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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27권
6. 변수면품③
6.4. 온갖 번뇌에 관한 그 밖의 문제[1]
1) 경에서 설한 번뇌의 여러 명칭
① 총설
앞에서 논설한 수면과 아울러 그것에 수반되는 번뇌[伴]를 부처님께서는 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ㆍ취(取)로 설하고 있다.10)
‘누(āśravā)’란 3루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루(欲漏)이며,
둘째는 유루(有漏)이며,
셋째는 무명루(無明漏)이다.
‘폭류(ogha)’란 4폭류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폭류(欲瀑流)이며,
둘째는 유폭류(有瀑流)이며,
셋째는 견폭류(見瀑流)이며,
넷째는 무명폭류(無明瀑流)이다.
‘액(yoga)’이란 4액을 말하는 것으로, 폭류에서 설한 것과 같다.
‘취(upādāna)’란 4취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취(欲取)이며,
둘째는 견취(見取)이며,
셋째는 계금취(戒禁取)이며,
넷째는 아어취(我語取)이다.11)
② 3루(漏)
이와 같은 ‘누’ 등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번뇌와 아울러 전(纏)에서
치(癡)를 제외한 것을 욕루라고 하며
유루는 상 2계의 번뇌로서
오로지 ‘치’를 제외한 것이다.
즉 다 같이 무기성이고, 대치가 동일하며
선정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하나로 합한 것이며
무명은 모든 유(有)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따로이 하나의 ‘누’로 삼은 것이다.12)
폭류와 액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지만
견(見)을 따로 건립한 것은 날카롭기 때문으로
견은 ‘머물게 한다’는 뜻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누’에서는 따로 독립시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욕액과 유액과 아울러 ‘치’와,
‘견’을 두 가지로 나눈 것을 ‘취’라고 이름하니
무명(즉 ‘치’)을 따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능히 집취(執取)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번뇌와 아울러 전(纏)에서 치(癡, 즉 무명)를 제외한 마흔한 가지의 법[物]을 모두 ‘욕루(欲漏)’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서른한 가지의 근본번뇌와 아울러 열 가지 ‘전’이 바로 그것이다.13)
색ㆍ무색계의 번뇌 중의 치(무명)를 제외한 쉰두 가지의 법을 모두 ‘유루(有漏)’라고 이름하니,14) 이를테면 상 2계의 근본번뇌로서 각기 스물여섯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색ㆍ무색계에도 비록 혼침(惛沈)과 도거(掉擧, 각기 10전의 하나)가 역시 또한 존재할지라도, 전(纏)은 계(界)에 근거하여 분별하지 않으니, 상계의 ‘전’은 그 수가 적을 뿐더러 자력으로 일어나는 것[自在轉]이 아니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오로지 [근본]번뇌만을 유루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의 경우도 역시 계에 근거하여 분별한다면, 유루는 쉰여섯 가지가 있게 된다. 그래서 『품류족론』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유루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색ㆍ무색의 2계에 계속되는 결(結)과 박(縛)과 수면과 수번뇌(隨煩惱)와 전(纏)이 바로 그것이다.”15)
어떠한 이유에서 상 2계의 수면을 합하여 하나의 유루로 설한 것인가?
다 같이 무기성이면서 대치가 동일하며, 선정[定地]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으로, [상 2계의 번뇌도] 역시 색(色)ㆍ성(聲)ㆍ촉(境)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 오로지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內門轉]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16)
그리고 그 뜻에 준하여 볼 때, 3계의 열다섯 가지의 무명이 무명루(無明漏)의 본질이 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본송에서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이것(즉 무명) 만을 따로 ‘누’라고 하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인가?
무명의 과실과 환란[過患]이 특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무명은] 그 자체만으로 능히 생사의 근본이 되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탐염(貪染)을 낳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
또한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도 같다.
존재하는 모든 악취와
이 세간과 저 세간은
모두 무명을 근본으로 삼고
탐욕에 의해 등기(等起)된 것이로다.
