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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산책 스크랩 한국의 애정한시
해암 추천 0 조회 160 18.10.24 07: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거리에서 미인을 보고

 路上所見 / 姜世晃

 

비단 버선 사뿐 사뿐 가더니만은

중문을 들어서곤 아득히 사라졌네.

다정할 사 그래도 잔설이 있어

그녀의 발자욱이 담장가에 찍혀 있네.

 

凌波羅襪去翩翩  

一入重門便杳然

惟有多情殘雪在  

屐痕留印短墻邊

 

능파凌波는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

나말羅襪은 비단 버선/

편편翩翩은 자득自得한 모양/

극흔屐痕은 발자욱/

유인留印은 자욱을 남기다.

 

길을 가다 앞서 가는 어여쁜 아가씨의 뒷 모습에 그만 넋을 놓고 만 연모의 노래다.

마치 물결 위 잎새인양 사뿐사뿐한 그녀의 걸음걸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쫓아 왔지만 무정하게 그녀는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대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뉘집의 아가씨일까.

어떻게 생겼는지 미쳐 보지도 못했는데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무연히 갈 길도 잊은 채 그는 서 있다.

 

혹시 다시 나오지는 않을까. 담장 너머로나마 그 모습을 한번 더 볼 수는 없을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서성이다가, 채 녹지 않은 담장 밑 그늘의 잔설 위로 너무나 또렷히 찍혀 있는 그녀의 발자욱을 보았다.

눈 위의 발자욱, 그녀가 남기고 간 발자욱.

그러나 그녀가 밟고 간 것은 눈 아닌 그의 철렁 내려 앉은 가슴은 아니었는지.

4구의 낮은 담장이란 표현 속에도 까치 발로 돋워 들여다 보고픈 설레임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녀는 바깥문 만이 아니라 중문까지 닫아 걸었으니. 잔설 위에 선명하게 남겨진 무심한 사랑의 모습 앞에, 연모의 불길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다.

 

이 시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詩中有畵 畵中有詩"는 말 그대로 시인의 감정은 극도로 절제되면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영상 속에 높은 미학적 형상화를 이룩하고 있다.

능파凌波와 중문重門으로 미인의 우아한 자태와 정숙한 몸가짐을 그려 보였고, 다정多情과 유인留印이 서로 호응하여 경과 정이 교융되면서 연모하는 마음을 말 밖에 잘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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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 가는 아가씨

峽口所見/ 申光洙

 

푸른 치마 아가씨 목화 따러 나왔다가

길손과 마주치자 길 가로 돌아섰네.

흰 개는 누렁이의 뒤를 따라 달리더니

주인 아씨 앞으로 짝 지어 돌아오네.

 

靑裙女出木花田

見客回身立路邊

白犬遠隨黃犬去

雙還却走主人前

 

협구峽口는 산골 어귀/

청군靑裙은 푸른 치마/

회신回身은 수줍어 몸을 돌림/

쌍환雙還은 짝 지어 돌아옴.

 

길을 가다 마주 오던 푸른 치마의 아가씨를 보았다. 목화 바구니를 들고 가다 낯선 남정을 보고 부끄러워 길 가로 돌려 선 그녀의 수줍은 모습을 보았다. 그때 아가씨 옆을 따라 가던 흰둥이가 저만치 있던 누렁이를 쫓아 짖어대며 달려가더니, 두 놈이 어우러져 뒹굴며 장난을 치다가는 깜빡 생각났다는 듯이 주인 아가씨 앞으로 달려 온다.

 

흰둥이와 누렁이가 컹컹대며 뒹굴고 장난 치고, 다시 한번 제 주인에게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길가던 나와 아가씨 사이엔 벌써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시인은 짐짓 엉뚱하게 흰둥이와 누렁이 얘기로 딴청을 부리고 있지만, 진정 하고픈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누렁이를 흰둥이가 쫓아가서는 어느새 어우러져 이 보란 듯이 제 주인에게 돌아오듯, 저 멀리서 조금씩 가까워지며 점점 궁금해지고 설레어버린 마음을, 그 아가씨와 다정히 앉아 정겨운 대화라도 나누고픈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흰둥이의 하는 양을 보고 자신의 마음을 들켜 버린 것만 같아 부끄러워 얼굴이 더욱 붉어졌을 테고, 가슴은 두방망이질 쳤겠다.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는 말 한 마디 없이 조금은 머쓱해져서 가던 길을 갔을 뿐이다. 그런데도 가슴 속의 파문은 좀처럼 가라 앉질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

 

