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비달마순정리론 제46권
5. 변수면품 ②
1.3. 10수면
앞에서 설한 여섯 종류의 수면은 다시 다른 갈래[異門]에 근거하여 열 가지로 건립된다.
어떻게 하여 열 가지가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6수면은 견(見)의 차별에 의해 10수면이 되니
여기서 차별이란 말하자면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과 사견(邪見)과
견취(見取)와 계금취(戒禁取)가 바로 그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6수면 가운데 ‘견(見)’은 그 행상(行相)이 달라 다섯 가지가 되고, 그 밖의 나머지는 ‘견’ 아닌 다섯 가지(즉 貪ㆍ瞋ㆍ癡ㆍ慢ㆍ疑)이니, 그 수를 합하면 모두 열 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열 가지 수면 중에서 다섯 가지는 바로 ‘견’의 성질로서,1) 첫 번째는 유신견(有身見)이며, 두 번째는 변집견(邊執見)이며, 세 번째는 사견(邪見)이며, 네 번째는 견취(見取)이며, 다섯 번째는 계금취(戒禁取)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섯 가지는 ‘견’의 성질이 아니니, 첫 번째는 탐(貪)이며, 두 번째는 진(瞋)이며, 세 번째는 만(慢)이며, 네 번째는 무명(無明)이며, 다섯 번째는 의(疑)이다.
이 같은 견(見)과 비견(非見)을 합하여 열 가지가 되는 것이다.
1.4. 98수면으로의 전개
또한 이러한 여섯 종류의 수면은 다시 다른 갈래에 근거하여 아흔 여덟 종류가 된다.
어떠한 갈래에 근거하여 아흔 여덟 가지로 건립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6수면은 행상(行相)과 부(部)와 계(界)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흔여덟 가지가 되니
욕계 견고(見苦) 등에 의해 끊어지는
열ㆍ일곱ㆍ일곱ㆍ여덟ㆍ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순서대로 [열 가지를] 다 갖춘 것
3견과, 2견과, 견(見)ㆍ의(疑)를 배제시킨 것이며
색계와 무색계의 경우는 ‘진’을 제외할 뿐
그 밖의 것들은 욕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여섯 가지 종류의 수면은 행상(行相)과 부(部)와 계(界)의 차별로 말미암아 아흔 여덟 가지가 된다. 이를테면 6수면이 견(見)의 행상의 차이로 말미암아 열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 즉 이렇게 분별된 열 가지 종류의 수면은 ‘부’와 ‘계’가 동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아흔 여덟 가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prakāra)’란 이를테면 4제(諦)를 관찰[見]하여 끊어지고 수습(修習)하여 끊어지는 다섯 갈래의 부류[五部]를 말하며, ‘계(dhātu)’란 욕ㆍ색ㆍ무색의 3계를 말한다.2)
바야흐로 욕계의 수면은 5부가 동일하지 않음에 따라 10수면에 편승하여 서른여섯 가지가 되니, 말하자면 견고제소단(見苦諦所斷)으로부터 수소단(修所斷)에 이르기까지 그 순서대로 열 가지와 일곱 가지와 일곱 가지와 여덟 가지와 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곧 위에서 언급한 5부 중의 한 가지(견고소단)와 두 가지(견집ㆍ견멸소단)와 한 가지(견도소단)와 한 가지(수소단)에다 순서대로 10수면을 모두 다 갖춘 것과, 세 가지 견(見)과, 두 가지 견과, [5]견과 의(疑)를 각기 배제하여 적용시킨 것이다.
이를테면 견고제소단(見苦諦所斷, 혹은 見苦所斷)은 10수면을 모두 다 갖추고 있으니, 일체의 수면은 모두 고제를 관찰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3) 견집제소단(見集諦所斷, 혹은 見集所斷)과 견멸제소단(見滅諦所斷, 혹은 見滅所斷)에는 각기 유신견과 변집견과 계금취를 제외한 일곱 가지가 있으며, 견도제소단(見道諦所斷, 혹은 見道所斷)에는 앞의 일곱 가지에다 계금취를 더한(다시 말해 10수면 중 유신견과 변집견을 제외한) 여덟 가지가 있다. 그리고 수소단(修所斷)에는 5견과 의(疑)를 제외한 네 가지가 있다.
이상의 수면을 모두 합하면 바로 서른여섯 가지 종류가 되는 것으로, 그 중에 앞의 서른두 가지를 견소단(見所斷)이라고 이름하니, 4제를 관찰할 때 그것은 바로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후의 네 가지를 수소단(修所斷)이라고 이름하니, 그것은 4제를 관찰하고 난 이후 되풀이하여[數數] 도(道)를 수습할 때 비로소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10수면 중의 살가야견(薩伽耶見, satkāya-dṛṣṭi, 有身見의 원어)은 오로지 1부에만 존재하니, 이를테면 견고소단이 바로 그것으로, 변집견도 역시 그러하다. 계금취는 2부에 모두 존재하니, 이를테면 견고소단과 견도소단이 바로 그것이다. 사견은 4부와 통하니, 이를테면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소단이 바로 그것으로, 견취와 의(疑)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그 밖의 탐 등의 네 가지(탐ㆍ진ㆍ만ㆍ무명)는 각기 5부와 통하니, 이를테면 견4제소단과 수소단이 바로 그것이다.4)
이와 같은 수면을 전체적으로 설하면, ‘견’은 열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의’는 네 가지로 나누어지며, 나머지 네 가지는 각기 다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욕계 중에는 서른여섯 가지의 수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문답하여 말하고 있다.5)
“이 중의 어떠한 상(相)을 견고소단이라 하고, 내지는 어떠한 상을 수소단이라고 하는 것인가?6) 만약 이러한 [성제(聖諦)를] 관찰하여 끊어지는 것(견소단의 번뇌 즉 見惑)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면 견차제소단(見此諦所斷)이라 이름하고, 그 밖의 것은 수소단이라 이름한다.”7)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변행(遍行)의 수면은 5부를 반연하기 때문이다.8) 즉 견고ㆍ견집소단의 수면은 역시 마땅히 견집ㆍ견고소단 등의 수면과도 통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견멸ㆍ견도소단의 수면은 비소단법(非所斷法)을 반연하는 것으로, 마땅히 무엇에 의해 끊어지는 것인지 말했어야 한다.9) 따라서 그는 끊어지는 법의 상에 대해 잘 말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견(見)이 고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은 것을 일컬어 ‘견고(見苦)’라고 하니, 이는 바로 고법(苦法)과 고류(苦類)의 지(智)ㆍ인(忍)으로, 이 두 가지 법에 의해 끊어지는 것을 모두 설하여 견고소단이라고 이름하였다고10) 말해야 한다. 나아가 견도소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자주 익히는 것[數習]을 일컬어 ‘수(修)’라고 하였다. 즉 견적(見迹)이란 상(上,열반)을 획득한다는 뜻으로, 고(苦) 등의 지(智)에 대해 자주 훈습(熏習)하는 것을 설하여 ‘수(修)’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도에 의해 제거되는 [수면을] 수소단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러한 설명이야말로 소단(所斷)의 상을 잘 세운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의 5부에는 각기 진(瞋)이 제외되며,11) 그 밖의 다른 것은 욕계에서와 동일하기 때문에 색ㆍ무색계에는 각기 서른 한가지의 수면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인해 모든 정리논사(正理論師, 유부 毘婆沙師를 말함)들은 6수면을 [‘견’의 차별적인] 행상과 [5]부와 [3]계에 근거하여 아흔 여덟 가지로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12)
욕 계색 계무색계
견고소단 탐ㆍ진ㆍ만ㆍ무명ㆍ의ㆍ유신견ㆍ변집견ㆍ계금취ㆍ사견ㆍ견취 진을 제외한 9가지 좌동 28가지
견집소단 탐ㆍ진ㆍ만ㆍ무명ㆍ의ㆍ사견ㆍ견취 진을 제외한 6가지 좌동 19가지
견멸소단 탐ㆍ진ㆍ만ㆍ무명ㆍ의ㆍ사견ㆍ견취 진을 제외한 6가지 좌동 19가지
견도소단 탐ㆍ진ㆍ만ㆍ무명ㆍ의ㆍ계금취ㆍ사견ㆍ견취 진을 제외한 7가지 좌동 22가지
수소단 탐ㆍ진ㆍ만ㆍ무명 진을 제외한 3가지 좌동 10가지
36가지 31가지 31가지 98가지
1) 98수면과 견(見)ㆍ수소단(修所斷)
이상에서 분별된 98수면 가운데 여든 여덟 가지는 견소단(見所斷)이니, 인(忍)에 의해 해손(害損)되기 때문이며, 열 가지 수면은 수소단(修所斷)이니, 지(智)에 의해 해손 되기 때문이다.13)
2) 방론(1)-수면을 9지(地)에 따라 분류하지 않는 이유
어떠한 이유에서 이같이 계(界)가 동일하지 않음에 근거하여 수면을 건립하면서도 [9]지(地)의 차이에 근거하여서는 [수면을 건립하지] 않은 것인가?14) 계(界)를 달리하는 욕ㆍ색계의 수면이 동일한 일에 대해 함께 수증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지(地)를 달리하는 초정려와 제2정려의 수면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지(地)가 비록 다를지라도 [그것의] 대치는 동일하지만, 욕ㆍ색계의 경우 대치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그럴 경우 마땅히 무색계[의 수면]을 별도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무색계와 색계[의 수면]도 대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수소단의 대치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색ㆍ무색계[의 수면]은 마땅히 별도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온갖 지(地)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별도로 설하지 않는 것인가?
