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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드리오니 행자님, 저를 위해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제가 말했습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19)
이게 그 장면이지요. 육조로 삼은 다음에 남쪽으로 갈 때 도명상좌가 쫓아온 겁니다. 쫓아와서 법을 가르쳐달라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그대가 정말 법을 위해 왔다면, 이제 모든 인연은 다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제가 그대를 위하여 설하겠습니다.”
잠시 침묵한 뒤에 혜명에게 말했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 무엇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
(선어록과 마음공부 p120)
이때 혜명상좌가 깨달았어요. 이것이 되게 간단한 얘기인 거 같지만 이 구조를 가만히 보면 아마도 이 얘기를 듣고 바로 깨달았다면 아마 도명상좌는 그때까지 아주 깨달음에 대한 깊은 발심이 있었을 것이고, 오조 홍인스님 문하에서 여전히 간절한 발심은 있었으나 도저히 깨닫지 못했었겠지요. 아주 간절하게 터질 거 같은 그 간절함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안고, 안고 있다가
이렇게 쫓아왔을 때는 이 말 한마디로 그냥 바로 언하대오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 법문을 보면 그대가 정말 법을 위해 왔다면 이제 모든 인연을 다 쉬어버리고 인연 따라 이리저리로 끄달리는 마음을 잠시 쉬고 내려놓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생각을 따라가고 생각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 무엇이 당신의 본래면목이냐?
이게 이제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지요. 분별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분별하는 걸 나라고 생각하고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분별하지 않을 때는 ‘네가 누구냐?’ ‘네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이 몸이 나고 바깥에 있는 건 다른 사람이야’, 라고 분별하면서 ‘이건 나야’, 라고 분별하고 있을 때. 또 이 생각은 옳고 저 생각은 틀렸고 이건 내 생각이고 저건 저 사람 생각이고.
이런 식으로 나와 너, 선과 악, 옳고 그름, 맞고 틀림, 뭐 크고 작음, 뭐 나와 너, 객관과 주관, 이런 수많은 둘로 나누는 마음, 둘로 쪼개는 분별하는 마음을 탁 쉬어보라는 것이지요. ‘분별하지 않을 때 그때 당신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냐?’ 이처럼 이 선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그 동안에 살아오면서의 습관이었던 분별의 습관. 분별해서 끊임없이 내 마음속에서 선과 악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옳고 그름이라는 걸 만들어놓고 그 속에 빠져서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내 의식이 구축해놓은 세계. 그 의식이 구축해놓고 만들어놓은 다음에 그 안에 빠져 들어가서 그게 진짜라고 여기면서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면서 사는 거짓된 세계, 내가 만들어놓은 가상현실의 세계,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 분별너머를 살아본 적이 없는 것이지요. 분별하면서만 살아봤기 때문에. 무엇을 판단하든 무엇을 보든 다 분별을 가지고만 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분별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즉 선악이라는 어떤 분별하는 마음을 탁 내려놓도록 이끈 다음에 그냥 분별하지 않을 때 ‘당신은 누구냐?’
이 소리를 들을 때 분별로 듣게 되면 그것은 죽비소리일 것이고 이 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이거나 듣기 싫은 소리일 수도 있는데요. 또 손가락을 이렇게 들고 왔다 갔다 할 때 이거를 가지고 ‘저게 뭐지?’ ‘손가락을 왜 저렇게 흔들고 있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소리를 들으면 (죽비를 치며) ‘이 소리는 무엇인가?’ 보이는 것을 따라가지 않고, 보이는 대상을 따라가지 않고,
보이는 대상을 따라가서 해석하지 않고, ‘아 손가락을 흔드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해석하지 않고 ‘이것이 무엇이냐?’ 들리는 소리를 개념 따라가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이해를 따라가지 않았을 때 (죽비를 치며) ‘이 소리는 무엇이냐?’ 이것이 바로 (죽비를 치며) 그대의 본래면목이라는 얘기지요. 제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바로 그 성품이 본래면목이고 저를 보고 있는 여러분 자신이 바로 본래성품이다.
본래성품이 아니면 할 수가 없지요. 눈이 본다고 하지만 눈은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는 거거든요.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건 아니잖아요. 눈이라는 기능이 있어서 내가 보는 게 아닙니다. 보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이지. 마네킹을 만들어놓고 눈을 멋있게 만들어놓으면, 아니면 마네킹에다가 우리 눈을 쑥 뽑아가지고 갖다가 끼워놓으면 볼 수 있을까요?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죽어도 볼 수 없고. 듣는 것도 마찬가지, 보는 것도 마찬가지, 생각하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 이 몸뚱이가 어떻게 느낄 수가 있어요? 몸뚱이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 몸뚱이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어요. 몸뚱이가 움직이는 게 가능할까요? 몸뚱이를 움직이게 하는 놈이 있으니까 움직이는 거지. 이 몸뚱이를 어떻게 움직여요?