이 시에서 3구는 무미건조한 듯 하나 그 가운데 풍부한 언외지미言外之味를 담아 시의 맛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2구와 3구는 언뜻 보아 시상의 비약과 단절이 생기는듯 하다. 그러나 바로 이 의도적인 의미의 단절과 4구에서의 암시적 결합에 바로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옛 말에 "봉우리는 끊어져도 구름은 이어진다 峰斷雲連"이라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 시인은 희고 누런 두 마리 개를 끌어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송의 엄우嚴羽는 시에서 `무적가구無迹可求`를 주장한 바 있다. 바꿔 말해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소금이 물 속에 녹아 있는 것과 같아서 소금의 성질은 비록 있으나 그 형체는 숨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가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남김 없이 다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 작품일 수가 없다. 남겨진 여백에 풍부한 함의를 담아야 한다. 시 감상에 있어서는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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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여인

 

美人篇 / 申欽

 

어여쁜 얼굴에다 얌전한 맵시

고운 살결 더더욱 어여쁘구나.

화장한 그 자태는 초생달인듯

얇은 옷은 매미의 날개 같구나.

웃으며 칠향거에 오르더니만

번화한 큰 거리로 수레를 모네.

중매쟁이 요청이야 왜 없었으리

하간의 돈 따윈 세지도 않았다오.

멋쟁이 오릉의 젊은 도련님

여린 애만 공연히 졸이신다네.

 

靡顔旣綽約 膩理亦便娟

粧成效初月 衫薄擬輕蟬

笑上七香車 長驅官道邊

豈無媒者求 不數河間錢

翩翩五陵少 柔腸空自煎

 

미안靡顔은 아름다운 얼굴/

작약綽約은 정숙하고 아름다운 모양/

이리膩理는 살결이 곱고 윤기가 흐름 (윤기 흐를 이膩) /

경선輕蟬는 매미의 날개처럼 가볍고 하늘하늘한 옷/

칠향거七香車는 일곱가지 향나무로 깎아 만든 화려한 수레/

관도官道는 나라에서 길을 내고 수선한 거리/

하간전河間錢은 오입장이들이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내놓는 돈/

오릉소五陵少는 오릉의 젊은이. 오릉은 장안에 있던 부유층들이 유락을 즐기던 곳/

공자전空自煎은 공연히 마음을 졸임.

 

얌전한 맵시, 얼음같이 흰 살결의 아가씨가 초생달 같은 자태로 매미 날개처럼 얇은 옷을 입고 화려한 수레에 올라 번화한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 모습에 거리의 시선이 함빡 모아졌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가씨는 도도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본 체도 않고 간다.

 

오릉은 당나라의 화려한 거리 이름이다. 이곳을 출입하는 젊은이는 요새 말로 모두 쟁쟁한 문벌과 재산을 자랑하는 재벌 2세 들이다. 아름다운 그녀, 그러나 도도한 그녀를 오릉의 신출내기 오입쟁이들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돈으로는 그녀의 뜻을 움직여 볼 길이 없고, 한다 하는 중매쟁이를 내 세워 보았자 저쪽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왜 하필 번화한 거리를 나풀나풀 살결이 다 비치는 옷을 걸쳐 입고, 온 거리의 젊은이들을 다 설레게 해 놓고 자신은 정작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예전 사공도司空圖는 "깊은 맛을 갖춘 되에야 시를 말할 수 있다.辨於味而後可以言詩"고 하여 시의 감상은 단순한 예술 형상을 벗어나 그 시가 간직하고 있는 깊은 맛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시는 미외미味外味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지금 미인이 이렇듯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신하여 교만을 부리지만 머지 않아 그녀의 아름다움도 스러져 버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운미韻味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본 편의 주제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평범한 진리를 환기하는데 있다.

 

《후한서》에 보면 "수레가 삐걱대며 하간으로 들어가니, 하간의 아가씨들 돈 셈에 능하여, 돈으로 집을 짓고 금으로 당을 꾸미네. 車班班, 入河間, 河間타女工數錢, 以錢爲室金爲堂"이라 하였다.

위 시에서 하간전河澗錢 운운한 것은 돈 많은 오입쟁이 도련님들이 그 아가씨를 어떻게 해보려 해도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는 도도한 자태를 말한 것임.

이백은 〈소년행〉에서 "오릉의 젊은이들 금시金市의 동쪽에서, 은안장 흰 말 타고 봄날을 보낸다네. 五陵年少金市東, 銀鞍白馬度春風"이라 노래하였다.

