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하는 혼 (이케다SGI회장 대담록)
제13회 ‘녹색혁명’의 아버지 퍼그워시회의 前회장 인도 스와미나탄 박사
행동하는 낙관주의가 세계를 바꾼다
인도 첸나이에 있는 마리나해변에 무수한 사람이 모였다. 날짜는 8월 14일에서 15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네루 총리의 연설이 흘러나왔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세계가 아직 잠자고 있는 사이에 인도는 눈을 뜨고 새로운 운명과 약속했다.”
인도가 독립했다. 스물두 살이던 스와미나탄 박사는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했다.
“만약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리고 깊이 생각했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는 더욱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같은 해 1947년 8월 14일, 열아홉 살이던 이케다(池田) SGI 회장의 인생도 결정되었다.
도쿄 오타(大田)에서 창가학회(創價學會) 좌담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인생의 스승인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제2대 회장을 만났다.
박사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려고 ‘녹색혁명’을 위해 살았다. SGI 회장은 ‘인간혁명’을 위한 사제의 길을 걸었다. 2002년 10월 26일, 두 사람은 세이쿄신문 본사에서 만났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처럼 서로 힘껏 껴안았다.
SGI 회장 : 인류의 ‘생존’과 ‘공생’ 그리고 ‘평화’를 위해 싸워 오신 위대한 박사와 만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박사 : 만날 날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SGI 회장은 지금까지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계발했습니다. 제 생각도 SGI 회장의 ‘인간혁명’ 철학에서 배웠습니다!
◇
스와미나탄 박사는 인도 ‘녹색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농학자다. 밀이나 쌀의 품종을 개량해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여 인도에서만 70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아사(餓死)에서 구했다.
미국 타임지가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아시아인’에 인도에서는 간디와 타고르 그리고 스와미나탄, 이 세 사람을 선정했다.
박사가 SGI 회장과 만난 것은 핵무기 폐기를 목표로 하는 과학자 조직 ‘퍼그워시회의’ 회장에 취임한 지 두달 뒤였다.
올해 여든아홉 살이 된 박사는 이렇게 술회한다.
“당시 저는 막 퍼그워시회의 회장에 선임되어 SGI 회장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장하는 위대한 평화활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회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핵무기 폐기는 SGI 회장의 은사인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의 맹세이고 지금까지 창가학회는 반핵 운동에 공헌했습니다.
우리 퍼그워시회의가 지향하는 점도 정말로 같은 이상이었습니다.”
1957년 조지프 로트블랫 박사를 비롯한 여러 박사가 퍼그워시회의를 창설했다. 도다 제2대 회장이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한 해다.
스와미나탄 박사는 2002년 8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퍼그워시회의 회장을 지냈다. 물리학자가 차지한 회장직에 농학자인 박사가 취임한 일이 더욱 폭넓게 ‘인간의 안전보장’을 계발하려는 퍼그워시회의의 자세를 상징했다.
SGI 회장과 박사는 첫 대화 때 대담집 발간에 합의했다. 그 중에서도 핵무기 문제부터 식량과 환경문제 그리고 교육문제까지 ‘인간의 안전보장’에 관한 광범위한 주제를 대화했다.
두 사람이 지닌 관심의 중심에 있던 것은 무엇인가. ‘녹색혁명과 마음의 혁명’이라는 제목에 그것이 나타나 있다.
즉 차이에 구애를 받고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마음’을 뿌리부터 변혁한다.
그러면서 단순히 이상을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변혁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하려는 의지다.
2011년 9월 24일, 첸나이에 있는 스와미나탄연구재단 강당에서 SGI 회장이 발표한 ‘SGI의 날’ 기념제언을 주제로 스와미나탄연구재단과 인도SGI가 공동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스와미나탄 박사가 스피치했다.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영지와 비폭력을 ‘무기’로 괴로워하는 민중에게 봉사한다.” 이런 박사가 인생의 골격을 구축한 것은 어린 시절에 위대한 인격과 만났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은 간디다. 박사가 어렸을 때 간디는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에 있는 박사의 집에 왔다.