몸뚱이를. 그럼 얘도 움직여야지. 뭔가 몸이 있으면 다 움직여야 되잖아요? 몸뚱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 이식 비식 하는 그 의식들. 객관과 주관. 그런 것이 뭔가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근은 바깥에 색경이라는 인연에 마주쳐서 접촉하면서 저절로 안식이 일어난다. 보자마자 해석하는 마음,
그걸 안식이라고 하거든요. 보자마자 해석하는 의식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그 의식은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의식을 실체라고 여겨서 그 의식이 만들어낸 세계. 안식이 만들고 이식이 만들고 나아가 의식이 만드는 세계. 그것을 진짜 내가 보고 있는 세계라고 여긴다는 거지요. 여긴 내가 있고 바깥에 세상이 있어서 내가 세계를 보고 이렇게 의식한다.
그런데 안이비설신의도 실체가 아니고 색성향미촉법도 실체가 아니고 그 의식도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본래 없다는 것이지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보고 듣고 맛보고 깨닫고 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느냐? 해석 이전에 첫 번째 자리에서 보고. 해석 이전에 첫 번째 자리에서 들을 때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면목이다, 라는 것이지요. 이런 법문을 듣고 꼭 이런 법문을 들어서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준비가 되어 있으면, 자신이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냥 길거리를 가다가 찻길에서 ‘빵’ 하는 소리를 듣고도 아니면 애기가 ‘응애’ 하고 우는 소리를 듣고도 바로 거기서 성품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장을 보면 육조단경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나오는데,
인종이 물었습니다.
‘황매산의 오조(五祖)께서는 무엇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가르쳐 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습니다.’
인종이 물었습니다.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참된 불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입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22)
이렇게 도명상좌를 구제한 다음에 혜능이 산에 들어가서 사냥꾼들 안으로 들어 가가지고 사냥꾼들에게 묻혀서 그냥 같이 사냥하면서 살았던 것이지요. 뭐 책에 따라서 뭐 십몇 년을 살았다. 십오 년, 뭐 십육 년 뭐 이렇게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그만큼 오랫동안 사냥꾼 속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냥 살았던 겁니다. 그 기간이 바로 보임의 기간입니다, 보임.
즉 자신의 성품이 분별을 딱 멎는 경험을, 체험을 한 번 해본 다음에 그런 다음에도 여전히 그분별을 따라가는 습관, 여태까지 살아왔던 분별의 습관이 계속해서 발동을 하다 보니까 자기가 자기 성품을 확인은 했지만 여전히 분별의 습관 때문에, 이 분별의 습관을 조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게 보임의 기간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성품을 확인했다고 해서
원만하게 보임이 다 되는 것은 아닐 수 있는 것이지요. 실제 이런 사람이 있다고 그래요. 큰스님들 법문을 본인이 너무 갈구했다든지 너무 괴로운 게 있다든지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자신의 인연 따라, 인연 따라 그냥 불교에 그렇게 큰 관심도 없었는데 그냥 친구 따라서 이렇게 절에 왔다가 스승의 법문을 한 몇 번 들었는데 몇 번 듣고 바로 자기 성품을 확인한 사람도 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이제 힘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발심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자기 성품을 확인했을 때는 본인 스스로도 이게 뭔지도 모르겠고 혹은 안다고 할지라도 난 이제 다 됐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나 자기 성품을 확인하는 그 순간에는 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떤 가볍고 쑥 내려가는 이런 환희심 같은 이런 것들을 느끼다 보니까
뭐 그것이 몇 주 몇 달 뭐 이렇게도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품을 확인하고 나서 몇 달을 지나고 나면 다시 이제 똑같아지거든요. 똑같이 돌아오면서 똑같이 막 분별도 하고 이렇게 휩쓸리고 하다 보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계속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마음속에 발심을 가지고 있거나 선지식의 법문을 듣거나
꾸준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거기서 퇴전하는 것이 아주 쉽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견성을 했다고 공부가 다 됐다, 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 공부에서는. 이제 공부할 준비가 되었다. 이렇게 이제 봅니다. 그런데 그 보임이라는 것은 뭔가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제일 좋은 거라면 선지식의 법문을 그냥 이렇게 듣는 것. 이게 이제 가장 좋은 것인데.