 

 

 

상촌선생집 제4권

악부체(樂府體)○한요가(漢鐃歌)

[18수. 한(漢) 나라 때의 군악(軍樂)으로서 징[鐃]을 두드리며 부르던 노래인데, 주로 행군(行軍)할 때에 마상(馬上)에서 연주하였다 한다]

    

미녀편(美女篇)

 

아름다운 얼굴 이미 얌전한데다 /    靡顔旣綽約

살결 또한 곱고 아름다워라 /          膩理亦便娟

고운 화장은 초승달을 흉내내고 /    粧成效初月

얇은 적삼은 매미 날개와 같은데 /   衫薄擬輕蟬

미소지으며 칠향거에 올라타고서 /   笑上七香車

관도 가를 길이 몰아 달리도다 /      長驅官道邊

어찌 중매장이의 청혼이 없으랴만 / 豈無媒者求

하간의 돈은 세지를 아니하거늘 /    不數河間錢

오락가락하는 저 오릉의 소년들은 / 翩翩五陵少

부질없이 스스로 속만 태우네 /       柔腸空自煎

 

[주C-001]미녀편(美女篇) : 원곡의 내용에 의하면, 미녀(美女)는 군자(君子)를 비유한 것이다.

[주D-001]칠향거(七香車) : 각종의 향나무를 가지고 만든 수레를 말함.

[주D-002]하간(河間)의 …… 아니하거늘 : 부귀영화를 하찮게 여김을 비유한 말.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경도(京都)의 동요(童謠)에 “하간의 미녀가 돈을 세는 데 능하여, 돈으로 집을 만들고 금으로 당을 만들도다[河間姹 女工數錢 以錢爲室金爲堂].” 한 데서 온 말인데, 하간의 미녀란 곧 하간으로부터 궁중(宮中)에 들어온 영제(靈帝)의 모후(母后)인 영락태후(永樂太后)를 가리킨 말이다. 《後漢書 五行志》

[주D-003]오릉(五陵) : 한 고조(漢高祖) 이하 오제(五帝)의 능묘(陵墓). 전하여 오릉이 있는 장안(長安)을 가리킨 말로, 예부터 장안에는 호유(豪遊)하는 사람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 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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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만 입고서

 

美人圖 / 魚無迹

 

규방에서 잠 깬 미인 날씨도 찬데

검은 머리 둘러 싸인 잠옷 차림에,

덧 없이 봄 다 갈까 근심스러워

매화가지 꺾어 들고 홀로 서 보네.

 

睡起重門淰淰寒

鬢雲繞繞練袍單

閑情只恐春將晩

折得梅花獨自看


미인도(美人圖) 어무적(魚無迹)
睡起重門淰淰寒(수기중문심심한)
鬢雲繞繞練袍單(빈운요요연포단)
閑情只恐春將晩(한정지공춘장만)
折得梅花獨自看(절득매화독자간)


淰淰심심은 서늘한 기운이 끼쳐옴/

빈운鬢雲(살적 빈)은 미인의 머리털을 푸른 구름에 비유하여 이른 말/

요요繞繞(에워쌀 요)繞는 둘러 쌈/

한정閑情은 정을 가만히 억제함/

연포단練袍單는 흰 명주로 만든 홑적삼. 여기서는 잠옷.

 

깊은 규방의 아가씨는 일이 없어 늦도록 잠을 자다 깨었다. 그녀를 깨운 것은 선듯한 한기였다. 그러나 그 한기는 겨울의 추위와는 사뭇 다른, 약동하는 생기를 머금은 봄날의 내음이었다.

그녀는 귀밑머리를 날리우며 잠옷 바람으로 뜰에 나섰다. 잠도 채 덜 깬 그녀. 아무도 의식치 않고 약간은 흐트러진 매무새로 뜰에 나선 그녀. 그녀는 뜰에 매화가지를 보다가 어느새 봄이 깊어졌음을 알았다.

매화 가지를 꺾어들고 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녀. 매화꽃이 하마 시들듯 내 아름다운 청춘의 날도 이렇게 시들까 싶어 갸우뚱 속이 상해 바라보는 그녀.

 

시의 안자眼字는 3구의 `한정`이다. 여기서 `한閑`은 한가롭다는 의미가 아닌 `막는다`는 의미이고, `정情`은 남녀간의 애정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정`이란 `한가로운 정서`로 새겨서는 안되고, `마음 깊이 솟아나는 애틋한 연정을 가만히 절제한다`는 뜻이다. 도연명의 [한정부閑情賦]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녀는 매화 가지를 꺾어들며 또 봄이 그대로 가버릴까 조바심을 하면서도 이를 가만히 마음 속으로 다잡아 절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다만 두려운 것은 봄이 덧 없이 그렇게 가버리는 것이다. 봄 날 깊은 규방 속 아가씨의 싱그런 아름다움과 이성을 향한 순진한 사랑의 마음을 무심한 한 폭의 화면으로 잘 잡아내었다.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이 시에 대해 "속어와는 크게 달라 당시에 크게 핍진하다. 殊非俗語, 大逼唐人"이라 하였다. 이 시의 의경意境이 일품임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의경의 기본 요소는 경과 정이 교융하는데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시인의 주관 정의와 객관적 경물 형상이 서로 만나 각자의 경계가 무너져 하나로 합일되는 경지가 바로 의경이다. 이 작품은 이런 의미에서 참으로 함축온자含蓄蘊藉의 미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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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바라보며

 

待月有懷/ 李婷

 

높다란 누각 위엔 달이 휘영청

둥그런 옥창 가에 기대 섰으리.

