는 원인이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matter)라 했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옳으냐고 물으면 플라톤이 옳다고 답해야 되겠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한 경우에, 즉 설득되었다고 할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고, 어째든 중심은 자꾸 일자로 가. 플로티노스는 물에 물을 부으면 그대로 넘쳐나듯이, 또는 불에서 빛이 흘러나오듯이 일자에서 넘쳐흐른다는 것이야. 그러나 그런 것은 전부 유물론적 해석이야. (275) .. 따라서 그 초월적 존재자로부터 나오는 것은 허무를 거쳐 나와야 된다. 바로 그 점에서 기독교 사상이 맞아. 창조론,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으로 가. 시간론을 읽어보면 그런 것이 나와. (275) 목적론은 플라톤 체계의 한 발전이지 존재와 무에서 출발하여 존재도 무도 아닌 방황하는 원인이 나온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서 곧바로 목적론이 나올 수는 없어. (296) 박: ..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방황하는 원인을 이성 또는 영혼이 설득한다고 할 때, 두 개의 능력(dynamis)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야. .. 즉 방황하는 원인에 대한 설득은 정적(static)인 것이 아니라, 동적(dynamis)인 능력이라는 것이지. 이것이 대단히 중요해. / .. 여기 구제(sozein)란 말이 나오지. 그 말은 설득해 갖고 항상 보전하고 있다는 뜻으로 봐야 돼. (298-299) / 하여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분명히 서로 달라. 방황하는 원인하고 제1질료하고. (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