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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독송 수행의 실제
독송의 마음자세
『금강경』을 계속해서 독송하다보면 자칫 어느 순간 형식적이 되고, 그저 몇 독을 끝내는 것이 목적이 될 때가 있다. 며칠 동안 몇 독을 하겠다고 원을 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한독한독 독송할 때마다 바로 ‘지금 여기’라는 순간에 깨어있으며, 『금강경』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보면 어느 순간 『금강경』 독송의 본뜻을 잊고 형식적으로 숫자를 채우는데 연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수행은 백 년을 하더라도 차라리 깨어있는 정신으로 한 독을 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금강경』을 독송하는 수행의 기간 동안에는 될 수 있다면 별도로 『금강경』의 뜻을 새기는 경전공부를 함께 해 나가야 한다. 특히 한문으로 독송을 할 경우에는 독송의 속도에 비해 그 뜻을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에 독송할 때는 독송에만 집중하고 따로 시간을 내어 『금강경』의 강설이나 『금강경』 법문을 듣는 것도 좋다. 뜻을 환히 알고 독송할 때와 아무것도 모르고 독송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영가천도를 위해 『금강경』을 독송할 때는 될 수 있다면 한글로 독송을 하거나, 한문으로 독송하더라도 그 뜻을 새기면서 천천히 간경을 하는 것이 좋다. 영가는 단순히 우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독경하는 이의 마음에 비친 생각과 소식을 듣기 때문에 독경하는 이가 『금강경』의 내용도 모르고,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채로 독송을 한다면 영가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독송을 하면서 내 스스로 『금강경』에 감동을 하고, 『금강경』의 소식에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바로 그 마음을 영가는 그대로 듣고 환희심을 내어 『금강경』의 뜻에 따라 아상을 버리고, 아집을 버린 채 이생에서의 집착을 여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독송할 때는 『금강경』을 설하신 부처님께서 지금 내 앞에서 나를 위해 법을 설해주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고, 간절하며 희유한 마음을 낼 일이다. 경전이라는 것이 곧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경전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부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 그러니 그러한 경전을 내 입으로, 내 마음으로, 내 온 존재로 수지독송한다는 것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내 안에 모시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독송은 한독한독이 그대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성스럽고도 경이로운 수행의 순간인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깨어있는 알아차림으로 『금강경』을 또렷또렷 정성스럽게 독송할 때 바로 그 순간이 그대로 내가 부처가 되는 순간이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깨어있는 독송의 순간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우리의 본래 자성은 언제나 부처였지만 평상시에는 항상 본래성품을 잃고 번뇌를 일으킴으로써 중생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독송수행으로 온전히 깨어있는 순간에는 그 어떤 번뇌며 탐진치 삼독도 끼어 들 틈이 없기에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도 청안한 깨어있음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온전한 깨어있음이 함께하는 『금강경』 일독의 독송시간은 그대로 우리를 열반으로 안내하는 부처님의 손길이다.
독송할 때는 얼버무리듯 속도만 빠르게 할 것이 아니라 또렷또렷하며 반듯한 목소리로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독송의 소리를 온전히 관하면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독송을 계속하다보면 자꾸만 잡념이 일어난다. 아마도 끊임없이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왜 이렇게 잡념이 많은가’ 하고 한탄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시비할 필요는 없다. 잡념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수행이 잘 되느니, 안 되느니 하면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잡념이 일어나면 다만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고 관하면 된다.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일어나는 잡념을 놓치고 관하지 못하는 것을 주의할 일이다. 독송 중에 이렇게 잡념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다시금 경전으로 돌아와 집중하여 관하면 된다. 그러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좌절하지 말라. 그러면서 수행의 깊이는 깊어갈 것이다. 그것은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수행 중에 마가 있다는 것이 나쁜 소식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흔쾌히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닦아가야 할 것이다.
집중수행과 생활수행
일반적으로 『금강경』 독송 수행을 할 때는 절이나 집과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을 내어 수행한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자칫 『금강경』 독송을 할 때는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진이 되는듯 하다가도, 『금강경』 독송을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다시 산란해지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금강경』 독송 수행을 한다고 해 놓고 독송 할 때만 마음이 비워졌다가 독송을 끝내고 난 뒤에는 다시 욕심과 집착과 번뇌와 아상에 물들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금강경』을 독송할 때만 수행자의 모습이지 일상 생활 속에서는 탐욕과 진심으로 들끓어 가족이나 직장 동료 등 가까운 이웃과도 맑고 향기로운 인연을 맺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수행을 하면 삶이 고요해지고, 아울러 삶이 변화하며 가지런해지기에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금강경』 수행을 한 사람은 아상이 없어 하심하고 겸손하기에 주위의 사람들이 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못난 모습까지도 비춰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삶이 바뀌고, 그에 따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찬탄하며 뒤따르고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공부를 하는가’,‘어떤 수행을 하는가’ 싶어 물어오곤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써 교화를 하는 사람이다. 위의교화의 참된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금강경』 수행을 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함께 『금강경』 수행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참된 수행의 모습이요, 참된 포교의 모습이다.