아리따운 그 미인 바로 내 사랑

아득해라 가을 물이 가로 막혔네.

차고 있는 패란은 아니 보여도

그윽한 난초 향내 품겨 오는듯.

그리워서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애닯어라 그 역시 하늘 끝일 뿐.

 

灩灩高樓月 團團玉窓裏

娟娟一美人 渺渺隔秋水

紉佩不可見 蘭香空在玆

思之望何處 腸斷亦天涯

 

염염灩灩은 달빛이 물결 위에 출렁거림/

단단團團은 둥근 모양/

연연娟娟은 아름다운 모양/

묘묘渺渺는 아득함/

인패紉佩는 장식으로 두름 /

재자在玆는 여기에 있다.

 

처음 네 구절의 앞에 나란히 형용사를 얹어 시상을 점점 고조시켰다. 강물 위에 비치어 물결에 출렁이는 밝은 달이 있고, 달처럼 둥근 창이 있으며, 그 안엔 달덩이 같은 미인이 있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이에는 손끝만 갖다 대어도 한기가 오싹한 가을 물이 가로 놓여 있어 먼 빛으로 그저 바라볼 뿐 안타까운 그 마음은 전할 길 바이 없다.

 

예전엔 난초를 허리에 차고 자신이 지닌 바 아름다운 바탕을 뽐내었었다. 깊은 가을 밤의 난초 향기 속에 그녀는 잠 못들고 옥창 가에 오두마니 앉아 있다. 먼 데서 바라보는 눈에 그녀가 차고 있는 난초가 보일 리 없건만 그 은은한 내음은 바람결에 날려 내게로 오는 것만 같다.

아무리 그렇키로 그녀야 가을 물 이 편에서 이렇게 그립고 가슴 조이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줄 알 리 없으니 하릴 없이 하늘 저편을 바라 보며 한숨 지을 뿐이다.

 

봄날의 나른한 오후와 가을의 달 밝은 밤은 사랑에 겨운 남녀를 위해 마련된 설레임과 그리움의 시간들이다. 그 애틋한 마음의 그리매야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가슴 두근대는 긴장과 잔잔한 흥분이 있을 뿐이다.

이 시는 끝 구에 여운의 함축이 깊다. `말은 다하였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言有盡而意無窮`는 말 그대로이다. 이곳 저곳 어디를 바라 보아도 하늘의 끝만 보일 뿐 님은 찾을 길이 없다는 의미이다.

휘영청 밝은 달의 경과 그윽한 난초 향내가 품겨오는 듯한 정이 교융되어,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역시 하늘 끝일 뿐의 의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시는 만당晩唐 오대五代 서촉西蜀의 [화간사파花間詞派]의 기풍이 있다. 그는 왕족으로 생활의 어려움을 모르고 종일 가무와 연음宴飮으로 환락 속에 지냈다. 때문에 시의 표현은 매우 아름다우나 내용이 공허하고 염려艶麗한 맛이 없지 않다.

 

 

출처;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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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름개 쓴 아가씨

 

贈美人 / 趙徽

 

길 나들이 부끄러워 무름개를 쓴 아가씨

맑은 밤 구름 새로 달빛이 비취는듯.

꽉 동여맨 가는 허리 호리호리 한 줌이요

비단 치만 새로 지은 석류화 천이로세.

 

惹羞行露護氷紗

淸夜輕雲漏月華

約束蜂腰纖一掬

羅裙新翦石榴花

 

행로行露는 길에 내린 이슬/

빙사氷紗는 얼음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흰 천/

월화月華는 달빛/

약속約束은 허리를 꽉 동여 맴/

봉요蜂腰는 벌의 허리 같이 호리호리한 허리

 


오랜 만의 나들이가 수줍어 흰 깃으로 무름개를 하고 나온 아가씨. 그러나 한껏 맵씨를 부려 늘씬하게 동여 맨 허리는 바람에도 금새 꺾일 듯 가냘프기만 하다. 얼음 같이 깨끗하고 흰 천으로 된 무름개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아가씨의 얼굴은 선녀가 하강한듯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로 형용할 도리가 없어 밤 하늘에 밝은 달이 엺은 구름 사이로 비추이는 것에 비유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마냥 수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랜 만의 나들이에 석류화 고운 천을 곱게 말라 지은 비단 치마를 입고 있질 않은가. 한껏 맵씨를 뽐내려 허리도 늘씬 동여매고서 말이다. 남정네의 짖궃은 눈길도 그녀에겐 두방망이질 하는 흥분이었을테니까. 바라보는 남정네나 수줍어 무름개를 더 가리우는 아가씨나, 어디에고 잡스런 마음이 끼어들 데 없는 청순한 한 폭의 그림이다.

