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격려 - 이케다 SGI 회장과 서원(誓願)의 동지 (19)
인재의 대하를 구축하라
〘아이치 미카와총현〙
아이치현 동쪽의 반이 옛 미카와쿠니다. 이곳에서 일본의 역사를 움직인 인물이 많이 나왔다.
조카마치 오카자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아명 다케치요)가 태어난 고향이다. 용맹하고 충직하다고 널리 알려진 미카와 출신의 무사가 이곳에서 수련하고 전국으로 흩어져 도쿠가와 시대의 260년을 떠받쳤다.
1986년 6월 27일, 이케다(池田) SGI 회장은 히가시오카자키역에 정차한 메이테쓰 전철에서 내려 성이 있는 오카자키공원으로 갔다. 그후 미카와문화회관(현 오카자키미나미문화회관)의 근행회에 참석해 말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스고우강. 푸른 버드나무가 울창한 둑길. 다리의 난간까지 시정(詩情)이 감돌았다. 봄에는 꽃이 흐드러진 벚꽃 길도 아름다웠다.”
묘법(妙法)의 다케치요
근행회가 6월 27일 금요일 오후 4시 전부터 시작했다. ‘이케다 선생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부인부였다. 갓난아기와 함께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모습도 보였다.
“여기에서는 묘법의 다케치요도 광포의 이에야스도 있을 것입니다.” “이 훌륭한 땅에서 광포를 짊어질 힘있는 인재가 계속 나올 겁니다.”
근행회가 끝나자 로비에서 기다렸던 사람들이 계속 강당에 들어왔다.
“저런, 모두 계셨나요? 그럼 제목을 부릅시다.”
다시 이케다 SGI 회장을 중심으로 미카와의 발전과 행복을 기원하는 낭랑한 창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마치고 이케다 SGI 회장이 일어섰을 때였다.
“선생님!”
어린아이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요?”
이케다 SGI 회장은 어린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어린아이의 손을 끌며 갓난아기를 업은 부인부의 벗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케다입니다.”
“모두 착한 아이군요.”
“소카(創價)대학교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한 사람 한사람과 악수하며 허리를 굽히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때 스즈키 사토미(미카와본진현 부인부부본부장)도 10개월 된 장녀 아케미를 업고 있었다.
“딸은 울어댔지만 악수해 주셨습니다.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남편인 와타루(권본부장)도 행사요원으로 강당에 있었다.
원점을 새긴지 25주년인 2011년 아케미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스즈키 부부의 손자가 되는 다이가는 입술과 위턱 등에 이상이 있는 선천성 ‘구순열(口脣裂)’과 ‘제1 및 제2 새궁 증후군’이었다. 수술을 반복하며 치료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와타루는 기원하고 선배에게 지도를 받아도 ‘25주년에 왜 하필 우리 손자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토미가 말했다. “지금 이때를 위해 이것을 이기기 위해 선생님은 악수를 해주신 게 아닐까.”
와타루는 깜짝 놀랐다. 스승의 자애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가족에게 신심을 알려준 사명 있는 아이’ 라고 확신했다.
한때 신심에서 멀어졌던 아케미가 어본존을 바라보게 되었고, 입회를 하지 않고 있던 아케미의 남편 마사시가 장남 유이치(주부남자부장)와 가족들의 격려로 지난해 3월 16일 다이가와 함께 입회했다.
스즈키 가족은 다시 한 번 가슴을 펴고 광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이가는 지난 3월 25일에 생일을 맞이해 만 네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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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SGI 회장이 아이들과 악수한 후에도 미카와문화회관에는 인파가 계속 모여들었다.
사카키야마 마리코(미카와현 권부부인부장)는 이케다 SGI 회장이 차에 타고 동지에게 손을 흔들며 출발하려 할 때 겨우 도착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장남 가쓰이치(주부남자부주임부장)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 ‘소카대학교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고 자주 들려주었습니다.”
4형제 중에서 가쓰이치가 소카대학교에 진학해 마리코는 남편 기요후미(부본부장)와 함께 캠퍼스에서 이케다 SGI 회장과 많이 만났다.
그리고 중증 심장병을 이겨내고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온갖 비행을 일삼던 차남 즈요시에게 다시 한 번 일어설 기회를 준 것도 소카대학교였다.
즈요시는 집을 나가 도쿄 하치오지 시내에 있는 가쓰이치의 아파트로 가서 반년 동안 함께 살았고 동생처럼 귀여워해주는 소카대학교 학생과 만나 마음에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즈요시는 스무세 살 때 세계청년평화문화제(1998년, 나고야돔)에 참여한 후 본격적으로 일어섰다. 현재는 미카와총현 청년부장으로 활약한다.