따라서 마땅히 이백 여든 네 가지의 수면을 설정해야 하는 것으로,15) 설혹 이와 같이 인정할지라도 역시 또한 어떠한 허물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이상 제 수면을 9지에 근거하여서도 분류해야 한다는 이설)
바야흐로 계(界)의 차이에 근거하여 아흔여덟 가지로 설정할 뿐이니, 그 까닭은 [3]계의 탐을 떠나는 것에 의해 변지(遍知)와 사문과(沙門果)를 설정하였기 때문이다.16) 즉 이 두 가지는 수면을 끊는 것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 이것(변지)이 수면을 끊는 것은 ‘계’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지 ‘지’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에 근거하여서는 수면을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숙구사(宿舊師)도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법성(法性)에 대해 명료하게 통달하였기에 능히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설하여 나타내 보일 수 있었다. 결정코 4정려지(地)의 온갖 번뇌의 법성에 대해서도 능히 잘 관찰하였지만, 부분적[少]으로 서로 유사하기에 비록 네 단계[地]로서 존재할지라도 그것들을 합하여 한가지로 설하였던 것이며, 4무색정을 합하여 [한가지로] 설한 것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경에서는 다만 ‘색탐’이나 ‘무색탐’ 등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정리논사(正理論師)들도 수면을 ‘지’가 아니라 ‘계’에 근거하여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4지의 [번뇌의] 법성이 어떻게 부분적으로 서로 유사하다는 것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것들은] 다 같이 지(支)를 포섭하는 단계[地]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지만,17) 이러한 해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온갖 근분지(近分地) 중에서도 번뇌를 낳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18)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4지는] 다 같이 두루 비추는 단계[遍照地]에 포섭되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어떤 이는 “[4지는] 다 같이 색탐(色貪) 류(類)의 번뇌[惑]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중현)는 [이같이] 말하리라. “여기서 ‘부분적으로 서로 유사하다’고 함은 오로지 박가범(薄伽梵)만이 명료하게 통달할 수 있다. 요컨대 [색계 중에서는] 제4정려의 하하품의 번뇌를 영원히 끊을 때 비로소 변지를 설정하며,19) 하지(下地)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다시 말해 변지로 설정하지 않기 때문에) 4지는 필시 부분적으로 [번뇌의] 성류(性類)가 서로 유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상지(上地)의 번뇌는 능히 하지(下地)를 반연하여 속박하는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아래 세 정려에서 이계(離繫)를 획득할 때 별도의 단변지(斷遍知)를 설정하지 않는 것인가?
결정코 동일한 종류의 번뇌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이계한 것과 계박하고 있는 것이 서로 유사한 것이라고 할지라도,20) 요컨대 동류의 번뇌를 남김없이 영단(永斷)할 때 비로소 ‘구경(究竟)의 이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오로지 계(界)에 근거하여 수면을 설정할 뿐 지(地)에 근거하여서는 설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이치상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이가 원적에게 사로잡혀 감옥에 갇혀 있다가 방편으로 탈출하였지만 원적의 성(城)이나 숲이나 밭이나 공한지 등과 서로 유사하지 않은 곳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비록 원적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났을지라도 크게 안온하지 못한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아래 세 선정의 탐을 끊었지만 아직 그러한 탐과 서로 유사하지 않은 곳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비록 일부분[의 번뇌]로부터 벗어났을지라도 아직은 크게 안온하지 못하다. 그래서 오로지 ‘계’에 근거하여 수면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유여사는 [이같이] 말하였다.
“만약 욕계를 초월하였다면 이는 바로 다수의 취(趣)와 다수의 생(生)에 걸친 크나큰 온(蘊)ㆍ처(處)ㆍ계(界)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의 괴로움[苦法]을 이미 초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만약 색계를 초월하였다면 이는 바로 하나의 취온 전부와 다수의 처ㆍ다수의 계를 이미 초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21) 만약 무색계를 초월하였다면 이는 바로 일체 생사에 포섭되는 온ㆍ처ㆍ계를 모두 초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래 세 선정을 떠날 때 초월하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지’가 아니라 ‘계’에 근거하여 수면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옛날[古昔]의 여러 정리논사(正理論師)들 역시 수면을 지(地)에 근거하여 건립하는 것을 인정하였으니,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답을 일시 시설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혹 이생(異生)으로서 98수면을 영원히 끊었으면서(혹은 끊지 못하였으면서) 그 모두를 성취하는 자가 있는가?22)
있다. 이를테면 이생으로서 욕계에 태어나 존재하며 제3정려를 획득하였지만, 아직 그것의 탐을 떠나지 않은 이가 그러하다.
혹 이생으로서 제3정려를 획득하고서 앞서 말한 98종의 수면을 영원히 끊었으면서(혹은 끊지 못하였으면서) 그 모두를 성취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그러한 이생으로서 욕계로부터 이미 몰한 자가 그러하다.
혹 견도의 고법지인(苦法智忍)의 단계에 머무는 이로서 98수면의 영단(永斷)을 모두 성취하는 자가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그러한 이생으로서 정[성]결정(正性決定, 즉 正性離生)에 드는 것을 획득한 이가 그러하다.
혹 온갖 보특가라로서 10지(智) 중의 오로지 4지만을 성취하였으면서 스물여덟 가지 수면의 영단을 획득하는 자가 있는가?23)
있다. 이를테면 구박(具縛)의 [성자]로서 정[성]결정에 들어 바로 고류지(苦類智)에 머물 때가 그러하다.”
