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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46?),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6권. 19세기, Le XIXe siècle 507-788
제10장 헤겔주의 분산(와해) Décomposition de l'hégélianisme 688
제1절 좌파 헤겔주의 l'hégélianisme de gauche 688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헤겔의 방법[론]과 그의 체계 사이에 하나의 대비를 발견한다. 이 대비(un contraste)는 1830년에서 1840년 사이에서 그의 학설의 폭발적인 성공 이후에, 그의 동조자들 사이에는 학설의 와해와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체계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체계가 예술에서, 정치에서, 종교에서, 철학에서, 절대적이고 피할 수 없는 진리들 일체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낭만주의 예술, 프러시아 관료국가, 크리스트교 교리, 관념론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방법론에서이다. 철학이 얼어붙은 독단적 원리들의 모둠[집합]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진리가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금지하는, 또 사회적 단계를 결정적이라 여기는 것을 금지하는 과정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체계는 보수적이고 방법은 혁명적이다. 여기서 헤겔의 우파와 좌파의 분할이 이루어진다. “특히 헤겔의 체계에 집착하는 자들은 종교의 영역에서 만큼이나 보수주의자들의 철학의 영역에서 남아있어야 할 권위를 믿고 싶었을 것이다. 반대에 서 있는 자들은 헤겔 철학의 본질적인 것을 변증법적 방법에서 보기를 원했고, 종교의 사실에서 만큼이나 철학의 사실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대립으로 기울어질 수 있었다.” 그 체계의 필연성에 의해 예견되었기는 하지만, 헤겔은 이런 귀결을 끌어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것은 헤겔이 아니라 젊은 헤겔주의자였다. 이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 Frédéric Guillaume IV, 1795-1861)[재위 1840-1861]의 반동통치 아래서 1840년부터 프로이센에서 자유로운 대립을 형성했던 집단이다. 이들 중의 한사람이 1841년에 쓰기를 “그들은 헤겔 자신이 감히 전개하지 못했던 진솔한 결과들을 거기로부터 끌어냈다. 인간 의식은 사람들이 진리들로서 간주했던 모든 것을 생장하게 한다. 반면에 진리들은 스스로 발전하며 서로 싸우고 또 서로 통합한다. 의식은 오직 진실한 원리로 남아있다. 모든 진리들은 절대 정신의 형식들일 뿐이다. 그 진리들은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정신은 이 진리들로부터 항상 새롭게 생장한다(engendre). 이 생성(le devenir)은 모든 철학의 유일한 원리이다. 이리하여 정신 그 자체의 행위보다 더 지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신은 항상 새로운 형식들로 스스로를 표출한다.” 니체(Nietzsche, 1844-1900)가 말했듯이 “헤겔에 있어서 보편적 진행과정의 마지막 정점은 베를린에서 그 자신의 현존[살았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최소한 인정한다면, 그 귀결은 필연적이다. (689)
이 원리의 첫째 적용은 종교에서 이루어졌다. 종교에서 논쟁이 그 당시에 정치에서 논쟁하기보다 덜 위험했다. 사람들은 크리스트 종교 안에서 인간 의식의 생산물을 보았다. 이런 저술들, 즉 슈트라우스(Strauss, 1808-1874)의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 1835)(La vie de Jésus), 바우어(Bauer, 1809-1882)의 요한과 복음서저자들의 복음서 역사의 비판(Critique de l'histoire de l'Evangil de Jean et des Synoptiques, 1840-1842), 포이에르바흐(Feuerbach, 1804-1872)의 크리스트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hums, 1841)(L'Essence du christianisme)의 공통적 특징이었다. 그러나 정식들의 많은 부분들에서 유사사성에도 불구하고, 18세기로 회귀의 문제는 아니었다. [종교발생에 있어서] 인간적 기원의 문제는 더 이상 종교를 중상 비방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인간 자신에게 풍부한 내적의식의 고유함을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포이에르바흐가 말하기를 “나에게서 고증적 전문지식과 철학은 인간의 심장에 감추어진 보물들을 돌려놓는 수단들이다.”(1864년 프랑스판 크리스트교의 본질(원판, 1841), p. xix). 헤겔의 시각에 관해 그들의 비판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특징은 헤겔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689)
