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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내가 의인이란 말입니까? = 마태복음25;31-46(성탄주일)
M1S1
우리 다같이 따라 해봅시다.
“하나님 사랑해요. 교회 사랑합시다. 가정 사랑합시다. 우리 모두 사랑해요. 할렐루야 아멘”
옆에 있는 성경구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빈민촌의 왕자
어느 날 젊은 왕자는 왕자가 타는 말을 타고 어느 빈민촌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왕자는 항상 그 여인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빈민촌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자는 어떻게 하면 그 여인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하며 하루하루 보내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왕자 신분으로 나타난다면 그 여인은 도망칠 것이 뻔해.
그녀는 나를 사랑하기나 할까?
어떻게 해야 그 여인에게 환심을 얻을 수 있을까?
과연 그녀는 미래에 왕이 될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하기나 할까?
농부로 가장하여 그녀 앞에 나타나 볼까?”
이렇게 여인을 그리워하며 고민하던 어느 날,
왕자는 궁궐에서 입는 왕자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이웃 동네로 이사하여 목수 일을 직업삼아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일을 마치면 동네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생활풍습을 배워서 그들과 아주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여인과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인과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 여인이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왕자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여인과 결혼하여 행복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인간사회에 내려오셔서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이 깨닫지 못하니까
어느 추운 성탄절 날이었습니다.
신앙이 아주 좋은 신랑을 따라서 성탄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내가 계속 의심하는 말로,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 있단 말이야. 난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투정부리는 것입니다.
신랑은 의심하는 아내에게 계속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집 앞까지 이르렀을 때, 참새들이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먹이를 얻지 못하고 집문 앞에서 비실비실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서 먹이를 가져와서 새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깜짝 놀라서 푸드득 거리면서 날아가 버렸습니다.
남편은 안타까워하면서,
“새들아! 난 너희들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란다. 이것을 먹지 않으면 너희들은 굶어서 얼어 죽게 된단다.”
새들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만무합니다.
신랑은 날아가는 새들을 안스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내 마음을 어떻게 너희들에게 전해 줄 수 있겠니? 내가 새가 되지 않고서는....”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신랑의 말을 가만히 듣던 아내는 마음에 무엇인가 번쩍 스쳐 지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 맞아.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속 사랑을 베풀어 주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거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야.
그리고 그 사랑과 축복을 십자가에 표현해 주신 것이야”
아내는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그러면서 뜨겁게 눈물 흘리면서 감사기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깨닫게 해 주고 싶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의 성탄은 우리의 구원이요 행복이요 생명이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주님의 성탄은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P4
① 고대 유대인들의 사고체계
고대 유대인들은 오른쪽은 힘과 명예와 영광의 방향이었던 반면에 왼쪽은 약함과 수치와 굴욕의 방향이다.
오른쪽은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서 서쪽으로 진다. 가장 해가 뜨거운 낮에는 남쪽이다.
남쪽은 밝은 쪽, 햇빛이 돋아나는 곳이다. 명예를 의미한다.
그런가하면 왼쪽, 북쪽은 그림자가 생기고 어둠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수치를 의미한다.
오른쪽 = 남쪽 - 예루살렘 – 밝음 - 명예 - 양 - 남자 - 메시야
왼 쪽 = 북쪽 - 갈릴리 - 그림자, 어둠 - 수치 - 염소 – 여자
성경에 보면 좋은 일들, 긍정적인 것은 오른쪽, 명예, 밝음, 양, 남자로 표현한다.
좋지 않은 일들, 부정적인 것은 왼쪽, 수치, 어둠, 염소, 여자로 표현한다.
성경에서 염소가 등장하는 본문은 대체적으로 신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좋지 않은 본문들을 기록할 때 등장한다.
양은 신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좋은 일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물을 드릴 때도 의로운 제사를 드릴 때는 양을 제물로 등장하지만, 수치스러운 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제사에는 염소를 제물로 드린다.(특히 성적인 범죄인 경우)
② 유대인들의 의인의 개념 =
유대인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의인이라 칭한다.
곧 원인과 결과가 동일할 때 의인이라고, 동일하지 않을 때 악인이라 한다.
손과 발이 일치하는 것, 눈과 마음이 일치하는 것, 귀와 입이 일치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고,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악인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의인이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육체적인 기관이 조화를 이루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의롭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분, 온전하신 분,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서 하나님의 의로움, 온전함, 완전함을 본받는 사람이 의인이다.