만약 욕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색계 중의 4정려지(地)[의 번뇌]를 동일한 계박이라 하더라도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이는 바로 계(界)의 탐을 끊는 것에 근거하여 변지와 사문과를 건립하였다는 사실과 매우 잘 부합할 뿐더러, 또한 본론(本論)에서 “변행인은 능히 자계(自界)의 염법(染法)을 낳는 원인이 된다”고 설한 것과도 부합하는 것이다.24)
그렇지가 않으니, 경론(經論)과도 상위할뿐더러 정리(正理)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먼저 경문을 인용하여 4정려가 동일한 계박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논증하기로 한다. 예컨대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나는 마땅히 심(尋)ㆍ사(伺)가 고요한 제2선정 중에 안주하리라.’ 이같이 생각하였음에도 능히 [제2선정 중에] 들 수 없자 다시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어떠한 인연으로 인해 나는 이러한 [제2선정] 중에 마음이 능히 들 수 없는 것인가?’ 이같이 생각하고 나자 스스로 바로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심ㆍ사의 과환(過患)에 대해 식별하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무심(無尋)ㆍ무사(無伺)의 공덕에 대해서도 관찰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였으며, 아직 능히 수습(修習)하지도 많이 수습하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제2선정 중에 마음이 능히 들지 못하는 것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는 이러한 [제2선정에] 머물면서도 자주 심ㆍ사를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이와 구행(俱行)하는 온갖 상(想)과 작의(作意)의 과환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지금 결정코 마땅히 이를 끊으리라.’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 경설 중의 뜻은 마치 욕계를 초월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정려지(地) 등에 대해서도 초월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하지에 존재하는 온갖 상(想)과 작의는 능히 이염(離染)을 장애할뿐더러 아울러 능히 [하지로] 물러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과환’이라 하였지만, 자지(自地, 즉 제2선정)의 [과환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색계는 동일한 계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과환을 관찰하는 것’을 능히 싫어함[厭]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는데, 싫어함은 떠남[離]의 원인이며, 떠남으로 말미암아 해탈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색계의 4지가] 동일한 계박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실들은 마땅히 쓸데없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심(尋) 등은 점차적으로 지식(止息)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만약 유가사(瑜伽師)가 제2선정에 들면 심ㆍ사는 바로 지식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아가 무변허공처정(無邊虛空處定, 즉 空無邊處定)에 들게 되면 색상(色想)이 바로 지식된다”고 설하고 있는데, 색계 제지(諸地)가 만약 동일한 계박이라고 한다면, 모든 유가자(瑜伽者)는 능히 심(尋)ㆍ사(伺)와 희(喜)ㆍ낙(樂)과 색상을 단박에 버릴 만한 어떠한 공능도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두려움과 겁약한 마음이 지극히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에 끝내 ‘심’ 등을 버리는 자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희(喜)를 떠나고 낙(樂)을 끊는다’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희’를 떠나고 ‘낙’을 끊는다”고 설하고 있으니,25) [각각의 지는] 동일한 계박이 아닌 것이다.
욕계의 온갖 처소에서는 아직 이탐(離貪)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 털끝만큼 남아있다고 할지라도 욕계의 계박을 완전히 떠났다[全離欲繫]고 말할 수 있다. 즉 오로지 이미 끊은 견소단법을 제외하고서 비록 수소단의 탐을 영원히 떠나지 못하였을지라도 ‘계박을 떠났다[離縛]’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그(예류과)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색계의 모든 지(地)가 동일한 계박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아직 끊지 못한] 그 밖의 계박이 존재하는 경우 [그것을] 떠나거나 끊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 등을 일컬어 ‘경(經)과도 상위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논(論)의 글귀를 인용하여 4정려가 동일한 계박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논증하기로 한다. 예컨대 본론(本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가 낙근(樂根)을 성취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변정천(遍淨天, 제3정려의 제3천)에 태어나거나 혹은 하지에 태어난 자, 혹은 성자로서 상지에 태어난 자이다.
누가 이러한 [낙근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변정천에 태어난] 이생으로서 상지에 태어나는 자이니, 하지에 태어나는 자가 아니다.”
여기서 상지에 태어날 때 비록 [낙근의]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말하였을지라도 [그것은] 끊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즉 동일한 계박인 욕계 따위 중에서는 이와 같이 ‘결정코 성취하고 [성쥐하지 못한다]’는 등의 이치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본론(本論)에서 “변행인은 능히 자계(自界)의 염법(染法)을 낳는 원인이 된다”고 설하였던 것은, 바야흐로 계(界)에 근거하여 수면을 건립한다는 사실에 따라 변행인을 분별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으로, 역시 또한 본론에서는 “자지(自地)의 염법을 낳는 [원인이 된다]”고 설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같은 사실 등을 일컬어 ‘논(論)과도 상위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색계는] 동일한 계박이다’고 하는 말이 정리(正理)에 어긋난다는 것인가?
먼저 경에 따른 정리에 어긋난다고 함은 [이러하다]. [색계가 동일한 계박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제2선정에서 내등정(內等淨)의 갈래를 설하지 말았어야 하였으니, 아직 심(尋)ㆍ사(伺)와 함께 하는 온갖 번뇌의 탁(濁)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26) 또한 [색계가 동일한 계박이라고 한다면] 제4정려에 태어난 유정도 역시 마땅히 염오한 심ㆍ사ㆍ희ㆍ낙을 성취한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계경에서는 “심ㆍ사가 지식(止息)된다”는 말을 설하였을 뿐더러 또한 계경에서는 “희(喜)를 떠나고 낙(樂)을 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본론(本論)에 따른 정리에 어긋난다고 함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본론 중에서 설하기를 “제2등지(等持, 정려의 다른 명칭)로서 미상응정(味相應定)은 능히 초등지(初等持)로서의 미상응정에 대해 오로지 두 가지 연이 되니, 증상연과 등무간연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27) 즉 색계의 제지(諸地)가 만약 동일한 계박이라고 한다면, 온갖 상지의 탐은 하지의 애(愛)에 대해 역시 마땅히 능히 인연과 소연연도 되어야 하고, 또한 생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등무간연도 되어야 하며, 또한 초정려의 애(愛)도 [제2] 내지는 제4정려의 탐에 대해 등무간연이 되어야 한다.
또한 마땅히 첫 번째 미정(味定, 초정려로서의 味相應定)으로부터 무간에 [제2] 내지 제4 정정(淨定, 제4정려로서의 淨相應定)이 현전해야 할 것이며, 또한 생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마땅히 제4 정정으로부터 무간에 첫 번째 미정이 일어나야 한다. 이와 같이 [색계가 동일한 계박이라고 한다면] 상ㆍ하지가 등무간연이 되어 전전(展轉) 상생(相生)한다고 해야 하므로 마땅히 다수의 난점이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네 번째 업 중의 네 가지 사(思)가 능히 백백(白白)의 이숙업을 능히 끊는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며,28) 또한 마땅히 “상지의 근분정에서는 능히 하지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도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그것은 다같이] 동일한 계박이기 때문이다. 또한 초정려를 획득한 모든 불환(不還)의 [성]자는 네 가지 선정을 획득하여 [번뇌를] 끊은 이와 마땅히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4정려와 4무색정의] 상ㆍ하지의 경우도 계(界)와 마찬가지로 업과 번뇌의 인과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이치상 동일한 계박이 아니기 때문이다.