크리스트교의 본질에서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 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 사상의 리듬은 아주 헤겔적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겉보기에는 외적인 것이 실제적으로는 우리에게 내적인 것이 되는지를, 또한 어떻게 신학자들이 인간의 밖에 투사한 신이 실재적으로는 인간 자신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자기에로 귀환, 즉 신의 의식과 자기의 의식의 동일성, 그게 바로 헤겔의 정신이었다. 종교는 인간의식을 동물의식과 깊이있게 구별하는 특징으로부터 유래한다. 인간의식은 이중적(double)이며, 즉 개체로서 스스로를 느끼고 또 인간은 종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인간은 내적 언어로 되어있는 사유 속에서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인식한다. 그 언어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면서도, 나임과 동시에 너이다(moi et toi). 따라서 인간은 자기 종의 무한성을 알고, 자기 개인의 한계에 대비되는 자기의 진실한 존재의 무한성도 인식한다. 신은 무한 속성들의 일체, 즉 인간 종에 속하는 지혜, 사랑, 의지의 일체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교 속에서 인간에게 관계되지 않은 무엇이 있는 지를 헛되이 찾고자 한다. 신속에는 특수하게 인간적이지 않는 어떠한 속성도 없다. 더군다나, 종교 속에는 인간 자신이외에 어떠한 다른 목표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종교에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구원(안녕 son propre salut)만을 꿈꾸기(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그 목표를, 즉 신의 사유들의 대상을 만든다. 육화의 불가사의는 인간을 위한 신의 사랑의 불가사의이다. 그러나 신의 불가사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의 불가사의일 뿐이다”(크리스트교의 본질, 333쪽). 게다가 신학적 착각은 필연적이었다. 내재성이란 항상 과정의 끝에 있다. “종교들의 역사적 진보는 초기 종교들이 신적인 것으로서 관조하고 찬양했던 것을 최근 종교들이 주관적인 것 또는 인간적인 것으로서 간주하는 데 있다”(같은 책, 37쪽). 포이에르바흐의 학설은 그에게서 보면 모든 우상 숭배의 단호한 배제에 있다. 그러한 학설은 정확하게 꽁트에서처럼, 18세기에 무신론으로 기울어지는 이신론을 토대로 했었던 자연과 신의 직접적 연관을 배제하는데 있다. 이점에 관해서 포이에르바흐가 말하기를 “자연 속에서 신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선 신을 자연 속에 놓아야 한다. 자연적 현상들에 의해 신의 현존 증명은 무지와 거만의 증거들일 뿐이다. 이런 무지하고 거만한 증거를 가지고 인간은 자기 지성의 한계로 하여금 인간 본성의 한계로 만든다. 이리하여 모든 핑계는 배제된다. 신은 인간을 위해서만 그리고 인간 속에서만 있을 뿐이다. (690)
이처럼 포이에르바흐는 크리스트교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한다고 믿었다. 그의 학설은 그의 사유 속에서 암호화된(비밀스런) 언어를 분명하게 번역하는 것이었다. “동방언어로 그리고 환타지로 꾸며진 크리스트 종교를 알 수 있고, 분명한 근대 언어로 성실한 번역, 즉 오직 단어 대 단어의 번역… 크리스트교의 수수께끼의 해결책이다.”(위 책 vii쪽) 번역이란 정신을 그 원본(모델)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포이에르바흐는 정신을 크리스트교로부터 전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르낭(Renan, 1823-1892)이 나중에 취할 태도의 애매성이다. 그 애매한 태도는 정신의 독단적인 주장들이 없이도 크리스트교 삶의 정신성을 온전히 유지하기를 원하는 태도이다. 이 종교적 무신론은 일종의 관념론적 감각주의와 짝을 이루는 것이다. 그 감각주의에서 포이에르바흐는 감각에게 존재들[개별자들]의 내부에서 무매개적으로 통일되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우리는 거울들의 표면들과 그 색채 있는 광경들만을 볼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의 시선을 관조한다. 이리하여 외부뿐만 아니라 또한 내부도, 살(la chaire, 육신)뿐만 아니라 또한 정신도, 사물뿐만 아니라 또한 자아도 의미(le sens, 감관)의 대상이다.” 이렇게 이해된 [감관]의미는 인간을 따로 떼어내거나 제한되게 하는 것을, 즉 관념론이 그렇게 해왔던 것을 피하게 한다. 그런데 [관념]연합작용과 더불어 인간의 무한성과 자유가 시작된다. 종교는 이에 대한 주장이다. (691)