지금 여기서는 오로지 수승한 것에 근거하여 백여덟 가지의 온갖 혹(惑)만을 ‘누’로 나타내어 논설하였을 뿐으로,17) 염오하지 않은 사(思) 등이나 한(恨) 등은 ‘누’에 포섭되지 않는다.
오로지 이같이 [수승한] 온갖 혹(즉 108번뇌)만이 유정을 계류(稽留)시켜 생사에 오래 머물게 하거나, 혹은 유정천(有頂天, 비상비비상처천을 말함)으로부터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생사 중에 유전하게 하므로18) 그 작용이 강력함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의 번뇌에] 치우쳐 [‘누’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19)
③ 4폭류(瀑流)와 4액(軛)
폭류와 액의 본질은 ‘누’와 동일하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견(見)을 역시 따로 설정하였다.
즉 앞에서 언급한 ‘욕루’는 바로 욕폭류(欲瀑流)와 욕액(欲軛)에 해당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유루’는 바로 유폭류(欲瀑流)와 유액(有軛)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기서의 온갖 ‘견’을 [별도로] 떼어 내어 견폭류(見瀑流)와 견액(見軛)으로 삼았으니, 그 성질이 지극히 날카롭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표탈(漂奪)과 화합(和合)과 의집(依執)이라는 뜻에서 ‘폭류’와 ‘액’과 ‘취’를 설정한 것으로,20) 단지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번뇌는 모두 서로를 자조(資助)하여 능히 [선품을] 씻어버리고[漂奪], [3계ㆍ4생ㆍ5취와] 화합시키며, [‘생’ 등에] 의지하고 집착[依執]하게 하듯이, 온갖 ‘견’도 역시 그러하다.
즉 온갖 ‘견’은 그 성질이 지극히 날카롭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번뇌와의 상호자조(도움)를 떠나서도 능히 [선품을] 씻어버리고, [3계ㆍ4생ㆍ5취와] 화합시키며, [‘생’ 등에] 의지하고 집착하게 하기 때문에 역시 [견]폭류와 [견]액과 [견]취로서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또한 모든 번뇌는 다 중생들로 하여금 염법(染法)[의 바다]를 떠돌게 하고 온갖 선품으로부터 떠나게 하게 하는데, 무해(無解, 즉 무명)와 사해(邪解, 즉 ‘견’)는 파도를 솟구치게 하고 중생을 표류시켜 선법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여기(폭류와 액)서 무명과 ‘견’을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견루(見漏)는 별도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머물게 하는 것’을 일러 ‘누(漏)’라고 이름하니, 뒤에서 논설하는 바와 같다.21)
그러나 ‘견’은 그러한 뜻에 수순하지 않을 뿐더러 의미상에도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생과 온갖 성자들로 하여금 다 같이 생사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누’라고 이름하였지만,
온갖 ‘견’은 어떠한 경우에도 성자들로 하여금 [생사에] 머물게 하는 공능을 갖지 않기에 [머물게 한다는] ‘누’의 뜻이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견루를 별도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22)
그러나 표탈(漂奪, 즉 폭류)과 화합(和合, 즉 ‘액’)과 의집(依執, 즉 ‘취’)의 뜻은 성자와 이생의 경우가 다르기 때문에 뒤의 세 갈래(누를 제외한 폭류ㆍ액ㆍ취)에서는 모두 ‘견’을 따로 설정하였다.
이를테면 이러한 온갖 번뇌는 능히 이생을 [생사의 바다에] 떠돌게 하고 일체의 선품에서 떠나게 하는 일이 있지만, 온갖 성자는 그렇게 떠돌게 할 수 없다.