3) 방론(2)--색ㆍ무색계에 진(瞋)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
앞에서 논설하였던 것처럼 상계(上界)에는 진(瞋)수면이 제외된다. 어떠한 연유에서 그곳에는 ‘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곳에는 진수면의 경계[事]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9) 이를테면 ‘진’은 [전5식이 감수하는] 고수(苦受)에서 수증되는 것인데, 거기에는 고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진수면은 메마르고 거친 특성[乾澁相]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번뇌는 마치 풍병(風病)처럼 그 특상이 메마르고 거친데, 그곳(상2계)의 유정류는 사마타(奢摩他)에 의해 상속이 축축하고 매끄럽기[潤滑] 때문에 거기에는 메마르고 거친 특성의 ‘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곳에는 ‘진’의 이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진’은 필시 좋지 않은 비애(非愛)의 이숙과를 초래하는데, 상 2계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좋지 않은 일이 없으니, 외적으로는 독을 갖은 가시나 풀의 날카로운 침, 재[灰] 등의 연(緣)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내적으로는 열병(熱病)도 풍병(風病))도, 미친 병[癲]도 지랄병[癎]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곳에는 괴롭히거나 해코지할 일[惱害事]이 없기 때문이며, 자(慈) 등의 선근만이 존재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며, 섭수(攝受)된 온갖 것을 모두 원리(遠離)하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또한 유여사는 설하기를 “‘진’은 그 성질이 조급하여 신속하게 원리(遠離)할 수 있기 때문으로, 유가사(瑜伽師)는 욕탐을 떠날 때 이것도 능히 지식(止息)하니, 구덩이에 머물지 않는 한 메마르고 거친 온갖 때[乾澁垢]는 조금만 씻고 닦으면 신속하게 제거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4) 98수면설에 대한 비판과 해명
(1) 분별논사가 인용한 7수면설의 경증(經證) 비판
그런데 분별논사(分別論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아흔여덟 가지로 설정할만한 수면은 존재하지 않으니, 경에서는 수면에 오로지 일곱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만약 일곱 종류의 수면을 영원히 끊고자 한다면, 그대들은 지금부터 마땅히 나의 처소에서 부지런히 범행을 닦아야 할 것이다’고 설하고 있으니,30)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정리론자(正理論者)는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計]에 의지하여 98수면을 설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성언(聖言)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생각에 의지하여 설정할 것 같으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면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유정들의 몸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관찰하건대, 구수(具壽)는 성교의 이치에 대해 능히 자세히 살피지도 못하였을 뿐더러 참답게 관찰하지도 못하였다. 지금 여기서 설정한 수면의 수(數, 즉 98가지)는 정리(正理)로 보거나 성교(聖敎)로 볼 때 지극히 잘 이루어진 것으로, 능히 견고하고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야흐로 그가 인용한 『칠수면경(七隨眠經)』은 [수면의] 결정적인 수를 논증할만한 공능을 갖는 것이 아니니, 요의경(了義經)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다른 경에서는 말하기를 “만약 색(色)에 대해 염리(厭離)하고자 하거나 그것을 멸하여 영원히 해탈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의 처소에서 부지런히 범행을 닦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식(識)에 대해 설한 것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오로지 “수면을 끊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의 처소에서 부지런히 범행을 닦아야 할 것이다”라고만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경은 요의설(了義說)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31)
또한 다른 곳에서도 역시 오로지 [3계 중] 1계의 염오나 한 가지 수면의 일부분을 떠나고자 하는 이에 대해 ‘마땅히 나의 처소에서 부지런히 범행을 닦아야 할 것이다’는 말을 설한 일이 있으니, 예컨대 계경에서 “만약 낙수(樂受)에서 탐수면을 영원히 해손(害損)시키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의 처소에서 부지런히 범행을 닦아야 할 것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고수(苦受)에서 진수면을 영원히 해손시키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의 처소에서 부지런히 범행을 닦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러한 경에서 설한 지극히 적은 [수의 수면]을 마땅히 7수면을 부정하여 설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그 경문은 이들 경과 마찬가지로 요의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제 마땅히 [분별논사가 인용한 『칠수면경』에 대해] 상세하게 분별하리라.
이 계경 중에서 ‘일곱 종류의 수면을 끊고자 한다면 마땅히 범행을 닦아야 한다’고 말한 뜻은 [이러하다]. 즉 이 경의 뜻은, 수면의 종류에는 [여러] 차별이 있기 때문에 ‘7’이라는 수로 나타내려는 것이었으니,32) 예컨대 계경에서 “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두 종류를 떠나 그 밖의 별도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과 같다. 즉 이러한 경설에 따라 어찌 [법을] 18계(界)로 설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18계는] 의(意)의 종류[意類]로서 그 밖의 다른 6계를 [더] 설한 것이기 때문에 ‘2’와 ‘18’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33)
또한 [『칠수면경』에서 일곱 가지의 수면을 설한 것은] 경에서 ‘개(蓋)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설한 경우와 같다.34) [그럴지라도] 무명 자체가 ‘개’에 포섭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경에서 “무명은 능히 덮는 것[覆蓋]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5개를 다른 경에서는 열 가지로 설하고 있으니, 계경에서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탐욕개는 그 자체 두 가지로 차별되니, 첫째는 내적인 것이고, 둘째는 외적인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
또한 경에서 “네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대지가 진동한다”고 설한 것과 같으니,35) [대지를 진동시키는] 그 밖의 다른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경에서 “세간에는 세 가지 법이 있으니, 마땅히 개발(開發) [현시]하여야 한다”고 설하였지만, 어떤 곳에서는 ‘네 가지’라고 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 또한 경에서는 “진리[諦]는 오로지 한 가지만 존재할 뿐으로, 두 번째 진리는 없다”고 설하였지만, 범지를 위하여 ‘진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거나 ‘네 가지 등이 있다’고 설한 것과 같다.
또한 경에서 “지(智)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바로 그것이다”고 설한 것과 같으니, 그밖에 달리 ‘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경에서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선과 불선이 바로 그것이다”고 설한 것과 같으니, 무기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계경은 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널리 설하신 것으로, 그 뜻이 각기 달라 능히 성교의 이취(理趣)를 요달할 수 없다. 그러니 오로지 다른 종의를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것을 공덕으로 여기는 이러한 부류들이 어찌 능히 선설(善說)의 핵심[果]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곧 세존께서 오타이(鄔陀夷)에게 “만약 여래가 여러 갈래로 설한 일체의 일체물(物)과 일체의 일체종(種)에 대해 그 뜻을 추구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라면,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그는 성교 중에서 투쟁하며 머무는 자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바와 같다.36)
또한 거기(주36의 경문)서 설한 바대로라면 바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면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인정한들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소의신의 차별에 근거할 경우(다시 말해 일체 유정의 소의신에 근거할 경우) [수면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정리논사(正理論師)가 수면을 98가지로 설정한 이유
그렇지만 법체의 종류에 따라 수면을 분별할 경우, 단지 여섯 종류만을 성취할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여섯 가지가 갈래[門]의 차이에 따라 열여섯 가지, 혹은 열 가지, 혹은 스물여덟 가지, 혹은 서른여섯 가지, 혹은 일흔네 가지, 혹은 아흔여덟 가지가 된 것이다.37) 즉 부처님께서는 곳곳에서 [3]계(界)와 행상[行]과 [5]부(部)라는 온갖 갈래의 차별에 근거하여 [여러 종류의] 수면을 현시하였고, 정리논사(正理論師)는 부처님이 설하신 바에 따라 [3]계 등의 차이에 따라 98수면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바야흐로 모든 번뇌의 법체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탐(貪)ㆍ진(瞋)ㆍ만(慢)ㆍ무명(無明)ㆍ견(見)ㆍ의(疑)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수면 자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으로,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38) 즉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계경 중에서 “3계의 탐을 전체적으로 애결(愛結)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수면의 법체가 오로지 여섯 가지임을 알게 된 것이다.39)