스트라우스(David Strauß, 1808-1874)와 바우어(Bruno Bauer, 1809-1882)는 오히려 역사가들이다. 이들은 앞선 세기들 동안에 성서에 근거 했던 텍스트 비판을 복음서들에 관하여 다시 비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정신은 여전히 헤겔적이다. 이들은 복음서에서 초기 크리스트교 공동체에 힘입은 어떤 신화적 발명을 보았다. 특히 스트라우스는 예수의 담론들 가운데서 유대주의에 매몰된 크리스트교인들과 유대교의 활용들과는 분리되어 있는 바울 교리와 사이에 충돌에 기인하는 모순을 발견한다. 스트라우스는 예수의 신화 속에 반영되어 있는 복음서들 속에서 초기 크리스트교 공동체의 역사 자체를 보았다. 따라서 이 헤겔주의자들은 정신 진화의 국면인 한에서 크리스트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것이 정통 헤겔주의자인 바우르(F.-Chr. Baur, 1792-1860)의 진리와 동일하다. 그는 특히 크리스트 교리사 교본(Lehrbuch der christlichen Dogmengeschichte, 1847)(Manuel de l'histoire des dogmes)에서 교리들(des dogmes, 독단들)의 역사에 대해 연속적이고 조직적인 발전을 다시 그리고자 애썼다. 그는 크리스트 교리에서 다음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교리들을 통일성으로 환원하면서 유대교와 이교도의 대립을 제거하는 종교 의식(意識)[종교적 사유]에서 새롭고 특별한 형식”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생대주의는 또한 정치학에서 적용된다. 이들은 우선 국가 속에서, 보다 더 특별나게 모든 국가적 전통으로부터 다른 국가들보다 더 자유로운 프러시아 국가 속에서, 새로운 정신의 지지에 이른다. 사람들은 한 헤겔주의자, 쾨펜(Friedrich Köppen, 1775–1858)을 보았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 Frédéric le Grand, 1712-1786)에 관한 찬탄할 만한 책을 썼다. 그는 “왕관을 쓴 낭만주의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795-1861)의 통치에 대해 실망하였다. 그 왕은 “그가 신과 그 인격 사이에 쓰여진 종이 한 장이 끼어든다 것을 결코 지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 했고, 그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을 추방하고 박해했다. 그러한 실망이 국가로부터 헤겔주의자들을 멀리 하게 했으며, 이 헤겔주의자들을 ‘정의로운 자들의 동맹’(Bund der Gerechten fr. La Ligue des justes, 1836)과 같은 혁명적 연합회들에 가담하도록 몰아갔다. 이 동맹은 그 당시 라메네(Lamennais, 1782-1854)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정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슈타인(Lorenz von Stein, 1815-1890)도 그의 저술 프랑스 제3혁명이래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Die sozialistischen und kommunistischen Bewegungen seit der dritten französischen Revolution, 1842)(Les mouvements socialiste et communiste depuis la troisième révolution française)에서 이러한 정신의 관념들을 [독일에] 알렸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난 모제스 헤스(1812-1875)는 1841년에 쓴 유럽의 삼두 정치(Die europäische Triarchie 1841)(La Triarchie européenne)에서, 미래는 독일 철학과 프랑스 사회주의의 내밀한 통합(une union)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것은 또한 그 당시 맑스(Karl Marx, 1818-1883)의 견해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보면 젊은 헤겔학인들의 견해이기도 한다. 이들은 프러시아국가의 파산으로 방향을 잃고 있었고, 또한 바우어(B. Bauer, 1809-1882)같은 이도 헤겔 상대주의에서 부정적인 순수 비판만을 보았기에, 이들은 공산주의 속에서 자신들이 갈망하는 건설적이고 실증적인 관념을 찾았다. (69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통합은 오래 끌지 못했고, 1845년부터 헤겔학인들부터도 공산주의자들로부터도 마찬가지로 단절되었다. 한편으로 주목할 만한 헤겔학인들은, 즉 루게(Arnold Ruge 1802-1880), 바우어 형제들(Bruno Bauer, Edgar Bauer), 불(Franz Peter Buhl 1809−1862), 마이어(Eduard Meyer, 1817–1901) 등은 겁먹은 것 같지 않지만, 이론에서는 과감하였지만 행동에서 만큼은 소심하였다. 때문에 모제스 헤스가 그들의 단점을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 1841년 이래로 맑스와 연결되었던 엥겔스는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것이 있다. 즉 그는 맑스와 함께 1845년에 한 가지 작업을 시도 했는데, 그 작업은 “독일 관념론 개념과는 대척점(l'antagonisme, 대립, 길항작용)에 있는 우리의 개념작업(공산주의)을 제시하는 것이며, 이 공산주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의 옛 철학적 의식을 청산하는 것이다.” 맑스와 공동 작업의 대상으로는,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 1845)(mit Marx)(L'Idéologie allemande), 신성가족: 부르노 바우어와 그 동료에 대한 비판적 비판의 비판(Die heilige Familie, oder Kritik der kritischen Kritik Gegen Bruno Bauer & Consorten, 1845)(mit Marx)(La Sainte Famille ou Critique de la critique contre Bruno Bauer et consorts)이 있다. 