의를 이루는데 모자라는 것을 불의, 부정, 죄. 악이라 한다.
곧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많으면 말로 죄짓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로워지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당연히 구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집집마다 구제헌금함을 두고서 늘 구제헌금을 한다.
그 구제헌금으로 나그네, 과부, 고아들을 돌아보는 일을 할 때 의인이 된다고 여긴다.
③ 나누고 베풀 수 없는 이유
ⓐ 나 먹고 살기도 너무 벅차고 힘들다.
우리 가족이 너무 많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을 많이 낳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자녀를 낳으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자녀들, 우리 가족들이 먹고 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데 어떻게 나누고 베풀면서 구제할 수 있나?
나도 구제를 받아야 식구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탁한 처지이다.
ⓑ 나 아니라도 나누며 베풀려고 하는 사람이 세상에 널려 있다.
유대인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축복과 사랑을 불우한 이웃들을 향하여 나누고 베풀면서 구제해야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앞 다투어 구제하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구태여 내가 하지 않아서 얼마든지 구제할 사람들이 널려 있다.
ⓒ 이들에게 도와주면 이들은 항상 도움을 받는 것이 너무 익숙하여 자기들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지 않는다.
종종 교회에 찾아와서 1000원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라.
하루에 몇 교회만 가서 1000원을 받으면 그것으로 술, 담배 사먹을 수 있다.
그러면서 밥주는 곳에 가서 밥 먹으면 된다.
수많은 노숙자들을 보라.
그들은 힘들게 일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먹여주지 않느냐 하는 생각으로 노숙생활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던가?
노숙자들에게 밥 먹여주고 술 사주고 그렇게 하니까 역전 대합실마다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놓지 않던가?
화장실이며, 손님들 앉으라고 놓여진 의자에까지 대소변을 놓고, 토해놓으면서 정말 역겹게 만들어놓지 않던가?
그러니 차라리 그들에게 밥을 주지 않으면 그들이 거기에 있으라고 해도 있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외국인들, 특히 관광객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고 깨끗하고 정결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D4 & B4 & L4
① 양과 염소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의인과 악인으로, 복 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로 선별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날,
곧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은 지금 현존하는 인생들뿐만 과거의 모든 인생들까지 단 한 사람도 예외되지 않고 모든 인생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양쪽으로 분산하신다.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양분하신다.
절대적인 예수님의 주권에 의해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양분하신다.
오른쪽으로 분류하신 인생들에게는 의인, 양, 복 받을 자로 인정하신다.
그러나 왼쪽으로 분류되어진 인생들에게는 악인, 염소, 저주받을 자로 판단하여 심판하신다.
②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
오른쪽으로 분류되어진 인생들은 자신들은 의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의인이 되는 줄도 모른다.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조금씩 조금씩 주변을 돌아보는데 사용했을 뿐이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조금씩 나누며 베풀어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돌봐 주신 것이 자기를 돌봐주었다고 단정 지어주면서 이들에게 의인이라고 칭찬하며 축복의 자리에 앉게 하신다.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신다.
왼쪽으로 분류되어진 인생들도 마찬가지로 악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악인이 되는 줄도 모른다.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사랑을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았을 뿐이다.
이들은
“우리 가족들 살피기에도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라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돌봐 준다는 말인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 않나?
사람들마다 각각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돌봐주면서 살아야만 한단 말인가?”
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봐주지 않은 것이 자신을 돌봐주지 않았다고 단정짓고 계신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저주하시고 영원한 심판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하는 살아가는 방법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하나님께서 양쪽으로 분류하시는 인생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대전제가 있다.
신앙인이라는 대전제 아래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들은 이미 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는 신앙인이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 때에 반드시 축복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로 분류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저주받을 자로, 왼쪽으로, 염소로 분류되지 말아야 한다.
저주받을 자로 분류되어지면 영멸, 영벌에 떨어지게 된다.
우리들은 축복받을 자로, 오른쪽으로, 양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축복받을 자로 분류되어지면 영생으로, 영원한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우리들이 선택할 수 없다.
어느 누구든지 저주받을 자로 선별받고 싶어하는 신앙인은 없다.
모든 신앙인들은 축복받을 자로 선택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인 주님의 권한이다.
주님만이 가진 권세이다.
주님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주권이다.