세존께서는 바로 이러한 6수면을 계(界)의 차별에 근거하여 먼저 탐을 두 종류로 나누어 설하였으니, 욕탐수면과 유탐수면으로 달리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탐의 차별에 따라 그 밖의 수면에 대해서도 [그같이] 유추하여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수면은 각기 선정의 세계[定界, 즉 색ㆍ무색계]와 선정이 아닌 세계[不定界, 즉 욕계]에 따라 두 가지가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이와 같이 [탐을 욕탐과 유탐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로지 ‘탐’에 대해서만 ‘계’로 차별하여 설하게 된 것은 여러 곳에서 ‘탐’을 첫머리[首]에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온갖 번뇌를 건립하는 교설 중에서는 곳곳에서 탐을 상수(上首)로 설하고 있으니, 9결(結)ㆍ3불선근(不善根)ㆍ5개(蓋)ㆍ5순상분결(順上分結)ㆍ3업도(業道)ㆍ3박업(縛業)ㆍ3연집(緣集)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교설이 그러하다.40) 즉 탐수면은 바로 생사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계경의 여러 곳에서는 그것을 대개 첫 번째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최초의 것(즉 탐수면)을 두 종류로 나눈다고 설하였으니, 이에 따라 그 밖의 것도 역시 마땅히 그같이 유추하여 나타내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진(瞋)에 대해서도 역시 계(界)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나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욕탐과 유탐[의 예]에 따라 그 밖의 수면도 그같이 차별하여 나타낼지라도, 이것은 만(慢) 등의 경우처럼 상계에도 역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1) 바로 이와 같은 교설로 말미암아 수면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정계(定界, 즉 색ㆍ무색계)와 산계(散界, 욕계)로 차별되는 것이라고 [앞서] 이미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다시 유탐(有貪)도 갈래를 달리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정계(定界)의 수면에도 역시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었으니, 이를테면 세존께서는 순상분결(順上分結) 중에서 [유탐을] 색탐(色貪)과 무색탐(無色貪)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별도로 설정하였던 것이다.42) [이러한] 탐의 차별에 따라 그 밖의 수면에 대해서도 [그같이] 유추하여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수면은 정계 즉 선정의 세계 중에서도 색계와 무색계의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이같이 [유탐을 색탐과 무색탐으로] 설하게 되었다. 즉 상분(上分, 상2계)의 결(結)은 오로지 수소단의 수면만이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수소단인 유탐에 대해서만 계(界)에 [따른] 차별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견소단의 혹(惑)은 수소단과 그 종류가 이미 동일하다고 하였을 뿐더러 필시 또한 [계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앞에서는 전체적으로 견소단과 수소단을 정계(定界)와 산계(散界)로 차별하여 나타내었던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는 개별적으로 오로지 수소단만을 색ㆍ무색계로 차별하여 나타내었으니,43) 이와 같은 수면은 무루도에 의해서만 끊어지기 때문이다. 즉 색ㆍ무색계의 견소단의 탐은 동일하게 대치되지만, 수소단의 탐은 각기 개별적으로 대치되기 때문에,44) 정계(定界)의 견소단의 탐에 대해서는 계(界)의 차별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수소단의 탐에 대해서는 계의 차별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경을 별도로 인용하여 탐에 3계의 차별이 있음을 논증하였고, 그 밖의 수면에도 역시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었다. 이제 다시 전체적으로 한 경을 인용하여 경증(經證)으로 삼고자 한다.
즉 계경에서 말하기를 “애(愛)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욕애(欲愛)이며, 둘째는 색애(色愛)이며, 셋째는 무색애(無色愛)이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애’의 차별에 따라 그 밖의 수면에 대해서도 유추하여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수면에는 욕ㆍ색ㆍ무색계의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이와 같이 [탐을 욕애와 색애와 무색애로] 설하게 된 것이다.
이상 성교(聖敎)를 인용하여 온갖 수면에 계(界)에 따른 차별이 있음을 논증하였다.
정리(正理)상으로도 역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어떤 종류의 보특가라가 욕계의 법에 대해서는 모두 이계(離繫)를 획득하였지만, 색ㆍ무색계의 법에 대해서는 [이계를 획득하지] 못하였을 경우, 그는 이러한 온갖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욕계에 태어나지 않으니, 여기서 끊어진 수면은 욕계계(繫)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색ㆍ무색계의 경우도 이에 준하여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교와 정리를 통해 볼 때 수면에는 결정코 ‘계(界)’에 [따른] 차이가 있어 그 수(數)는 열여섯 가지가 되는 것이다.45)
이상 ‘계’에 따른 차별을 나타내었다.
[그렇다면] 행상[行]에 따른 차이는 어떠한가?
즉 6수면 중의 ‘견(見)’은 행상에 따른 차이가 있으니, 세존께서 곳곳에서 ‘견’에는 유신견 등 앞에서 나열한 것과 같은 다섯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6수면은 행상에 따른 차이가 있어 그 수는 도합 열 가지가 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46)
그리고 행상과 ‘계’에 [따라 차별된 것을] 합하면 스물여덟 가지가 되는 것이다.47)
이상 ‘행상’에 따른 차별을 나타내었다.
[그렇다면] 부(部)에 따른 차이는 어떠한가?
‘부’란 이를테면 수면의 개별적인 대치[別對治]에 근거한 것을 말한다. 즉 수면에는 고제를 관찰[見苦]함으로써 끊어지는 종류도 있고, 집ㆍ멸ㆍ도제를 관찰함으로써 역시 끊어지는 종류도 있으며, 그런 후 하나의 지(智)를 자주 수습(修習)하여 더욱 수승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끊어지는 종류도 있으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4제에 대한 통찰[四諦見]이나 후과(後果)로서의 [4제] 지(智)를 설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즉 견도(見道) 중에서는 4성제에 대해 반드시 점진적으로 현관(現觀)해야 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분별하는 바와 같다.48)
이와 같은 5부는 결정적인 차별로서, 부처님께서 경 중에서 스스로 바로 현시하였으니, 예컨대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옛날 그대들과 더불어
생사의 멀고 먼 길을 거쳤던 것은
능히 참답게 4성제를
관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능히 4제를 관찰하고
모든 존재[有]의 속박을 영원히 끊는다면
바로 생사가 모두 소멸하여
온갖 후유(後有)를 [더 이상] 받지 않으리.49)
여기서 “만약 능히 4제를 관찰하고”라고 함은 ‘4제를 관찰함으로써 끊어지는[見四諦所斷] 네 가지 무명을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다시 “모든 존재[有]의 속박을 영원히 끊는다면”이라고 말한 것은 ‘수도에 의해 끊어지는[修道所斷] 무명을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어찌 여기서의 ‘존재의 속박’이라고 함은 ‘애(愛)’를 말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5부(部)의 무명을 인용하여 논증하는 것인가?
여기서는 무명을 설하지 않았지만, [이치상]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세간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애결(愛結)에 계박된 이로서 무명에 [계박되지] 않은 자가 없으니, 다만 수소단으로서 애결만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무명결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하거늘, 어찌 다시 [애결을] 성취[하여 논설]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50) 어리석지 않은 자에게는 ‘애’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모든 번뇌는 온갖 ‘부’에 따라 차별된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는 또 다른 [경]증이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고(苦)에 대해 무지(無智)하며, 집(集)에 대해 무지하며, 멸(滅)에 대해 무지하며, 도(道)에 대해 무지하다”고 설한 바와 같다. 즉 여기서는 [무명이라는 말에] 전제(前際)에 대한 어리석음 등도 모두 포섭하고 있지만, 4제의 경계에 근거하여서도 네 가지 무지를 설정하였던 것이다.51) [또한] 여기서는 ‘무명’이라는 말로써 일체의 수면을 나타낸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연기품(緣起品)」 중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52)
따라서 모든 번뇌에는 ‘부’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명에 5부[의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로 유추하여 그 밖의 번뇌[惑]에도 다 5부의 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 밖의 번뇌에 대해서는 이를 부정하는 설[遮說]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존께서는 “견(見)과 의(疑)를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획득한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증으로 볼 때 ‘견’과 ‘의’가 수소단이라는 사실은 부정되는 것이다. 또한 경에서는 다만 “악취(惡趣)로 나아가는 탐ㆍ진ㆍ치(癡, 즉 무명)ㆍ만(慢)을 끊으면 예류과를 획득한다”고 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예류과에는 ‘견’과 ‘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수소단인 탐ㆍ진ㆍ치ㆍ만이 존재하는 것이다.53)
이러한 [경]증으로 볼 때 6수면은 ‘부’가 동일하지 않음에 근거하여 스물여덟 가지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54)
그리고 ‘부’와 행상에 [따라 차별된 것을] 합하면 서른여섯 가지가 되고,55) ‘부’와 ‘계’에 [따라 차별된 것을] 합하면 일흔네 가지가 되며,56) ‘부’와 행상과 ‘계’에 근거하여 수면은 전체적으로 아흔여덟 가지로 분류되는 것이니,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57)
따라서 대법자(對法者)가 부처님의 성교(聖敎)에 따르면서 정리(正理)를 추구하여 수면을 아흔여덟 가지로 분별하여 설정한 것은 결코 뒤집을 수 없는 부동의 사실인 것이다.
