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기후
끝난 겨울인 줄 알았는데
눈이 내리다니
우둘투둘 얼음처럼 잠긴 내게
당신이 꽃으로 오시다니
땅은 얼른 눈을 안아 녹이고
나는 머뭇머뭇 당신 따라 깨어나고
<시작 노트>
일상에서 이상 기후를 느낄 때마다 우리는 잠깐씩 멈칫한다.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이한 자연에 대한 감성이 먼저 작동할 때도 있다.
눈은 겨울에 내려야 하고, 얼음이 한창이면 꽃은 아직 멀리 있는데,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뜻밖의 날씨는 예측하지 못한 인연의 느낌이다. 4월에 내리는 눈처럼, 언 가지 곁에 피는 꽃처럼,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어떤 연유로 닿는 사람들.
그러나 너무 잦은 이상 기후는 두렵다. 크나큰 혼란과 재해를 품고 있을 것이므로.
첫댓글 김남이 시인님 시 한편 더 감상합니다
왜 그렇게 살아
툭 던진 너의 말이
내 책상 위로 떨어지자
늦은 밤의 보료에
활자들이 유리 파편으로 흩어진다
보이지 않는 별을 안고
낮과 밤의 경계를 떠도는 나를 너는 모르고
밥이 되지 못해 당당할 수 없는 내 어떤 일을
너는 도무지 모르고
너의 말이 아니어도 가끔 생각한 적 있다
당찬, 맹렬한 같은 말 품고 살았다면
코스모스보다 검붉은 장미를 좋아했다면
놓인 자리보다 놓일 나를 곰곰 따져보았다면
암각서로 만났을까 이 활자들
내 속에 상처를 긋는 파편들
네게 보여줄 수 있을까
왜 이렇게 사는지 밤새 횡설수설과 놀아도
내일 아침은 또
‘전자 세금 신고’라는 사거리 현수막이
한사코 “전세 자금 신고‘ 로 읽히겠지만
그런 아침 문장들은 더 다급하다
상처는 별의 이마로 가려야 하니까
-시집 『상처는 별의 이마로 가려야지』에서
다시 끓이곤 했다
김남이
살짝 흐려 있는 콩나물국
비틀린 멸치나 북어살 한 점 없이
쏟아버리면 금방 잊힐
냄비 바닥에 고인 미련 몇 가닥이
개수구에서 주춤거렸다
붉고 노랗고 푸릇하니 다 제 색깔 가진 것들
물을 더 넣고 팔팔 끓여
허물해진 파와 당근채와 콩나물로 또 한 끼를 넘기니
아렸던 속이 순해졌다
너덜해진 내가 쓸모없게 느껴질 때마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 수도
얼룩들 햇볕에 널 수 없어서
지나간 어둠을 조금 더 부어 끓이곤 했다
바닥의 건더기들 휘젓다 보면
쉰내를 날려 보낸 색깔과 아삭거림이
애써 거품으로 떠올랐고
멀리 가는 꿈은
거품 방울에도 목 축이고 있었다
-시집 『상처는 별의 이마로 가려야지』에서
줄을 넘는다
김남이
줄 가운데로 어떤 무게가 몰려온다
어둡고 우둘투둘한 그것이 납작하게 깔려 없어지란 듯
발다닥을 쿵쿵 내리찍는다
배와 허리에 뭉친 살들이 덜렁거린다
태양의 눈총 아래 거뜬하기 위해
삐딱선 타는 내 입 달래기 위해
갑옷처럼 둘러쓴 살들이건만
줄을 넘는다
꼭 잡은 손잡이에 뭉쳐 있던 진동이
손목과 팔뚝과 어깨를 타고 발을 들어 올린다
바닥에서 공중으로 잠시 날아오르는
줄넘기는 숨이 차고 종아리가 땅기는 순간의 연속
수없이 넘어가도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지만
내 발이 모르게 누군가 의도하는 줄
땀방울 매단 불빛 점점 흐려져도
줄은 나를 띄워 올린다
야문 관절과 곧은 척추로 서라고
발바닥 피톨들 정수리까지 끌어 올리며
한고비 넘긴 몸이 자동인형처럼 뛰어 오를 때쯤
줄이 나를 놓아버리는 순간은 온다
제 절정에 취해 흩어지는 허공의 춤사위
그것과 무관하게
나는 바닥을 밀어낸다
-시집 『상처는 별의 이마로 가려야지』에서
곁들여
작은 깐마늘 두어 조각 푹 다져 넣고 빨간 고춧가루를 콩나물국에 사알짝
표시도 안 나게 뿌린 후
다음엔, 후 후 불며 먹기 전에
시큼한 발사믹식초를 길게 한 방울 톡 떨어뜨리면
그야말로 따봉이죠^^(제 경험상으론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나의 항아리
김남이
남들은 내가 키운다고 했지만 사실 항아리가 나를 키우고 있었다 아름다운 내 항아리 먼지 앉을세라 금갈세라 두 팔로 감싸 안고 수시로 닦고 문질렀다 무언가를 향해 있는 마음은 가끔씩 확 뻗쳐오르기도 하는데 그런 날이면 아예 몸에 붙여 안고 다니기도 했다