또한 떠돌게 하고서는 능히 온갖 이생의 종류들로 하여금 좋지 못한 계(界)와 취(趣)와 생(生)과 화합하게 하지만, 성자는 그렇게 화합하게 할 수는 없다. 또한 화합하고 나서 능히 온갖 이생의 종류들로 하여금 거기에 의지하고 집착하지 않게 하는 일이 없지만, 성자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세 가지 갈래로 보건대, 이생은 성자의 경우와 다르며, 그 중에서도 특히 ‘견’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것을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견(見)은 그 성질이 성급하고 날카롭기[躁利] 때문에 단독으로는 [생사의 바다에] 머물게 한다는 뜻으로 분별될 수 없다.
그래서 ‘누’의 갈래에서는 그 밖의 다른 번뇌와 더불어 설정된 것이다. 만약 그 밖의 다른 번뇌와 더불어 설정한다면, 머물게 하는 공능을 바로 갖게 되니, 이는 마치 코끼리 왕을 조련시키면서 그가 낳은 코끼리 새끼와 함께 묶어 두는 것과 같다.”23)
이상에서 스물아홉 가지의 법을 욕폭류(欲瀑流)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이미 나타낸 셈이니, 이를테면 탐ㆍ진ㆍ만에 각기 다섯 종류가 있고, 의(疑)의 네 가지와 전(纏)의 열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24)
스물여덟 가지의 법을 유폭류(有瀑流)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색ㆍ무색계의] ‘탐’과 ‘만’의 각기 열 가지와, ‘의’의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혼침(惛沈)과 도거(掉擧)를 더한다면, 서른두 가지가 될 것이니, 색ㆍ무색계에 각기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25)
서른여섯 가지의 법을 견폭류(見瀑流)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3계 중의 각기 12견이 바로 그것이다.
열다섯 가지의 법을 무명폭류(無明瀑流)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3계의 무명 각각에 5부(部)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4액(軛)은 4폭류와 동일하다.
④ 4취(取)
다시 4취(取)의 본질은 4액과 동일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욕취(欲取)와 아어취(我語取)에 각기 무명을 더한 것과, ‘견’을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은 것이 앞의 액(軛)의 경우와 다르다.26)
즉 앞의 욕액(欲軛)에 욕계의 무명을 더한 서른네 가지의 법을 모두 욕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탐ㆍ진ㆍ만ㆍ무명의 각기 다섯 가지와, ‘의’의 네 가지와 아울러 10전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유액(有軛)에 상 2계의 무명을 더한 서른여덟 가지의 법을 모두 아어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탐ㆍ만ㆍ무명의 각기 열 가지와, ‘의’의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혼침과 도거를 더한다면, 마흔 두 가지가 된다.27)
그리고 견액(見軛) 중의 계금취를 제외한 나머지 서른 가지의 법을 모두 견취(見取)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나머지 여섯 가지(3계의 견고ㆍ견도소단)의 법을 계금취(戒禁取)라고 이름하는데,
이것만이 홀로 성도(聖道)에 적대되는 원수가 되기 때문이며,
두 가지(즉 非因計因과 非道計道) 모두 출가와 재가의 무리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28)
어떠한 이유에서 무명을 별도의 ‘취’로 건립하지 않는 것인가?
‘능히 [온갖 존재(有)에] 집착[取]한다’는 뜻에 근거하여 ‘취’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지만, 모든 무명은 능히 집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알지 못하는 것[不了相]을 설하여 ‘무명’이라 이름한 것으로, 그것은 능히 집착하는 것이 아니니, 지극히 예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만 다른 번뇌와 합쳐서 ‘취’로 설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수면과 아울러 전(纏)을 경에서 누ㆍ폭류ㆍ액ㆍ취라고 설한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2) 수면 등의 명의(名義)
그렇다면 이러한 수면 등의 명칭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미세와 두 가지에서의 수증과
수축(隨逐)과 수박(隨縛)ㆍ
머묾과 유전ㆍ표탈ㆍ화합ㆍ의집(依執)
이것이 바로 수면 등의 뜻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근본번뇌(즉 10수면)가 현재전할 때 그 행상(行相)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미세(微細)’라고 이름한다.29)
그래서 성자인 아난타(阿難陀)도
“나는 지금 동일한 범행(梵行)에 대해 만심(慢心)을 일으키는지 일으키지 않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던 것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만수면의 행상이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도 만심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온갖 이생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그 밖의 다른 수면의 경우도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1찰나의 극미에서도 역시 수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미세’라고 이름한다”고 해석하였다.