(3) 상좌(上座)의 98수면설 비판에 대한 재비판
그런데 저 썩어빠진 우매한 상좌(上座)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록 경에 인용한 바와 같은 명목(名目)의 상(相)이 없지 않을지라도 일찍이 어떠한 곳에서도 ‘이러한 수면은 바로 견고소단이며, 내지 수소단이다’고 설한 적이 없었다. 여기서 마땅히 따져 물어보아야 할 것이니, 견도에 들 때, 이미 고제를 관찰하였으나 아직 집제 등에 대해서는 관찰하지 못하였다면, 견소단의 번뇌[惑]를 바로 일으키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그러한 수면을 아직 뽑아버리지 못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어찌 이토록 번거롭게 희론(戱論)의 그물을 펼치는 것인가?
또한 그대가, 번뇌는 서로를 반연하지만 반연하는 바를 관찰하지 않더라도 영원히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가 비록 [고제 이외의 다른] 3제(諦)를 반연할지라도 고제를 관찰할 때 무엇이 [그러한 3제를 반연하는 번뇌가] 단박에 끊어지는 것[頓斷]을 방해할 것인가?
[이에 대해] 만약 ‘고제를 관찰할 때 능히 견소단의 번뇌를 단박에 끊을 수 있다고 한다면, 뒤의 3제를 관찰하는 것은 마땅히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고 이같이 따져 힐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다. 즉 그는 이러한 [고제를 관찰하는] 상태에서 집제 등을 관찰하려고 추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에 따른] 수면을 끊으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전의 지(智, 즉 苦智)가 점차 인발(引發)됨으로 말미암아 법이(法爾)로서 저절로 집제 등을 순서대로 관찰하게 되는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현관(現觀)하는 중간에 [다른 제를] 관찰하려고 하는 등의 마음이 뒤섞이고 말게 될 것이다.
또한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곳에서도 ‘수면에 아흔여덟 가지가 있다’고 설한 일이 없었으니, 만약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부처님께서 어디서 그같이 설하였는지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바로 믿고 수지할 것이다.”
상좌는 이와 같이 따져 물으면서 수면에 대해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 추심(推尋)하였으면서도 아직 그 중간도 파악[切]하지 못하였다.(다시 말해 수면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야흐로 부처님께서 경 중에서 온갖 수면을 ‘고제를 관찰함으로써 끊어진다’는 등으로 설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4제를 관찰하지 못하였기에 생사의 멀고 먼 길을 거쳤던 것으로, [4제를] 관찰하는 경우 바로 [생사가] 모두 소멸한다”고 설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58) 그런데 어떻게 “부처님께서 어떠한 경우에도 일찍이 견고단(見苦斷) 등의 수면이 존재한다고 설한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고(苦) 등에 대한 네 가지 무지(無智)가 존재한다”고 설하였는데,59) 어떻게 네 가지 무지가 오로지 견고단이라는 것인가? 따라서 결정코 5부의 수면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는 “이미 고제를 관찰하였으나 아직 집제 등에 대해서는 관찰하지 못하였다면, 견소단의 번뇌를 바로 일으키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그러한 수면을 아직 뽑아버리지 못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라고 따져 물었지만, 이는 지극히 부질없는 말[浮詞]이라고 할 수 있다.60)
즉 아직 고제를 관찰하지 않았을 때에도 역시 견고단의 번뇌가 현기(現起)하지 않는다면, 이미 뽑아버렸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마땅히 ‘고제를 관찰할 때 끊어진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만약 아직 고제를 관찰하지 않았을 때에는 능히 견고소단의 일체의 수면을 뽑아버릴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제를 관찰할 때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즉 아직 집제 등을 관찰하지 않았을 때라면, 역시 능히 그것(見集 내지 見道)에 의해 끊어지는 득(得)을 끊을 수 없다고 해야 하니, 능히 그러한 득을 대치하는 도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는 마땅히 두 가지를 차별하여 [말한] 근거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까닭에서 [고제를 관찰할 때] 수면 등이 현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일부의 수면은 아직 뽑아버리지 못하였다고 하고, 그 밖의 수면은 이미 뽑아버렸다는 것인가? 따라서 그가 힐난한 바는 말만 그럴 듯 할 뿐 어떠한 이치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그대가 번뇌는 서로 반연하지만 반연하는 바를 관찰하지 않더라도 영원히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가 비록 [고제 이외 다른] 3제(諦)를 반연할지라도 고제를 관찰할 때 [그러한 3제를 반연하는 번뇌도] 단박에 끊어질 수 있다”고 하였지만, 우리의 종의에서는 ‘온갖 번뇌는 서로를 반연하지만 반연하는 바를 모두 다 관찰하지 않더라도 영원히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록 견멸ㆍ견도소단의 번뇌 중에서 유루연(有漏緣)의 수면은 반연하는 바를 관찰하지 않더라도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번뇌는 멸제와 도제에 근거하여(다시 말해 미혹하여) 생겨난 무루연(無漏緣)의 온갖 번뇌와 벗하여 일어난 것이다.61) 즉 이러한 [유루연의 번뇌는] 바로 그러한 [무루연의] 번뇌에 의해 장양(長養)되기 때문에, 뜻으로 설[義說]하자면 역시 ‘멸제와 도제에 미혹한 번뇌[迷於滅道]’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바로 그러한 도(즉 見滅과 見道)를 반연하는 힘에 의해(다시 말해 그것이 반연하는 바를 관찰할 때) 소멸되는 것이다.
나아가 3제를 반연하여(대상으로 하여) 존재하는 수면의 경우, 고(苦) 등의 존재를 낙(樂) 등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62) 또한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고제에 미혹한 번뇌(즉 견고소단)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일이 없는데,63) 어찌 고제를 관찰할 때 그러한 번뇌(3제를 반연하는 번뇌)도 단박에 끊어진다는 것인가? 따라서 그가 이 같은 사실을 인용하여 그것의 예증으로 삼은 것은 한결같지 않은 것이다.64)
또한 그는 “이러한 [고제를 관찰하는] 상태에서 집제 등을 관찰하려고 추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에 따른] 수면을 끊으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전의 지(智, 즉 苦智)가 점차 인발(引發)됨으로 말미암아 법이(法爾)로서 저절로 집제 등을 순서대로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어떠한 이치도 없는 말이다.