익숙하지만 누군지 분명치 않은 얼굴 하나가 항아리에 손대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는 지푸라기와 흙덩이를 집어넣기도 하고 거친 쇠꼬챙이로 표면에 흠집도 냈다 또 어떤 날은 돌멩이로 부숴버리려 했다 쓸데 없이 부풀려진 거추장스런 물건이라 했다
그에게 악다구니 쓰며 손목을 분질러 버리고 입속에 오물덩이를 처넣고 싶었지만 그가 누군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얼핏 나를 닮은 것도 같았다
사방이 캄캄한 그믐날 나도 캄캄해져서 아무도 모르게 항아리를 멀리 떼어 놓기로 했다 어떤 궁리로도 버리거나 부술 수도 없어 뒤란에 얼마간 묻어둘 요량이지만
항아리에 어울릴 꽃이나 열매를 마련할 때까지 참는 내 방식 아직 통할까 항아리도 앙다문 입으로 제 근육 움켜질 것이다 내린 듯 사라지지만 땅속까지 적시는 진눈깨비의 겨울을 잘 보내야겠다고
-시집 『상처는 별의 이마로 가려야지』에서
내일을 예척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삶 같아요
이상기후로 겨울에 진달레가 피고
봄에 코스모스가 피는 것도 날씨가 변덕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꽃들은 기후에 순응한 죄밖에 없지요?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이상기후로 인해
산불이 나고 헤일이 일고 폭우가 쏟아지지요
살아가면서 자연에 배신 한 것들이
재앙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생각하니 무섭기도 합니다
인간과도 자연과도 상생이 필요한 것인데
인간의 삶의 질서도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아기가 줄어들고 동성애는 늘아나고 배신은 밥먹 듯 하고
산첩첩 물첩첩이라더니
살아갈수록 번잡하고 말 많고 시끄러워가는 세상 같아서....... 이
모두가 이상기온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일?
끝인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고, 끝이 아닌줄 알았는데 끝이라는 사실은 오늘날 자연 현상과 인생에 있어 병가의 (예)상사가 되고 말았다. 이상은 이상이 아니다. 겨울에 진달래꽃이 피고 봄날에 눈이 내리는 것은 이상 기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의외의 진리이거나 우연한 마주침의 사건이기도 하다. 꽃눈으로 온 당신은 겨울과 봄 사이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으로서 죽음과 생명의 경계가 가로 놓여 있다. 눈을 안아 녹이는 대지의 꽃이 새로운 봄날, 시와 삶의 지혜는 우연을 받아들이고 우연과 연대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당신을 따라 머뭇거리며 피어난 “꽃들은 침묵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 빛이 되었다. 새들이 그 나무에서 노래했다. 마치 침묵이 그 마지막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쳐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 침묵의 음音들을 쪼아 올리는 것이 새들의 노래인 것 같았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그리고 이 시의 '~니, ~고'의 어미 처리로 인한 리듬감이며 여운이며, 딴은 부사어('우둘투둘', '머뭇머뭇')의 적절한 사용도 미적 장치로 기능해 있다.
"땅은 얼른 눈을 안아 녹이고
나는 머뭇머뭇 당신 따라 깨어나고"
* * *
이크!
첫눈 같은 당신, 꽃으로 오는 당신과 단단히 봄바람 났군요~
머뭇머뭇 깨어나는 모습에서 봄의 생기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