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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화된 피해와 비용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고민과 관심이 깊어지는 것은 반가운 변화다. 하지만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핵발전소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나를 다시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만든다. 아뜩하다. 기후변화와 탈핵은 함께 갈 순 없는가? 자신을 ‘기술 찬양론자’라고 소개한 빌 게이츠 역시 핵발전을 두고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원이라며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이지 않아도 된다고, 불편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저 지금처럼 살아도 된다고, 그 무엇도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다만 핵발전을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묻고 싶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보통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전기와 에너지를 주로 소비만 하는 사람들이고 중심에 사는 다수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닐 ‘그들’ 혹은 ‘저들’은 전기와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 근처에 살거나 전기를 운반하는 초고압 송전탑 아래에서 살아가는, 중심이 아닌 주변에 사는 소수라고 볼 수 있다. 중심을 위해 살아가는 주변인.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리 안에 중심과 주변이, ‘우리’와 ‘그들’이 공존하면서 동시에 분리하고 차별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안락을 위해 누군가의 일상이 무너져내려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특히 비용과 위험을 ‘외부화’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정당화하며. 그렇기에 누군가는 쉽게 핵발전소를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꼽는지도 모르겠다. 외부효과란 사회적으로 볼 때 엄연히 손실이 있음에도 개인의 손익계산에서 무시되는 제3자의 피해를 일컫는 경제학적 용어다. 환경오염은 전형적인 외부효과로 꼽힌다. 보통 현대사회를 떠받치는 생산과 소비의 분극화된 시스템은 전기를 생산-운반-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피해 및 오염을 지역과 그곳에 살아가는 ‘그들’에게 전가한다. 깨끗하고 안락한 곳에서 살아가는 다수의 ‘우리’에게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기에 우리는 이러한 피해의 총체들을 그저 ‘외부화된 비용 혹은 피해’라고 간단하게 부른다. 도대체 어떤 피해가그곳에서 벌어지는 것인가. 숫자 혹은 수치화된 피해와 오염은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런 설명 방식이야말로 실제 발생하는 문제를 은폐하는 요소로 작용한다고 하면 과한해석일까.
연구자들이 수행하는 연구도 마찬가지다. 보통 핵발전의 역사, 제도, 발전해온 경로 등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가는 주민들 삶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문제와 피해에 주목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나는 서울이나 중앙 혹은 연구자의 관점이 아니라 주민, 지역의 관점에서 핵발전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2020년 10월 중순부터 2021년 7월 초까지 8개월 동안 경주 월성 핵발전소 인접 마을에 살면서 연구했다. 숫자, 수치로 추상화되고 ‘외부화’된 위험과 고통이 아니라 직접 그들의 표정과 일상,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곳에서 어떤 삼대를 만났다. 매주 월요일 아침, 경주 월성 핵발전소 남문 앞에서 상여와 관을 끌며 이주를 요구하는 황분희 씨 가족이었다. 그들은 경주 월성 핵발전소가 보이는 최인접 마을에서 살아가는 ‘그들’이다. 현장 연구를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경주 월성 이곳저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핵발전소(한국수력원자력, 이하 ‘한수원’)의 위력과 그것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한수원 본사, 한수원이 지은 대형 운동 시설(체육관, 수영장 등), 거리 곳곳에 붙은 핵발전 관련 현수막들(직원 채용, 월성 청소년 합창단 모집 등)과 ‘발전소’라는 이름의 음식점까지, 천년 고도로만 알려졌던 이미지와 다르게 경주 월성 양남면은 한수원/핵발전소 천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수원이 지배하는 지역사회에서 이를 비판하고 반대하며 2014
년 이후 8년째 이주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싸움은 외롭고 힘들지만 가치 있어 보였다. 이들이 처음 상여 시위를 할 때 나는 이 싸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덥거나 춥거나 비나 눈이 올 때도 매주 싸우는 이들의 시위를 귀찮게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낡아서 해진 관 위에 적힌 ‘주민들의 직함’을 본 순간,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이 시위를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자신들의 관을 끌어왔는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황분희 씨는 “핵발전소 근처에 사는 우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직접 관과 상여를 끌고 우리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심정과 싸움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핵발전과 함께 사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없기에 관과 상여를 직접 끌면서 이곳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이주’를 줄기차게 요구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기.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상과 하루가 ‘그들’에겐 수년째 요구하고 싸워서 쟁취해야 할 삶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가 있었던 1986년 이곳으로 이사 와서 36년째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가는 황분희 씨와 그의 남편은 둘 다 갑상선 관련 질환을 앓았다. 황분희 씨는 갑상선암을 선고받아 수술받았고, 그의 남편도 갑상선항진증을 앓았다. 가족력 없이 건강하게 살아온 그들이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질병도 핵발전소의 위험을 의심하게 만들지 못했다. 황분희 씨는 “한수원은 체르노빌 사고가 터질때도 구소련의 기술을 비판하며 우리는 그들과 다르게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한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 적어도 30년 이상 핵발전에 대한 의심보다 ‘안전 신화’가 이곳을 지배해왔던 셈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발생한 핵발전소 사고는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단 한 번도 핵발전소의 안전을 의
심하거나 위험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그들 내부에서 조금씩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들은 내가 왜 아픈지, 왜 내 주위 이웃 주민들이 유독 암이나 백혈병으로 수술받은 사람이 많은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문가들, 활동가들과 함께 소변검사를 시도했다. 그 결과 황분희 씨 부부와 함께 사는 손주들의 몸속에서 월성 핵발전소로부터 기체와 액체 형태로 배출되는 방사성 물질 중 하나인 삼중수소가 일반적인 성인들보다 높은 수치로 검출되었다. 검사 결과를 받은 황분희 씨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다면서 “무엇보다 딸, 손주들과 함께 살고 싶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위험한 곳에 살게 되었다”고 자책했다. 결국 2014년 8월, 400세대 중 72세대, 약 100여 명이 참여해서 ‘월성원전인접지역 주민이주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들은현재까지 한수원과 핵발전소를 상대로 싸워오고 있다.