즉 [그럴 경우,] 그는 이러한 [고제를 관찰하는] 상태에서도 역시 고제를 관찰하려고 추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에 따른] 수면을 끊으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전의 난(煖) 등의 상태에서 생겨난 지(智)가 점차 인발됨에 따라 고제에 대해서도 법이로서 저절로 관찰하게 되었으니, 이때에도 마땅히 견고단(見苦斷)의 수면을 끊지 못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고제를 관찰하는 상태]에서 이미 수면을 끊었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제(諦)를 관찰할 때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4제를] 현관(現觀)할 때 가행(加行)의 마음을 일으켜 [4제를] 관찰하려고 추구하거나 [그에 따라 수면을] 끊고자 추구한다”고는 설하지 않는다. 즉 우리 역시 “현관위 중에서 집제 등을 관찰할 때 별도의 가행을 떠나 다만 이전의 지(智, 즉 苦智)가 점차 인발(引發)됨으로 말미암아 법이로서 저절로 집제 등을 순서대로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고 말하지만, “관찰할 때 [바로 번뇌가] 끊어지고 [이계가] 증득된다”고 하여 [관찰의] 유용함을 깊이 성취하기에 그대의 종의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만약 “그 밖의 3제를 관찰하더라도 결정코 그것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없다”고 한다면, 집제 등을 관찰하고 그러한 경계에 대한 지(智)를 [되풀이하여] 수습하는 것도 완전히 무용하게 될 뿐더러, 대사(大師)께서 이를 설하신 것도 어찌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법이(法爾)로서 저절로 능히 집제 등을 관찰해야 할 것이기에 부처님께서도 다만 마땅히 “고제를 관찰하고 [그러한 경계에 대한] 지(智)를 수습하라”고만 설하였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4성제는 그 상(相)이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제(諦)를 요해(了解, 즉 관찰)하여 다른 제에 미혹하여 생겨난 번뇌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인가? 따라서 고제를 관찰할 때 [그 밖의 3제를 반연하는] 수면도 단박에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곳에서도 ‘수면에 아흔여덟 가지가 있다’고 설한 일이 없었으니, 만약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부처님께서 어디서 그같이 설하였는지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바로 믿고 [수지할] 것이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그렇지가 않다. 나는 그대들 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敎相]을 믿는 이를 결코 보지 못하였으니, 내가 앞에서 성교와 정리에 의거하여 “수면에 아흔여덟 가지가 있다”고 건립하였음에도 그대들은 전혀 이를 믿고 수지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그대들은 길상론(吉祥論)을 갖추었다면서65) 이제와 어디서 수승한 지혜를 얻어들었기에 “일찍이 어떠한 곳에서도 부처님께서는 ‘수면에는 행상과 부(部)와 계(界)의 차이에 따라 아흔여덟 가지가 있다’고 설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인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일이 있다.
“『증일아급마(增一阿笈摩)』 중에는 [원래] 1법으로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00법까지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멸도(滅道)하신 후, 이 땅의 유정들은 안으로는 지혜[慧]와 기억[念]과 수명[命]이 나날이 손감(損減)되고, 밖으로는 약초 등의 맛[味勢]과 덕[熟德]이 점차 쇠퇴해짐에 따라 공능(功能)이 적어지면서 사람들은 대부분 나쁜 일에 얽매이게 되었으니, 어찌 능히 여래의 성교를 갖추어 지닐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오늘날의 『증일아급마』 중에서는 오로지 1법으로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0법까지만 실려 있게 된 것이지만, 이 중에도 많은 부분이 영락(零落)하여 보잘 것이 없게 되었거늘 하물며 10법을 초과하는 법을 능히 수지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경 중에 수면을 설한 곳이라면 결정코 아흔여덟 가지를 모두 설한 문구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전해들은 이야기는 이치상으로도 필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니,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저 『십응경(十應經)』 중에서 “지극히 심오한 경[甚深經]은 당래 점차 은몰(隱沒)하여 마침내 최후로 은몰하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옛날부터 여러 성자들은 논을 지으면서 곳곳에서 “아흔여덟 가지의 수면이 존재한다”고 설하였을 뿐더러 아울러 분명한 문구도 남아있고, 이치에 맞는 해석도 남아있기 때문에 근본 아급마(阿笈摩) 중에도 결정코 이러한 명목(名目)과 수(數)를 나타내는 진실한 문구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다시 제 아급마를 간략히 인용하여 다수의 계경이 이제 이미 은몰하였음을 논증하리라.
부처님께서는 저 『바타리경(婆拕梨經)』에서 바타리에게 말하기를 “나는 옛날 필추중(衆)들을 위하여 나이 어린 어질고 좋은 말을 [다루는] 법에 대해 널리 설하였지만, 그 때 너희들은 이 법문에 대해 조그마한 진실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하였는데,66) 그 경은 이제 이미 은몰하여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저 『고온경(苦蘊經)』 중에서 석가종족인 대명(大名, Mahānāma)을 위해 설하기를 “내가 옛날에 한 때 왕사대성(王舍大城)에 머물고 있었는데, 광협산(廣脇山)을 거닐다가 모든 이계(離繫)들이 다 손을 높이 쳐들고서는 스스로를 괴롭히며 영원한 것[常]을 추구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고하여 말하였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는데,67) 그 경도 이제 이미 은몰하여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저 경희(慶喜, 아난다)는 『대공경(大空經)』 중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옛날 한 때 부처님과 석가종족의 대성(大城)으로 가 그들이 경영하는 대객관(大客館)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때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아난타(阿難陀)여, 그대는 내가 [염]주(念住)하는 공(空)을 알기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바로 청하여 물었고, 부처님께서는 나를 위해 설하였으며, 나는 부처님께서 설한 바를 헤아려 그 뜻을 이해하였다.”68) 그렇지만 그 경도 역시 이제 이미 은몰하였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저 『오타이경(鄔陀夷經)』에서 “나는 옛날에 4수(受)가 존재하여 번갈아 가며 현전한다고 설하였다”고 말하였는데,69) 그 경도 역시 지금은 이미 은몰하였다.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또 다른 경 중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내가 옛날에 한 때 왕사대성에 머물면서 산의 골짜기를 거닐었는데, 그 때 다수의 출가외도가 나에게 와 내 뜻을 물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러나 그 경도 역시 지금은 이미 은몰하여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저 『출애왕경(出愛王經)』에서 말하기를 “대왕이시여, 내가 기억하건대 옛날 일찍이 이같이 말하였습니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사문 바라문 등으로서 일체법을 단박에 관찰[頓見]하고 단박에 아는[頓知] 이도 없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능히 단박에 관찰하고 단박에 아는 곳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경도 역시 지금은 이미 은몰하였다.
또한 우상외도(雨相外道)는 『구박가경(瞿博迦經)』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내가 기억하건대, 옛날 일찍이 석씨(釋氏) 교답마(喬答摩) 존(尊)께서 나지가성(那地迦城) 군시가(郡市迦) 숲에 머물고 있으면서 정려 등의 일체의 법문에 대해 찬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70)
그러나 그 경도 역시 지금은 은몰하여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저 경희(慶喜)는 『만경(滿經)』 중에서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 만자자(滿慈子)가 대중들을 위하여 매우 심오한 법문을 널리 설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는데,71) 그 경도 지금은 역시 이미 은몰하였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저 『남박가경(藍薄迦經)』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옛날 한 때 일찍이 다섯 필추들에게, 내가 아직 출가하지 않았을 적에 항상 즐거이 ‘집에 머물면 다수의 온갖 과환(過患)이 들이닥치므로 하루 빨리 염리(厭離)해야 하리라’고 관찰하였다고 말하였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러나 [일찍이 다섯 필추들에게 말한] 그 경도 지금은 역시 은몰하여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저 성자가 『호국경(護國經)』 중에서 말하기를 “대왕이시여, 네 가지 염도(厭道)가 있으니, 오로지 박가범께서만이 올바로 관찰하시고 올바로 아시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여래 응정등각(應正等覺)이 일찍이 널리 설하였을지라도 온갖 세간에서는 능히 부지런히 염리행(厭離行)을 닦지 않으니, 이들은 바로 갈애의 타사(馱娑)임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고 하였는데,72) [여래 응정등각이 일찍이 널리 설하였던] 그 경도 역시 지금은 이미 은몰하였다.