 

치밀하고 정치精緻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구의 행로行露는 《해동시선》 에는 행로行路로 되어 있는데 역시 말이 통한다. 행로行露는 길에 내린 이슬로, 여자가 이슬이 내리는 시간에 이슬을 맞으며 다닌다는 것은 좋지 못한 행실을 뜻한다. 이를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예로써 자수自守하는 여인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 말은 {시경} [행로]편에 보인다. 한국적인 미는 서구의 경우처럼 노출에 있지 않다. 망사나 한산 세모시 같이 은은하게 비치어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데에 있다. 빙사와 월화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절묘한 조응을 이루었다.

 

이 작품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려 전한다. 조휘趙徽란 사람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북경에 갔을 때, 길에서 미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엷은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반한 그가 흰 부채에 적어 주었다는 바로 그 시이다. 언어예술면에서만 본다면 이 작품은 격이 그리 높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유가의 미학사상에 바탕을 두어 인격미의 표현에 주안을 두고 있어 돈후한 맛이 있다. 이른 바 맹자가 말한 `충실지위미充實之爲美`가 바로 미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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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구질 하는 아가씨

杵女/ 柳永吉

 

오르락 내리락 절구 찧는 고운 팔목

윗 저고리 때로 들려 흰 살결 드러나네.

월궁에서 불사약을 많이 찧은 탓이리라

인간 세상 절구질도 그 수법 그만일세.

 

玉杵高低弱臂輕

羅衫時擧雪膚呈

蟾宮慣搗長生藥

謫下人間手法成

 

옥저玉杵는 옥절구/

약비弱臂는 연약한 팔뚝/

설부雪膚는 눈 같이 흰 살결/

섬궁蟾宮은 달의 이칭/

관도慣搗는 손에 익어 능숙함/

적하謫下는 귀양 내려 옴.

 

기계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가난한 가정에서는 곡식의 도정을 대부분 여인네들이 직접 절구질로 해결하였다. 여리디 여린 섬섬옥수는 절구공이가 무겁기만 할텐데도 그녀의 절구질은 고저완급의 박자를 잘도 맞추고 있다. 그녀의 능숙한 절구질로 보아 그녀는 천한 신분의 여인임을 알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자태만은 선녀와도 같았다.

 

고운 그 자태를 넋놓고 바라보다가 상상은 나래를 달아, 시인은 그녀가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월궁 항아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예전 항아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 후예가 서왕모에게 부탁하여 구해온 불사약을 훔쳐 먹고 월궁으로 달아나 선녀가 되었다. 그런데 혼자서만 장생불사 하겠다는 그 소망은 애초 부질 없는 짓이었다. 천추만년 긴 세월을 월궁 토끼와 계수나무 아래 마주 서서 절구에 장생약을 찧으며 보냈으니 말이다.

아가씨의 저 능숙한 절구질, 아 그녀는 필시 전생에 월궁의 항아 아씨였을 터이다. 그녀는 무슨 죄를 지어 다시 인간에 귀양을 오게 되었을까? 불사약을 훔쳐 먹은 죄는 아니였을지? 그러나 그 귀양은 오히려 설레이는 기쁨으로 맞이할 것은 아니었던가.

 

짖궃은 남정네의 눈길은 그녀의 가녀린 팔목에 머물지 않고, 공이를 치켜들 때마다 보일듯 아찔한 그녀의 희디 흰 살결에 붙박혀 있다. 공이가 솟구칠 때마다 괜스레 그렇게 두근대는 가슴 따라 심장의 고동 소리만 커져가고 있다. 시를 읊고 있노라면 절구소리와 함께 고동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시 역시 행간에 그녀의 근면성을 칭찬한 것이니, 맹자의 `충실지위미充實之爲美`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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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내가는 소녀

黃城俚曲 / 金鑢

 

청 삽살이 앞세우고 흰둥이 뛰따르고

밥 내가는 저 아가씨 열 여섯 살이라오.

땋아 나린 머리 위로 둥근 광주리 이고서

아버님 시장할까 발걸음 재촉하네.