핵발전소라는 느린 폭력에 맞서는 이유
조효제 교수는 《탄소 사회의 종말》에서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를 ‘사회적 배태성’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개인이 저마다 사회구조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동일한 현상도 다르게, 차별적으로 인식하거나 경험하는 것처럼, 하나의 기후변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경험하는 기후변화‘들’로 설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핵발전소 문제에서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자신의 위치에 따라 그들의 삶과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것과 관련이 깊다. 내가 현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핵발전소를 비판하는 목소리(탈핵/반핵) 또한 단일하고 추상적인 하나의 ‘반대 운동’이라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주를 요구하는 ‘월성원전인접지역 주민이주대책위원회’를 포함해 핵발
전소와 함께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은 ‘탈핵’이나 ‘반핵’이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 앞에서 이들은 ‘이주’라는 구체적인 요구를 해왔다. 핵발전소를 비판하고 반핵/탈핵을 말하는 대다수 사람은 핵발전소의 사고 가능성 혹은 피폭 위험성을 자기주장의 주된 근거로 내세운다. 만약에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한수원의 말마따나 ‘안전하게 가동 중인 핵발전소’라면 이를 반대할 명분이 사라지는 것일까. 황분희 씨는 “탈핵하겠다는 것 좋지. 신규 원전도 짓지 않고, 오래된 원전은 가동 중지하고. 근데 왜 활동가나 전문가들은 핵발전소만 문제 삼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우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거야?”라고 힐난한다. 즉, 고리1호기·월성1호기와 같이 오래된 핵발전소의 가동을 멈추더라도, 여전히 가동을 멈춘 채 존재하는 ‘위험’과 함께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탈핵’의 정의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탈핵은 주로 에너지원 형태에 초점을 맞춰 ‘신규 원전을 짓지 않고 오래된 원전 가동을 중지하며 재생에너지를 늘려나가는 것’이라고 설명된다. 주민들은 이런 탈핵의 정의에 ‘사람’이 빠져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 및 처분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중앙과 지역, 우리와 그들 사이에도 서로 다른 탈핵의 정의와 요구가 있는 셈이다. 주민들은 고준위 핵폐기물을 처리하거나 보관할 가능성도, 기술도 없는 현재 상황에서 ‘탈핵’은 너무 순진하고 모호하며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가는 주민에 대한 대책이 결여된 담론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탈핵’이나 ‘반핵’보다 ‘이주’를 중심으로 핵발전소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사고’가 아니더라도 핵발전소를 비판하며 이주를 요구하는 것일까? 롭 닉슨은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에서 기후변화와 함께 핵발전소를 대표적인 ‘느린 폭력’(Slow Violence)이라고 불렀다. 그는 느린 폭력을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고, 시공을 넘어 널리 확산하는 시간 지체적 파괴, 일반적으로 전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폭력”이며, 극적이지도 즉각적이지도 않지만 점점 축척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위험이라고 설명했다. 여전히 핵발전소(방사선 피폭)와 주민들에게 발병한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설명되지 않았지만 다수의 주민은 암과 백혈병을 앓고 있다. 설명되지 않고 과학적으로 합의되지 않았지만 느린 폭력에 의한 피해자 다수가 ‘안전하게 가동 중’인 핵발전소와 함께 살
아간다. 또한 이 위험한 곳에서 주민들 스스로 이사 혹은 자발적인 이주 형태로 벗어나려고 해도, 핵발전소에서 가까운 지역일수록 부동산 거래 수가 적거나 거의 없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지가 상승 폭도 낮았다. 그래서 황분희 씨는 자기 삶을 “도망치고 싶어도 핵발전소에서 도망칠 수 없는 삶”이며 결국 이것은 “창살 없는 감옥”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사고가 나지 않아도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암, 백혈병을 비롯한 질병의 가능성을 몸에 품은 채 살아가고, 그들은 ‘안전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와 거주·이전의 자유또한 거세당한 채 살아간다.
