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31세인 78년도 5월 7일(일)에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당일은 공교롭게도 바로 손위 처남도 나와 같은 예식장에서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그래서 처가에서는 아마도 축의금을 한 차례만 받았으리라. 주례 선생도 한 분을 모셔서 먼저 손위 처남 결혼 주례를 치렀고 이어 우리 결혼식에도 주례를 해주셨다.
당시 신랑으로의 보통 수준의 결혼식을 올리려면 집 장만 하는 것 외에도 결혼 비용으로 약 120만 원 가량이 소요 되었다. 예식장비, 식사비, 여행비, 패물비, 함속 등을 준비하는 비용에 적잖이 들어 갔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직장 3년차 사원인지라 당시 월급 수준이 매우 빈약했었다. 아버지가 결혼 비용으로 내게 30만 원을 주시면서 하라시는지라 나는 회사에서 별도 50만 원을 가불하여 총 80만 원으로 결혼식을 치루었다. 당시 월급장이는 년 보너스가 400%인지라 그를 밑돈으로 가불금을 갚느라 약 3개월 동안은 개고생을 하였다.
청첩장을 찍는데 들어가는 비용 조차 아끼려고 필체 좋은 사원의 손을 빌려 수기로 작성하고 회사내 습식 청사진 복사기를 활용하여 청첩장을 만들었다. 당시는 컴퓨터도 없었고 국제간 교신에 텔렉스(telex)를 사용하였기에 영어 문장도 압축 문자로 통신을 하였었다. 해외 통신 비용을 국내 전보처럼 글자 수로 계산하여 지불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책장 속의 앨범들은 가로로 뉘여 있어서 꺼내 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새 아파트로 이사 후 약 3년 만에 가로로 뉘여 있는 앨범들 일일이 꺼내 뒤져 보다가 우연하게 78년도 결혼 당시의 내 결혼 부조금 치부책을 보게 되었다.
수기 청사진 청첩장은 유실되었는지 찾을 길이 없었고, 모처럼 근 40년 전 내 결혼 축의금 장부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컴퓨터가 보편화 된 이후로 나는 모든 자료들을 잘 정리해 놓았다. 89년도 어머니 사망시 조의금, 97년도 장인, 장모 사망 상의 부조금이며, 2009년 딸 결혼 시의 부조금도 모두 잘 정리해 놓았다. 그 반대 급부로 내가 상대에게 준 부조금 내역도 컴퓨터로 상세히 잘 정리해 놓고 있었다.
회사를 퇴직 시에 아래 직원에게 부탁하여 회사를 비록 떠나더라도 사내 경조사항에 대해 잘 알려 달라고 부탁을 해놓았었다. 그리고 퇴직 후 일부 통신비가 부담 될까봐 미리 아래 직원에게 약간의 촌지를 건네 주었다. 그래서 아래 직원에게 부담 없이 부탁도 하고 내 전화는 비교적 잘 받아 주는 편이었다.
한번은 전 직장 지인이 빙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문 길이 너무 멀어서 우선 지인에게 나를 대신하여 조의금을 내어 달라고 부탁하였다가 잠시 후 이를 다시 취소시킨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 상조 장부를 뒤져 보니, 그 지인이 내가 같은 직장내 현직에 있을 때에 내 빙부 상에 조의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뭘 그렇게까지 쫀쫀하게 따지느냐고 힐난을 받기도 하지만 축의금이나 조의금은 일종의 상부상조의 개념인지라 결례를 범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더러 어떤 분은 동창회 목록을 놓고 무조건 청첩을 하는 경우도 보는데 청첩을 받는 이의 입장에서는 청첩자가 누군지를 몰라 지인들에게 물어물어 확인을 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78년도 내 결혼 당시의 축의금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니 오랜 세월이 흘러 상당히 감회가 일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기에 그냥 총체적 특이 사항만을 이곳에 정리해볼까 한다.
당시 개인적 결혼 축의금을 살펴 보니 최하가 1,000원 이었고, 보통은 2,000원 그리고 절친한 경우 3,000원이었다. 총 결혼 축의금으로 176,000원을 받았으며 특이하게 내가 근무하였던 전 부서인 개발부에서 금반지 3돈을 보내 왔다. 그리고 당시 근무하고 있었던 기술부에서 27,000원을 부조하였다.
대충의 결혼식 비용으로서 예식장비 32,000원, 식사대 17,000원, 여행비로 80,000원을 책정하고 부조금 가운데 아버지에게 34,000원을 용돈으로 빼드려서 총 입금된 부조금 중 163,000원을 지출 하였다.
밀월여행은 부산 태종대로 하고 여행비를 아끼고자 여관에 투숙을 하였다. 아버지는 시골 고향 집으로 내려 오셔서 동네 분들에게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었다. 동생들이 다니고 있는 면 소재 초등교 교사가 7명이 고향 집 피로연에 참석하면서 3,000원을 부조하였다. 우체국원 일동 1,000원, 면 지서장이 1,000원을 부조하였다. 그리고 아내 친구 두 명이 일부러 처가가 아닌 신랑 쪽으로 2,000원을 부조한 양태가 보여지기도 하였다.
비록 거창한 결혼식이 아닌 허름한 예식에 불과하였지만 지금에 와서 크게 부끄럽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가난이 죄가 아니듯이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홍신 작가의 강연 내용처럼 유명 상품을 좇기 보다는 자신이 명품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명품에게는 허름한 옷도 빛나 보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근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내 결혼식이 어제의 일처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당시는 개인 카메라들도 별로 없었고 주례 앞에 오로지 녹음기만을 켜 놓고 녹음에만 의존하던 시절이었으니, 비록 허름한 방명록이지만 이 아니 감개무량하지 않겠는가. 힘든 고생이었든, 아니면 작은 즐거움이었든 간에 부조금 장부 한 편이 하나의 소중한 추억의 열매를 생산해 준 것 같았다.