이렇게 혜능처럼 사냥꾼 속에 들어가서 보임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이 혜능스님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삶 자체가 파격입니다. 우선 스님이 아닌데 법을 얻은 것도 파격이지만. 보임을, 남들은 보임을 할 때 어떤 스승 밑에서 오래오래 갈고 닦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냥꾼 쪽에서도 보임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냥꾼 속에서 보통 그래요.
보임을 하는 데는 그냥, 그냥 평생 공부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주로 씁니다. 계속해서 평생 공부하는 것이다. 옛날 그 많은 스승들은 그렇게 얘기했어요. 죽을 때까지 계속 공부하는 것이고 이게 10년, 20년, 30년 보임을 하는데 점점 더 깊어지니 끝을 알 수가 없구나. 뭐 이제 이런 식의 표현을 쓴 것이지요. 부처님이 아니고서는 주로 선사스님들은 그렇게 얘기를 하시고.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 딱 안착이 된다. 뭐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짧게는 10년에서 뭐 20, 30년 보통 한 30년 걸린다, 보임하는데. 이런 식의 표현을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이 스님이 사냥꾼 속에 들어가서 한 16년 정도를 이렇게 있다가 어느 순간 ‘아 스스로 이제 이 보임이 많이 익었다’, 라는 어떤 느낌이 오신 거지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법을 펴야 될 때가 왔구나.’ 이제 이런 생각이 드신 겁니다. 그리고 실제 오조스님도 육조스님에게서 법을 깨달았지만 성급히 법을 펴려고 하지 말고 좀 피해서 어디 숨어 있도록 이렇게 얘기 하셨거든요. 그래서 이제 십몇 년 있다가 이제 내려온 겁니다. 하산해서 내려왔는데 인종(印宗)의 문하에 인종(印宗)스님의 문하에 인종(印宗)스님이 열반경인가 이렇게 강의를 하고 있을 때
거기 많은 스님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지요. 그때 이제 인종스님이 뭐 유명한 비유지요. 깃발이 펄럭이느냐?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니까 바람이 펄럭이는 거냐? 깃발이 펄럭이는 거냐? 막 논쟁이 붙었을 때 혜능스님이 “당신들 마음이 펄럭인다.” 뭐 이런 얘기를 듣고서는 인종스님이 ‘아 이거 범상치 않구나.’ “혹시 당신이, 우리가 옛날에 들었는데 법이 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라는 얘기를 들어섰는데 혹시 당신이 그 행자 아니십니까?” 그랬더니 “송구스럽지만 제가 그 행자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 발우와 가사를 보여 달라고 해요. 그래서 그걸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고서 인종이 정식으로 내가 당신을 스승으로 삼겠습니다. 하고서 아직 까지는 행자잖아요. 그러니까 행자를 인종스님의 제자로서 출가를 시켜줍니다.
출가를 시켜주고 나서 다시 거꾸로 스승으로 모십니다. 그래서 육조 혜능스님은 그때 정식으로 스님이 된 거지요. 그러고서 이제 인종스님이 이 육조 혜능스님에게 처음으로 묻는 겁니다. 황매산에 있던 오조 홍인스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쳐주셨느냐? 가르침의 핵심을 알려달라는 거겠지요. 특별히 가르쳐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특별히 가르쳐주는 방법? 뭐∼ 법이 이런 거다.
하는 어떤 내세울만한 뭔가는 없다. 다만 견성을 말할 뿐,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성품을 확인하는 것.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자기 성품, 본래면목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할 뿐이지,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런 얘기를 들으면 다들 되게 헷갈려 합니다. 불교는 선정을 닦아 해탈하는 종교인데 육조 혜능스님은 좀 사이비 아니야. 실제로요.