가쓰이치도 고향에 돌아와 결혼도 하고 세이쿄신문 판매점을 운영했지만 2005년 가을 시련이 찾아왔다. 가쓰이치 쪽의 문제로 부인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치료법도 없다. 의사에게 그렇게 선고 받았다.
부인 키요미(지구부인부장)와 함께 울었다. 태어난 의미와 결혼한 의미가 무너지는 듯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스승의 격려를 받으며 결의가 솟아올랐다.
“사명이 있다면 이케다 선생님의 제자인 아이를 키울 수 있게 해 주세요.”
부부는 기원하고 기원했다.
1년 후 재검사에서 결과가 뒤집어졌다. 2008년 4월 장녀 유이가 태어났다.
“선생님이 오카자키에서 ‘소카대학교에서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신 한마디가 우리 가족의 성장으로 전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가쓰이치가 말했다.
어머니 마리코는 “그때 달려가길 정말 잘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장녀인 야마무라 사카에는 지부부인부장으로 차녀인 아베 미사코는 지구부인부장이다. 가족 모두가 아이치 광포를 짊어진 인재로 자랐다.
도요타에서 기후로
“기후본부는 어디입니까.”
“긴카산 근처라고 들었습니다만-.”
1975년 11월 15일, 젊은이 일곱 명이 아이치현 도요타시에서 차를 두 대로 나눠 타 기후시내의 기후본부(당시)로 갔다. 모두가 도요타자동차 그리고 그 협력공장에서 일했다.
도요타 본부(당시)의 남자부는 주부 최강을 자랑했다. 전국에서 도요타의 소재지인 도요타 본부에 젊은이가 계속 모였다. 기세와 청년부의 진열도 충실했다. 그리고 같은 해 본부에서 270세대의 홍교를 이루었다.
그러한 보고를 받고 이케다 SGI 회장이 말했다.
“도요타 남자부를 만나고 싶네요.”
그런 까닭으로 근무에 지장이 없고 연락이 닿았던 일곱 명이 기후로 달려갔다.
그러나 핸드폰도 내비게이션도 없었다. 길을 잃은 끝에 겨우 이케다 SGI 회장이 있는 기후본부 근처 회관에 도착하여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간담도 끝나려고 했었다.
“오, 도요타입니까. 잘 오셨습니다. 늦지 않았군요.”
이케다 SGI 회장은 활짝 웃음 띤 얼굴로 맞으며 모두와 악수했다.
고이케 게이지(미카와총현 부총현장), 기쿠치 가쓰오(도요타현 총합장), 이요 히로타카(도요타현 부본부장), 와타나베 다케시게(도요하시정의현 부현장), 미네 다케히사(와카야마 난키대광현 부현장), 이케자키 마코토(시즈오카 누마즈왕자현 현본부장), 고야마 히로시(작고) 일곱 명이었다.
“모두 식사도 못했겠지요.”
이케다 SGI 회장은 카레라이스를 대접했다. 그것을 한입 가득 넣으며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당시 남자부 본부장이었던 고이케가 회상했다.
“그때 선생님은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도요타가 일본에서 으뜸이 되어주세요’ ‘한 사람을 소중히 하세요’ 그리고 ‘5년 후를 향해 나아가세요’ 이 지도는 지금까지 전해졌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활동만이 아니라 일에 관해서도 자세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직장에서 힘내야 한다’고 말했다.
대표로 고이케 씨가 ‘지무(知舞)’라고 적힌 휘호를 받았다.
고이케 씨는 ‘지혜를 짜내어 광포를 향해 춤추며 나아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 후 학회활동에만 치우쳤던 자세를 반성하며 일과 활동을 대충하지 않았다. ‘학회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에 온 힘을 다해 열중하자’고 후배에게도 계속 말했다.
지역과 직장에서 실증을 나타내는 도요타 장년부와 남자부의 전통이 세워졌다.
2005년 11월, 이케다 SGI 회장이 도요타의 ‘개선(改善) 정신’에 관해 스피치한 일도 멤버에게 커다란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일곱 명 중에 고이케, 기쿠치, 이요 는 지금도 도요타에 살고 있다. ‘후계를 육성하자’고 점점 의기왕성하다.
2013년 1월, 도요타현 총회에 이케다 SGI 회장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립고 그리운 여러분’ ‘사랑하는 도요타현 만세!’
이케다 SGI 회장이 도요타시에서 기념촬영을 한 지 벌써 40주년이 되어간다.
오카자키, 니시오, 도요타, 가리야 이케다 SGI 회장은 현재 미카와총현에 여섯번 방문하여 발자취를 남겼다. 그때마다 ‘청년이여 내 뒤를 이어라’ ‘청년이여 성장하라’고 격려했다.
‘인재의 대하’인 미카와의 역사 그리고 미래도 전국의 모범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태양의 격려 (23) 인재의 대하를 구축하라 - 아이치 미카와총현.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