스와미나탄 소년의 옷차림을 보고 말을 걸었다. “이 물건들은 무엇을 하려고 가지고 있습니까. 저에게 주지 않겠습니까.”
박사는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몸에 차던 금팔찌와 금목걸이를 모두 간디에게 바쳤다. 간디는 가난한 사람을 지원하거나 해방운동에 쓰기 위해 장식품 등을 제공하도록 주장하고 있었다.
“간디에게 배운 최초의 교훈은 ‘필요 없는 물건, 필수품 이외 여분의 물건은 유효하게 사용되도록 더욱 좋은 목적을 위해 바쳐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이 제 신조가 되었습니다.”
간디는 인도의 카스트에서 ‘불가촉천민’으로서 과혹한 차별을 받은 사람들을 하리잔(신의 자녀)으로 불렀다.
‘브라만’이라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박사의 아버지도 하리잔의 지위 향상을 위해 싸웠고 그로 인해 사원에서 파문당했다.
박사의 아버지는 만연하는 풍토병을 박멸하려고 남인도 마을들을 돌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돈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벌어들인 수입의 대부분은 독립운동을 위해 바쳤다. 어느 늦은 밤 왕진에 나서서 해 뜰 무렵에 돌아와 췌장염으로 급사했다.
박사가 열한살 때였다. 박사는 임종 때까지 일하며 꿋꿋이 싸운 아버지의 삶 모든 것이 ‘끊임없는 메시지’였다고 말한다.
박사는 아버지 뒤를 이으려고 한때 의사를 지망했다. 그러나 1942년부터 인도의 벵골 지방을 덮친 대기근이 박사를 바꾸었다.
“신은 가난한 사람들 곁에 빵과 같은 형태로 밖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간디의 이 말이 젊은 박사의 가슴에 박혔다.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의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식량이다. 우선 식량이 필요하다!
박사는 농학으로 뜻을 바꾸고 ‘녹색혁명’으로 수천만 명의 목숨을 구제했다.
◇
간디와 SGI 회장의 공통된 철학은 무엇인가.
박사는 이렇게 논한다.
“중요한 것은 ‘낙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간디는 진실과 비폭력이 승리한다고 확신했습니다. SGI 회장과 대담하고 나서 회장도 마찬가지로 낙관주의를 지닌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육체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정신은 계속 살아있다고 느꼈을 때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실천에 근거한 낙관주의입니다.”
박사는 SGI 회장과 두 번 회견하고 대담집을 발간했을 뿐 아니라 피폭 60년인 2005년 7월, 퍼그워시회의의 연례대회가 히로시마에서 열렸을 때에는 격무 속에서 짬을 내어 히로시마이케다평화기념회관을 방문해 기념강연을 했다.
2011년 9월에는 첸나이에서 스와미나탄연구재단이 인도SGI와 함께 ‘SGI의 날’ 기념제언 세미나를 공동으로 열었다.
2004년 4월 27일, 두 번째 대화에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SGI 회장은 실로 ‘평화의 사자(使者)’입니다. 이 심각한 세계정세 속에서, SGI 회장의 존재는 상당히 큽니다.”
“제가 오직 기원하는 것은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더욱더 세계에 보내고 싶다는 점입니다!”
그 8월 14일로부터 67년.
‘세계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두 사람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몬콤부.S.스와미나탄
농학자. 퍼그워시회의 前회장. 1925년, 인도 타밀나두주 출생.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유전학 박사학위 취득.
인도농업연구소 소장 등을 엮임하고 1960년대에는 쌀과 밀의 고수확 품종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 공헌했다. ‘녹색혁명’의 아버지라 불렸다.
1988년에 스와미나탄연구재단을 설립하고, 환경보전과 빈곤극복을 위한 ‘영속적인 녹색혁명’에 힘쓰고 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퍼그워시회의 회장을 지냈다. 농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세계식량상’을 비롯한 ‘아인슈타인세계과학상’ ‘막사이사이상’ 등을 수상했다.
소카대학교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교와 미국의 오리건주립대학교 등 세계의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공명하는 혼 (13) ‘녹색혁명’의 아버지 퍼그워시회의 前회장 인도 스와미나탄 박사.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