 

靑玁前行白玁隨 小娘年紀破瓜時

丫頭戴着圓簟去 忙趁阿爹午饁飢 아두 :丫頭

 

청엄靑玁은 푸른 삽살개/

파과破瓜는 여자 나이 열 여섯 살. 외 과瓜자를 파자 하면 여덟 팔자가 두 개가 되므로 하는 말/

아두아頭는 길게 땋은 머리/

대착戴着은 머리에 이다/

원점圓簟은 대로 엮어 만든 밥을 담는 둥근 그릇/

망진忙趁은 바쁘게 걸음을 재촉함/

아다阿爹는 아버지/

오엽午饁은 점심밥.

 

멍멍 짖는 삽살이 소리 따라 눈 길이 멎었다. 푸르고 흰 삽살이가 어여쁜 아가씨의 앞 뒤에서 장난치며 뛰놀고 있다. 눈두렁 밭두둑 사이로 새참 광주리를 이고 가는 아가씨. 헛디딜까 눈매를 곱게 내리 깔고서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겠다.

 

길 가던 나그네는 발 길을 잊고, 그 시선도 아랑곳 없이 그녀는 발길을 서두른다. 아버님이 얼마나 시장하실까? 이른 아침 들 일을 나오셨으니. 아니 그녀는 제 등 뒤로 쏟아지는 나그네의 눈길이 화끈거려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삼단 같이 길게 땋아 내린 머리는 먼 눈길에도 앳띤 처녀임을 말해주고, 기울 듯 흔들리는 걸음을 보면 달려가 광주리를 들어도 주고 싶건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가씨는 총총 걸음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밥 광주리를 이고 잰 걸음으로 가는 아가씨의 옆으로 삽살이가 따라 가는 전원의 풍경은 너무나도 상징적이어서 아름답다. 건강하고 발랄한 청춘의 약동이 숨 쉬는 여름 날 한낮의 소묘다. 이 시의 표현은 예술성 보다는 진솔에 비중을 두었다.

 

김려(金鑢)의 〈황성리곡(黃城俚曲)〉이다. 2구의 파과(破瓜)는 ‘과(瓜)’를 파자하면 여덟 팔자가 두 개가 되므로 열 여섯 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丫)’자 모양으로 머리를 길게 땋았다고 해 아직 시집가지 않은 처녀임을 보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들 일 나간 아버지의 점심을 담은 둥근 광주리가 얹혀 있다. 그녀의 걸음이 자꾸만 빨라지는 것이 짖궂은 나그네의 시선 때문인지 아버지가 시장하실까 걱정이 되어서인지는 굳이 따질 것이 못된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강아지 두 마리가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푸른 삽사리와 흰 삽사리이다. 집안에서 심심하게 뒹굴던 개들도 주인 아씨를 따라 밭 두둑 길로 나서니 그만 신이 나서 주인을 뒤에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겅중대며 뛰어간다. 새참 광주리를 머리 가득 이고, 행여 발을 헛디딜까 싶어 눈매를 곱게 내려 깐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가씨. 그 옆으로 삽사리 두 마리가 팔랑대는 전원의 풍경. 건강하고 발랄한 청춘이 약동하는 여름 한낮의 소묘이다.

 

목화밭은 어디에 있을까? 그 옛날 추억 속의 그 소녀는, 파란 치마로 수줍던 그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반짝이던 젊은 날은 어디로 숨어 버렸을까?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은 소녀(少女). 또는 두 가닥으로 땋은 머리 모양. 아환(丫鬟).

  환<머리환(땋은 머리환, 쪽찔환)…또 아환은 소녀이다. 또 말하기를 아두라 한다.> ; 鬟<머리환…又丫鬟져믄간나 又曰丫頭> [훈몽자회 중권, 12장 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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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삼하는 처녀

黃城俚曲 / 金鑢 

 

규전의 아가씨 그 모습 꽃과 같네

돌 우물 남쪽 집이 태어난 곳이라죠.

탐스런 검은 머리 손질도 못하고서

달밤에 물을 길어 삼단을 축인다오.

 

葵田處女貌如花

石井南邊是爸家

綠鬢雲鬟渾不整

月中汲水曉漚麻

 

규전葵田은 제주도의 지명/

녹빈운환綠鬢雲鬟은 소녀의 윤기 나는 머리와 쪽/

급수汲水는 물을 긷다/

구마 漚麻는 삼단을 축임.

 

규전 마을을 지나다가 길삼하는 처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워 꽃이 그녀인지 그녀가 꽃인지 분간할 길이 없다. 나그네는 그 얼굴에 반하여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집은 돌 우물가 나즈막한 초가집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구름 같은 귀밑머리.

