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구미촌의 만년과 죽음 이후
신지제는 57세 되던 1618년 2월에 망우당 곽재우를 곡했다. 3월에 체직되어 집
으로 돌아와서, 창원 부사 시절의 시를 「회산잡영」으로 엮었다. 7월에 살 곳을 구미
촌에 정하고 ‘구로龜老’라 자호했다. 또 나서 자란 곳이 하천下川 오동산梧桐山 북쪽이
라서 ‘오봉梧峯’이라고 자호했다. 1619년 안평安平 교동橋洞에 부친과 모친 박씨 묘를
개장하면서 합폄合窆했다. 1620년 정월에 한강 정구의 부고를 듣고 곡했다. 1621년
7월 28일 도적이 들어 집과 서적 500여 권이 불탔다. 1622년 2월에 후금이 중국의
강토를 점령했다는 소문을 듣고 「요양가遼陽歌」를 지어 울분을 토로했다.
62세 되던 1623년 3월에 인조가 즉위하고, 7월에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
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2월에는 모
친 오씨의 상을 당했다. 이듬해 1624년 1월 8일 정침正寢에서 졸하고, 3월 17일 의
성현 서북 우곡방羽谷坊 율곡리栗谷里에 장사 지내졌다. 향년 63세였다. 1646년 가선
대부,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세자 좌부빈객에 추증되었다.
1669년 8월에 사림이 경상도 의성군 신례동 서쪽, 봉양면 장대리에 있는 장대서
당藏待書堂 오른쪽에 사당을 세웠다. 장대서당은 1610년 신지제가 후진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강당이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이 ‘장기어신 대시이용藏器
於身待時而用’이라는 현판을 써 준 데서 서당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현판의 글은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의 “군자가 자신의 몸에 보배스런 기물을 간직했다가 때
를 기다려서 움직인다면 무슨 불리할 일이 있겠는가.[君子藏器於身 待時而動 何不利之
有]”라는 말에서 취한 것으로, ‘장수이대지藏修以待之’의 뜻이다. 1672년 12월, 정묘
해제|31
호란 때 좌도의병장 이민성李民宬의 위판과 함께 장대사藏待祠에 위판이 병향並享되었
다. 이유장李惟樟이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지었다. 1685년 인근의 사우에 모셔져 있던
김광수金光粹와 신원록申元祿의 위패를 옮겨 왔고, 1702년 장대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87년에 묘우, 1996년에 강당이
복원되었다. 1991년에 현재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 금산 언덕의 금산서원錦山書院에
신체인과 함께 신지제의 위판이 봉안되었고, 2005년 신지효도 추향되었다. 1782년
에 신체인이 강학을 위해 건립한 금연정사錦淵精舍가 1912년에 무너진 것을 1977년
중건하고, 1991년 서원으로 승격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