나는 왜 공부하고 연구하는가
처음 전기와 에너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밀양 사건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주민들의 반대와 싸움을 ‘이기적인 님비(NIMBY) 현상’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정당한 싸움’이라 했다. 그곳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전기는 할매의 눈물을 타고 흐른다”라고 설명했는데, 처음에는 이 표현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활동가로 그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하면서, 전기 문제가 왜 밀양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인지,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의 삶이 왜 그들의 눈물,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부끄러움 혹은 죄책감으로 연결되었고, 활동가로서 하던 고민과 활동은 연구자인 내게 사회학적 고민으로 이어졌다.
‘외부화된 비용과 위험’으로 말하는 방식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정말 ‘외부’의 어딘가로 사라지고, 결국 이 대도시가 멀끔하고 깔끔하며 아무 이상 없이 돌아가는 사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누군가가 앓고 있는 불안과 질병 등 몸과 마음에 새겨진 고통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나는 앞으로도 이 ‘외부화된 비용’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그래야만 이 문제가 ‘그들’만의 이야기, ‘지역’의 이야기로만 치부했던 관행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정치·사회적인 의제로 설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황분희 씨 삼대를 비롯해 핵발전소, 대형 송전탑 근처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비참하다. 아니, 비참하다는 표현만으로 그들의 일상과 비극과 상처를 다 말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마치 ‘이등 국민’ 같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핵발전을 탄소중립을 위한 대안이라고 하지만, 핵발전소가 갖고 있는 불평등과 비민주적인 성격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안락과 행복에 대해서는 약속하지만, 핵발전소 인근 지역 주민들의 구체적인 고통과 불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증명되지 않았고 인과관계가 없는 그저 ‘불안, 감정, 망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외부화된 위험’이라는 표현이 문제의 구체성을 보여주지 못하기에 이를 다르게 부를 필요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중심과 주변, 그들과 우리를 나누고 그 차별을 정당화하는 핵발전의 논리를 ‘내부 식민지’라고 부르면 어떨까. 다수의 평화, 우리의 풍요로운 사회를 위해 소수에게 부과된 희생과 불안의 시스템, 우리의 안락을 위해 그들에게 희생과 피해와 고통을 전가하는 이 시스템은 외부효과를 넘어 ‘내부 식민지’ 관점으로 봐야 그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보이지 않았던 구체적인 얼굴들과 고통, 희생과 비민주적인 행태들이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이 글과 표현은 나를 비롯하여 대도시에서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던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는 아무런 위해도 나쁜 의도도 없이 그저 소비자로서 안락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하는 전기와 에너지 너머에서 위험과 함께 사는 그들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고통에 침묵하지 않는다면, 우리와 연결된 그들의 구체적인 얼굴을 비로소 보게 될 것이다. 이 불편한 글이 당신에게 ‘우리’와 ‘그들’의 연결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더 고민하게 만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우리 모두가 월성이고 밀양이다.
김우창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수료생.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대책위 활동을 통해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현재는 경주 월성 핵발전소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월성원전 인근 주민들의 투쟁 이야기를 담은 《원전 마을》을 썼다.
‘우리’와 ‘그들’에게 핵발전은 무엇인가 < 커버스토리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복음과상황 (goscon.co.kr)
첫댓글 황분희 씨는 “탈핵하겠다는 것 좋지. 신규 원전도 짓지 않고, 오래된 원전은 가동 중지하고. 근데 왜 활동가나 전문가들은 핵발전소만 문제 삼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우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거야?”라고 힐난한다. 즉, 고리1호기·월성1호기와 같이 오래된 핵발전소의 가동을 멈추더라도, 여전히 가동을 멈춘 채 존재하는 ‘위험’과 함께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민들은 이런 탈핵의 정의에 ‘사람’이 빠져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 및 처분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다고 비판한다....그래서 그들은 ‘탈핵’이나 ‘반핵’보다 ‘이주’를 중심으로 핵발전소를 비판한다.
이 내용이 많이 와 닿습니다. 결국 탈핵도, 탄소 중립도, 지속가능한 사회도 생명 (사람)이 빠지면 그 무엇도 관념일수 밖에 없고, 허망합니다. 생명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일하고, 실천하는 것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