‘두 가지에서의 수증(隨增)’이란, 말하자면 [수면은] 능히 그것의 소연이나 상응하는 법에서 모두 수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번뇌가 소연과 상응법에서 수증하는 일이 있다는 것인가?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30) 혹은 원수가 해코지하려고 허물과 틈[瑕隙]을 살펴 구하듯이, 아울러 독(毒)을 관찰하듯이, 번뇌도 자신의 소연에서 수증하는 일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뜨거운 쇠 구슬이 능히 물을 뜨겁게 하듯이, 아울러 독과 접촉하듯이, 번뇌도 자신과 상응하는 법에서 수증하는 일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두 가지는 모두 유모가 아기로 하여금 [그녀에] 따라 성장하게 하며, 유모가 아기로 하여금 능히 성장하게 하는 동시에, 아울러 기예를 점차 쌓아가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소연과 상응법은 온갖 번뇌의 상속으로 하여금 증장하게 하며, 아울러 적집(積集)을 획득하게 하는 것이다.
‘수축(隨逐)’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수면이] 무시(無始) 이래로 [유정의] 상속 중에서 [그것의] 득(得)을 일으켜 [유정을] 쫓아다니는 것[隨逐]을 말한다.31)
‘수박(隨縛)’이라고 말한 것은 그것을 떠나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니,32) 마치 사일열(四日熱)의 학질이나 서독(鼠毒)과도 같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수박이란 말하자면 획득되어 항상 수전(隨轉)하는 것으로, 마치 바다의 물고기[水行]가 공중을 나는 새[空行]의 그림자를 따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설한 온갖 인연으로 말미암아 열 가지 종류의 번뇌를 ‘수면(隨眠)’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훈사문(訓詞門)에 근거하여 이것의 명칭을 해석하면 [이러하다]. 즉
[수면은] 말하자면 ‘따라 유전하는 것[隨流]’으로, [유정의] 상속 중에서 잠자고 있기 때문에 ‘수면’이라고 이름하였다.
여기서 ‘따라 유전한다’고 함은 소의신 중에 안주하여 증장하며 뒤섞여 머문다[惛滯]는 뜻이다.
혹은 ‘따라 두드러진 것[隨勝]’으로, [유정의] 상속 중에서 잠자고 있기 때문에 ‘수면’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바로 참다운 이해[如實解]로 들어가는 상태를 혼미하게 한다는 뜻이다.
혹은 옥(獄) 중에서 오랫동안 쫓아다니며[隨逐] 유정류를 덮고 있기 때문에 ‘수면’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탐 등의 열 가지만이 수면이고, 그 밖의 분(忿) 등은 수면이 아닌 것인가?33)
오로지 이러한 열 가지 종류만이 습기(習氣)가 견고할 뿐, ‘분’ 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수면은] 유정을 생사(生死)에 체류시켜 오래 머물게[住] 하거나, 혹은 유정천으로부터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생사 중에 유전(流轉)하게 하는 것으로,34) 그들의 상속은 6창문(瘡門, 즉 6근을 말함)에서 끝없이 허물[過]을 누설하기 때문에 [수면을] 일컬어 ‘누(āsrava)’라고 하였다.
또한 선품을 극심히 표탈(漂奪)시켜 버리기 때문에 ‘폭류(ogha)’라고 이름하였고,
유정을 [3]계ㆍ[5]취ㆍ[4]생과 화합시키기 때문에 ‘액(yoga)’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그러한 [3계ㆍ5취ㆍ4생] 각각에 집착하게 하기 때문에 ‘취(upādāna)’라고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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