맑스가 쓰기를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철학을 해석해 왔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의 학설들에 대해 이보다 더 날카롭고 더 정확한 비판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보았듯이, 문자 그대로 학설들은 통찰(vision)의 단순한 대상인 실재성을 건드리지 않은 채 남겨둔 번역들이다. 이리하여 포이에르바흐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종교적 대상인 신과 인간 사이에 이중화(un dédoublement)가 작동되고 있고, 그의 학설은 인간을 신에게 끌어 붙이면서 이 이중화를 제거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작업의 끝에 이르고 난 뒤에, 아직 해야 할 중요한 것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대척점]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백한 신적 실재성과 그것의 시간적 토대 사이에서) 대척점을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천상의 가족이 지상의 가족의 반영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난 뒤에, 이 후자에 대해 이론적 비판을 해야 할 것이고, 이 후자를 급속히 변형시켜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헤겔 변증법의 촉발을 멋지게 알아챘다. 헤겔은, 어떠한 당위존재(Seinsollen)도 없으며, 행동을 이끌 수 있고 인도할 수 있는 독립된 어떠한 이상(idéal)도 없다는 것을 이미 제시했다. 맑스는, 행동을 금지할 수 있는 어떤 이상도 없다고 말하면서, 사상(la pensée, 사유)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그 행동은 관념에 대하여 모든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회의주의 안에서 이론을 방황하게 하는 모든 불가사의들(Tous les mystères, 비밀들)은 인간의 실천적 활동성에서, 그리고 이 활동성의 이해[내포] 속에서, 그것들의 합리적 해결을 발견한다.” (693)
이런 비판들은 헤겔학인들 철학의 토대를 목표로 삼기보다, 헤겔학인들의 사색적 태도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이 철학에 대해 맑스는 실재적인 것과 구별된 이상적인 것의 부정을 수용한다. 이것은 1848년 이후에 사회주의 유물론으로부터 그리고 프랑스 이데올로기적 사회주로부터 분리를 보증한다. 그러나 그는 헤겔의 변증법의 중심 생각(l'idée, 관념)에 대한 비판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즉 실재적인 것의 개화의 조건으로서 (부정성의) 대척점의 관념에 대한, 게다가 사람들이 보았다시피 독일 사유의 고정된 관념[변증법적 생각]인 대척점의 관념에 대한 비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이런 생각의 주변에 있던 맑스는 독창적이라기보다 정력적인[거침없는] 사상가로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에게서 모든 방면으로부터 길어 올린 요소들을 조직화 하였다. 이 작업의 틀을 넘어서는 세부사항들에 들어가지 않고서, 우리는 어떻게 맑스가 [생각을] 이끌어 갔는지를 상기하자. 즉 맑스가 어떻게 유일한 대척점(대척점)에, 즉 자본가 또는 소유자의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또는 노동자 계급의 대척점(길항관계)으로 역사의 모든 동인을 몰아갔는지, 어떻게 이 대척점이 개인적 의지들로부터, 즉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생산의 조건들에 기인하는지, 또 어떻게 이 대척점을 인식하면서 이 대척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식이 개입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회주의 정당의 역할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을 구성하여, 절대권력(la dictature, 집정권력)에 도달하여 자본주의 계급의 소유권 박탈[잉여 착취 박탈]을 준비할 수 있도록, 정치적 정당으로 그것을 변형하게 하는 것인지를 상기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에서 헤겔 사유가 깊숙이 각인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만일 맑스가 이 낯선 명제를, 인간들 사이에 도덕, 정치, 법률, 지적인 모든 연관들이 한 사회에서 생산의 체계(le régime de la production, 생산양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명제를 매우 쉽게 인정했다면, 그것은 그가 헤겔주의자로서 정치 경제학에서 한 동맹자(un allié)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정치경제학은 인간들이 사회적 생산에서 서로 간에 체결한 “의지와는 독립적인, 필연적인, 규정된(결정된)” 연관들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는, 마치 헤겔 철학처럼, 제자기 현존(즉자적, en soi, 현존)으로부터 맞자기 지식(le savoir de soi [pour soi], 대자적 지식)으로 사회의 이동이다. (694)