전적으로 양쪽으로 분류할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변할 수 없는 강력한 주권으로 우리들을 양의 자리로, 오른쪽으로 분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들이 염소의 자리로, 왼쪽으로 분류되는 불행은 당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당연히 오른쪽, 양의 자리로 선택할 수 있겠지만 우리들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선택받을 권리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을 선택하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좋은 마음, 선한 마음, 축복의 마음, 은혜와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들을 향하여 양의 자리로, 오른쪽으로, 의인의 자리로 선택할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에 쏙 들어야 한다.
L5 & B4 & L6
*** 선교헌금에 동참하기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곧 구제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구제헌금을 가르치기 위하여 가정들마다 구제헌금함을 설치해 둔다.
그 구체헌금함에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실 때마다 구제헌금함에 헌금한다.
그 가정에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 그 구제헌금함을 가지고 가서 헌금한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이 함께 모여 사는 마을공동체에 가난한 유대인이 새롭게 이사 오게 되면 그 마을공동체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새롭게 이사 온 유대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대책을 세워준다.
사업하고자 하면 사업비를 마련해 준다.
취직하고 싶어하면 직장을 알선해 준다.
공부하겠다고 하면 학교를 알선해 주고 학비를 제공해 준다.
이렇게 모든 유대인들이 도와주면서 새롭게 이사온 사람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살만해 지면 이들은 또 다시 이사 온 사람에게 최대한으로 협조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의인들이 당연히 해야 될 일이라고 인식한다.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동참해 준다.
이렇게 하니까 유대인들이 어디를 이사 가든, 어느 지역에서 살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이처럼 할 때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축복해 주신다.
그러면 우리들이 주님의 마음에 쏙 들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 의인이라고 단정 지어지고 축복받을 자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교헌금에 동참하자.
매주일 헌금에 동참하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동참하자.
우리들 주변이나 외국 선교사님들이 사역처소에 우리들의 작은 손길을 기다리는 곳들이 너무 많다.
얼마 전에 가보았던 필리핀에만 해도 너무나 열악하고 낙후된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70넌대, 80년대에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가끔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먹지 않고 버려지는 음식을 볼 때 이 음식이면 북한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민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맛이 없다고 먹지 않고 버려지는 음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나는 가능하면 맛없다고 투정부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어떤 이들은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먹을 수만 있다면 행복한 이들이 너무 많다.
그들을 생각하면 맛없다고 버리는 음식 앞에 죄 짖는 느낌이 든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어떤 사람이냐”를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너희들이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신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너희들은 나를 돌아보면서 살았구나”라고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한다.
악인들의 항변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들은 당연히 왕이 굶주리셨다면,
왕이 목말라 하셨다면,
왕이 나그네 되었더라면,
왕이 헐벗었더라면,
왕이 병들었더라면,
왕이 감옥에 갇히셨더라면 당연히 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왕이 그랬던 적이 있기나 합니까?
왕은 그랬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한다.
이들이 이렇게 항변할 때 주님은 무엇이라 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곧 우리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들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지도, 베풀지도 않은 것이 왕을 돌아보지 않았다,
왕에게 나누지 않았다고, 왕에게 베풀지 않았다고 주님은 판단하고 계신다.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2014년에는 우리들이 드리는 헌금 종류에서 하나를 더 추가하자.
선교헌금에 동참하자.
1000원이라도 좋다.
1000원 이상 10000원까지 매주일도 좋고. 한 달에 한 번도 좋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달아보실 때 무언가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동참하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축복하실 수 있는 씨앗을 심어보자.
우리 자녀들의 이름으로 축복의 씨앗을 심자.
하나님의 축복의 씨앗을 심어야 축복의 결실을 거두게 된다.
우리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다.
아주 작고 미력한 선교헌금이지만 자녀들의 이름으로 심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다.
우리들이 선교헌금을 심으면 하나님께서 그에 상응하는 축복을 주실 것이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어쩌면 너무 작은 헌금일지 몰라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시면서 판단하실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제시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들은 축복의 사람이 된다.
축복받을 사람, 오른쪽으로, 양과 같이 분류되어진 사람이 되어 영생에, 축복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 프레임설교를 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싶어서
청중마음열기(M1S1)의 유머 400편, 예화230편, 자료70편
이렇게 총 700편의 자료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책이름은 “영혼를 깨우는 세미한 음성”입니다.
책은 저가 몇 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습니다.
구입하시면 많은 부분에서 유익하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구입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은 전화 또는 문자로 문의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T. 010-5797-9094(한상원 목사)
대전와우리교회 http://cafe.daum.net/GRACE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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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