제가 그걸 본 적이 있어요. 옛날에 어떤 뭐∼ 도올선생을 깨고 이러면서 여러 사람들이 뭐 이 사람이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논쟁을 하다가 유명해진 분이라고 그러는데. 그 분이 아마 학(學)쪽으로는 불교학을 혼자서 엄청나게 공부를 많이 했나보죠? 그런데 그분이 그랬다는 거예요. 이 공부를 학(學)쪽으로 공부를 해보니까 육조 혜능스님은 전법이 아니다. 이거는 사이비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사이비 같은 얘기를 하거든요, 육조 혜능스님은. 이런 거지요, 대표적으로. 부처님의 불교 핵심 가르침은 선정과 해탈인데, 해탈을 얻는 건데 육조스님은 해탈을 부정했다. 그게 어떻게 불자가 될 수 있냐? 그게 어떻게 스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기본적인 방편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그냥 학문으로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불교에 있는 모든 가르침은 전부다 방편입니다. 열반 해탈 전부다 방편입니다. 말로 표현된 모든 것은 전부다 방편입니다. 즉 방편이라는 것은 내세울 데가 있어야지만 내세워서 그 효용가치가 끝나면 그걸 반드시 다시 타파해야 됩니다. 그걸 깨뜨려야지만 되는 것이지요. 내세울게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는 그것을 방편으로 견성이라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저 성품을 본다. 우리는 계속 중생세간을 보고 있다가 중생세간을 보다가 문득 성품을 보면 된다. 그렇게 견성이라는 말을 그나마 견성이라는 말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니까 가르쳐야 되니까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그걸 견성이라고 이름을 하나 붙여놨지만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얘기를 했느냐면,
선정을 먼저 얘기를 한다면 선정은 방편으로는 좋은 가르침이지요. 번뇌 망상을 막 일으키는 거보다는 마음을 고요히 해서 선정을 지키는 것이 공부에 훨씬 큰 도움이 되지요. 번뇌 망상에 끄달려 있는 거보다는 마음을 고요히 해서 선정삼매를 오래 이렇게 닦으면 당연히 안정이 되고 좋겠지요. 그런데 선정이라는 것은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 있고 선정에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그것 때문에 이것은 진짜가 아니라고 느끼신 거지요. 선정에 들어갈 때는 한없이 평화로운데 선정에서 딱 나오고 나면 일상생활에서는 또다시 그냥 일상이 이루어지고 이것만 반복이니까. 이 선정이 어떻게 진짜라고 할 수 있느냐? 길을 걸으면서도 선정, 움직이면서도 선정, 이렇게 돼야지만 진짜 선정이지. 어떻게 앉아있을 때만 선정이고 나와서는 선정이 깨진다면
그게 어떻게 진정한 선정일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해서 선정주의를 버리신 거거든요. 마찬가지 이 선정이라는 것은 하나의 작은 어떤 방편? 내지는 공부하는데 공부 길에 가는 어떤 재미난 일들? 에피소드 정도는 될 수 있겠으나 이것 자체를 도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선정은 이법. 분별법입니다. 둘로 나눠놓고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거지요.
선정과, 선정에서 들어오는 거와 나오는 것이 있지요. 그래서 입정이라고 해서 정에 들어간다, 이러잖아요. 들오고 나가는 게 있으면 그거는 바른 정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래서 선정이라는 것도 선정에 들어가는 게 있고 선정에 나오는 게 있잖아요. 둘로 나누는 분별법이기 때문에 분별법은 참된 법이 아닙니다. 그건 방편일 뿐이지요. 해탈은 해탈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해탈이라는 방편을 썼는데 이게 말이 가지는 한계에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언어라는 것을 세속제라고 해서 세속적인 것으로 어쩔 수 없이 진리를 설명해야 되니까 진짜는 아니지만 가짜로 어쩔 수 없이 말로 표현을 하는 것을 부득이하게 세속제라고 표현을 하고 또는 그 뭐죠. 문자반야라고 표현을 해요. 반야는 반야인데 반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문자를 써야 되는데
문자로 반야를 설명하면 그건 반야가 아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쓰지 않으려니 그거는 사람들에게 설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문자라는 허물 있는 방편을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큰스님들이 법문하실 땐 다들 뭐라고 그랬냐면 법문을 하는 사람은 전부다 스스로 똥물을 끼얹는 것과 똑같다. 스스로 똥물을 끼얹을 각오를 하고 하는 것이 법문이다. 왜냐면
스스로 다 허물을 짓는 거라는 거지요. 방편은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문자반야라는 거는 진짜 반야가 아닌 거예요. 실상반야가 참된 반야이지. 문자반야는 문자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자는 전부다 허물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해탈이라는 것에 방편의 순기능을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해탈이라는 말이 지니는 그 허망한 문자가 지니는 역기능? 그것을 이제 설명함으로써 해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깨뜨리는 거지요. 해탈에 조차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은 해탈에 구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도 마찬가지거든요. 해탈이라는 말 자체가 이법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요. 모든 말은 이법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요, 모든 언어는. (이어서 1분 22초 녹취)
첫댓글 ‘분별하지 않을 때 그때 당신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냐?’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본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문자는 전부다 허물이 있다는 겁니다.
추석 잘 보내셨나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인연이 되어 다시 읽어봅니다. 감사합니다.
무멍나 그대가 나이구나....
그 중에 한 승려가 속성이 진(陣)씨이고 이름이 혜명(惠明)이란 자가 있었다.
출가하기 전에 사품장군으로 성질과 행동이 거칠고 사나웠다.
혜명은 나중에 이름을 도명(道明)이라 고친다. 스승인 혜능의 혜(惠)자를 피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