 

자다가 일어난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녀는 길삼에 열중하느라 머리 손질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었다. 돌우물에는 때 마침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우물에 뜬 달 빛, 그 달빛 마냥 함박진 소망을 동이 가득 길어 그녀가 삼단을 축이고 있다. 달빛 흥건한 물에 적신 삼단에서 삼실을 뽑아 그녀는 길삼을 하리라. 그 베로는 누굴 위해 옷을 지을까.

 

이 장면을 굳이 그림으로 그린대도 달밤 아가씨에게 넋을 잃은 나그네가 들어설 곳은 어디에도 없다. 나그네는 어디까지나 장면 밖에서 물끄러미 아가씨의 하는 양을 건네다 볼 뿐이다. 달밤에 남녀가 무슨 말을 건네느냐고.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할 소린가. 나그네가 본 것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삼단을 축이고는 졸린 눈을 비비며 집으로 들어가는 천진스럽도록 앙징맞은 그녀의 실루엣일 뿐이었겠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머리 손질도 아니하고 남들이 고이 잠든 밤중에 질삼을 하려고 삼을 축이는 모습을 보며, 그녀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나그네의 설레임을 말 밖에 잘 담아낸 작품이다.

 

위 두 작품은 일반적인 한시의 미의식과는 자못 다른 풍격을 보여준다. 공자가 {예기}에서 `정욕신 사욕교 情欲信 辭欲巧` 즉 정감은 진실하고 문사는 교묘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창한 이래 후대 여러 사람에 의해 이와 비슷한 논의가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명말 원굉도袁宏道는 이를 반대하여 `독서성령 불구격투 獨抒性靈 不拘格套`를 주창하였다.

이는 진부한 투식에 얽매이지 않고 진실한 감정을 선명한 개성에 담아 노래한 것이야 말로 진짜 시임을 주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 영정 시대 이후에 이런 풍이 크게 성행하였다. 이 시기의 시학은 수사적인 미를 중시하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진솔함의 미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위 두 편의 시는 김려의 <황성리곡黃城俚曲> 239 수 가운데서 가려 뽑은 것이다. 원시엔 제목이 없으나 번역 상 제목을 붙였다. <황성리곡>은 전라도 지방 백성들의 토풍민속과 어려운 생활상을 노래한 연작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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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 그리는 여인

銀臺仙 2수 / 姜渾

 

천상의 선녀인가 자태가 옥 같구나

이른 새벽 거울 보며 눈썹을 그린다오.

막걸리에 취한 듯 발그레한 그 얼굴에

봄바람 솔솔 불어 검은 머리 흩날리네.

 

姑射仙人玉雪姿 曉窓金鏡畵蛾眉

卯酒半酣紅入面 東風吹鬢綠參差  :  酣 鬢

 

고야선인姑射仙人은 《장자》 〈소요유〉편에 나오는 피부는 눈과 같고 아름답기는 처녀와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들이마시며 이슬을 마신다는 신인神人/

묘주卯酒는 막걸리/

참치參差는 가지런하지 않은 모양.

 

은대선銀臺仙은 성주星州의 유명한 기생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언어로 그려낸 한 폭의 미인도다. 백설 같이 흰 살결, 옥 같은 그 자태. 그 자태는 장자가 말한 묘고야산의 선녀가 환생한 듯 눈이 부시다. 이른 새벽 일어나 하는 눈썹 단장은 누굴 위한 것일까? 그만 부끄럽게 내달린 마음 속 님 생각에 수줍게 두 뺨이 타오르고 말았다. 봄 바람도 짖궃게 그 뺨을 간지르며 삼단 같은 귀밑 머리털을 날리우고 있다.

 

봄은 설레임의 계절이다. 까닭도 모를 공연한 기대에 가슴은 울렁인다. 이 봄엔 늠름하신 님이 흰 말을 높이 타고 문득 나타나실 것만 같은 생각, 왠지 그런 예감이 그녀의 뺨을 발그레 물들였다. 그 마음 알겠노라며 간지르는 봄 바람의 심술궃은 장난에 아가씨의 마음은 벌써 거울 앞을 떠난지 오래다. 경 속에 정이 의연히 드러나는 데에 작품의 묘가 있다.

 

허균의 《국조시산》에는 제목이 〈정성주기呈星州妓〉로 되어 있다. 옛날의 명기는 오늘날의 매춘부와는 달라 정조가 있었다. 그리고 한번 정을 주면 그 소실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검은 머리 곱게 빗고 누각에 기대

쇠 피리 빗겨 부는 부드러운 손.

관산월 한 가락에 그대 그리워

두 줄기 맑은 눈물 떨구었다오.