그러면 어떤 점에서 헤겔주의가 지적 분위기처럼 되었는지를, 사람들은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L'Unique et sa propriété, 1845) 속에서 본다. 이 작자의 본이름은 슈미트(Johann Kaspar Schmidt)이며, 1806년에 바이에른 바이로이트(Bayreuth)에서 태어나서 1842년 이래로 많은 청년헤겔파들, 즉 베를린의 해방파(die Freien, fr. Affranchis)들을 만났다. “해방파들”(les Freien)은 정확히 말하면, 그 책의 중요한 색션의 한 제목이었다(위 책 117-182). 여기서는 그는 정치적, 사회적, 인간적 자유주의를 연구하고 비판한다. 게다가 그 책의 전체는 대립되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인간과 자아(L'Homme et Moi)로 나누어져 있다. “해방파”의 부분을 포함하는 그 첫 부분은 끊임없이 포이에르바흐의 인류학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사람들은, 출판되면서부터 맑스에 의해 비판된 이 책이 얼마나 많은 그 시대의 논의들 속에서 나온 것인지를 보게 된다. (694)
그의(슈티르너) 책은 그 시대의 젊은 헤겔파들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헤겔주의의 완성이었다. 그것은 특히 바우어(B. Bauer)에 마주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 진 사실들이다. 문학신문(Litteraturzeitung)의 편집장의 비판주의는 헤겔 변증법을 극단에까지 밀고 나가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유의 과정”을 순수 실재성으로서 간주하면서, 실질적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인 그 어떤 모든 주장도 거짓이며 사라져야만 하고, 그리고 그 비판주의는 사유의 최고 진보 앞에서 분해(해소)된다는 것을 보게 하는데 있다. 슈티르너가 그것을 아이러니하게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소유에 반대하는 소유당한 자의 투쟁”이라고 한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소유당한 자들”은 실재성을 믿듯이, 신, 국가, 권리(le droit 법)를 믿는 자들이다. 바우어(B. Bauer)가 분명하게 본 것은 “종교적 태도는 신들에 마주하여 현존할 뿐만 아니라, 권리(법)에 마주하여 현존한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les idées Gedanken)을, 그는 사유에 의해(la pensée, Denken) 해소할 것을 원한다.[”] 그러면 나는 말한다. “유일한 사실이 나를 사유로부터 구출한다. 그것은 사유의 부재이다.” 이리하여, 헤겔주의는 이 극단 점에서,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모든 사유의 상대성에 도달한 후에, 결국에는 자기 반대편 속을 통과해야 한다. 슈티르너는 그것을 헤겔 스타일로, 맑스가 발행한 라인신문(Reinische Zeitung)의 1842년 기사에서 즉 「우리 교육의 인위적 원리, 또는 휴머니즘과 실재론(Le principe de notre education, ou Humanisme et realiseme)」에서, 이미 말했다. “학문(la Science, 지식) 자체는 의지(comme volonté)처럼 죽음 속에서 다시 꽃피우기 위하여 죽어야만 한다. 사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 의식의 자유는 땅의 어머니 같은 가슴에 파묻히는데, 새로운 자유, 즉 의지의 자유가 가장 고상한 젖(즙)들로 영양을 공급받기 위해서이다.” 사유의 부재, 그것은 순수의지, 무매개적인 것, 유일한 것, 모든 비교의 바깥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나를 특별한 어떤 것으로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유일자의 어떤 것(quelque chose d’unique)으로서 여긴다. 나는 다른 자들과 닮았다(la ressemblance)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성을 위해서만 가치가 있다. 사실상, 나는 비교가능하지 않고 유일(unique)하다. 나의 살(ma chair)은 그들의 살이 아니며, 나의 정신은 그들의 정신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것들을 즉 살, 정신을 일반적인 틀들 속에 위치시킨다면, 이제 이것들은 당신의 관념에 속하는 것으로 나의 살(ma chair), 나의 정신(mon esprit)과는 관계 맺을 아무것도 없다.” 이 공격적인 유명론 앞에서 낡은 신앙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대혁명이래로 근대인들이 그것 대신에 대체했던 새로운 보편자들도, 즉 국가, 사회, 인류 등도 사라진다. 국가의 토대 위에 부르좌의 정치적 자유주의가가 선다. 문제 중인 자유는 [농노]해방(affranchissement)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법률들에 복종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개인은 거기에서 법률과 직접적 연관 속에 있다. 법은 개인을 개입된 인격들로부터 해방시킨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신에 대한 의무들로부터가 아니라 신과 개인 사이에 있었던 성직자들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킨다. 자유로운 것은 국가이지 내가 아니다. “국가의 자유는 나의 예속(mon esclavage)이다” (695)