또한 급고독(給孤獨)이 『취경(趣經)』 중에서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박가범의 처소에서 이와 같은 법문을 직접 들었고 직접 전수하였다. ‘만약 어떤 유정이 원림(園林) 등을 보시한다면, 이러한 원인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몸이 허물어지고 목숨이 끊어지게 되면 천(天) 중에 태어나 미묘한 쾌락을 향수하게 될 것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법시(法施)를 원인으로 하여서는……”이라고 하였는데,73) 그 경도 역시 지금은 이미 은몰하여 현존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저 경희(慶喜)는 『열반경(涅槃經)』 중에서 무멸(無滅)에게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부처님의 처소에서 이와 같은 법문을 직접 들었고 직접 전수하였으니, ‘불(佛)세존은 무동(無動) 적정(寂靜)의 제4정려에 의지하여 명안(明眼)으로 열반한다’고 하였다”고 하였는데,74) [아난이 직접 들었다는] 그 경도 역시 지금은 이미 은몰하였다.
이와 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계경이 존재하였었지만, 그것들 모두 다 지금은 은몰하여 현존하지 않는다. 본래 결집하였던 계경의 대다수가 조락(凋落)하여 버렸거늘 상좌(上座)는 어찌 그토록 빈번히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어떠한 곳에서도 아흔여덟 가지의 수면을 설한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5) 98수면과 견ㆍ수소단(續)
수면의 차별적인 이치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본래 설하려고 하였던 뜻에 대해 순서대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여든여덟 가지의 수면은 견소단(見所斷)이며, [열 가지는 수소단(修所斷)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견ㆍ수소단은 결정적으로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인(忍)에 의해 해손(害損)되는 수면의 경우
유정지(有頂地)의 그것은 오로지 견소단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견ㆍ수소단과 통하며
지(智)에 의해 해손 되는 것은 오로지 수소단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인(忍)에 의해 해손(害損)되는 온갖 수면 중에서 유정지(有頂地, 즉 3계 9지 중의 가장 꼭대기인 非想非非想處)에 포섭되는 것은 오로지 견소단인데, 그것은 오로지 유지인(類智忍, 즉 고ㆍ집ㆍ멸ㆍ도류지인)으로서만 비로소 능히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8지(地, 욕계로부터 무소유처)에 포섭되는 것은 견ㆍ수소단 모두와 통한다. 즉 성자가 끊은 것은 오로지 견소단으로 수소단이 아니니, 상응하는 바대로 법지인(法智忍, 즉 고ㆍ집ㆍ멸ㆍ도법지인)과 유지인으로써 끊기 때문이다.75) 그러나 만약 이생이 끊은 것이라면 오로지 수소단으로 견소단이 아니니, 세속지(世俗智, 즉 유루 6관행)를 되풀이하여 닦음으로써 끊기 때문이다.
지(智)에 의해 해손 되는 온갖 수면으로서 일체 지(地)에 포섭되는 것은 오로지 수소단이니, 모든 성자와 온갖 이생들이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무루지와 세속지를 자주 되풀이하여 수습함으로써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송에서는 “그 밖의 나머지는 견ㆍ수소단과 통하며”라고 말하였지만, 이 말을 설하지 않더라도 뜻에 준하여 알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인가?
앞뒤[의 뜻]에 의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는 개별적으로 ‘인’에 의해 해손 되는 수면으로서 유정지의 그것은 오로지 견소단이라고 설하였고, 뒤에서는 다시 전체적으로 ‘지’에 의해 해손 되는 것은 오로지 수소단이라고 설하였으니, 그 밖의 것(‘인’에 의해 해손 되는 아래 8지의 수면)이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는 것은 이에 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뜻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바로 설하였을지라도 어떠한 과실도 없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외도의 모든 선인(仙人)들은 견소단의 혹(惑)을 능히 항복시켜 끊을 수 없으니, 예컨대 『대분별제업계경(大分別諸業契經)』에서 ‘욕탐을 떠난 모든 외도들에게도 욕계를 반연하는 사견(邪見)이 현행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한 바와 같다.76) 아울러 『범망경(梵網經)』에서도 역시 ‘그들에게는 욕계를 반연하는 온갖 견(見)이 현행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전제(前際)에 대해 분별하는 논자 중에 어떤 이는 완전한 상주론[全常]을 주장하였고, 어떤 이는 부분적인 상주론[一分常]을 주장하였으며, 어떤 이는 제법은 원인 없이 생겨난다는 사실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77) 즉 색계의 혹(惑)은 욕계를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욕계의 경계에 대해서는 이미 탐을 떠났기 때문에 [그들은] 결정코 이러한 욕계의 온갖 견을 아직 끊지 못하였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옳지 않으니, [3계의] 견ㆍ수소단이 모두 다 능히 연속하기에 [퇴타(退墮)하여] 욕계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분을 끊었을지라도 그 밖의 번뇌가 역시 마땅히 연속하므로 자계(自界)에 태어난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인천을 왕래하는] 예류과 등의 경우와 같다. 그렇지만 모든 외도 역시 [색계천] 내지 유정천에 태어나는 일이 있으니, 그들에게 욕계의 번뇌가 현행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필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이치에서 저들 모든 외도 선인들은 수혹을 끊었기 때문에 이욕자(離欲者)라고 말하면서도, 견소단의 혹을 끊지 않았다는 사실에 따라 역시 ‘이욕하지 못한 자’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앞에서 『안온경(安穩經)』을 해석하면서 이와 같이 설한 이치에 대해 이미 나타내었다.78) 따라서 그가 인용한 두 종류의 계경은 이치에 어긋나므로 불요의경이라고 할 수 있다.
비바사자(毘婆沙者)는 그 경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그(외도선인)가 견(見)을 일으킬 때 이욕(離欲)으로부터 잠시 물러난 것일 뿐이니, 이는 마치 천수(天授, 제바달다)가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획득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79)
만약 오로지 스물여덟 가지만이 결정코 견소단이라면,80) 어떠한 연유에서 곳곳의 경에서는 여든여덟 가지라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경문은 차제증자(次第證者)에 두루 근거하여 설해진 것이지만, 이는 이치를 모두 궁구한 이[盡理, 즉 超越證者]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양자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경문의] 뜻은 성도(聖道)의 공용(功用)이 수승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또한 설혹 이전에 [세속도로써] 하(下) 8지의 탐을 떠났을지라도 요컨대 견도(見道)에 의해 무루의 득(得)을 일으키고 그것의 택멸을 증득하기 때문에 [여든여덟 가지로] 설하였을지라도 어떠한 과실도 없다.
견소단과 수소단의 상(相)은 어떻게 다른가?
만약 오로지 관찰에 따른 혜[見慧]에 의해 끊어지는 혹(惑)이면 이를 견소단이라 이름하고, 만약 관찰과 지(智)에 따른 혜[智慧]에 의해 끊어지는 혹이면 이를 수소단이라 이름한다.81)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1품에 따라 단박에 끊어지는 것이면 [이를 견소단이라 이름하고], 만약 9품에 따라 점진적으로 끊어지는 것이면 [이를 수소단이라 이름한다].
만약 성도로 끊고 나서 필경 물러나지 않는 것이면 [이를 견소단이라 이름하고], 만약 성도로 끊고 나서 혹은 물러나거나 혹은 물러나지 않는 것이면 [이를 수소단이라 이름한다].
만약 끊고서 4ㆍ3ㆍ2과(果)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면 [이를 수소단이라 이름하고], 만약 끊고서 3ㆍ2ㆍ1과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면 [이를 견소단이라 이름한다].82)
만약 성도로 끊을 때 그것의 비택멸을 반드시 택멸 이전에 증득하는 것이면 [이를 견소단이라 이름하고], 만약 이전에 혹은 이후에, 혹은 동시에 증득하는 것이면 [이를 수소단이라 이름하니], [견소단과 수소단은] 이상과 같은 등의 여러 가지 점에서 그 특상이 다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