 

雲鬟梳罷倚高樓 鐵笛橫吹玉指柔

萬里關山一輪月 數行淸淚落伊州

 

운환雲鬟은 여인의 아름다운 머리칼/

소梳는 빗질함/

철적鐵笛은 쇠 피리/

횡취橫吹는 빗겨 불다/

관산월關山月은 악부시의 이름/

이주伊州는 저도 몰래 흐르는 눈물.

 

역시 은대선을 노래한 둘째 수이다. <관산월> 구슬픈 한 가락에 얼음 같이 맑은 눈물이 떨어진다. 달빛 받아 더욱 영롱한 눈물. 가녀린 손가락도 아지못할 슬픔에 하릴 없이 곡조 속으로 잠겨만 간다. 윤기 나는 머리를 곱게 빗어 땋고서 누각에 기대 앉아 피리 부는 여인. 피리 소리는 달에까지 사무치고, 그 소리에 달빛 조차 느끼며 서쪽 나라로 떠내려 간다.

 

그녀는 이 밤 저 높은 누각에서 왜 피리를 불고 있을까? 누구를 그리워 하며 울고 있을까? 그녀는 필시 전생에 월궁의 항아 아씨였을 것이다. 월궁에서의 남 모르는 사랑 때문에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선녀일 것이다. 하염 없이 우러러도 풀릴 길 없는 그리움, 손을 아무리 내밀어도 닿지 않는 막막함, 그 그리움과 막막함을 피리 소리에 얹어 천상의 님께로 띄우는 것일게다.

 

일반적으로 한시는 전구轉句에 묘처가 있다.

위 3구 `萬里關山一輪月`은 `만리 떨어진 관문과 산에 둥글고 밝은 달`의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 `관산월`이라고 하는 이별을 상심하는 가락의 피리에 맞춰 부는 악곡 이름 위에 萬里와 一輪을 삽입하여 님과 내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상심하는 심층적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낙이주落伊州는 고사가 있다. 4구를 직역하면 `몇 줄기 맑은 눈물 이주에 떨어지네`가 된다.

이주는 <이주령伊州令>이란 악곡의 가사를 말한다. 당나라 때 범중요范仲요 의 처가 멀리 벼슬살이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게 부친 시이다. 그 가사는 "가을 바람 어제 밤에 주렴 장막 뚫고 오니, 규방은 더욱더 을씨년스럽네. 西風昨夜穿簾幕, 閨院添蕭索"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위 네째 구는 여인의 님을 향한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흐르게 하였다는 것을 `낙이주落伊州`라고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이주령伊州令>에는 다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처음 상주相州에 녹사錄事 벼슬을 살러 간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위 시를 지어 보내면서 편지를 동봉해 보냈는데, 실수로 伊자에 사람 인을 빼고 尹으로 써서 보냈다. 이를 받아 본 남편은 그녀에게 보낸 답장에서 "생각컨데 그대에겐 남자가 필요 없나봐. 料想伊家不要人"라고 우스개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그대와 헤어진 뒤 몇 해가 되었는데, 제 옆엔 아직 어린 아이만 자고 있죠. 共伊間別幾多年, 身邊少個人兒睡"라고 재치있게 회답하였다. 비록 헤어질 때 배 속에 있던 아이가 벌써 자라 옆에서 자고 있지만 남자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고, 또 남자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필요하다는 것이니 하루 빨리 돌아와 함께 지내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넘치도록 가득 담아 보냈던 것이다.


한시에서 이러한 앞선 고사를 원용하는 시작법은 매우 일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전고어는 단순히 의미 전달을 간결하게 하는 외에, 그 고사를 함께 연상시킴으로써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교묘히 묘사하여 그 시의 함축미를 더욱 깊고 유장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허균은 이 시를 평하기를 "원한의 정이 한 웅큼 움켜진다. 恨情可掬 "이라 하였다.

 

후대에 와서 이주란 말은 멀리 떠난 남정을 그리워 하는 규정閨情의 의미로 굳어지게 되었다.

王維도 <이주가伊州歌>를 지었는데 참고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가을 바람 부는 달밤 괴로이 그리노니

고향 떠나 종군한지 십년도 더 되었네.

떠나시던 그 날에 은근히 부탁했지

기러기 올 때마다 자주 편지 부치라고.

 

淸風明月苦相思

蕩子從戎十載餘

征人去日慇懃囑

歸雁來時數附書

 


삶의 갈피 갈피에 켜켜히 쌓인 사랑 [한국의 애정한시]

한국의 애정한시는 김도련 정민 이 함께 엮은 <꽃피자 어데선가 바람 불어와>(교학사, 1992)의 내용을 작품 별로 구분하여 수록한 것이다. 일부 내용은 원래의 내용을 손질하여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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