그러나 공산주의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인민]해방은 더욱 아니다. 그 자유주의는 노동자의 예속[굴종]의 기초를 이루는 개인적 소유를 제거하고, 사적 소유를 집단적 소유로 바꾸고자 한다. 단지 소유자들의 사회는 나에게 모든 것을 부여하고, 나에게 의무들을 교환으로 강요한다. 그러나 “그 사회란 빌려주거나 양도하거나 보증하거나 하는 ‘자아(un moi, 나)’가 아니며, 우리가 방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도구와 수단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에 어떤 것도 희생할 의무가 없으며, 사회주의자들은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처럼 그들도 종교적 원리들의 포로들이기 때문이고, 또 마치 예전에 국가와 같은 그들에게 성스런 그런 온사회(une Société)를 찾기 때문이다.… 그들(사회주의자들)의 사회는 또한 환영(un fantôme), 즉 [로베스삐에르의] ‘최고 존재’(un être suprême)이다.” 결국에는 “인간적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슈티르너는 포이에르바흐와 바우어(B. Bauer)가 남긴 우상(l'idole), 즉 온인간(l'Homme)을 부셨다. 바우어는 사회주의자들과 결별하면서, 그는 ‘대중’(la masse) 속에서 “혁명의 가장 의미 깊은 생산물을, 즉 빛의 세기의 철학의 착각들이 끝없이 기분 나쁘게 전수했던 기만당한 군중(une foule)을 보았다.” 1789년의 자유로운 관념들에 대하여 슈티르너는 자아의 내적 해방(liberation, 인성해방)의 학설을 대립시켰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의 이기주의를 무화시켜야 한다. 이리하여, 바우어는 [인간을] 교회로부터 그리고 국가로부터 분리를 선언한다. 왜냐하면 종교적 관심들은 이기주의로 간주되기 때문이고, 사적 인간만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상으로는, 바우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인간은 도달하기에 불가능한 이상이다. 그 인간은 개인에게 있어서 “숭고 저넘어의 것, 최고 존재, 신”으로 남는다. 그 신은, 마치 바우어의 무신론이 거부했던 신이 존경받지 못하듯이, 존경[숭배] 받을 만하지 못하기도 하다. (696)
“이 모든 자유주의들은, 온자아에게서, 크리스트교의 오랜 오해의 연속일 뿐이다… 온인간의 종교는 크리스트 종교의 마지막 변신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하나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가 자아를 자아의 본질로부터 분리하고, 그 본질을 자아의 그 위에 올리기 때문이며, 또 그 자유주의는, 다른 종교가 자기의 신과 자기의 우상들을 만든 것과 똑같은 정도에서, 인간을 [그 위로] 올렸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슈티르너가 기조(François Guizot, 1787-1874)를 이해했을 때 충분히 정당화 된 생각이다. 상원의원 회의의 한 회기에서, 기조는 대학들이 예전에는 교회에 귀속되었던 정신적 지도의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696)
헤겔변증법으로부터 항상 다시 생겨나는 생각, 풍부하고 생산적인 대척관계의 생각을 슈티르너는 끝까지 밀고 나갔다. 슈티르너는 이렇게 썼다. “우리들의 나약함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립해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완전하게 대립되어 있지 못하고 또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로 떨어지지 못하고 있어서,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une communauté), 하나의 묶음(un lien, 유대), 유일한 신앙, 유일한 신, 유일한 이념, 모든 사람을 위한 유일한 모자를 찾는다.… 그러나 가장 마지막이자 가장 단호한 대립은, 즉 유일자들에 반대하는 유일자의 대립은, 사람들이 대립이라 불렀던 것을 그 바탕에서(au fond) 넘어선다. 유일자로서 너는 다른 사람과 공통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분리될 것도 적대적일 것도 없다. 너는 제3자(tiers)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반대하는 너의 권리를 찾지 못한다.… 대립은 완전한 분리(la parfait séparation) 또는 유일성(l'unicité) 속에 사라진다.” 대척관계를 그러한 정도에까지 밀고 나가는 것(가능한 한 가장 많이 그것을[대척관계] 비난하는 것은 헤겔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척관계를 제거하는 것이고 그리고 대척관계를 그것의 반대자로 환원하는 것이며, 유일자(l'Unique)로 해소하는 것이다. (696)
자아의 유일성을 무화시키는 사회에 또는 국가에 대해 슈티르너는 프루동(Proudhon, 1809-1865)처럼 연합(l'association, Verein)을 대립 시킨다. 이 연합이란 나의 작품, 나의 창조이며, 다른 사람과 협약에 의해 나의 힘(권력)을 증가 시키는 수단이며, 게다가 내가 의지로서 가담하고 거절할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통합이다. 그에게 있어서 국가는 실현된, 고정된, 고착된, 그리고 나와는 독립된 하나의 연합일 뿐이다. 낡은 사회 속에 가소성과 운동성을 재도입하는 것, 그러한 것은 적어도 슈티르너의 근본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697)