그러려면 『금강경』 수행의 정진이 독송하는 때만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 중에도 기도 수행의 마음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생활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시간을 내어 별도로 집중하여 독송 수행하는 것을 ‘집중수행’이라고 한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 어디서든 항상 깨어있는 정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생활수행’이다. 사실은 집중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활수행이다. 집중수행을 하는 이유도 그 수행력을 통해 생활이 바르게 서고,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집중수행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활 속에서 매 순간순간 깨어있는 생활수행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면 『금강경』 생활수행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보통 염불이나, 진언, 다라니, 혹은 반야심경과 같은 짧은 경전일 경우에는 외워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틈나는 대로 염불, 독송함으로써 깨어있음의 정진을 삼을 수 있으나, 『금강경』 같이 긴 경전인 경우는 모두 외우가가 어려우므로 중요한 핵심 경구인 ‘사구게’를 외워 독송하는 것이 좋다. 『금강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사구게는,‘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나,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응무소주 이생기심’ 등이 있다.
이러한 사구게와 사구게의 내용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언제 어디서든 『금강경』 독송을 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이러한 사구게를 독송함으로써 그 의미를 요달하고 마음을 집중시켜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사구게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함으로써 지관 수행의 방편을 삼을 수도 있으며, 사구게는 짧아 그 뜻을 이해하기도 쉬우니 마음을 그 뜻에 두고 간경함으로써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나 경계를 맞았을 때 사구게의 의미가 우리에게 큰 힘과 지혜를 전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금강경』 사구게 하나만 화두처럼 놓치지 않고 삶을 살아가더라도 우리의 삶이 한층 밝아지고 지혜로워지며 여여해짐을 경험할 것이다. 처음에는 사구게의 뜻을 해석해 보더라도 그 깊은 의미를 잘 모르기 쉽지만 이 사구게들은 그 안에 팔만사천의 모든 가르침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정진이 깊어갈수록 그 광대무변한 진리의 깊이가 우리의 온 존재를 환희와 지혜로 물들일 것이다.
독송의 실제
『금강경』을 처음 독송할 때는 본 『금강경 독송 지침서』의 처음에 나온 순서대로 정구업진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봉청팔금강, 봉청사보살, 발원문, 개경게, 개법장진언을 독송한 뒤에 금강반야바라밀경 제목을 읽고 바로 『금강경』의 본문을 독송한다. 그러나 봉청팔금강, 봉청사보살, 발원문을 빼고 정구업진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개경게, 개법장진언만을 읽고 바로 『금강경』 독송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혹은 개법장진언 만을 읽고 바로 독송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경전의 제목을 읽고 난 뒤 바로 제1분인 ‘여시아문 일시 불…….’하고 경전 본문을 읽는다. 각 분의 제목인 ‘법회인유분 제일’,‘선현기청분 제이’등은 읽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한자 본문에 토를 달아 ‘여시아문 하시오니 일시에 불이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하사…….’라고 독송하기도 하지만, 토를 빼고 그냥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하고 독송해도 좋다.
이런 식으로 32분까지 독송한 뒤에 ‘개대환희 신수봉행’으로 경전 독송을 끝마치기도 하지만, 그 뒤에 회향게인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를 읽으면서 끝내는 것이 좋다. 그 뜻은 ‘원컨대 내가 닦은 이 공덕이 널리 일체중생에게 회향되어 나와 중생들 모두 극락세계에 태어나서 함께 무량수부처님 뵈옵고 다 함께 성불하여지이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울러 한글본 『금강경』을 독송할 때는 위의 한글독송본의 순서에 따라 독송하면 된다. 혹은 경전의 처음과 끝은 똑같이 한문으로 된 정구업진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개경게, 개법장진언과 회향게를 읽고 본문만 한글로 독송할 수도 있다.
사구게를 독송할 때는 별도로 송경의식이나 회향게 없이 정해 놓은 사구게를 언제 어디서든 틈만 나면 염불하듯 독송하면 된다. 또한 독송하면서 몇 가지 자주 하는 질문이, 독송을 하다가 한 독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부득이하게 중단하게 되면 다시 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인데, 그냥 다음에 할 때 하던 곳부터 다시 독송해도 좋다.
-출처 :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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