따라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는 헤겔 학설의 파생물들(des corollaires)처럼 나타난다. 틀림없이 이 둘은 헤겔학설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다. 젊은 헤겔주의자들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읽고서 영양을 공급받았다. 슈티르너는 프루동을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냉철한 엄격성으로 매우 특별한 측면을, 즉 “객관성”의 측면을, 다시 말하면 1848년 이후에 지켜나갈 감정성의 부재의 측면을 받아들였다. 러시아에서 우리는 알렉상드르 헤르쩬(Alexandre Herzen, 1812-1870)에게서 헤겔주의에 매우 닮은 진화를 보게 된다. 이 나라에서도 또한 헤겔 학설이 1840년경부터 대학 속으로 들어왔다. 대학에서도 또한 짜르 체제와 비잔틴 정교를 옹호하는 헤겔 우파가 있고, 헤겔 좌파도 있다. 좌파가 평가하기를 “헤겔은 자기의 원리 속에 명시적으로 포함된 모든 결과물들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헤르쩬은 1842년에 맑스의 독일프랑스 연보(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지를 읽고 난 후에, 간략하게 요약했다. “독일철학은 삶에서 궁정 홀로부터 나와서, 사회적, 혁명적이 되었다. 살[육신]을 가지고 있고, 사건들의 세상에서 행동하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은, 헤겔의 보편자 속에 가능한 억압적인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헤르쩬의 친구인 벨리드스키야(Bêlidskij)가 쓰기를 “이 보편자는 마치 어떤 몰로흐(un Moloch)처럼, 주체를(구체적 개인을) 고려한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자기 속에 한 순간 아름다움을 만들고 난 뒤, 보편자는 그것을 낡은 바지처럼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가난한 인격을 사형 집행 하는 도형수 같은 보편자를 증오한다.”고 했다. 러시아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슈티르너의 관점이 될 그런 관점으로 나가는 성향이 있다. 심지어 그들은 바우어(B. Bauer) 비판의 암시 아래서 헤르쩬에 의해 만들어진 표현인 ‘니힐리즘’으로 향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헤르쩬은 이 학설을 러시아 [전파] 임무의 관념에 연결했다. 그는 자신의 방식에 따라 슬라브 애호자로서,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과거로 회귀하는 우파이면서 혁명 참여파로서 슬라브 애호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러시아인의 한 헤겔주의자이며 슬라브 애호자로서 남았다. 그의 역사 철학은 “보편사의 헤겔 도식을 제3시기에 의해 연장하는데 있으며, 이 시기에 러시아에 의해 인도되는 슬라브 세계는 로마-게르만 세계를 이어갈 것이며, 즉 그 자체로 고대 세계의 계승자일 것이다.” 그런데, 슬라브주의의 원리, 그것은 바로 무정부적 원리이며, 농민의 공동체인 미르(Mir)의 원리이다. 헤르쩬에 따르면 이 농민공동체는 프루동에 학설들에 따른 근대화(la moderne)로 변형되어야 한다. 따라서 허무주의적 무정부는 아무 것도 막지 못했고, 그것은 헤겔의 범게르만주의와 동일한 본성으로 심지어 범슬라브주의를, 즉 보편사[세계사]의 마지막 단계로서 성스런 러시아의 숭배를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헤르쩬은 헤겔에서 그 표현은 찾는데 만족했다. 어떻게 바우어(B. Bauer)가 마치 쇼펜하우어처럼 다른 길을 통해서 허무주의에 도달했는지를 지적한 후에, 헤르쩬은 덧붙였다. “바우어가, 마치 예정된 도구들처럼, 현존하는 모든 것을 무로 환원하기 위하여 러시아인들을 심판하는 것을 아는 것은, 러시아인들로서는 아마도 흥미로운 점일 것이다. 그러한 것이 바우어의 책, 러시아와 게르만 민족(Russland und das Germanenthum, 1853)의 진술이다.” 그가 농촌 공동체를 해방해야만 하는 혁명을 작동시키기 위하여 짜르 체제를, 특히 알렉상드르 2세(Alexandre II, 1818–1881)[재위 1855-1881]를 신뢰하는 것은 헤겔주의자를 증거 하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없다. (698)
덧붙일 것이 있다. 독일에서처럼 러시아에서 헤겔주의는 셀링의 낭만주의로 곧 바로 대체된다. 이 낭만주의는 1820년에서 1830년 사이에 경쟁 없이 지배하게 되어, 신비적 특성의 민족주의에 이르게 된다. 키레예브스키(Iwan Kirejewski 1806–1856)가 1830년에 쓰기를, “독일 철학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깊은 뿌리들로부터 밀고 나올 수 없다. 우리들의 철학이 우리들의 삶의 발전에 퍼져야 하고, 우리 자신에 맞는 의문들을 풀어야 하고, 우리들 개별적 현존을 지배하는 관심들에 대답해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서 밝혀지기 시작하는 이 독일 철학을 향한 관심은 이 목표를 향해서 중대한 한 발자국을 표시하는 것이다.” 셀링철학에서 헤겔철학의 영향으로 이행은 대체로 독일에서처럼 민족주의에서 혁명적 정신으로 이행이다. 그러나 이 혁명적 정신은 인간 권리들의 정신과 아주 다르며, 민족적 전통에서 지지점과 실재성을 찾는 것이다. (698) (47PMI) (57RMF)
제2절 정통 헤겔주의 L'hegelianisme orthodoxe 698
정통 헤겔주의의 생각들은 여러 정기 간행물들에 의해 주장되어 퍼져 나갔다. 학문비판을 위한 연보(Jahrbücher für wissenschaftliche Kritik, 1827-1847), 루게(1802-1880)의 독일 학문과 예술을 위한 할레 연보(Hallischen Jahrbücher für deutsche Wissenschaft und Kunst, 1938 이후)(헤겔좌파), 독일연보(Deutsche Jahrbücher, 1841-1843), 뒤빙겐 대학에서 나온 현재의 연보(Jahrbücher der Gegenwart, 1843-1848), 노크(Noack, 1819-1885)에 의해 편집된 사색적 철학을 위한 연보(Jahrbücher für speculative Philosophie, 1846-1848), 로젠크란쯔(Johann Karl Friedrich Rosenkranz, 1805-1879)는 편집자인데, 헤겔의 주석가이며 변호자이다(참조, 하임에 대한 헤겔의 변호(Apologie Hegles gegen Haym, 1858)). 헤겔주의자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은 이 시대에 여러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 신학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크리스트교를 헤겔 사유에 통일시키려 애썼다. 예를 들어 비더만(Alois Emanuel Biedermann, 1819-1885)은 자유신학: 투쟁과 자유에서 철학과 크리스트교(Die freie Theologie oder Philosophie und Christentum im Streit und Freiden 1844)에서, 종교 속에서 인식과 표상인 모든 것을 철학 속에 흡수한다고 한다. (699)
프랑스 절충학파처럼 헤겔학파는 철학사에 관한 탐구의 매우 많은 결실들을 생산했다. 독일 철학자이며 논리역사가인 프란틀(Carl Prantl,, 1872부터 Ritter von Prantl, 1820-1888)은 서양에서 논리학의 역사(Geschichte der Logik im Abendland, 1855–1870, 4권)를 쓰면서 처음으로 헤겔파 학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개요(Grundriss der Logik und Metaphysik, 1841)을 쓴] 에르트만(Johann Eduard Erdmann, 1805-1892)도 있고, 새로운 철학사(Geschichte der neueren Philosophie, 1854-1877)를 쓴 [철학사가로서 신칸트주의자이기도 한] 피셔(Ernst Kuno Berthold Fischer, 1824-1907)도 있다. 심지어는 그리스 철학사 전공자인 젤러(Eduard Zeller, 1814-1908)도 초기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처럼 또한 이 철학사가들도 순수 철학으로 기울어진다. (699)
독일 미학자인 비셔(Friedrich Theodor Vischer, 1807–1887)는 미학: 아름다움의 학문(Aesthetik oder Wissenschaft des Schönen, 1846-1857)(5권) 쓰면서 헤겔의 변증법의 방법을 자신의 예술 설명에 사용했다. 예를 들어 화가의 작품들의 잡다한 “찰나들”, 즉 소묘, 명암, 원근, 색깔 (§ 664-670) 등을 일련의 변증법으로서 구축했다. 이 변증법을 통해서 조금씩 시각적 형식이 전체적이고 완전한 겉모습을 생성해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과 귀납에 많은 자리를 부여한다. (699) (10:26, 47PMJ) (11:15, 57R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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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Bibliographie 699
I.
K. Löwith(1897-1973), Die hegelsche Linke, 1962.
H. Arvon(1914-1992), Feuerbach, 1964.
K. Bockmühl(1931-1989), Leiblichkeit und Gesellschaft, 1961)(Gottingen)
H. Arvon(1914-1992), Aux sources de l’existentialisme: Max Stirner,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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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뢰비트(Karl Löwith, 1897-1973) 독일 철학자. 니체전공자, 역사철학이론가. 헤겔 좌파(Die hegelsche Linke, 1962)
1914 아르봉(Henri Arvon, 1914-1992) 프랑스 이념사가, 아나키즘의 역사전공.포이에르바흐(Feuerbach, 1964), 현존주의 기원에서: 막스 슈티르너(Aux sources de l’existentialisme: Max Stirner, 1954)
1931 복뮐(Klaus Bockmühl, 1931-1989) 복음신학자. 체계신학교수. 독일태생, 주로 독일에서 교수를 지내고 런던대학교수도 지냈다. 카나다 벵쿠버에서 죽었다. 1980년 판은 부제가 길다. 육신성과 사회: 포이에르바흐와 맑스 초기작품에서 종교비판과 인지학에 관한 연구(Leiblichkeit und Gesellschaft - Studien zur Religionskritik und Anthroposophe im Frühwerk von Ludwig Feuerbach und Karl Marx, 1961)(Brunnen Giessen/Basel 1980).
(11:3, 47P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